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급류
“이곳인 모양이구나.”
산양에서도 이십 리는 족히 떨어진 산자락의 외딴 마을이었다.
땅거미가 느릿느릿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
고개를 하나 넘어가야 다음 집이 보이는 외진 고장에서도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나타나는 폐가에는 인기척은커녕 새나 쥐의 그림자도 한 점 없었다.
그곳에 특징 없는 회색 피풍의를 걸친 두 승려가 나타났다.
한 명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승이었고, 다른 한쪽은 눈썹이 짙은 청년이었다.
눈빛이 유독 맑고 선량해 보인다는 것 외에는 평범한 인상의 승려들이었다.
그러나 보통의 승려들과는 다른 게 있었으니, 이마 한가운데 고르게 찍힌 붉은색 계인이었다.
“예, 노…… 아니, 방장.”
노승의 정체는 현 소림 방장 지월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또 다른 승려는 방장을 보필하는 팔대호원의 우두머리인 감원이라는 소리였다.
“우릴 이곳으로 부른 이들은 아직 도착하지 못한 듯하구나.”
현 소림의 감원, 범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다 되었으니 곧 오겠지요. 저희가 좀 일찍 도착한 듯싶습니다. 아직 해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래 보이는구나. 그런데 주인보다 객이 먼저 오게 되었으니…… 그 주인 놈 엉덩짝이 퍽도 무겁구나.”
지월의 말이 끝나는 것과 얼추 비슷하게,
“이런 정신 나간 땡추가 무슨 흰소리를 지껄이는 게야. 누구더러 주인 놈이라는 게냐. 아무렴 하남에서 섬서로 오는 길이 빠르겠냐, 하북에서 오는 길이 더 빠르겠냐. 고작 몇 걸음 더 먼저 왔다고 남 엉덩짝 흉부터 보다니. 에잉, 쯧쯧.”
짙은 바람 냄새를 풍기며 두 사람이 더 등장했다.
바람 냄새는 실로 잡다했다. 길거리의 묵은 먼지와 각종 음식, 시큼한 땀과 닳은 신발짝에서 풍기는 냄새 등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하남도 하남 나름이지. 나는 험하기로는 태산보다 더 하다는 숭실봉에서 내려온 것을. 개봉은 사방 길이 뻥 뚫렸으니 유람하듯 슬슬 걸어오면 되잖나.”
“유람? 거지 놈이 길 떠나는데 유람이 다 무슨 말이냐. 고행이면 몰라도.”
“허허. 중이라고 뭐 다를 게 있나. 밥 빌어먹고 다니긴 매한가지인 것을.”
온갖 냄새와 함께 등장한 그는 현 개방의 방주, 팔중신개 풍덕포였다. 그 옆에서 소매 끝으로 미묘하게 코를 가린 이는 그의 제자이자 소방주인 백사준이었다.
소림 방장과 개방 방주의 만남이었다.
강호의 그 어디에서도 소림의 방장이 소림을 비웠다는 얘기가 들리지 않았으니 남들의 이목을 가린 비밀 회동이라는 뜻이었다.
지월이 허허 웃는 낯으로 팔중신개를 향해 팔을 벌렸다.
팔중신개는 이 드넓은 강호에서도 지월이 단 하나 친우라 부르는 자였다.
지월은 소림에 말단 제자로 입문하는 순간부터 친구보다 적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무던한 인품과 너른 아량 같은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 그것도 도저히 경쟁 상대로 여길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하다는 것.
그 사실은 지월을 도무지 평범한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게 했다.
소림의 방장이자 천하제일의 무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진심으로 흠모하여 따르는 이보다는, 그를 제 목표로 삼아 멋대로 적대시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런 지월이 인정하는 단 한 명의 친우가 팔중신개 풍덕포였다. 두 사람 사이에 쌓인 것들은 남들이 쉬이 짐작하지 못할 터였다.
풍덕포가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팔 접어라. 간만에 본다고 징그러운 짓 하지 말고.”
