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천하무도회의 이면(裏面)
“으음…… 어디서부터 말을 하면 좋을지.”
휘익.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경쾌했다.
지강백과 백사준은 독귀의 약방을 나와 약전으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채희유에게 공공화단을 전해 주기 위해서 속도를 높였다.
“아직 드러내서는 안 될 이야기 같긴 하오만 소협은 이미 흰 머리칼에 대해 알고 있으니 숨길 수도 없겠군. 편히 얘기하겠소.”
“부탁드립니다.”
백사준은 지강백이 별로 어렵지 않게 자신과 보폭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입술을 실그러뜨리고 있는 것은 숨이 차서가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는 탓이었다.
“대명천교. 사부님과 내가 생각하는 흰 머리칼의 정체는 그렇소.”
“대명천교……라 하셨습니까?”
“그렇소. 소협의 표정을 보니 그게 뭔지 통 모르는 모양이구려.”
“부끄럽게도 견식이 짧습니다.”
“그게 어찌 부끄러운 일이오. 누구나 잘 모르는 게 있는 법인데. 그런데 대명천교를 모른다니 그건 좀 너무하군. 혹 마교라 하면 아시겠소?”
백사준의 말에 의하면 중원인들이 흔히 마교라 부르는 곳의 정식 명칭이 대명천교라 했다.
“중원에서는 쓰지 않는 괴이쩍은 사술을 쓰는 곳이지. 그 사술이라는 게 폭이 넓다오. 예를 들어 무공에 사술을 더하면, 중원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괴상한 초식이 나오는 거요. 약과 더해지면 생전 처음 보는 독이 탄생하는 식이지.”
그 외에는 대명천교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었다.
중원에서는 그곳의 위치조차 몰랐다. 존재하되 존재를 모른다는 의미로 그저 세외(世外)에 있다고만 했다.
대명천교의 존재감이 드러날 때는 오직 그들이 스스로 중원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웃길 노릇이지. 저들 내킬 때 나타나 저들 좋을 대로 중원 땅을 헤집어 놓다니.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오. 그리고 그러고 다니는 이유조차 모르고 있소. 그게 아주 환장할 노릇이라오.”
그러나 대명천교가 중원에 나타나는 것에는, 묘한 주기가 있다고 했다.
“몇 대에 걸쳐 골머리 썩혀 가며 알아낸 것이지. 그 시기는 대략 오십 년에서 팔십 년 사이. 아무리 길어도 백 년을 넘기지 않았소. 그 이유가 무어라 생각하시오?”
지강백은 잠시 생각을 집중했다.
오십 년에서 팔십 년. 길어도 백 년을 넘기지 않는 시기라면 떠오르는 것은 하나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사람의 일생과 비슷한 주기로군요.”
“허?”
백사준이 입을 벌렸다. 그러느라 속도가 잠시 늦춰지기까지 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 어찌 그리 쉽게 맞췄나 싶어 말이오. 이 몸은 진짜 그걸 생각해 내느라 새치가 한 움큼씩 늘어났는데.”
“멀리 떨어진 자에게는 오히려 쉬이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저는 대명천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오히려 편히 생각을 해 냈을 겁니다.”
“으음…… 뭐, 그런 것도 없잖아 있겠지. 여하간 그 주기를 따져 보니 사람이 태어나 죽는 시기와 얼추 비슷하지 않겠소. 그러다 보니 짐작이 가더군. 대명천교가 한 세대라는 주기를 가지고 중원에 나타나는 이유. 아마 새로운 교주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서일 거요.”
지강백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그래서 천하무도회도 만들어진 게요.”
“천하무도회가요?”
“암. 아니라면 그 바쁘신 양반들이 왜 쓸데없이 모여서 무공 자랑이나 하고 앉았겠소? 표면상으로는 그래 보여도 결국은 대명천교가 다시 나타날 때를 다 같이 대비하자는 게지.”
