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52화 (52/346)

제52화 실연 (1)

새벽이 되었다.

지강백은 까맣던 하늘이 하얗게 바래가는 과정을 뜬눈으로 지켜보았다.

너무 총총해서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 같던 별들도 새벽에 밀려 존재를 잃어 갔다. 점점 창백해져 가는 달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시린 기분이었다.

“시간이…… 이렇게 더딘 거였나.”

텅 비어 버린 약전 골목길에 혼잣말이 흘렀다.

처음에는 채희유가 사라진 약방 문 앞이었다.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문을 지키고 서서 기다렸다.

밤이 점점 기울면서 마음이 기울더니 걸음도 기울었다.

저도 모르는 새 걸음이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향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약전의 입구였다.

“무사할 거다. 사제도 그랬고 개방에서도 행적을 뒤쫓고 있으니. 무사할 거야.”

아무것도 없는 새벽을 한참 서서 지켜보던 지강백은 잘 떨어지지 않은 걸음을 돌렸다.

개방에서 시체를 수습해 간 뒤 빈집이 돼 버린 약방에는 용천휘와 필목현이 자고 있었다.

이런 데서 어떻게 자라는 소리냐며 비단 금침이 깔린 객잔을 찾아보라는 헛소리라도 한번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용천휘는 옹색한 약방 침상 위에 턱 드러누웠다.

평소 같았으면 “아이고 우리 도련님께서 금침도 없는 침상 위에 제 발로 누우시다니. 이제야 사람 구실 좀 하시려나 봅니다.” 어쩌고 너스레를 떨었을 필목현도 조용했다.

걱정할 것 없다며 태연한 척 굴어도 사실은 걱정 중이라는 것을 그래서 알았다.

* * *

그렇게 약방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채 소저!”

지강백은 막 약방 문턱을 넘어서려는 작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채희유였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채 소저!”

지강백이 채희유를 향해 달려갔다.

지강백을 발견한 채희유가 안채를 힐긋 보더니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조용히 하라는 뜻.

“도련님이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지강백이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때서야 그는 그녀가 약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게 아니라 나오고 있던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채희유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녀의 어디에도 괴한에게 납치당한 흔적 같은 것은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된 겁니까?”

지강백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우연찮게 본가에서 보내신 분께 도움을 받았습니다. 몸에는 탈이 없고,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을 테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거짓말 같은 얘기였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그녀가 그 이튿날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난 것처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납치당했는데, 마침 본가에서 사람을 보냈다니요. 사제의 본가라 하면 꽤 멀리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공교롭게도 그리되었습니다.”

대답도 아무렇지 않았다.

채희유는 모를 것이다. 지강백이 왜 이 새벽에 이곳에 있는지. 그에게 지난밤이 어떠했는지. 까매야 하는 밤이 왜 온통 새하얬는지, 그런 것들을.

사실 지강백도 정확히는 몰랐다.

그저 걱정이라 하기엔 과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그녀를 보는 마음이 불편했다. 단단한 수평면을 뚫고 무언가가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본가에 볼일이 있어 당분간은 그쪽에 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잠시 도련님의 상태를 보려고 들렀습니다.”

아니, 이미 뚫고 나왔다. 그리고 우썩우썩 자라는 중이었다.

“볼일이라니요?”

“어쩌다 보니 제가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도련님께는 일을 마치고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럼,”

지강백은 걸음을 움직여 채희유의 앞을 막아섰다.

한 쌍의 검은 눈동자가 무감이라는 한 겹의 가면을 쓰고 그를 마주했다.

“왜 이러십니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어제, 채 소저께서 괴한에게 납치당한 뒤에 말입니다.”

“……사형 분께서는 모르셔도 되는 본가의 일입니다. 저는 무탈하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니, 알아야겠습니다.”

“왜 아셔야 합니까?”

“왜냐고 물으셨습니까?”

지강백이 주춤 고개를 굳혔다.

이유야 많았다.

백발마인은 마교일지도 몰랐다. 그런 자들이 채희유와 용천휘를 두 번씩이나 노렸다.

마교에 납치당한 채희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돌아왔다.

그 둘은 과연 마교와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볼 수 있을까.

이 우연들을 그저 공교롭다고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백사준은 용천휘가 종남파에 입문한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 했다. 지강백은 아직 그것에 대해 캐묻지 못했다.

하지만 그 어떤 의혹들보다 더 우선인 이유가 있었다.

밤이 새벽보다 환했던 이유, 점점 닥쳐오는 새벽이 터무니없이 빠르다고 느꼈던 이유, 차가운 새벽을 깔고 앉아 그 많던 별들이 한 줌의 허무로 사라지도록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유.

지강백이 채희유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녀는 여전히 숨이 고플 정도로 하얗고, 시렸다.