“오해 마시게. 거지 몸에서 냄새가 나기에 그것 좀 쫓으려고 한 것이니.”
“늙으면 노망이 나는 건 소림 방장도 어쩔 수 없나 보지. 내 몸에서 냄새 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그걸 그새 까먹었나?”
“매번 맡아도 고약한 걸 어쩌겠나. 허허.”
말은 그렇게 해도 지월은 한사코 피하려 드는 풍덕포를 억지로 끌어안아 버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 풍덕포가 진저리를 치며 지월의 손에서 벗어났다.
겉으로는 끌어안고 도망치는 아주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그 속에서 치러진 수많은 무학의 합은 쉽사리 깊이를 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범광과 백사준은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그사이 지월은 허전해진 손을 내리며 빙그레 웃었다.
“원, 냄새처럼 고약한 인간일세. 이 먼 곳으로 불러내더니 잠깐 반가워하는 것도 못 하게 하나.”
“내가 설마 할 일 없어 놀자고 불러냈겠느냐. 다 일이 있으니 그런 게지. 이럴 게 아니라 잔말 말고 볼일이나 보자. 한시가 급한 일이다.”
풍덕포가 백사준에게 턱짓을 했다.
백사준이 앞으로 나서며 먼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개방의 백 모가 무림의 태산이신 지월 대사를 뵙습니다.”
지월은 합장으로 백사준의 인사를 받았다. 다음으로 범광이 나서서 풍덕포에게 인사를 하고, 제자들 간의 인사도 이어졌다.
격식을 차리는 것은 순간이었다.
백사준은 곧 본론을 꺼냈다.
“개방의 눈이 마교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마교라는 말은 조금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범광이 무거워진 얼굴로 말을 이어받았다.
“역시 마교였습니까. 다급한 연락에 그것밖에 없겠다 생각은 했습니다만…….”
개방에서 다짜고짜 지월을 불러낼 일이란 기실 하나뿐이었다.
“흔적이 처음 발견된 곳은 섬서입니다. 조짐이 보이자마자 스승님께서는 현 천하제일기의 주인이신 소림에 기별을 넣으라 하셨습니다. 그사이 저와 사부님이 직접 섬서로 걸음 해 흔적을 뒤따랐습니다. 해서 부득이하게 섬서까지 걸음 하시도록 청을 드린 것입니다.”
대명천교를 경계하고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개방에서는 사소한 흔적도 놓치지 않았다.
그간 대명천교가 중원 땅을 범했을 때 어떠한 참사가 벌어졌는지를 생각하면 아무리 봐도 솥뚜껑이다 싶은 작은 단서에도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기별이 더 빨랐다.
개방에서는 지월에게 섬서에서 만날 것을 제안한 뒤 증거를 좇았다.
아직 증거라고는 독귀의 말이 전부였지만 백사준은 그것만으로도 경각심을 갖출 이유는 충분하다 결론지었다.
“그리하면 이번에는 좀 빠른 감이 있지 않은가?”
지월의 말에 백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바는 지당하나 그들이 나타나는 주기 또한 이제껏 짐작에 불과했던지라 섣불리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인 줄 압니다.”
“흐음. 그야 그렇지. 워낙 조짐 없이 움직이는 자들이니…….”
“맞습니다. 이제껏 기록을 짚어 보면 뭔가 뚜렷한 족적을 간파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늦어 있었습니다. 마교는 늘 생각보다 빠릅니다.”
풍덕포가 고개를 끄덕여 제자의 말을 거들었다.
“그리고 늘 생각 이상으로 지랄 맞지.”
그와 박자를 맞추어 지월도 수염을 쓸었다.
“그 말이 맞지. 암.”
백사준과 범광은 직접 몸으로 대명천교를 겪어 보진 못한 세대였다. 그러나 현 무림의 일인자와 못해도 열 손가락 안에는 반드시 들 개방 방주의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백사준은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말했다.
