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53화 (53/346)

제53화 실연 (2)

“그런데 시체는 잘 처리했나?”

용천휘가 물었다.

시체라는 것은 채희유를 납치해 갔던 이매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용천휘가 채희유를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파루나가 이매 몇 정도는 스스로 처리할 수 있음을 미리 알고 있던 탓이었다.

채희유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용천휘를 바라보았다.

용천휘와는 다른 의미로 그녀 또한 속내를 읽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용천휘는 표정이 너무 많아 무엇이 진짜인지 가려내기 어려운 반면 채희유는 표정이 없어 읽을 것이 없는 경우였다.

그녀는 더욱더 알 수 없는 얼굴이 되어 용천휘를 마주했다.

“……아니요.”

“아니라고?”

용천휘가 되물었다. 물음이 아니라 질책이었다.

그에 대한 답은 한 박자 틈새를 둔 뒤에 흘러나왔다.

“행적을 쫓기 위해 일부러 놔두었습니다. 추보향(追步香)을 뿌려 두었으니 뒤쫓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다만,”

“네 벌레가 향을 쫓아야 하니 당분간 곁을 비워야 한다는 소리겠군.”

“그렇습니다, 소야.”

아무것도 없는 표정은 그대로 고요한 순종이 되었다.

“허락을 구하기 위해 잠시 들렀습니다. 그리고 호당충(護當蟲)도 새로 마련해 드려야 하고요.”

호당충은 어제 백사준의 공격을 잠시 멈추게 했던 밀봉(蜜蜂: 꿀벌)을 말하는 것이었다.

채희유가 붙여 놓은 작은 독충은 용천휘의 곁을 맴돌고 있다가 위기의 순간이 되면 그를 지키는 구실을 했다.

호당충을 이끄는 것은 채희유가 용천휘에게 발라 놓은 특수한 향이었고, 이것이 미약해지기 전에 주기적으로 보충을 해 주어야 했다.

“아직은 향이 괜찮지만 제가 생각보다 길게 곁을 비워야 할지도 모르니 미리 보충을 하겠습니다. 괜찮으신지요.”

“마음대로.”

“그럼, 조금만.”

용천휘가 슬쩍 고개를 낮추었다.

채희유가 발을 들어 그에게 얼굴을 닿게 했다. 입술과 입술의 높이가 맞았다. 그리고 채희유의 눈이 녹색을 띠었다.

스스스…….

그녀가 입술을 벌려 용천휘에게 입김을 불어넣었다. 짙은 자색의 김이 용천휘의 입 안으로 꾸물대듯 기어갔다.

“다 됐습니다.”

이윽고 채희유가 몸을 물렸다.

그녀가 조금 전처럼 반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용천휘에게서 멀어진 채희유가 필목현의 곁을 지나 문가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떠나기 전 필목현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필목현이 이유를 묻는 대신 눈썹을 까닥였다.

“이매의 행적을 캐는 것은 소야께서 삼좌위에게 내린 일이라 들었습니다만, 제가 이리 가로채게 되는군요. 그간 조금도 성과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만.”

표정 없는 얼굴이 힐긋 필목현을 스쳐 갔다.

“제가 없는 동안 소야의 보필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것밖에 할 일이 없을 듯하니까요.”

“……무어라?”

“그럼 이만.”

채희유는 필목현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사라졌다.

덕분에 필목현은 핏대가 오른 얼굴로 용천휘의 타박을 상대해야 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언젠가부터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작은 기척을.

“누구냐!”

필목현이 날카롭게 외쳤다.

동시에,

슷!

거뭇한 사람 그림자가 담을 넘어갔다.

“쯧.”

용천휘가 혀를 찼다.

“하던 일을 빼앗겼으니 남은 일이라도 잘해야 하는 것 아냐? 엿보고 있는 놈이 있다는 것도 몰랐어?”

필목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비죽였다.

“작작 좀 하십시오. 이 노구가 그간 발바닥에 비자(疿子:땀띠)가 돋도록 동분서주했던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새파랗게 어린 계집이 으스대는 것도 모자라 소야께서도 이 몸을 이리 구박하시면……,”

“알았으니까 그만하고 놈이나 쫓아. 어디까지 들었을지 모르니 확실히 없애도록.”

“아, 물론입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핏.

필목현이 꺼지듯 사라졌다.

혼자가 된 용천휘가 습관처럼 부채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꼴을 보아하니 이매는 아닌 듯한데…… 그럼 대체 어느 놈이라는 소리지?”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소림으로 향하는 이제까지의 길에 부딪힌 사람들이 제법 되었다.

살막에서 마음을 다르게 먹을 수도 있었고, 천하제일쾌검이 비좁은 인성을 이기지 못하고 설욕을 맹세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흐음. 어쨌거나 이젠 조심할 때가 되었다는 소리겠군.”

