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사문의 법도
“멀쩡한 음식을 해하다니. 이건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오!”
백의 사내가 비장한 표정으로 용천휘를 노려보았다.
강호일자무식 사제는 언제나 그렇듯, 조금의 위기의식도 없었다.
“용납할 수 없으면 어쩔 건데?”
“선택지를 드리지.”
백의 사내가 손가락 두 개를 펴 들었다.
“첫째, 개 잡는 몽둥이로 개처럼 맞든가. 둘째, 그게 싫다면 새로 백육혈장을 한 접시 시켜 주든가.”
그러면서 백의 사내는 매우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찬 낡은 몽둥이를 드러나게 했다.
“아,”
이제야 지강백은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언젠가 사부님이 강호의 절대 세력인 구파일방에 대해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다.
그 일 방은 개방이라 일컬으며 천하의 거지들이 모인 곳이라 했다.
개방의 절기는 타구봉법이라 했는데 생업상 늘 골목길의 개와 싸워야 하는 거지들의 애환을 무공에 담은 것으로, 개 잡는 몽둥이인 타구봉은 개방방주의 신물이었다.
여기서 지강백은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하려던 것인지 깨달았다.
상대가 개방의 인물이라는 것을 몰라본 것은 둘째 치고, 그런 자와 손을 섞으려고 하다니.
사제의 몸종 노릇까지 해 가며 사문과 무공을 감추라던 사부의 명을 보기 좋게 어길 뻔했던 것이다.
‘이런. 어떻게든 이 자리를 피해야겠는데.’
지강백은 이쯤에서 용천휘를 말리려 들었다.
“두 번째로 하자. 다른 손님들도 있는 반포에서 시비라니. 좋지 못한 생각이었다.”
용천휘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왜 일면식도 없는 거지에게 밥을 사 줘야 하지?”
지강백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첫째, 아니면 네가 지금 개처럼 맞게 생겼으니까. 둘째, 돈도 많은 놈이 인정 좀 베풀고 살아라.”
“쯧쯧. 이런 한심한 가난뱅이 같으니.”
차르륵, 탁!
용천휘가 부채를 소리 나게 접었다.
“인정도 그럴 가치가 있을 때 베푸는 거야. 그래야 나중에 내게 도움이 되지. 그런 게 아니라면 쓸데없이 돈을 버리는 거라고.”
“평소에도 쓸데없는 돈 잘 버리잖아.”
“틀려. 그건 내 취미를 위해 쓰는 거니까. 버리는 게 아니라고.”
“이참에 그 취미에 적선도 포함시켜라.”
“취미는 즐겁자고 하는 짓이야. 내 피 같은 돈을 버리면서 과연 그게 즐겁겠어?”
눈치도 더럽게 없는 사제를 쳐다보는 지강백의 눈초리가 점점 험악해졌다.
“그럼 개처럼 맞든가. 나는 나서지 않겠다.”
“어처구니가 없군. 몸종 주제에 주인님이 억울한 변을 당하는 걸 구경만 하고 있겠다니.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맡은 일을 열심히 해야지.”
백의 사내가 기회를 틈 타 끼어들었다.
“공연히 맞느니 이 몸에게 새 요리를 시켜 주는 게 어떻겠소? 옆에서 듣자 하니 돈도 많으시다면서.”
용천휘와 지강백이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게 된 백의 사내가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을 했다.
“이 몸은 때마침 공복이라. 헛되이 힘을 쓸 필요가 없으면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니겠소.”
용천휘가 코웃음을 쳤다.
“서로에게 좋긴. 새 밥 얻어먹는 거지나 좋은 일이겠지.”
“허허. 편히 갈 길을 자꾸만 험하게 가려 하시는군. 정녕 매 맛을 보고 싶소이까?”
“칼자루 쥔 게 어느 쪽인지 꼭 찔려 봐야 아나. 날 아무리 두들겨 패도 새 밥이 거저 나오진 않아. 오히려 공복감만 더 심해지겠지.”