“제가 채 소저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

이번에는 채희유의 고개가 주춤, 내려앉았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결국 개방이나 사제의 도움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제 자신에게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던 만큼, 제가 채 소저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

채희유가 뭔가를 더듬듯 입술을 벌렸다.

하얗던 얼굴이 꽃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듯 보이기도 했고, 다른 무엇으로 피어나 날아갈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좋아합니다.”

“아…….”

채희유가 넘어질 것처럼 기울어졌다.

지강백은 그럴 줄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그녀를 받아 들었다.

지강백의 품 안에서 채희유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강백은 무감의 가면이 사라진 맨눈을 보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 안에 자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른 것은 없었다. 아마 제 눈도 그럴 것이다.

“저를…… 좋아하십니까?”

“…….”

채희유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지강백의 팔을 붙든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아주 세게, 인식도 하지 못하고 자신을 쥐는 채희유를 보며 지강백은 그것으로 답을 들었다 생각했다.

지강백이 손목을 돌려 채희유의 턱을 쥐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고개가 조금씩 올라왔다.

마침내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지강백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어제 채희유의 입술이 아주 잠깐 닿았다 떨어졌던 순간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다정하게 끌어안고 더없이 소중한 기분으로 입을 맞추고 싶었을 것이다.

생각보다 따듯했던 입술이 막 입술에 와 닿는 순간,

“안 돼!”

퍽!

고개가 뒤로 밀렸다.

채희유가 그를 밀어내기 위해 버둥거렸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놓아주세요!”

“아……”

팔이 벌어졌다.

채희유는 재빨리 몸을 물렸다.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었다. 이가 입술을 세게 무는 것이 보였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겁니까.”

“저는…… 저는,”

채희유는 이번에도 답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이 서운하다기보다는 안쓰러웠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너무 떨려 와 뭐든지 괜찮다 말해 주고 싶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아주 나중이라도 괜찮습니다. 답을 해 주고 싶으실 때, 그때 해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한 발자국 물러난 지강백은 품 안을 뒤졌다.

잠시 후 그의 손에는 언젠가 용천휘가 던져 버린 뒤로 더듬이 부분이 망가진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이 소중히 들려 있었다.

“이것, 틈틈이 고쳐 보려 했습니다만 손이 둔해 원래대로는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야 돌려드리는군요.”

“…….”

채희유의 눈이 지강백의 손과, 그 손에 들린 머리 장식을 번갈아 보았다.

너무 빨리 움직이는 눈동자는 그래서 흔들리는 듯도 했다.

“제가 꽂아드려도 되겠습니까?”

“…….”

답이 없었다.

지강백은 채희유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채희유는 숨도 쉬지 않고 서서 지강백의 손이 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녀를 대신해서 심장이 대신 말을 하는 듯했다. 쿵쿵대는 거센소리가 가슴을 넘어 지강백에게도 들려왔다.

조심스러운 손짓이 서투르게 머리 장식을 꽂았다. 사내의 눈에 머리 장식은 너무 뾰족하기 마련이었다. 행여나 다칠세라 함부로 꽂을 수가 없기에 그저 머리 위에 올려놓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 어설픈 모양에 지강백이 쑥스럽게 웃었다.

“잘 안 되는군요. 다음에는 더 잘……”

“아, 안 돼!”

채희유가 눈을 질끈 감으며 또 한 번 그를 밀어냈다.

탁!

어설프게 올려진 머리 장식이 땅으로 떨어졌다.

지강백이 당황해 손을 뗐고, 채희유가 왈칵 소리를 쳤다.

“저는 도련님의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태어날 때부터 저는 도련님의 사람으로 키워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리해선 안 됩니다. 절대로, 절대로 안 됩니다!”

말을 마친 채희유는 그대로 몸을 홱 돌려 다시 약방 안으로 들어갔다.

쾅! 하며 코앞에서 문이 닫혔다.

그 탓인지 귀가 먹먹했다. 아니, 사실 귀가 먹먹한 것은 그 전부터였다. 귀도 모자라 가슴 안쪽과 머릿속까지 먹먹한 듯했다.

“사제의…… 여자였구나.”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랬구나.”

미리 알았다면, 당연히 이런 마음은 담지 않았을 텐데.

왜 몰랐을까.

“그랬……”

그 자리에 멈춘 채로 혼잣말을 중얼대던 지강백은 문득 땅에 떨어진 머리 장식을 발견했다.

그가 허리를 굽혀 머리장식을 주워 들었다.

어수룩하게나마 손을 대어 놓았던 더듬이는 또다시 망가져 버렸다.

“…….”

나비처럼 생긴 장식을 묵묵히 바라보던 지강백은 그것을 다시 품에 챙겨 넣었다.