봄 햇볕 아래 나른하게 조는 나비 날개 같던 부채질이 뚝 멎었다.

“무연객…… 아니, 지월을 다시 마주쳐야 할 텐데. 가급적 그가 소림으로 돌아가기 전이라면 좋겠고.”

용천휘는 객잔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무연객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무공의 원리와 흐름을 한눈에 꿰뚫어 보는 수라안 덕택이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을 넓게 하면 알 수 있는 문제였다.

상대의 무공에 맞춰 즉석에서 창안한 무공으로 비무를 하는 자.

그런 경지에 도달한 이가 지월 말고도 또 있다 하면 그는 도저히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림을 가는 이유가 애초에 지월이었으니, 가는 길에 그를 미리 만난 것은 기가 막힌 행운이었다.

그러나 애석히도 행운은 짧았다.

무연객은 너무 빨리 사라졌다. 호영장을 떠난 뒤로는 그의 행적을 도무지 찾기 어렵노라고, 그를 뒤쫓으라는 명을 받았던 필목현이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젠장. 그냥 소림으로 가야 된다는 소린가.”

끝내 무연객을 찾을 수 없을 경우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무연객 행세를 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지월은 오랜 시간 소림을 비워 두진 않을 것이다.

소림 방장의 출타는 어디까지나 비공식이었다. 그 말은 무연객으로서의 강호행이 일시적이라는 뜻이었다. 짧게 볼일을 마치고 곧 소림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소림으로 가는 길목에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어도 될 듯싶었다.

길을 좁힐수록 지월과 다시 마주치는 일은 수월해질 것이다.

“사형이 돌아오면 길을 서두르자고 해야겠군.”

용천휘가 조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 바보는 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거야. 고작 실연 정도로 이리 굴다니. 나약해 빠졌어.”

어쨌거나 그가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용천휘는 그 자리에 느긋하게 다리를 뻗고 앉았다. 그는 나태한 표정으로 약포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옹색한 천장을 응시했다.

그러나 점점 붉어지는 눈은, 그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 * *

“이런. 지 소협 아니오?”

지강백은 그게 자신을 부르는 말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는 소리들을 무심히 흘려 넘기고 계속 걸었다.

“이보오, 지 소협!”

어깨를 툭 건드리는 바람에 지강백은 고개를 돌렸다. 백사준이 그를 보며 턱을 갸웃대고 있었다.

“아, 백 소방주님.”

“귀가 먹었소? 나보다 젊은 사람이.”

“그게 아니라……”

“뭐, 됐소. 못 알아들을 수도 있고 그러니. 그런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소? 일행은 찾으셨소?”

“예. 제가 찾은 것은 아니고 본인이 알아서 돌아왔습니다.”

“무에? 아니, 납치당했다 하지 않았소?”

“도움을 받았다 하더군요.”

“허, 거참. 하늘이 보살피셨나 보군. 그런데 소협은 왜 그렇게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털레털레 걷고 있던 게요?”

지강백의 입매가 쓴 것을 삼킬 때처럼 변했다.

“그게…… 아무 일도 아닙니다.”

“음? 아무 일도 아니긴.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은 결코 아무 일이 될 수 없는 일이 있었다는 소리라오.”

입맛이 더욱 써졌다.

제 얼굴 위에 방금 전 마음 한 곳을 잃었다는 표시가 쓰여 있기라도 한 것인가 싶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백 소방주님은 왜 아직 이곳에 계십니까?”

백사준은 말을 돌리는 지강백을 향해 짐짓 눈을 흘겼지만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웬걸. 벌에 쏘였지 뭐요.”

“벌이오?”

백사준이 오른 소매를 걷어 올려 시퍼렇게 부어오른 팔뚝을 보여 주었다.

“이건 벌에 쏘인 게 아닌 듯합니다만.”

“역시 그런 것 같소? 나도 그랬소. 그런데 하오문의 미친 약쟁이가 벌이라 하더이다. 간혹 이런 미친 독을 지닌 벌도 있다 하오.”

“이런 벌독은 저도 처음 봅니다.”

“나 역시 그렇다오. 더 기가 찬 게 뭔지 아시오?”

백사준의 눈에 언뜻 이채가 스쳐 갔다. 지강백은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이채였다.

“이 벌이 중원 땅에서는 백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놈이라는 게요.”

용천휘를 후려 패기 직전, 웬 벌이 하나 날아왔다. 벌레도 저래 미치는구나 싶어서 소맷자락으로 쳐 냈다. 용케 소매 안으로 날아든다 싶었던 벌은 손에 부딪히는 순간 곧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이 잠시 욱신대는 것은 마땅히 후려 패야 했을 인간을 때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독이라 했다.