대명천교는 중원을 집어삼키려 들지 않았다. 한꺼번에 치우려 들지도, 아예 끝을 내려고 들지도 않았다.
한 번씩 나타나 저들 좋을 대로 쑥대밭을 만들고 사라질 뿐이었다.
“아니, 중원이 무슨 저들 곳간이라도 되오? 필요할 때만 와서 야금야금 빼먹고 사라지게? 뭐, 놈들이 워낙 사이하고 괴악해 뿌리까지 싹 다 뽑아내는 것은 지금 당장 어렵다고 칩시다. 그래도 저들 내킬 때 이용해 먹는 곳간 취급은 사양해야 되지 않겠냐는 말이오.”
오 년에 한 차례씩 천하무도회를 빌미로 서로의 무공을 재어 보는 것은 대명천교라는 진짜 적을 앞두고 서로를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개방은 구파일방 중 제자들이 가장 널리 퍼진 곳이니 대명천교의 동향을 감시하는 일을 꾸준히 맡아 왔소. 워낙 귀신같은 놈들이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는 몰라도, 일단 나타날 조짐이 보이면 그것이라도 알고 대비를 해야지.”
“그 조짐이라는 게 머리칼을 희게 만드는 약이라는 겁니까.”
“확신은 못 했지. 놈들이 쓰는 사술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그러나 이제껏 중원에서 본 적이 없는 것이라면 의심이 갈 만도 하지.”
개방의 눈은 어디에나 있었다.
이제껏 대명천교를 염두에 두고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면, 그 수많은 제자들 중 누군가가 이질적인 흰 머리칼의 무인들을 섬서 인근에서 목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제자들의 보고가 전해지자 소방주인 백사준이 나서서 그들의 존재를 뒤쫓기에 이르렀다.
“이제 독공의 말까지 더해졌으니 대명천교라 확정을 지어도 무방할 듯하오.”
“그렇다면 조만간 대명천교의 중원 침략이 있을 것이라 보아야 하는 겁니까?”
“아마도.”
백사준이 이를 질근 물었다.
“지난번 침략이 정확히 사십삼 년 전이었소. 이번에는 꽤 빠른 편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슬슬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된 거요.”
지강백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제가 보았다는 그들이 혹…… 백발마인이라 불리는 파락호일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백사준은 지강백의 말 속에 숨겨진 의미를 한 번에 눈치챘다.
“소협의 사제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시는 모양이로군. 아니 그렇소?”
“……무공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제입니다. 만일 사제가 거짓말을 했다고 하면, 그들이 모두 시체가 된 까닭을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사제의 말대로 지나가던 누군가가 도와주는 수밖에 없겠군.”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을 겁니다.”
지강백이 용천휘를 의심하는 이유는 사실 단 하나였다.
손바닥의 상처.
지강백은 고개를 털며 막 싹을 틔우려 하는 의심의 씨앗도 털어 냈다.
미리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직접 물어보고 답을 듣고 난 뒤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용천휘가 아니라 때를 잘 맞춘 의문의 고수가 일부러 대명천교의 정체를 감췄을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은 한시바삐 사제를 찾아야겠군요.”
“내가 봐도 그렇소.”
둘은 용천휘와 헤어졌던 약전의 입구로 돌아왔다.
여기서부터 일행을 찾아 채희유에게 약을 건네는 것은 지강백의 몫이었다.
지강백은 지금껏 동행해 준 백사준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베풀어 주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백 소방주님.”
“감사할 것 없다니 자꾸 그러시네. 그리 따지면 나도 소협께 얻은 게 많지.”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저는 여기서 이만,”
백사준이 사람 좋게 웃으며 지강백의 말을 끊었다.
“예서 혼자 움직이시게?”
“귀 방의 일도 총망하실 테니 더는 제 일로 번거롭게 해드리지 않는 게 도리일 줄 압니다.”