“그렇다면 마교가 움직이고 있다는 가정 하에, 어떤 대비를 함이 옳겠습니까?”
오늘 비밀 회동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의든 아니든 간에 지월은 현 무림의 정점이었다. 무림 전체가 관여해야 하는 대사건은 그가 좌지우지할 수밖에 없었다.
지월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다시 눈을 뜨고 말했다.
“각 파에 기별을 넣으시게.”
“어떤 기별이 되어야겠습니까?”
“마교의 움직임을 알리고 이에 충분히 대비하도록 일러야겠지. 각 문파마다 적정 인원을 차출하여 무리를 지어 놓고, 그들이 긴밀히 타 문파와도 연결이 되어 마교의 출몰에 신속히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하네. 문파의 구분이 없이 하나가 되어 저들을 상대해야 할 걸세.”
일종의 맹을 만들어 구파일방의 힘을 조직화하자는 소리였다.
그 비등한 힘들을 세밀히 조정한다면 분명 더 놀라운 전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뿐입니까?”
하지만 그만으로는 부족했다. 백사준은 그 이상을 원했다.
그리고 지월이라면 그 이상도 충분히 가능하다 여겼다.
“그게 무슨 뜻인가?”
“맹을 만드는 것도, 소림이 그 구심점에 서는 것도 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무엇이 그리 달라지겠습니까? 아마도 조금 덜 죽고, 조금 덜 다칠 겁니다. 그리고 마교는 또다시 오겠지요. 반드시.”
백사준은 그 지긋지긋한 사슬을 끊어 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했다.
지월 같은 인물은 이전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구파일방은 한 굴에 틀어박혀 제 영역을 지키려고 드는 아홉 마리의 범이었다. 덩치도 같았고 이빨의 날카로움도 엇비슷했다.
서로가 서로의 가장 큰 적이었다. 굴 밖에 아무리 강한 천적이 있다 한들, 당장은 서로를 견제하는 것이 우선인 한심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아홉 마리 범을 한 번에 목줄을 쥐고 끌어낼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지월은 그럴 만한 힘을 가진 이였다. 그래서 지금이어야 했다.
이 강호에, 지월이 있고 자신이 있는 지금.
“이제 그만 마교를 뿌리 뽑아야 될 때라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백사준의 도발적인 언사에 다들 안색이 달라졌다.
지월은 경직된 표정으로 물었다.
“이쪽에서 마교를 치자는 말인가. 정녕 그럴 수 있으리라 보는가? 나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생각하네. 우리는 아무것도 준비가 되지 않았어.”
“지금이 아니라면 앞으로도 기회는 영영 없을 것입니다.”
백사준은 단호했다. 그리고 결사적이었다.
“지금이어야 합니다. 준비가 안 되어 있다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중원은 이제껏 지금처럼 준비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중원은 드디어 맹을 조직할 준비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온전히 하나의 세력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 힘은 아직 마교에 미치지 못할 걸세. 나를 지키는 것과 상대를 없애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어.”
“지금껏 이토록 빠르게 마교의 움직임을 파악한 적이 있었습니까? 마교는 중원이 그들의 동향을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 기회가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기회가 곧 결과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
“대사께서는 스스로 지니신 힘을 믿지 못하십니까?”
백사준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느리지만 분명 중원도 달라졌습니다. 마교의 침공 이래로 천하무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진 것을 서로 비교하는 정도였습니다만 지금은 그를 통해 자신의 모자람을 깨닫고 더 나은 성취를 얻는 계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백사준은 종남파를 예로 들었다.
“천하무도회가 아니었다면 종남 같은 쭉정이 문파도 아직 구파일방의 일원으로 남아 있었겠지요. 구파일방은 과거의 영화에 갇혀 고인 물로 남은 채 썩어 갔을 것입니다. 허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천하무도회를 통해 꾸준히 옥석을 가려온 결과 중원의 무학은 분명 더 나아졌습니다. 비단 무학만이 아닙니다. 개방의 정보력도 이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지요. 이 모든 게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월이 고개를 저었다.