“거 자꾸 아픈 데를…… 후,”
백의 사내가 돌연 한숨을 쉬었다.
“비록 동냥질은 질색이지만 그래도 본분은 거지인지라. 엄연히 강도와는 다르니 안 준다는 밥을 억지로 빼앗아 먹을 수도 없고. 하아, 통재라. 사문의 법도는 왜 이리 엄격하단 말인가.”
그 말에 불쑥 동질감이 솟구쳤다.
사문의 법도를 논할 것 같으면 종남파의 일대제자인 그가 할 말이 없을 리 없었다.
잘은 모르지만 개방도 지엄한 법도를 통해 제자들을 다스리는 모양이었다.
“허나 거지가 제 돈으로 밥을 사 먹을 수도 없는 노릇.”
백의 사내가 타구봉을 불끈 움켜쥐고는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적선하시오. 나는 저 백육혈장을 꼭 먹어 보고 싶단 말이오. 저놈이 그리 맛있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개봉 땅에서 달려올 동안 흘린 침이 벌써 강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라. 거, 동정심이 마구 샘솟지 않소?”
지강백은 말할 수 있었다. 자고로 동정심은 멀쩡한 사람한테 생기는 것이라고. 유감스럽게도 용천휘는 결코 멀쩡하지 못한 인간이라고.
“상인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게 동정심이지. 그리고 가친께서 말하길 이 몸은 천하제일의 상인이 될 인성을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다 하셨어.”
그래, 저런 인간이었다.
“상인이라면 인성뿐 아니라 안목이란 것도 갖추셔야지.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괜히 있겠소? 한 번의 적선이 어떤 보은으로 돌아올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오.”
“거지가 보은은 무슨.”
용천휘가 두 번째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백의 사내가 이를 질근 물더니 손가락 새로 타구봉을 현란하게 굴렸다.
무공을 아는 자라 하면 그 동작 속에 숨겨진 초식의 현묘함에 감탄할 것이고, 무공을 모르는 자가 보아도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싶을 것이다.
“거지라고 다 같은 거지는 아니오. 이 몸은 개방의 소방주로 내 신분은 이 타구봉이 증명할 것이오.”
용천휘는 감탄하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개방이 뭔데?”
백의 사내가 당황했다.
“개……방을 모르다니?”
“내가 알아야 해?”
“아니, 그게…… 그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내가 왜?”
“그래야 이 몸에게 밥 한 끼를 사는 게 그저 적선에서 그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테고…… 으음, 또…… 아니, 빌어먹을. 대체 내가 왜 이딴 구차한 변명을 해야 하는 거지? 이 몸은 개방의 소방주라니까!”
결국 노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이 타구봉 하나로! 세상에 못 때려잡을 개가 없다는 개방의 소방준데! 내 명호가 그래서 일봉만적(一棒滿寂)인 것을! 아, 그깟 밥 한 그릇! 내가 갚는다고!”
“그러니까 거지가 무슨 수로?”
용천휘의 시큰둥한 대꾸에 참다못한 개방의 소방주 일봉만적, 본명 백사준이 결국 타구봉을 휘두를까 고민한 그 순간에.
때를 맞춘 듯, 백사준의 가치를 증명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아니, 이런! 채 약사!”
필목현의 다급한 목소리에 모두 그쪽을 돌아보았다.
채희유가 탁자 위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가늘게 꺾인 고개가 힘겨워 보였다.
“채 소저!”
지강백이 용천휘를 밀치고 달려갔다.
평소에도 흰 얼굴이 지금은 핏기 하나 없이 질려서 식은땀마저 흐르고 있었다.
“왜 이러는 겁니까?”
“아니, 저 그게……”
필목현이 난감한 듯 눈을 끔벅였다.
“저로서도 잘…… 어흠흠, 약사는 제가 아니라…….”
“며칠 내내 잘 못 먹었잖아. 어디 배탈이라도 난 게 아냐?”
