소설리스트

경천동지-55화 (55/346)

제55화 이 대신 벼룩

“아니, 여기서 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그자는 필목현이었다.

필목현은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는 듯이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체 어디를 가셨던 건지 코빼기도 안 보이시고! 지금 도련님께서 얼마나 심기가 언짢으신지 알고 계십니까? 이제 볼일도 끝났으니 이 꼬질꼬질한 동네는 그만 좀 벗어나자 하시는데 사형분은 통 보이질 않으시고 말입니다!”

어지간히도 놀랐던지 필목현이 큰소리를 쳤다.

지강백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왜 여기 계신 겁니까?”

“아니, 그러니까! 도련님이 지금 어서 빨리 사형분을 찾아오라 발광을…… 아니, 저 그게…… 아, 하도 성화시라서요!”

“저를 찾으셨던 거라고요?”

“그게 아니라면 제가 왜 이 노구를 이끌고 버려진 개처럼 뒷골목을 헤집고 있겠습니까!”

때마침 반대편으로 돌아왔던 백사준이 도착했다. 그의 등 뒤로 몇몇 개방의 제자들이 보였다.

“네놈이구나! 소협, 내게 양보하시오!”

휙!

그가 타구봉을 머리 위로 치켜세우고 뛰어들었다.

“으악!”

필목현이 헛걸음질을 치다 제풀에 자빠졌다. 그가 지강백의 다리를 붙들며 소리쳤다.

“아니, 대체 저 사람은 왜 저런 답니까? 좀 어떻게 해 보십시오!”

그것을 보고 백사준이 공세를 멈췄다.

“소협이 아는 자요?”

그러다 곧 표정이 써졌다.

“아, 이런…… 그자로군.”

그제서야 일면식이 있던 필목현을 알아본 것이다.

또다시 상황이 공교롭게 됐다.

마교의 인물을 쫓는 와중에 걸려든 사람이 필목현이었다. 상황이 영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고, 그에게 의심스러운 구석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지만 비슷한 우연이 연달아 반복되는 상황이었다.

지강백이 일단 필목현과 백사준 사이에 끼어들었다. 백사준이 눈썹을 추켜 세웠다.

“이 상황에서도 저자를 감싸려는 게요?”

“그런 게 아니라…… 아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확인은 필요합니다.”

백사준이 콧바람을 뿌렸다.

“확인이라? 방금 전 개방의 제자가 목숨을 잃었고, 그 시신이 채 식지도 않았소. 흉수가 근처에 있을 거라 하던 이는 소협 아니시오?”

필목현이 입을 딱 벌렸다. 지강백의 다리를 붙드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닛……? 흉수라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는 정말로 몹시 놀라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같은 장소에 때마침 있었다는 이유로 필 총관께서 흉수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필 총관께는 개방의 제자를 살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충분하고 남았다. 지강백이 모를 뿐이었다.

그렇다고 백사준이 그들에게 몰래 감시를 붙여 놓았다는 얘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빌어먹을. 그렇다면 저자를 흉수로 몬 개방의 제자들이 모두 해태 눈깔이었다는 소리가 되겠구려.”

지강백은 옳다 그르다 말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모든 게 의혹과 갈등이 될 뿐이었다. 필목현이 개방의 제자를 살해했다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반대로 그가 흉수가 아니라는 증거가 있는 것 또한아니었다.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찾아야 했다.

용천휘에게 생겨났던 작은 의심을 캐내는 일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믿어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소협을 못 믿을 거야 없지. 다만!”

지강백의 말을 끊은 백사준이 힘을 주어 내뱉었다.

“내 믿음에 대가를 주시오. 만에 하나 소협이 틀렸을 경우, 내게 책임을 지는 거요!”

지강백이 입술을 물었다.

믿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믿음을 얻는 것에 비하면.

백사준이 저를 믿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내어놓아야 했다.

“……그리하겠습니다.”

“좋소.”

백사준이 몸을 돌려 연기를 피워 내는 장치가 달린 죽통을 쥐고 있던 한 제자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일 똑바로 하지 못하냐! 사람 하나 쫓으라는 것도 제대로 못 해! 이를 잡으랬더니 왜 벼룩을 잡고 있어!”

난데없이 얻어맞은 제자가 몹시 억울하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시 해! 이번에는 제대로 쫓아!”

휙, 탓!

말을 마친 백사준이 신형을 띄워 지붕 위로 사라졌다.

개방의 제자들로 다시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거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답니까? 그러니까 저 거지한테요.”

그때서야 필목현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지강백은 아무런 잘못도 없어 보이는 필목현의 매끈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제자를 죽인 흉수를 쫓는 중이었습니다.”

“어이쿠, 새벽 댓바람부터 살인이 일어났단 말입니까? 하마터면 저도 큰일 날 뻔한 겁니까?”

필목현이 제 목을 더듬더듬 더듬었다. 그는 정말로 제 목숨을 걱정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다만 한 가지.

“…….”

문제가 있었다면 지강백이 같은 수법에 당한 두 구의 시체를 보았다는 것과, 그들의 목덜미에 남은 손자국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중지보다 검지가 더 길었던, 그래서 미묘하게 남들과 달랐던 그 손 모양을.

