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49화 (49/346)

제49화 연심

공공화단이 꿀꺽 목울대를 넘어갔다.

도리가 없었다.

약을 도로 뱉어 낼 입술을, 채희유의 붉은 입술이 막고 있었으므로.

지강백이 약을 삼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채희유는 입술을 떼었다.

“좋은 약이군요. 사형 분께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따라 숨결이 많이 묻어 있는 그녀의 음성은 물기가 많았다. 낮고, 습하고, 비밀을 전하듯 은밀했다.

그래서였을까. 지강백은 그녀를 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그 언젠가 스치듯 보았던 그녀의 알몸이 아예 머리 안쪽에 똬리를 틀 것만 같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지강백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던지 채희유가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때처럼 안 드시려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도……”

끝내 머뭇대는 지강백을 보며 채희유가 속눈썹을 지그시 내렸다.

“그게 아니면…… 혹 제가 닿아 불쾌하신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강백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말하는 채희유가 너무 애처로워 보였던 탓이었다.

힘껏 당겨 품에 안아 달래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다시 미소 지을 때까지 무엇이든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저를 안으려는 지강백을 향해 채희유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몸을 기울였다.

하얀 손이 먼저 지강백의 팔뚝을 감았다. 매끈한 비늘을 가진 짐승처럼 능란하게 감기는 손은 두 번 다시 놓지 않을 것처럼 그를 단단히 붙들었다.

“사형.”

그 손을, 용천휘가 강제로 떼어 냈다.

“정신 차리라니까.”

지강백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용천휘를 마주했다.

오늘따라 용천휘의 표정은 차가웠다. 안개가 낀 듯 몽롱하던 머릿속에 찬물을 들이붓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지강백은 호흡을 다스리며 몸을 뒤로 물렸다.

“밖에 나가서 정신 좀 차리고 오겠다.”

그는 부러 채희유를 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기가 확연히 달랐다. 채희유에게서 나는 단내는 너무 위험했다.

“…….”

혼자가 된 지강백은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방금 전 채희유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었다. 입술은 저 홀로 뜨거웠고, 아직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던 감각을 선사했다.

어디에서도 배운 적은 없었지만 이 감각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안고 싶었어.”

사내가 여인을 품고 싶어 하는 그것의 이름은 연심(戀心)이었다.

그는 조금 전 채희유를 안고 싶었다.

* * *

“네가 그를 품은 마음을 탓하진 않겠다. 삼좌위의 말대로 그것을 파루나의 부정이라고도 여기지 않아.”

지강백이 사라진 자리에 고정된 채희유의 고개를, 용천휘가 턱을 붙들어 돌려세웠다.

“허나 그는 내게 중요한 사람이다. 함부로 접촉하지 마라.”

“…….”

“특히나 지금처럼 네가 너를 제어하지 못할 때라면 위험하지.”

용천휘의 손이 채희유의 목을 타고 내려왔다.

건드릴 듯, 건드리지 않고 내려온 손은 이어서 그녀의 손을 쥐었다.

가느다란 손끝이 바람이라도 맞은 듯 흔들렸다. 용천휘는 그 손을 들어 손목이 보이도록 뒤집었다.

이어서 그가 파란 핏줄이 비치는 흰 손목을 입술로 가져갔다.

입맞춤을 하듯 부드럽게 내려앉은 입술은 거짓이었다.

으득.

“으음…….”

채희유가 눈썹을 웅크리며 어깨를 뒤틀었다.

이빨이 박힌 살점을 타고 선명하다 못해 요사스럽게 보이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피가 흐를수록, 채희유를 감싸고 있던 낯선 분위기도 수그러들었다. 잠시 후 채희유는 완연히 평소의 표정을 되찾았다.

“이제…… 괜찮습니다.”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용천휘가 손목을 놓아 주았다. 그는 더러운 것을 치우듯 피로 얼룩진 입술을 가볍게 닦아냈다.

“괜찮아졌다니 다행이군.”

“……예, 소야. 감사합……”

채희유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꽃처럼 무감하던 눈에 언뜻 물기가 차올랐다.