그것도 중원 땅에서는 매우 희귀한 종류의 벌독이라 했다.

그러니 심증이 계속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제라는 인간은 확실히 마교와 연관이 있었다. 있어야 했다. 백사준이 이미 그렇게 믿기 시작했으므로.

“뭐, 그래도 한번 얼굴을 보게 되어 기분은 좋구려. 시간이 괜찮다면 이 몸과 약주라도 한 잔 하지 않겠소?”

지강백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 약주를 입에 대 본 적이 없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지금이 막 해가 뜨기 시작하는 이른 아침이라는 것이었다.

“이 시간에 말입니까?”

“뭐 어떠오. 술에 무슨 때가 필요하다고. 때마침 요 근처에 끝내주는 명주를 파는 곳이 있는데…… 아, 물론 내가 그 집 안주를 공으로 맛보고 싶다는 건 아니고…… 어떻소? 확 당기지 않소?”

미안하지만 조금도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좀……”

“아니, 소협. 잘 생각해 보오. 소협이나 나나 사실 벌써 소림으로 갔어야 할 몸들 아니오? 천하무도회니 뭐니 다 좋다 이거요. 그런데 장소가 하필 소림이란 말이오. 가 봤자 퍼석한 보리밥에 염소가 씹는 푸성귀 반찬 정도나 내주겠지. 어찌 보면 지금이 맛 좋은 술에 기름진 안주를 맛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단 말이오!”

백사준에게는 퍽 아쉬운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술 한 잔 정도라면 언제 대접해도 좋습니다만 그런 이유에서라면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강백의 정중한 거절에 백사준이 안타까운 듯 그를 붙들었다.

“아니, 소협. 그럴 게 아니라 진짜요. 정말로 소림의 밥은 형편없단 말이오. 소협이 도사 생활을 오래 해서 그냥저냥 비슷하겠거니, 이렇게 안일하게 넘어갈 게 아니란 말이지!”

“그런 게 아니라 저는 소림에 갈 일이 없을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음? 소림에 가지 않는다니?”

생각도 못 했던 답이었던지 백사준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물었다.

“천하무도회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말이오, 그럼?”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 어째서!”

지강백이 침착하게 설명했다.

사실 지강백에게는 백사준이 그의 참석을 당연히 여기는 게 더 이상할 노릇이었다.

“천하무도회는 오 년에 한 번씩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종남은 제가 제자로 있는 십칠 년 동안 한 번도 천하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번이라고 다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다르지 않다니! 이번에는 소협이 있지 않소!”

백사준의 입장에서는 이 당연한 얘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강백이 이상했다.

“송구스럽게도 저는 아직 종남의 제자 노릇을 할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뭐라고!”

백사준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그게 대체 말이요, 소요? 누가 준비가 덜 됐다고?”

“사부님께서 늘 말씀하시길, 종남의 모든 무학을 대성했을 때야 천하무도회에 참여할 자격이 생긴다 하셨습니다.”

“꽥!”

너무 답답하고 이상한 나머지 백사준은 목이 졸리는 소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백 소방주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왜……”

백사준은 서둘러 지강백의 말을 끊었다.

“종남의 이번 장문인은 양영천…… 으음, 그러니 천우진인이라 알고 있는데. 맞소? 아니면 그새 다른 장문이 드셨나?”

사부님의 정식 도명을 듣는 것은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분이 그리 말씀하셨다고?”

“그렇습니다.”

“나 참.”

백사준이 입술을 달싹였다.

분명 지강백에게 진실을 말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중일 것이다.

“소협. 혹시 말인데…… 혹 비무를 해 본 적은 없소? 아니, 꼭 비무가 아니어도 좋소. 누군가와 대련을…… 아니, 젠장. 무공을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 애송이로는 안 보였는데. 아무튼 손을 섞어 본 적이 없소? 한 번도?”

“물론 있습니다.”

“그래? 그게 누구요?”

일단 생각나는 이름은 둘이었다. 남궁진현과 호영장주 호곽. 그리고 몹시 어수룩하던 살막의 살수도 있었다.

지강백이 말하는 이름을 들은 백사준은 더더욱 기가 차다는 표정이었다.

“……하! 천하제일쾌검을 상대하고도 그런 소리를 하오? 뭐? 오른팔을 못 쓰는 상태에서? 나 참. 진짜 어처구니가 없군. 그리고 또 누구! 누가 있소!”

점점 거세지는 백사준의 질문에 지강백은 의외로 수더분하게 답을 이었다.

사실 지금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싶기도 했고, 무공 얘기를 나누는 것은 그도 퍽 즐거워하는 일인 탓이었다.

“그리고…… 이건 대련이라 하기에는 애매한 듯한데 무연객이라는 자와 구검을 한 적이 있습니다.”