누군가를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은 그 이전과 다를 게 없어 안타까웠다.

* * *

“아, 안…….”

숨을 할딱거렸다.

채희유는 닫힌 문 안쪽에서 스르륵 주저앉아 버렸다.

“안……”

눈물이 고인 걸까.

시야가 흐려지며 눈이 따끔거렸다.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러자 손끝이 따끔했다. 아니, 파닥이는 가슴 안이 저려 왔다. 어딘가에 사정없이 갈린 것처럼.

채희유는 옷깃을 부여잡았다. 바삭하게 구겨지는 옷감은 칼날처럼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니, 마음을 베어 냈다.

“저는…… 저, 저는……”

지강백 앞에서는 차마 뱉지 못했던 대답이 흘렀을 것이다.

때마침 누군가 말을 걸지 않았다면.

“너는, 뭐?”

“……!”

채희유가 고개를 들자 그 앞에는 부채를 삐뚜름하게 쥐고 있는 용천휘와 필목현의 모습이 보였다.

“깨, 깨어 계셨……”

“아아. 원래는 한창 달게 잘 시간인데 말이야. 밖에서 재미있는 소리가 들려와서.”

삐뚜름한 것은 부채가 아니라 사실 용천휘의 표정이었다.

몸을 낮춰 눈높이를 맞춘 그가 부채 끝으로 채희유의 턱을 들어 올렸다.

“파루나가 울면 쓰나. 그 눈물 한 방울이면 근처의 벌레들이 다 죽을 텐데.”

“놓아……주십시오, 소야.”

“아아, 서운하게. 사형한테는 잘도 안겨 있었으면서 말이지. 내가 좀 보는 건 싫다는 소린가?”

“소, 송구…… 합……”

채희유는 끝내 송구하다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사실은 조금도 송구하지 않았다.

용천휘가 자신을 제 여자로 다루지 않는 것처럼, 그녀 또한 그를 지아비로 여기지 않았다.

그가 대명천교의 소교주로 태어났듯이 자신도 그저 팔우위의 딸로 태어났을 뿐이었다. 팔우위의 딸들이 파루나가 되게끔 다른 누군가가 정해 놓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파루나는 필연적으로 교주의 여자가 되었다.

눈물 한 방울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인은 양날의 검과 같았다.

파루나의 주인은 파루나를 제어하기 위해 아주 어릴 때부터 몸에 금제를 걸었다. 절대 풀리지 않는 금제였다. 금제를 건 주인조차 금제를 이용할 뿐, 다스리진 못했다.

오로지 한 사람에게는 독이 통용되지 않는 금제.

결국 한 사람만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굳이 금제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파루나는 교주의 여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독인이 만들어지는 과정 탓이었다.

독인을 만드는 것은 독이었다. 파루나의 양식은 독이었다. 파루나로 운명 지어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채희유는 물 대신 독초의 즙을 빨았고 음식 대신 독충의 살을 찢어 삼켰다.

독은 단지 몸에 해를 끼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단계를 거쳐 복용하는 독에는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있었다.

온갖 종류의 환각을 겪고 나면 몸보다 먼저 정신이 붕괴되었다.

첫째 언니는 제 손가락을 씹어 먹고 죽었다 했다.

둘째 언니는 뼈가 드러나도록 살갗을 긁다 죽었다 했다.

셋째 언니는 짐승의 피를 산 채로 빨다 배가 터져 죽었다.

채희유도 그랬다. 몇 번이고 껍질이 벗겨지고 머리칼이 녹아내리며 손발톱이 썩어 흐르는 과정을 겪다 보면 차라리 미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때도 있었다.

그 과정을 버티는 이유가 오직 교주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세뇌와도 다를 것 없는 과정을 거치고 독인이 되면 너무도 당연히 제 존재를 교주를 위한 것이라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뇌와 금제. 두 가지 이유로 파루나는 절대 교주를 배신할 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이상한 파루나일 것이다.

자신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내인 용천휘가 사내로 느껴진 적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어쩌면 용천휘가 비정상적인 소교주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점만큼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필목현의 말이었다.

“파루나의 부정을 묵인하시는 소야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파루나가 어떤 존재인지 새삼 말씀드려야 합니까?”

필목현은 용천휘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 말은 파루나인 채희유가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는 것도 눈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파루나의 몸을 취하십시오. 금제를 강화하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수입니다.”

“음…… 뭐, 그렇긴 하지.”

몸을 취하라는 말에 채희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얼굴을 보며 용천휘가 작게 혀를 찼다.

“저런. 그렇게 대놓고 싫어하면 내가 너무 파렴치한 같잖아.”

필목현이 미간을 굳히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극히 마땅한 일인 것을.”

“그래. 마땅하긴 하지.”