용천휘는 채희유의 눈물을 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복종 이외의 것은 의미가 없었으므로.

“내 사형에게 약을 먹인 건 잘한 일이야. 앞으로도 기회가 생긴다면 놓치지 말도록.”

“예, 소야.”

채희유가 흘렸던 한 방울의 눈물은 그새 흔적 없이 말라 버렸다.

* * *

밖으로 나온 지강백은 일행이 타고 온 마차를 찾았다.

채희유가 완쾌되면 가던 길을 서둘러야 할 테니 마차를 미리 대기시켜 놓으면 좋을 것이다.

“필 총관이 몰고 간 건가.”

좁아터진 약전 골목은 마차를 댈 만한 곳이 없었다.

지강백은 혹시 몰라 약방의 뒷마당으로 향했다. 뒤편에는 마구간 같은 게 있을지도 몰랐다.

“여긴 없군.”

뒷마당도 비좁긴 마찬가지였다. 마구간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창고가 있었다.

약방답게 온갖 약초들이 들어차 있어야 할 창고는 평소라면 맡아 보지 못할 냄새들이 흘러나왔다.

지강백은 그쯤에서 발길을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

걸음을 붙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강백은 몸을 돌려 다시 창고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꼬집을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

지강백은 창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창고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던 것이다. 열린 문틈으로 약초 냄새가 진하게 흘러나왔고, 그래도 가려지지 않는 다른 냄새가 하나 더 섞여 있었다.

어릴 때부터 청정한 산에서 자란 지강백은 남들보다 후각이 예민했다. 산에서는 어지간해서는 다른 냄새가 날 일이 없었다. 다른 냄새란 곧 무언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약초 냄새에 섞인, 희미한 혈향.

지강백은 휙 몸을 날려 창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런……!”

바닥에 놓인 두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한쪽은 평범한 옷을 입은 노인이었다. 차림새를 보면 아마도 이 약방의 주인일 듯싶었다.

다른 한 구의 시체는 유감스럽게도 그가 아는 자였다.

“개방의 사람이다.”

백사준에게 용천휘의 위치를 알려 주었던 그 거지였다.

지강백은 가까이 다가가 시체를 살폈다.

약방 주인의 시신에는 이렇다 할 상처가 없었다. 표정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자신이 죽는 것도 모르는 채 죽었을 것이다.

반면에 개방도의 시신에는 뚜렷한 상흔이 있었다.

턱 옆에서 목까지 이어진 손자국.

손자국을 따라 피부가 타들어 간 상흔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뚜렷한 손자국은 흉수의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 고스란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단숨에 목을 잡혀 죽은 듯 보였다. 그러나 몹시 고통스러웠던 모양인지 코와 눈에서 피가 흘렀고, 혀는 입 밖으로 길게 나와 있었다.

지강백이 저도 모르게 눈매를 찌푸렸다.

“장법의 일종인 것 같은데 이렇게나 사이한 무공이라니.”

시체를 발견했을 때의 충격, 그가 방금 전까지 멀쩡히 살아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해지는 위화감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누가 이들을 죽였을까.

그것도, 백사준이 대명천교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 주었던 이 시점에서.

그와 연결된 용천휘의 작은 거짓말이 의심의 싹을 틔우려 하던 지금.

어쨌거나 지강백은 그것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백사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시간을 고려해 보면 흉수는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지강백이 막 몸을 돌리는 순간.

슷.

지강백은 시야의 한구석을 언뜻 스쳐 가는 작은 기척을 목도했다.

너무 작고 미미한 기척이라 그것을 본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본 것이 아니라 느낀 것일지도 몰랐다.

‘흉수일까?’

생각에 앞서 몸이 기척을 뒤쫓았다. 지강백이 기척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흉수임이 틀림없어야 할 기척은 그 시점에서 씻은 듯 사라지고 대신 엉뚱한 사람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필목현이었다.

그가 용천휘 못지않게 강호에 대해서는 일절 문외한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 보지 못하셨습니까?”

“예? 누굴 말씀입니까? 저희 도련님 말고요?”

