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44화 (44/346)

제44화 백육혈장(白肉血腸) 한 점의 사연

“어이, 몸종아. 이제 슬슬 시장하지 않느냐?”

호영장을 나선 이래로 용천휘는 어딘지 모르게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지강백은 남이 몰아 주는 마차에서 편하게 앉아 갈 수 있었다.

몸이 편해지자 자연 생각이 늘었다.

지강백은 좀 전에 보았던 두 고수의 대결을 머릿속에서 되짚었다.

무연객에게 말한 대로 배운 것은 없었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보았다. 그것을 온전히 깨닫기 위해 생각을 골몰하다 보니 다른 것들을 잊었다.

지강백은 내내 눈을 피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채희유가 지금은 고개를 돌려 저를 가만 응시하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용천휘의 말은 그러던 중 들려온 것이었다.

“아, 벌써 식사 때가 되었나?”

지강백이 주의를 돌리자 채희유의 말 없는 시선은 곧 사라졌다.

“되고도 한참 전에 지났지. 이 몸은 시장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대체 몸종이 돼서 주인님 식사 때도 제대로 못 챙…….”

“그럼 반포(飯鋪: 식당)를 찾아보지 그랬어. 채 소저도 시장하셨습니까?”

지강백이 용천휘의 말을 뚝 끊으며 채희유를 보았다. 채희유는 고개를 돌린 채 작게 답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용천휘가 기분 나쁜 듯 부채 끝으로 지강백을 쿡 찔렀다. 물론 지강백이 돌아보지도 않은 채 훌쩍 피하는 바람에 헛된 시도에 그치긴 했지만.

“이봐, 사형. 사람이 말하는데 끊지 마.”

“사람 말이 아니라 개가 하는 말 같던데.”

“뭐야, 그럼. 이 몸더러 알아서 식사 때를 챙기란 말이야?”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는 소리도 못 들어봤나.”

“그런 건 돈 주고 시키면 되는 거 아니었어?”

그래서 용천휘의 말은 또 무시당했다.

“혹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지강백이 묻자 채희유가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시라 말씀드렸습니다.”

“예,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신경 쓰이니까요. 딱히 가리는 음식이 없다는 얘기로 알아듣겠습니다.”

말을 마친 지강백은 훌쩍 마차 문을 열었다.

“어이, 사형. 뭐 하는 짓이야?”

“괜찮은 반포를 찾으러.”

“어, 그래. 애써 봐.”

지강백은 대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 너 따위를 위해서 찾는 게 아냐, 라는 말을 대신했다.

잠시 후 그가 달리는 마차에서 가볍게 몸을 날렸다.

* * *

“흐음…….”

지강백이 일행을 안내한 곳은 저잣거리 한구석의 자그마한 식당이었다.

문턱이 반들반들 닳아 있는 게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는 뜻이었다.

길에서 본 몇 사람에게 물어도 한결같이 이 근방에서는 이 식당의 음식 맛이 가장 좋다고 답을 해 주었다.

그렇게 물어물어 데려온 식당이었는데, 용천휘는 팔짱을 끼고 앉아 내온 음식을 가만히 쳐다만 보는 중이었다.

그가 그러고 있자니 자연 채희유나 필목현도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그만 쳐다보고 먹어라.”

지강백이 한마디 했다.

용천휘는 젓가락을 드는 대신 부채질을 했다.

“잘도 먹네. 이런 걸.”

그가 턱 끝으로 가리키는 것은 백육혈장이라는 요리였다.

백육혈장은 신선한 선지에 양념을 더해 돼지 창자를 채우고 그것을 묶은 다음 배추와 함께 찐 것으로, 예로부터 부엌신께 바치는 요리라고 할 정도로 별미였다.

“먹어 본 적 없나?”

“유감스럽게도.”

“먹어 봐. 맛있을 거다. 다들 잘한다고 하더니, 이 집은 특히 잘하는 것 같은데.”

“설마. 사람들이 사형한테 사기 친 거 아냐?”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재미 삼아 그럴 수도 있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너같이 삐뚤어졌을 거라 착각하지 마라.”

지강백은 용천휘 앞에 놓인 접시를 홱 빼앗아 들었다.

“입맛이 없으면 권하지 않겠다. 사제는 신경 쓰지 마시고 두 분이라도 좀 드십시오.”

지강백은 채희유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아직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요리는 향긋한 냄새가 더해져 식욕을 자극했다.