“이래 봬도 꽤 넓은 곳이라. 혼자 움직이는 것은 아무래도 무모하지. 잠시 기다려 보시오. 내 기별을 넣어 놨으니까.”
“예?”
백사준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웬 거지 하나가 다가왔다.
몸에 걸친 누더기며 머리에 뒤집어쓴 구멍 뚫린 망태와 이가 빠진 밥그릇 모두 흠 잡을 데 없는 거지였는데 눈빛이 기이하게 맑았다.
“오른쪽, 둘.”
“그래. 수고했다.”
백사준이 밥그릇에 동전을 몇 개 넣어 주었다.
거지는 밥그릇 가장자리를 나무 수저로 탁탁 두들기며 “복 받으십쇼!” 라고 외친 뒤 사라졌다.
“개방의 제자분이십니까?”
“그렇지. 갑시다.”
백사준이 훌쩍 앞서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그가 지강백을 이끈 곳은 약전의 입구에서 오른쪽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 보이는 두 번째 약방이었다.
“소협의 사제는 이곳에 있다 하는군. 들어가 보시오.”
또 한 번의 도움을 받는 셈이었다.
지강백이 정중한 포권으로 인사를 했다.
“무어라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이 도움을 갚을 기회가 생기길 바라겠습니다.”
“에이, 그런 소리 말라 하지 않았소. 나도 소협께 얻은 게 많다니까.”
백사준이 싱긋 웃으며 마주 포권을 취했다.
“그럼 다음 인연을 기다리겠소. 무운을.”
“예, 무운을.”
인사를 마친 지강백이 약방으로 들어갔다.
주변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방금 전 가 버렸던 거지가 어느샌가 슬그머니 나타나 백사준의 옆에 섰다.
“방주께서는 자리에 도착하셨습니다.”
“아, 그래? 때가 딱 맞았군.”
백사준이 지강백이 사라진 곳을 향해 힐긋 시선을 던졌다.
“저자들을 잘 감시해라. 분명 뭔가가 있어. 내 알기로 마교 놈들은 결코 개인적으로 누굴 노린 적이 없거든. 둘 중의 하나가 마교와 끈이 닿아 있을 것이다. 사소한 것도 결코 놓치지 말도록.”
“예, 소방주님.”
“하는 김에 저들의 정체도 좀 알아봐. 초식이 정순한 것을 보면 그만한 연륜이 있는 사문이라는 소리일 텐데…… 왜 몰라보겠지?”
백사준의 말에 이어진 답은 이랬다.
“어쩌면 알아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뭐야? 어째서?”
“방금 호영장에서 들려온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종남이 움직인다고.”
“뭐? 종남?”
백사준이 헛숨을 들이켰다.
“종남? 내가 아는 그 종남파? 지난 이십 년 동안 천하무도회에 발도 못 붙이고 있는 그 종남파라는 소리냐?”
“종남의 두 제자라 했습니다.”
“이것 참.”
백사준이 불식간에 허를 찔린 사람처럼 제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종남파라…… 마교와 종남파라?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그러나 혼잣말을 하는 순간에도 백사준의 눈은 재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좋아. 뭐가 어찌 됐든 지금 알아낸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얘기가 나오겠군. 어서 사부님을 뵈어야겠다. 안내해.”
“예, 소방주님.”
개방의 두 제자가 소리 없이 자리를 뜨기 전, 백사준의 눈이 힐긋 지강백이 있을 약방을 향했다.
그의 눈이 느리게 꿈지럭대며 의미심장한 말을 내던졌다.
“그러게 말했잖소. 지금으로선 내가 소협에게 얻은 것이 더 많다고.”
그리고 백사준이 사라졌다.
* * *
“채 소저!”
약방으로 들어선 지강백은 채희유를 찾았다.
비좁고 어두운 약방 안쪽에는 작은 방이 하나 있었고, 고맙게도 문틈으로 용천휘의 더럽게도 비싼 가죽신이 힐긋 보였다.