“일방에서 마교에 대한 경계를 맡아 주시는 것은 늘 감사할 일이지. 내 어찌 그 노고를 모르겠나. 허나 그것만으로는,”
백사준이 지월의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저는 그 모든 것 중에서 대사께서 가장 준비가 되셨다 믿고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대사께서는 이미 중원의 무학에 있어서 끝을 보셨습니다. 원치 않으셔도 대사는 지금 스스로 고인 물이 되어 갑갑하실 겁니다.”
“그걸 일방의 소방주께서 어찌 아시는가?”
“그게 아니라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의 비무행이 이토록 꾸준히 이어질 리 없지 않습니까.”
“허……!”
백사준의 말은 지월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안색이 홱 바뀌는 것은 범광도 마찬가지였다.
백사준의 말은, 무연객의 정체가 사실 지월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지월이 비무행을 시작한 이유를 가장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홀로 끝에 닿은 자의 고독.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는 데서 오는 막막함을 지월은 그렇게나마 지우려 했던 것이다.
담담하던 지월의 표정이 깨어졌다.
“허허…… 이것 참, 딴에는 잘 감추고 다녔다 믿었는데 일방에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니. 그간 이 노쇠한 계인을 가려 준 가발에 면목이 없어지는군.”
잠시 허허로운 바람처럼 웃던 지월이 곧 표정을 회복한 뒤 말했다.
“허나 그건 이 노불자(老佛子)를 너무 가볍게 보았네. 내 어찌 끝을 넘어 보겠다는 욕심 하나로 수많은 강호 동도들의 목숨을 걸겠나.”
부드러운 듯하지만 질책이 서려 있는 말이었다.
백사준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뜻이 되었네.”
지월이 느릿한 손길로 수염을 쓸었다. 시선이 잠시 백사준을 떠나 풍덕포를 찾았다.
“이보게, 거지 친구. 늘그막에 참 고약한 연을 찾았네 그려.”
풍덕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떤 고약한 중놈이 남 멀끔한 제자더러 고약하다 하느냐.”
“사부는 느린데 제자는 남들보다 서너 배는 빠르고자 하니 말년에 고생길이 훤하지 않겠는가. 늙은 거지가 이제는 게으름도 마음대로 못 피우겠어.”
질책을 지나 이제는 칭찬으로 이어진 말에 풍덕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나만 그런가. 이제 땡추 너도 그러게 생겼지.”
“그러니 고약하다 하는 게지.”
허물없이 주고받는 농은 거기에서 멎었다. 풍덕포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럼 그리하자는 게냐? 나야 뼈마디 더 삭기 전에 한 판 일 치르는 것은 쌍수 들고 환영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내 몸뚱이 하나 죽고 말 일이겠느냐. 늙은 목숨, 젊은 목숨 할 것 없이 떼거리로 황천 물 건널지도 모를 일이고…… 네놈이야 명색이 땡추니 살생은 싫다 안 된다 칠색 팔색 하며 내숭도 떨어야 할 테고.”
“으음. 그래야 하나?”
“뭐라는 게냐. 아, 시간 없다. 오죽하면 염불 외기에도 바쁜 땡추를 예까지 오라 했겠냐. 뜸 들이지 말고 후딱 정하자.”
“자네 말대로 우리는 늙어 가는 몸일세.”
지월의 맑은 눈이 백사준과, 이어 범광을 향했다.
강호를 이끌 다음 세대였다. 이 다음 마교의 침공은 저들이 맡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저승 강을 건너야 한다면, 우리가 앞장서서 건너는 게 순리가 아니겠나.”
백사준은 이번이 안 된다면 다음에라도 기어이 강을 건널 것이다.
저들을 위해 앞장서는 것도 괜찮았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징검다리 하나쯤은 놓아줄 수 있을 것이다.
“오냐. 내 생각도 그렇다.”