“보기보다 훨씬 맛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하고요. 한번 맛을 보셨으면 합니다.”

지강백은 젓가락을 들어 채희유에게 내밀었다.

“…….”

“…….”

“……크음, 큼.”

그런데 뭐가 문제였을까.

채희유는 난감한 듯 입술을 물었고, 용천휘는 부채로 입매를 가렸으며 필목현은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했다.

“싫으십니까?”

그러자 난처한 사람은 지강백이 되었다.

맛있는 요리를 권했을 뿐이다. 입맛 까다로운 도련님 따위, 몇 끼를 굶든 알 바 아니었다. 정 배가 고프면 알아서 제 몸을 챙길 것이다.

다만 채희유에게는 마음이 쓰였다. 종남산에서 숭산까지는 먼 길이었다. 연약한 여자 몸으로 사내들 틈에 끼어서 내내 부대끼려면 곤하기도 할 것이다.

채희유는 언제나 단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요새 들어 표정에 그늘이 지는 것도 같았다.

게다가 지강백은 소림사를 향해 길을 떠난 이후로 채희유가 제대로 끼니를 챙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게 저…… 보기보다 괜찮은데…….”

지강백이 그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간다는 것이 너무 앞선 모양이었다. 음식을 권하기에 앞서 무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부터 물었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무안한 탓에 귀밑이 뜨끈히 달아올랐다.

“예, 그럼. 잘 먹겠습니다.”

그런 그가 안타까웠던지 채희유가 작게 말했다.

싫으면 억지로 드시지 마십시오, 라고 해야 할 것을 그 말이 반가운 나머지 지강백은 재빨리 젓가락을 내밀었다. 그도 모자라 직접 손에 쥐여 주기까지 했다.

“많이 드십시오. 요새 좀 야위신 것 같습니다.”

“아…… 예.”

그의 귓가가 붉은 만큼, 답을 하는 채희유의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채희유는 숨을 한 번 삼키고 난 뒤 평연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야위지 않았습니다. 제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편치 않습니다.”

젓가락을 쥔 하얀 손이 얼핏 떨리지 않았다면,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사람을 밀어내는 저 목소리가 서운했을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막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서요.”

“아……”

채희유의 시선이 갈 곳을 몰라 했다. 지강백은 제 눈앞에서 흔들리는 그녀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흔들리지 않게 지켜만 주고 싶었다.

오늘에는 종종 다른 생각도 들었다.

제 손으로 흔들고 싶다고.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뭐, 먹겠다니 잘됐네. 많이 먹도록. 사형 말대로 너 요새 좀 말랐어. 그런데 너는 뭘 먹을 때 고명이 필요하지 않아?”

서로를 향하는 두 사람의 시선을 방해한 것은 용천휘였다.

“아, 마침 제가 좀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필목현이 맞장구를 치며 소맷자락을 뒤적였다.

그가 꺼내 든 것은 자그마한 옥병이었다.

“오, 잘됐네. 이리 줘.”

용천휘가 옥병을 받아서 뚜껑을 열었다. 코가 알싸한, 달면서도 묘하게 쓴 그런 향기가 퍼졌다.

용천휘는 망설임 없이 옥병 안에 든 것을 백육혈장 위에 뿌렸다.

간장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검은색 물이 요리 위에 골고루 묻었다.

“아, 이렇게 보니 조금은 맛있어 보이네. 자, 양껏 먹도록 해.”

그러나 더 맛있어 보일 리가 없었다.

“…….”

채희유가 말없이 용천휘를 응시했다.

말이 없는 대신 표정이 복잡했다. 화를 내거나 평소처럼 조근한 말투로 잘못을 짚지도 않았다.

약간의 체념과 원망, 그리고 슬픔이 있었다. 채희유는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용천휘를 보았다.

그 표정이 문제였을 것이다.

탁!

지강백이 인상을 쓰며 용천휘의 손을 쳐 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채희유의 아픈 표정을, 지강백은 전부 다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용천휘의 행동이 그가 내뱉은 말과는 다르다는 것, 그것이 채희유를 언짢게 한다는 것을 알아챘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화가 나기에는 충분했다.

“왜 이래?”

“몰라서 묻나?”

용천휘는 뭐가 잘못인지 통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사형이야말로 못 들었어? 내 약사는 입맛이 특이해서. 뭘 먹으려면 꼭 이렇게 고명을 올려서 먹어야 한다고. 필 총관이 일부러 챙겨 와 준 거야.”