지강백은 고민할 것도 없이 방으로 들어섰다.
“채 소저는 좀 어때? 설련실 대신으로…….”
용천휘를 향해 물었으나 그 물음은 소용이 없었다.
창문이 없는 방 안쪽에 놓인 작은 침상 위에 채희유가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오셨습니까.”
“…….”
지강백은 할 말을 잃었다.
채희유가, 채희유가 아닌 탓이었다.
입술이 붉었다. 머리칼이 검었다.
피부는 희었고 눈매는 그윽했다.
너무 맑던, 흠 없던 눈꽃 같은 그녀가 아니었다.
숨이 막혔다.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 하나, 입술을 열어 내뿜는 숨결 한 조각도 달랐다.
세상에서 가장 지독하고 화사한 독초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붉은 입술이 열려 숨을 뿜었다.
채희유의 몸에서 짙은 체취가 흘렀다.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달콤한 냄새였다.
저도 모르게 취해서 걸음이 헝클어질 것 같았다.
참지 못하고 다가가 옷깃을 엉망으로 끌어내린 다음 맨살에 코를 묻고 싶어질 것 같았다.
“왜……,”
지강백이 입술을 달싹이자 채희유가 눈을 치켜떴다.
평소의 까만 눈이 산공독 같았다면 오늘 저 눈은 위험천만한 최음향이라도 되는 듯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설련실을 대신해 다른 약을 구해 왔습니다.
효과를 보증한다 했으니 한번 드셔 보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그런 말을 해야 했던 지강백은 그저 마른침을 삼켰다.
채희유가 그를 향해 붉은 입술을 살짝 늘여 웃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요염한 꽃이 제 속잎을 살그머니 벌릴 때의 느낌처럼.
“그럼, 이리 가까이.”
하얀 손가락 하나가 뻗어와 그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오라고. 이리 와서 나를 안으라고.
“어서.”
“…….”
지강백이 채희유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눈빛이 몽롱했다. 취한 듯 표정이 어지러웠다.
그가 막 손을 내밀어 채희유의 옷자락을 쥐려던 순간이었다.
“사형.”
곁으로 다가온 용천휘가 지강백의 손을 붙들었다.
“…….”
지강백은 터무니없이 붙들린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불쑥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용천휘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깜박했어. 사형이 이런 게 처음이라는 걸. 내성이 전혀 없을 법도 하지.”
“처음……이라니?”
“일단 나가자. 채 약사는 괜찮아, 이제.”
“아,”
지강백이 그때서야 품 안을 더듬었다. 독귀가 내준 공공화단이 거기에 있었다.
“이것을,”
“이게 뭔데?”
“설련실 대신으로 구한 거다. 효력은 비슷하다 했어.”
용천휘가 그를 보며 잠시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사형은 이래서 좋아. 생각한 그대로의 인물이라는 게. 이젠 좀 감동스럽기까지 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일단 구해 온 거니 그래도 채 소저께 드려야지.”
“글쎄…… 지금은 괜찮아졌는데 소용없지 않을까?”
불쑥, 채희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청석유의 냄새가 나는군요.”
“예? 아, 그렇군요. 공청석유가 세 방울 들어갔다 했습니다.”
채희유의 눈이 반짝였다. 지강백은 또 그렇게 아찔한 감각을 느꼈다.
“이리 주시겠습니까?”
채희유가 지강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지강백이 채희유에게 다가가 공공화단을 건넸다.
“그럼.”
약을 감싼 기름종이를 벗겨 낸 채희유가 입을 열어 그것을 물었다.
지강백은 붉은 꽃 같은 입술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읏!”
채희유의 팔이 지강백의 목을 휘감았다.
입술이 맞닿는다 싶자 공공화단이 입 안으로 넘어왔다.
알싸하고 청량한 공공화단의 맛이 혀로 느껴지는 동시에 채희유로부터 예의 그 위험할 정도로 단 내음이 풍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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