마치 지금 필목현의 손처럼.

“검지가 더 기시군요.”

“예? 아, 제 손 말입니까? 어라, 그랬었나?”

필목현은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며 새삼스럽다는 듯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허,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이지 좀 그런 것도 같습니다.”

필목현이 두 눈을 끔벅이며 지강백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긴 사람이 드뭅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검지가 더 길면 뭐 좋은 점이라도 있습니까?”

이건 대답할 수 있었다.

“예.”

“호오. 어떤 겁니까?”

지강백이 필목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딘가에 손자국이 남았을 경우 기억하기 쉽습니다.”

“…….”

순간 필목현의 얼굴이 굳은 듯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였고, 그는 곧 평소의 너스레가 잘 어울리는 얼굴로 돌아왔다.

“에이, 그야 뭐 썩 좋은 점이라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손자국이 어디 남았을지 알게 뭐랍니까.”

필목현이 지강백의 어깨를 탕탕 두드렸다.

“자자, 그럼 저희도 어서 가십시다. 도련님께서 머리끝까지 지랄병이…… 아니, 저…… 에이, 이건 우리끼리니 하는 말입지요. 하여간 서둘러 여길 떠나자 하니 어서 가서 마차에 처박아 버립시다.”

필목현이 앞장섰고, 지강백이 조금 뒤처진 곳에서 함께 걸음을 옮겼다.

지강백의 눈은 앞뒤로 자연스레 흔들리는 필목현의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 * *

다각다각…….

필목현이 모는 마차는 이제 능숙하게 달리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산양이었다. 그곳에서는 마차 대신 배를 탈 수도 있었고, 강을 따라 주욱 달려갈 수도 있었다.

“사형. 인상 좀 펴.”

난데없이 어깨를 툭 때리는 목소리에 지강백이 생각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한참 복잡하다는 게 표정에서 드러났다.

“왜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어? 실연이 뭐 그리 대수라고. 천하의 절반은 여인이야. 그리고 그중 절반은 내 약사보다 괜찮은 여인들이고. 훌훌 털고 더 좋은 여자 만나면 되잖아.”

빙그레 웃고 있는 용천휘는 기분이 좋은 것인지 저를 놀리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왜 말하지 않았나?”

“뭘?”

“네가 채 소저와 장래를 약조한 사이라는 것.”

“음? 내 약사가 그런 말을 했어?”

부채가 퍼덕였다.

“나 참. 그게 그렇게 나올 줄 몰랐네. 그거야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정한 거긴 한데 나는 관심 없어. 그렇게 독한 여자는 여자로 안 보인다고. 자고로 여자는 나긋나긋해야지.”

“말조심해라. 네가 관심 없다고 하면 채 소저의 입장은 뭐가 되는데.”

“그거야 그쪽 사정이지. 마음에 안 드는 걸 나더러 뭐 어쩌란 거야.”

“이 자식!”

지강백이 용천휘의 멱살을 낚아챘다.

옷깃으로 목이 졸리면서도 용천휘는 짜증을 부렸다.

“실연당한 화풀이를 엉뚱한 데 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 방법이 너무 무식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함부로 대하지 마라. 네 여자잖아.”

“아직 아니야.”

“좀 더 아끼고…… 네가 할 수 있는 한 아껴. 더는 못 할 정도로 아끼라고.”

“안 그러면? 사형이 어쩔 건데? 날 패기라도 할 거야? 그것참, 거창한 미련이군. 그러니까 걔가 본가로 도망쳤지. 사형이 이따위로 굴 줄 미리 알았나 봐.”

“……!”

멱살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불거져 나왔다.

지강백은 입술을 꾹 물고 용천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일이었고 자신이 끼어든다는 것은 미련에 불과했다.

홱!

지강백이 뿌리치듯 용천휘를 놓아주었다.

“이제 화풀이는 다 된 거야?”

용천휘가 목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지강백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원 참. 속 좁긴. 너무하잖아. 나는 사형한테 이렇게나 관대하게 굴고 있는데 말이지. 사실 나는 채 약사를 양보할 생각도 있었어. 하지만 굳이 나서서 등을 떠밀지 않은 건 사형을 위해서야. 걔가 그렇게 겉보기만큼 괜찮은 여자가 아니라니까. 사형이 아까워. 채인 게 오히려 잘 된 거야.”

“너는 대체……!”

지강백이 울컥 인상을 썼다.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느라 목에 핏대가 솟았다.

“사람을 뭐로 아는 거야. 양보라니. 그게 사람한테 할 소리라고 생각하나?”

“못 할 건 또 뭐야. 그게 내 진심인걸. 난 왠지 걔보다는 사형한테 더 마음이 쓰이더라고.”

“개소리 좀 작작해라. 네 사람한테 그게 무슨 소리야.”

용천휘가 싱긋 웃었다.