“네 눈에는 이게 더 맛있어 보여?”

삶은 창자 위로 검은 물이 주르륵 흐르는 백육혈장은 퍽 애매한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그 검은 물이 어떤 환상적인 맛을 지닌 양념인지는 몰라도 일단 보는 것으로는 식욕을 떨어트리는 데 더없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장난은 내게 치는 것으로 부족하냐? 채 소저에게까지 이래야겠어?”

“나 참. 왜 멋대로 장난이라 여기는 거지?”

용천휘가 입술을 비죽이며 지강백의 시선을 받아쳤다.

“생각해서 뿌려 준 거라고.”

“그래? 그렇게 몸에 좋은 거라면 네가 먼저 먹지 그래?”

“내가 왜? 사양하겠어.”

지강백이 젓가락으로 그 수상쩍은 양념이 흐르는 백육혈장을 한 점 집어 들었다.

“그래야 내가 네 말을 믿을 테니.”

그리고 다음 순간,

휘릿, 탁!

몸을 일으킨 지강백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용천휘의 턱을 붙들고는 백육혈장을 들이댔다.

“입 벌려라. 좋은 말로 할 때.”

용천휘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었고, 필목현과 채희유가 사색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 잠시, 잠깐. 진정 좀 하시고요. 아이고, 저 까탈스럽고 성질 더러우며 세상 저 혼자만 법인 줄 아는 저희 막돼먹은 도련님께서 이 일로 경기라도 일으키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필목현이 발을 쿵쿵 구르며 안절부절못했고, 채희유가 조심스럽게 지강백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도련님 말씀이 사실입니다. 부디 이러지 마십시오. 음식을 잘못 드시면 도련님은 탈이 나기 쉽습니다.”

그 말에는 지강백도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라 하셨습니까?”

“예.”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채희유의 표정은 좀 전과 같았다. 그래서 믿기가 어려웠다.

“거짓말…… 같습니다만.”

“제가 무슨 연유로 도련님의 사형분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사제의 체면을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천만에요. 도련님의 짓궂은 장난에까지 체면을 먼저 보아 드릴 만큼 저는 넉넉한 사람이 아닙니다. 틀림없는 사실이니 그만 도련님을 놓아 주십시오.”

지강백은 잠시 채희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채희유가 홱 소리 나게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그를 피했다.

“제 목소리가 그리 작습니까.”

“……그럼.”

지강백이 마지못해 용천휘의 턱을 놓아주었다. 그것을 보고 필목현이 가슴을 쓸어내렸고, 지강백은 못마땅한 얼굴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채희유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권해 주신 음식은 감사하나 이미 식어 차마 입맛이 당기지 않는군요. 다음에 먹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상황은 일단락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어차피 안 먹을 음식, 배곯는 거지에게 적선이나 하시구려.”

목소리가 불쑥, 어깨를 넘어 다가왔다.

목소리보다 더 빠른 것은 손이었다. 그 빠른 손은 아차 하는 사이에 백육혈장 접시를 훌쩍 집어 들고 있었다.

“이런 도둑놈을 보았나!”

지강백이 상대의 빠른 손놀림에 감탄하는 동안 필목현이 분노했다.

그는 사라지는 접시를 도로 빼앗으려 들었다.

“남의 음식을 공짜로 먹으려 들다니!”

스슷!

접시가 허공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사실은 접시를 든 자가 매끄럽게 발을 놀린 탓이었다. 그는 아주 간단하게 백육혈장을 지켜 냈다.

지강백은 저도 모르게 그 능숙한 보법에 감탄했다.

“아닛! 사형 분은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어서 저 도둑놈을 말리지 않으시고!”

필목현이 답답했는지 지강백을 끌어당겼다.

“어차피 안 먹을 음식이면 나눠 줘도 괜찮을,”

“그게 무슨 소립니까! 예? 어차피 안 먹을 음식이라니요! 그래도 돈은 우리가 내지 않습니까! 대천 용씨 집안에 거저 남에게 뭔가를 베푸는 이런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아니, 상인은 흙 퍼서 돈으로 바꿉니까, 예? 어서 저것 좀 도로 빼앗아 오십시오! 엉뚱한 사람이 먹기 전에 말입니다!”

그사이 백육혈장을 강탈해 간 인물은 제 소매춤을 뒤적거려 젓가락 한 쌍을 꺼내 들었다.

도둑놈 소리를 듣기에는 퍽 멀끔한 사내였다.