흉수에 대해 설명할 길은 지강백에게도 없었다.

“창고 안에서 시체를 찾았습니다.”

“예에?”

필목현이 깜짝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시체라니요! 대체 누가 누굴……! 아니, 그 전에 왜랍니까?”

“그건 모릅니다. 흉수가 멀리 가지 못했을 테니 저는 일단 그부터 쫓겠습니다.”

필목현이 펄쩍 뛰었다.

“아닛,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람을 둘이나 죽인 흉악범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도련님을 혼자 두고 가시겠다니요! 당연히 곁에 딱 붙어서 지키셔야지요!”

“공교롭게도 시신이 된 사람 중 한 명은 제가 신원을 압니다. 연락을 취해야 합니다.”

“아닛! 그래도 안 됩니다! 흉악범이 언제 돌아와 또 사고를 칠지 누가 압니까!”

“방금 흉수의 기척이 사라졌으니 분명 도주하고 있을 겁니다. 다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겁니다, 라고 필목현을 안심시키려던 순간이었다.

지강백은 이제껏 해 본 적이 없던 거짓말을 할 뻔했다.

“으악! 사형, 살려 줘!”

때를 맞춘 듯 용천휘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아니, 도련니임!”

필목현이 것 보라며 왈칵 핏대를 세우기 전, 지강백은 이미 신형을 솟구치고 있었다.

* * *

“무슨 일이냐!”

쾅!

문짝이 부서질 듯 열리며 지강백이 약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형!”

용천휘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팟! 파밧!

세 자루의 수리검이 지강백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슷, 퍽!

어느샌가 수직으로 들린 목검에 수리검이 꽂혔다. 마치 처음부터 목검을 과녁으로 노린 듯한 모습이었다.

목검의 각도가 비틀리며 그 사이로 지강백의 시선이 드러났다.

수리검을 던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동일한 것은 그들이 잊을 수 없는 흰 머리칼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백발마인, 어쩌면 마교일지도 모를.

그 또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공교로웠다. 맞물리는 의혹들은 이제 싹이 아니라 제대로 뿌리를 내릴 지경이었다.

“아니, 차라리 잘된 건가.”

지강백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보다 먼저 목검이 움직였다.

휙!

목검이 허공을 그었다. 투박한 검신에 박혀 있던 수리검이 일제히 튕겨 나왔다.

타다닷!

지강백의 목검이 그 언젠가 돌을 쳐냈을 때처럼 수리검을 후려쳤다. 수리검이 백발마인들을 노리고 날아가는 동시에 지강백은 지체 없이 앞으로 달렸다.

대천강검에 이어 태을분광검의 모든 초식을 갈무리한 목검은 물처럼 자유롭고 바위처럼 강건했다.

일 수(一 手)였다.

퍼억!

백발마인 하나가 목에 일 검을 맞았다.

깨끗한 한 수였다.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는 데에 아무런 이견이 없을 정도였다.

지강백이 등을 돌리자 백발마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지강백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곧장 다음 상대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사형!”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분명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날 수 없어야 하는 게 맞았던 백발마인은 제 발로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다른 백발마인들이 지강백을 향해 돌아섰다.

아무리 둔한 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서 있는 그 정확한 간격에 의미가 있다는 것은 눈치챌 수 있었다.

“진(陳)……인가?”

슷, 스스스슷.

백발마인들이 지강백을 가운데 놓고 마치 커다란 원을 그리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형, 갇혔잖아. 내가 도와줄게.”

용천휘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려고 했다. 지강백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저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고만 생각했다.

“가까이 오지 마! 너는 채 소저를 지켜!”

스슷. 스스스슷,

회전 속도가 빨라졌다.

진에 대해 알고 있는 바는 적었지만 지강백은 그들의 진이 종남의 그 어떤 진과도 다른 원리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회전하는 진에는 방향이 없었다. 방위가 없었고 축이 없었다. 생문과 사문이 없었다.

오로지 속도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진이 아니라는 소린가?”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이들의 정체가 정말로 대명천교라면 자신이 홀로 온전히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백사준은 그들이 한 번 중원 땅을 밟을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당해 왔다고 했다.