“아마도, 사형이 이런 사람이라서 그런 거겠지.”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사형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는 솔직히 사형처럼 단순한 사람은 이제껏 보지 못했어. 처음에는 취미 생활하기에 퍽 좋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어. 사람이 단순하다는 건 믿기 편하다는 소리겠구나 싶더라니까.”

“…….”

용천휘의 말은 지강백이 이제껏 터질 것처럼 머릿속에 담아 두었던 생각의 둑에 툭, 구멍을 뚫어 버린 것 같았다.

“그러는 너는?”

“나? 내가 뭘?”

“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

“워, 잠깐.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용천휘가 부채를 펼쳐 입매를 가렸다.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이윽고 다시 곧아졌다.

그러나 눈매가 변하는 것만으로는 표정 전체를 읽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너는 내게 숨기고 있는 게 없냐고.”

지강백이 용천휘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 그 바람에 부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부채! 젠장, 이게 무슨 짓이야?”

지강백은 용천휘의 타박을 무시하고 억지로 그의 손바닥을 폈다.

손바닥은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너무 깨끗해.”

“……뭐?”

“흉터가 남을 정도로 깊게 베이진 않았다는 소리야. 너는 내가 정신을 잃고, 지켜 줄 사람 하나 없는 상황에서 말도 안 될 만큼 가벼운 부상 하나만 입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둘 중 하나겠지. 놈들이 너를 봐줬거나, 아니면 네가 거짓말을 했거나.”

“내가 거짓말을 했다면 이유가 있어야지. 뭣 때문에 파락호들한테 거짓말을 해 줘?”

“놈들은 마교라더군.”

“…….”

용천휘의 입매가 굳으며 잠시 침묵이 생겨났다.

침묵은 필연적으로 긴장을 불러왔고, 긴장은 신경을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미세한 표정 변화까지 읽어 낼 수 있을 만큼.

“……뭐? 마교?”

“개방에서 마교의 행적을 늘 주시하고 있는 중이라 했다. 그러니 틀린 얘기는 아니겠지.”

“마교가 뭔데?”

“정말 모르나?”

“내가 알아야 하는 거야?”

“당연히 알아야지.”

“왜?”

천연덕스럽고, 매끄러운 표정. 상처 하나 없는 손바닥을 닮은.

지강백은 해체할 것처럼 용천휘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 너도 종남의 제자니까.”

“아하, 그래? 그럼 알고 있지 뭐. 마교가 뭔데? 뭐 하는 것들인데 대낮부터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양인(良人)한테 겁을 줘?”

“나도 그 이유가 묻고 싶다.”

지강백은 용천휘의 손목을 놓고, 대신 그의 목에 손을 갖다 댔다.

용천휘가 어깨를 주춤했지만, 지강백의 손은 딱히 힘을 쓰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목에 가져다 댈 뿐이었다.

“마교의 흉수가 개방의 두 제자를 살해했다. 이렇게 한 손으로 목을 조여 죽였어. 극양 계열의 장법을 썼는지 살갗이 타들어 갔지. 손자국 모양으로. 문제는 너무 뚜렷해서 그자의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있다는 거였어. 중지보다 검지가 조금 더 길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거지들이 죽은 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필 총관의 손이 그렇게 생겼더군.”

“……뭐?”

용천휘가 지강백의 손을 쳐 냈다.

“지금 뭐라는 거야?”

“네가 마교와 연관이 있는지 묻는 거다. 네가 종남파에 입문한 이유가, 과연 네가 말한 그게 전부인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인지. 나는 그게 알고 싶다.”

“손이 그렇게 생긴 사람이 한둘이야? 고작 그따위로 날 의심하겠다고?”

“그리고 지금 우리가 소림에 가고 있는 이유도. 그게 정말 무공을 엿보기 위함이냐?”

“사형!”

지금, 지강백의 검은 눈은 거울이 되었다.

용천휘는 그의 눈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고 있을 것이다.

“대답해.”

침착하고 낮은 음성은 외려 커다란 고함보다 무서웠다.

감정을 담은 것이 아니라 답을 듣겠다는 뚜렷한 목적 하나만을 담고 있었다.

“……없어.”

시근덕대던 숨을 삼킨 뒤 용천휘가 답했다.

“정말이냐?”

“그 머리 하얀 놈들이 마교라면, 난 정말로 연관 없어. 난 놈들이 누군지도 모른다고.”

“그래?”

지강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겠군.”

“좀 믿으라고. 내가 얘기했잖아. 사형이 날 믿으면 난 사형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사형이 믿으면 되는 일이야.”

지강백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달리는 마차의 문을 열 것처럼 문고리를 잡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마차를 돌리자.”

“뭐? 왜!”

“네 집이 함양에 있다고 했나? 거기로 가자. 소림의 속가제자보다 종남의 정식 제자가 더 낫다는 것이 보고 싶을 뿐이라면 내가 보여 주겠다.”

“……이봐, 사형. 그건 내 생각이고…… 무엇보다 사부님께서 허락하시겠어?”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리고 지강백은 용천휘가 말릴 틈도 없이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이런, 젠장. 사형!”

용천휘가 그를 불렀으나 이미 늦었다. 소림을 향해 달리던 마차가 멎었던 것이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