“뭐라고!”

백사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금방이라도 눈알 두 개가 툭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갈 듯싶었다.

“무연객! 무연객이라고!”

그 격한 반응은 지강백이 아무리 순진하다 하더라도 이상하다 여기기에 족했다.

“혹시 아는 분이십니까?”

“하, 알다마다! 내가 개방의 소방준데! 내가 설마 그걸 모르겠소! 하! 이런, 망할!”

백사준은 무연객의 비무행도, 그가 비무행을 하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그가 비무 상대를 어떻게 고르는지도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연객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 놀라움에는 그게 가장 컸다.

지월은 무광이었다. 무공을 보면 참지 못했다. 그러나 능히 상대할 자가 없는 천하제일인이 되고 나서는 비무 상대를 가렸다.

지월은 하늘과 그 위에 존재하는 또 다른 하늘 사이의 경계를 밟고 서 있는 자였다.

그의 비무에는 이미 승패가 걸려 있지 않았다. 지월은 모두가 제 발아래인 상황에서, 이렇다 할 흥미를 느끼게 해 주는 상대의 무공을 관찰하기 위해 비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흥미는 바로 가능성이었다.

같은 무공이라 하더라도 개개인의 무인에 따라 쓰임은 천차만별이었다. 위력도 모두 다를 것이다. 간혹 몸이 너무 뛰어나거나 깨달음이 온 자라면 같은 무공이라도 전혀 다른 것이 되기도 한다.

지월은 그것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지에 있었고, 그가 지강백을 상대로 구검을 했다는 것은 지강백에게서 분명히 남들과는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백사준은 무언가가 울컥 솟구치는 얼굴로 타구봉을 빼어 들었다.

“소협, 술은 집어치우고 나와 한판 붙읍시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까놓고 말해드리지. 나는 개방의 소방주고, 내 타구봉은 개방 역대로 다섯 손가락으로는 못 꼽아도 열 손가락 안에는 반드시 든다 하였소. 그 말은 지금 현재 강호에 있는 스물둘의 후기지수 중 이 몸이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간다는 소리지. 참고로 말하자면 그 세 손가락 안에는 소림의 감원도 있다오.”

“그게 왜……?”

“그러니 소협이 날 꺾으면 자동적으로 그 세 손가락 안에는 소협도 들어간단 말이오. 어떻소, 확인하고 싶지 않소?”

“…….”

지강백이 굳은 눈빛으로 백사준을 바라보았다.

“그 스물둘이 모두 이번 천하무도회에 참석할 것이라오. 소협이 세 손가락 안에 든다면 마땅히 소협도 그 자리에 와야지.”

할 말을 잃었다.

반드시 사문을 감추라던 말도, 너는 아직 모자라다는 말도 함께 잃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한 번쯤은 묻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 어디가 그렇게 부족하다 생각하시냐고.

다른 이들은 어디가 그렇게 부족하지 않은 거냐고.

어쩌면 한 번쯤은 사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이 궁금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안 될 게 뭐 있소?”

가슴이 뛰었다.

십칠 년간 고되게 홀로 걸어온 고독한 길에 비로소 꽃이 피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백사준을 꺾는다면, 그렇다면 끝이 어디쯤인지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강백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의 목검을 빼어 들고 있었다.

백사준이 당장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안 되오. 진검으로 하시오.”

“아직 진검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으로 양해해 주십시오.”

“그건 또 무슨…… 하, 진짜 환장하겠군. 이 백사준을 상대로 고작 목검을 쓴단 말이지.”

지강백이 말했다.

“천하제일쾌검을 상대로는 써 보지도 못했습니다.”

“……하! 좋소, 그런 검이라면 내가 감히 사양할 수야 없지!”

백사준이 손바닥에 침을 뱉어 탁구봉을 꽉 움켜쥐었다. 진심으로 상대하겠다는 뜻이었다.

“준비되셨소?”

“물론입니다.”

“좋아, 그럼 가……”

기세 좋게 울리던 백사준의 목소리가 갑자기 수그러들었다.

“……? 왜 그러십니까?”

백사준이 타구봉을 들어 지강백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내가 지금, 과하게 흥분한 나머지 헛것을 본 것 같아서 말이오. 저기 지금 검은 연기가 피어나는 게 맞소?”

지강백이 고개를 돌려 백사준이 말하는 것을 확인했다.

검은 연기가 맞았다.

“맞습니다만.”

그로서는 그게 개방의 흑어 중 하나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제자의 죽음을 뜻한다는 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비무는 미뤄야겠군. 소림에서 봅시다, 소협! 꼭이오!”

“백 소방주님!”

휙!

그러나 백사준은 벌써 저만치 달려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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