그들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을지, 자신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휙, 휙!

귓가를 스쳐 가던 회전 소리가 점점 또렷해지며 고막을 직접 파고들었다.

지강백은 내력을 끌어올려 오감에 집중시켰다.

틈을 노려야 했다.

어떤 진에도 틈은 있었다. 진이 완벽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을 이루는 것이 사람인 탓이었다.

아무리 오래도록 한 몸처럼 합격술을 연마했다고 해도 한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사소한 계기로도 틈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지강백이 할 일은 그 계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지강백은 목검을 들어 올렸다.

“사형. 사형 혼자서는 안 될 것 같아.”

용천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너무 빠른 회전 상태에서 생겨나는 무형의 벽이 소리를 한 겹 가로막았다. 그래 봤자 지척인 용천휘의 목소리가 웅웅대는 것처럼 왜곡되었다.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용천휘가 괜한 짓을 할까 봐 마음이 초조해졌다.

지강백은 도저히 없을 것 같은 검로를 억지로 만들며 출수했다.

“하지 마, 사형!”

슷!

목검이 움직이며 허공을 휘저었다. 목검의 움직임에 따라 공기의 흐름이 일순 단절되었다가, 변했다.

그게 문제였다.

치잉!

“윽!”

지강백이 갑자기 무릎을 꺾으며 휘청였다.

갑자기 귀로 들려오던 소리가 괴이할 정도로 크게 증폭되었던 것이다. 오감을 활짝 열어 놓고 집중해 있던 터라 그 효과는 더더욱 컸다.

누군가 귀에 칼을 쑤셔 박는 듯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슷, 스스슷!

갑자기 시야 안에 들어오던 모든 것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질서정연한 회전이 아니었다. 천장이, 바닥이, 흰 머리칼의 괴한들이 제각각 회전했다.

하나이던 천장이 두 개로 쪼개져 각자 돌아가더니 두 개가 네 개로, 네 개가 여덟 개로 나뉘어 열여섯 개의 원을 그렸다.

사람의 눈은 두 개가 마땅했다. 괴한들의 눈이 두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났다. 네 개가 여덟 개가 되고, 이어서 서른두 개의 눈을 가진 괴물들이 눈앞을 둥둥 떠다녔다.

돌아가는 속도 또한 제멋대로였다. 앞에서 돌고 뒤에서 돌고, 제 머릿속에서도 돌아가는 듯했다.

“으윽!”

지강백은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한껏 휘저어진 머릿속은 곤죽이 된 듯했다.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사 혀 엉

사 아 혀 어 어 엉

사 아 아 혀 어 어 어 엉

끈질기게 들려오는 용천휘의 목소리가 아니라면 이대로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큿!”

지강백은 제 입술을 씹었다.

살갗이 찢기며 피가 번졌다. 엉망으로 쪼개져 회전하던 시야가 잠깐 동안 멈췄다.

지강백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날렸다.

“하압!”

구 성의 태을신공을 모두 쏟아부은 한 수가 펼쳐졌다. 내리꽂히는 폭포처럼 곧장 떨어지는 검이 하얀 머리통을 수직으로 찍었다.

퍼억!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다른 모든 잡음을 지웠다.

이어서 눈앞이 붉어졌다. 피를 모두 뒤집어쓴 것이다.

자책할 사이도 없이, 지강백이 몸을 돌렸다. 다른 괴한을 향해서였다.

“……!”

괴한은 지강백을 피하거나 맞서는 대신 그 자리에 멈춰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자 멈췄던 회전이 시작되었다. 두 개의 눈은 삽시간에 숫자를 불려 나갔다.

사 혀 엉!

지강백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미 그려진 검로대로 손을 휘둘렀다.

퍼억!

알 수 있었다. 이번의 한 수도 성공했다는 것을.

그러나,

“사형!”

용천휘의 다급한 목소리에 놀라 눈을 떴을 때,

“……망할!”

피가 섞여 둔탁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살아남은 백발마인이 채희유를 둘러업고 달아나는 뒷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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