용천휘가 등 뒤에서 툭 끼어들었다.
그 전에 필목현과 그가 빠르게 눈짓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지강백은 알지 못했다.
“배탈이라고? 채 소저가?”
“음. 원래 자기 아픈 건 의원도 못 고친다는 말이 있잖아. 약을 잘 아는 것과 자기 몸을 잘 아는 건 다른 일인가 보지.”
지강백이 쓰러진 채희유를 안아 들었다.
축 늘어진 몸이 아무 힘도 없이 안겨 오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게가 너무 가벼워 또 한 번 놀랐다.
가는 손목을 쥐어 맥을 짚어 보았다. 맥은 새소리처럼 작고 가냘팠다.
“일단 의원에게 가야겠군. 제가 옮길 테니 필 총관께서는 마차를 준비해 주시겠습니까?”
필목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야겠지요.”
용천휘가 물었다.
“잠깐. 아무 의원한테나 데려가도 되겠어? 돌팔이면 어쩌려고.”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잖아.”
여기서 백사준의 도움을 받을 일이 생겨났다.
“용한 의원을 찾는 일이라! 그건 또 이 몸이 도와 드릴 수 있지! 명색이 개방의 소방주가 그깟 길 찾는 일을 못 한대서야 말이 되겠소!”
그가 반색을 하며 달려들었다.
지강백이 채희유를 안은 채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길 안내를 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오! 그런데 그 전에,”
지강백은 그가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봐.”
지강백이 부른 것은 용천휘였다.
용천휘가 턱을 까닥하자 지강백이 말했다.
“열 접시.”
“……뭐?”
“백육혈장. 미리 선금으로 치러 둬. 언제라도 와서 드실 수 있게.”
“내가 왜 그런,”
“채 소저는 네 약사다.”
“……젠장.”
용천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매를 뒤져 은덩이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백사준이 호탕하게 웃으며 지강백의 어깨를 두들겼다.
“아아, 이쪽의 소협은 매우 화통하시군. 분명 대성하시겠소. 아주 크게 될 인물로 보인다오. 어쨌거나 길이 급하니 서두르시겠소?”
“예, 서둘러 주십시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짧은 시간 새에 채희유가 정신을 차렸다.
“제…… 그……”
“채 소저! 정신이 드십니까?”
“그…… 아, 아니……”
기운을 잃은 흰 손이 지강백의 옷깃을 붙들었다.
지강백은 고개를 숙여 채희유의 입가에 귀를 갖다 댔다. 떨리는 작은 음성이 진동이 되어 귓가를 어지럽혔다.
“제 벼…… 병은 제가 알…… 의원이 아니라…… 야, 약이 필요…… 약방으로 가 주…… 셔야……”
간신히 쥐어짜는 힘겨운 말이었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약방으로 가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백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약전이 있지. 그리로 데려가겠소.”
“잘 됐군요.”
반포를 나선 지강백 일행이 마차에 올랐다. 백사준은 길 안내를 위해 마부석에 앉았다.
지강백은 마차에 올라서도 채희유를 놓지 못했다. 그녀의 가는 몸이 부서질세라 마음껏 꽉 붙들지도 못하는 마음은 가시밭을 홀로 나뒹구는 듯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무언가를 꾹 씹고 있는 듯한 지강백의 음성이 채희유의 귓가에 닿아 부서졌다.
채희유가 그 말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길고 가는 속눈썹이 눈 밑에 작은 응달을 만들었다. 지강백은 그 그림자조차 서늘할 듯하여 마음이 타들어 갔다.
“조금만.”
정신을 잃은 채희유의 몸에서는 조금씩, 젖은 풀잎에서 날 것 같은 축축한 비린내가 흘러나왔다.
* * *
지강백 일행은 무사히 약전에 도착했다.