풍덕포가 고개를 끄덕였고, 백사준은 지월을 향해 절이라도 할 것처럼 깊숙이 목을 숙였다.
“대사의 크신 뜻,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눈이 마음을 대신해서 끓어오르는 중이었다.
그의 투지는 다른 이들에게도 쉽게 옮겨졌다. 풍덕포는 이미 마음을 먹은 지 오래였고, 지월은 그 마음을 단번에 이해했다. 범광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좋아, 좋아. 그럼 다른 놈들은 어떻게 끌어들일지 얘기를 해 보자고. 소림사 땡중들보다 엉덩짝 무거운 놈들이 한둘이라야 말이지. 너하고 내가 한 바퀴 돌며 그 엉덩짝을 발로 차 주면 되겠냐?”
풍덕포가 입맛을 다시며 말을 꺼냈다.
그에 답한 것은 백사준이었다.
“제가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세 쌍의 눈이 백사준을 향했다.
“천하무도회를 최대한 앞당기는 겁니다. 규모를 키워 참가 문파와 각 문파에서 참여하는 자들의 수를 늘리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맹을 세우면 자칫 번거로워질 시간 낭비를 단숨에 줄일 수 있습니다.”
“흐음. 허나 그리될 경우 모두의 의견을 취합하는 데 더욱 직접적인 어려움이 따르지 않겠나?”
“그래서 천하제일기가 필요합니다.”
현 천하제일기의 주인은 지월이었고, 소림이 보관하는 중이었다.
향후 십 년간 천하제일기가 거처를 옮겨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해의 천하제일기를 손에 쥔 자, 다음 천하무도회의 시기와 장소를 정할 수 있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곳을,”
백사준이 한 번 말을 끊었다 이었다. 그 잠시 동안 그를 보는 눈들이 빛을 뿜었다.
“서역으로 정하는 겁니다. 시기는 오 년 뒤가 아닌, 마교의 정확한 거처를 발견하는 그때로.”
“허허…….”
지월이 수염을 쓸며 웃었다.
그 저돌적인 사고를 보면 자신이 이미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에 미친 한 세월. 처음 무인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여겼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뒷물결이 밀려오는 것은 눈 깜짝할 새였다.
강호는 조만간 새 물결로 물갈이가 될 것이다.
마교의 침략에 맞서 천하무도회라는 소극적인 대안밖에 생각해 내지 못하는 늙은 세대는 밀려가고, 수많은 피를 각오하더라도 선제공격을 하겠다는 젊은 세대가 강호의 새 주인이 될 것이다.
지월은 이 흐름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은 결국 밀려나게 될 것이다. 그 전에 뒷물결을 위한 징검다리 하나를 놓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결국 이 몸에게 달려 있다는 소리로군. 천하무도회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것은 백 소방주가 하실 테니.”
“맡겨 주십시오.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사준이 염두에 둔 방법이 어떤 것인지 막 얘기가 나오려던 순간이었다.
풍덕포가 돌연 손을 들어 저 멀리를 가리켰다.
“제자야. 이 사부가 요새 눈이 어두워져 그러는데 지금 저게 우리가 쓰는 신호탄이 맞는 게냐?”
백사준이 풍덕포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방향으로 따지면 좀 전에 떠나온 약전 쪽에서 검은 연기가 빙그르르 돌 듯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사준의 안색이 변했다.
“저것은…….”
풍덕포가 얼굴에서 게으르던 표정을 지웠다.
그가 무른 흙바닥도 아랑곳없이 뭉개고 있던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그래. 맞는가 보구나.”
둥글게 번져 나오는 검은 연기.
개방에서 쓰는 신호탄의 일종으로 그 뜻은 방도의 죽음이었다.
“설마…… 눈치를 챘단 말이냐.”
백사준이 이를 물었다.
약전 근처라면, 그 죽음의 이유는 하나였다.
마교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자들을 감시하라고 붙여 놓았던 제자가 역으로 위치를 들켰을 것이다.
백사준이 말했다.
“저곳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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