용천휘의 부채가 턱에서 목선을 따라 내려가 옷깃을 긁었다. 채희유는 그 작은 동작에도 바스라질 듯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걱정 마라. 당장은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나는 네가 내 사형에게 연심을 품었다는 게 상당히 마음에 들거든.”

“…….”

채희유의 입술이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뻐끔 벌어졌다.

“그리 단순한 성정이라면 네 속내를 의심할 필요가 없지. 너는 이매가 될 수 없는 사람이고, 되지도 않을 사람이다.”

용천휘가 잠시 말을 끊고 짧게 웃었다.

“그리고 내 사형이란 자는, 네가 내 것인 이상 쉽게 내게서 등을 돌리지 못하겠지. 너는 당분간 이대로 남겨 둘 생각이다. 속이 어떻든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한 이대로. 내 사형은 그만한 예의를 갖춰 줄 가치가 있어.”

용천휘의 웃음이 툭툭, 어딘가를 건드리는 듯했다.

그것은 방금 전 지강백에게서 등을 돌리면서 한구석이 베인, 상처 난 가슴이었다.

“그러니 너무 몸 사릴 것 없어. 연애 놀음 정도는 해도 괜찮아. 그 정도는 허락하겠다. 파루나에게 내리는 작은 선물이라 생각해도 괜찮겠군.”

웃음은 그 순간 칼이 되었다. 이미 베인 자리를 더 깊숙이 찌르고 들어오는 칼이.

용천휘가 웃음을 지웠다. 진지한 얼굴이 되자 그의 눈은 저절로 붉게 보였다.

“다만 한 가지는 주의해라. 선은 지켜. 너무 깊은 상처는 주지 마라. 나는 내 적혈마가 타 보기도 전에 엉뚱한 잔병치레로 골골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

그 말을 끝으로 용천휘가 몸을 일으켰다. 막 몸을 돌리는 그의 등을 향해 채희유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럼, 소야께서는……!”

“나는?”

힐긋 턱이 돌아섰다. 채희유는 힘껏 물고 있느라 새하얘진 입술을 떼었다.

“사형분의 마음은…… 그게 진심이라면…… 그리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면……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이신 겁니까.”

저는 그렇다 쳐도 말입니다.

저는 소야가 아닌 다른 사내를 품을 수 없는 몸이니 제 마음이야 애초에 갈 길을 잘못 들었다 쳐도 말입니다.

그분은 아닙니다.

그분은 모르십니다.

그건 어째야 하는 겁니까. 어쩌실 생각입니까.

채희유의 물음에 대한 용천휘의 답은 짧았다.

지강백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긴 것과는 반대로.

“그러니 말해 두는 거잖아. 선을 잘 지키라고. 천하무도회가 열리는 그 날까지.”

“마음은…… 마음은 선을 지키지 않습니다. 시기가 되었다고…… 사라지거나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건 어쩌…….”

용천휘가 귀찮다는 듯 채희유의 말을 끊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적혈마를 필요로 하는 것은 천하무도회까지다.”

“…….”

핏기를 잃은 얼굴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도 없을 만큼 창백해졌다.

용천휘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쓸 이유가 없었으므로.

“천하무도회가 무사히 지나면 나는 이매의 머리를 자르고 교의 진정한 주인이 될 것이다. 그때라면 너도 진짜 파루나가 되겠군.”

진짜 파루나라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채희유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지강백을 아낀다는 용천휘의 말은, 사실은 거짓이라는 것을. 용천휘에게는 사실 진심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그가 자신의 사람이라 하는 이들은 기실 하나의 말에 불과했다. 좀 더 유용한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이 있을 뿐이었다.

지강백은 용천휘가 가진 유용한 말이었다. 그러나 지강백의 효용 가치에는 기한이 있었다.

기한이 다 되면 그는 버리는 말이 될 것이다.

진심 같은 것은 조금도 상관없이. 그를 품은 제 마음이 아무리 크고 간절해도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것처럼.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소야께서는 제가 진짜 파루나가 되길 바란다 생각하십니까?”

이번에도 용천휘의 답은 같았다.

“네 생각을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있나?”

그 말은 방금 전 채희유의 가슴에 박혔던 칼의 자루를 부러트려 버렸다.

그래서 알았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가 박아 넣은 칼날은, 이제 어떻게 해서도 도로 뽑을 수가 없다는 것을.

채희유는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반듯이 섰다. 무릎을 굽히고 목을 숙여 예를 취하며 그녀가 말했다.

“대천의 불꽃, 생과 사의 경계에서 길이 영명할지니. 파루나가 대명신이 되실 분의 뜻을 받습니다.”

뽑을 수 없는 칼은 그녀를 피 흐르게 하다 결국 죽게 만들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혼자 죽지 않을 것.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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