백사준이 안내한 약전은 제법 규모가 컸고, 그만큼 사고파는 약의 숫자도 한 사람이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채희유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 사형. 들었지? 사형은 그쪽 거지와 함께 저 방향으로 가서 설련실(雪蓮實)을 구해 와. 나는 필 총관과 이쪽을 둘러볼게.”
채희유가 뭐라고 달싹이자 용천휘는 그 말을 용케도 알아들었다. 그녀가 필요하다고 했던 게 설련실인 모양이었다.
백사준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아니, 설련실이라니. 대체 그 희귀한 걸 구해 오란 말을 어찌 그리 쉽게 하시오?”
표정을 보면 설련실이 대체 어떤 물건인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만큼 구하기 어렵다는 뜻이리라.
“그렇게 구하기 어렵습니까?”
“물론이지. 여기 약전이 제법 크다고는 하나 그게 꼭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오.”
용천휘가 물었다.
“없다고는? 단연코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 건가?”
“음? 아니, 그게 또 꼭 그렇다고는…….”
“그럼 됐어. 희귀하다는 말은 돈이 있으면 어떻게든 구할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 일단 찾기나 해. 이 몸에게 돈은 문제가 안 되니까.”
그렇게 나오니 백사준도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뭐, 기왕 돕기로 했으니 최선을 다해 보겠소.”
지강백은 설련실이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도 몰랐지만 개방의 소방주가 돕는다니 한시름을 덜었다.
“그래, 알았다. 하지만 약을 구할 동안 채 소저를 마차에 혼자 놔둘 수는 없어.”
“필 총관이 업으면 돼. 사형은 걱정할 것 없어.”
“업는 거라면 내가,”
“됐어. 내 약사가 인간미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다지만 말이야, 그래도 혼기 찬 여인이라고. 외간 남자가 업고 다니면 본인에게도 좀 그렇지 않겠어? 필 총관은 부친뻘에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니 모양새가 훨씬 괜찮지. 물론 더 편하기도 할 테고.”
“……내가 불편하다고?”
지강백의 눈초리가 저도 모르게 사나워졌다.
용천휘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은 알았다. 채희유와 자신은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것도, 자신은 외간 남자일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말에 마음이 날카로워졌다. 지강백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이름을 몰랐다.
용천휘는 모르는 척 그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서 설련실이나 찾아봐. 뭘 미적거려.”
“……그래.”
지강백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갑시다. 어서 보은을 해야 이 몸도 떳떳하게 허기를 채우지 않겠소.”
그렇게 지강백과 백사준이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 * *
“가지가지 하는군. 파루나가 제 몸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다니.”
지강백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였다.
필목현의 언짢은 질책에 채희유가 비틀대는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삼 좌위.”
“그쯤 해 둬.”
용천휘가 필목현을 말렸다.
채희유는 여전히 제 힘으로 몸을 가누기 힘겨워 보였으나, 입술을 물어뜯을지언정 또다시 의식을 잃으려 들지 않았다.
“가서 파루나가 먹을 독약이나 긁어모으자고. 내 사형이 정말로 설련실을 구해오기 전에. 계절이 계절이니 당연히 무리긴 하겠지만…… 하지만 사형이 한다면 정말 하는 인간이라는 게 이럴 때는 또 무섭단 말이야.”
“……감사합니다, 소야.”
용천휘가 한 팔을 들었다.
그 의미를 몰라 채희유가 보고 있자 용천휘는 직접 채희유를 끌어다 제 몸에 기대게 했다. 옷감 밑으로 체온이 닿는 순간 채희유는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제대로 설 기운도 없는 주제에 뻗대지 마. 평소처럼 네 멋대로 하고 싶거든 어서 독이나 보충해. 이런 시골 약전에 쓸 만한 독이 있는지는 미지수겠지만.”
“……예, 소야.”
채희유가 결국 체념한 듯 눈매를 내렸다.
문득 서글퍼지는 눈가의 작은 응달은 어느 순간 깊은 우물이 되었다.
사내는 모를, 여심(女心)이라는 이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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