생김새는 평범했지만 차림새가 단정했다.

발목까지 오는 백색의 장포는 때 한 점 없었고 머리는 곱게 빗어 하나로 묶었다.

머리를 묶은 끈도 백색이었는데 흔한 머릿기름 한 방울 묻지 않았다. 짧게 자른 손톱은 가지런했고 신발에도 흙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딱 하나, 그의 몸에서 깨끗해 보이지 않는 것은 허리춤에 찬 투박한 봉(棒)이었다.

봉 자체가 더럽다기보다는, 써 온 세월이 긴 나머지 아무리 닦아도 없어지지 않는 묵은 때가 고스란히 쌓인 느낌이었다.

“옳지. 이 집의 백육혈장이 그렇게나 유명하다고 했겠다. 기왕 섬서 땅을 밟은 김에 꼭 먹어 봐야지 했는데 이렇게 먹게 될 줄이야. 게다가 손도 안 댄 새 요리라니. 아주 운수가 대통한 날일세.”

그는 정말로 먹을 생각이었던지 젓가락 끝으로 백육혈장 한 점을 쿡 집어 올렸다.

그러나 먹지는 못했다.

“잠깐.”

지강백이었다.

천강북두보를 밟아 사내에게 다가선 지강백이 그의 어깨에 왼손을 올리고 있었다.

사실 그는 어차피 안 먹을 음식이니 누군가와 나눠 먹어도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이토록 무례하게 구는 작자라면 곱게 나눠 먹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뭐 잊은 게 있지 않습니까?”

“…….”

말끔한 사내는 곁눈으로 지강백의 왼손을 흘겨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미꾸라지처럼 매끄럽게 몸을 놀려 지강백의 손을 벗어났다.

창졸간의 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둘 사이에 아무런 접촉도 없는 듯 보였다.

백의를 입은 사내는 여전히 한 손에는 접시를, 한 손에는 백육혈장 한 점을 찍은 젓가락을 들고 있는 똑같은 자세였다.

지강백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좋은 수로군.”

“피차 마찬가지.”

그가 손가락 사이로 젓가락을 스르륵 돌리며 말했다.

“내가 잊은 게 있다고 했소?”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까.”

“아니지.”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백육혈장은 그쪽이 준 게 아니라 내 손으로 거둔 것이라. 이럴 경우 고맙다는 말이 필요 없지.”

“그건 도둑질 아닙니까?”

“거지가 음식 앞에 두고 동냥질을 하든 도둑질을 하든. 뱃속으로 넣으면 그게 장땡이라.”

“거지……?”

지강백은, 또 한 번 말하지만 정말로 멀끔하고 훤한 사내의 모습을 훑었다.

심지어 사내는 말투 또한 점잖았다.

“이 몸의 훤칠한 외양은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오나 공교롭게도 사정이란 게 있어서.”

그는 지강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너무 출출해 초식 순서도 헷갈릴 것 같으니 이것부터 먹고 마저 합시다. 그게 어떻겠소?”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한 다음 마음 편히 먹는 건 어떻습니까?”

“저런. 그렇게는 안 되지. 일단 거지라면 한번 내 손에 들어온 음식을 절대 되돌려 주는 법이 없는지라.”

“되돌려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걸 어찌 믿겠소. 인생은 원래 견물생심. 일단 내 손을 떠난 음식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거라오.”

“그럼 어쩔 수 없이 믿게 해 드려야겠군요.”

지강백이 목검을 빼어 들어 출수를 준비했다.

그를 보며 용천휘가 작게 혀를 찼다.

“쯧쯧…… 되도록 무공을 감추라던 사부님 명은 벌써 까맣게 잊었군. 하여간 저 바보도 남부럽지 않은 무광(武狂)이라니까.”

필목현이 물었다.

“두고 보실 생각입니까?”

“설마. 물론 나야 사형의 비무는 언제든 환영하는 바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 네가 준 대반하독은 시간이 지나면 색이 변하지 않나? 그 전에 증거를 없애야지.”

용천휘가 고명이랍시고 뿌려 댄 검은 물은 사실 독이었다.

그러나 채희유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독인인 그녀는 주기적으로 독을 보충하는 일이 필요했다.

용천휘가 창백한 얼굴을 한 채희유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됐네. 모처럼의 끼니를 거르게 돼서.”

“……괜찮습니다.”

“설마. 이제 한계일 텐데. 짐칸에 싣고 왔던 네 밥들은…… 아, 실례. 네 독들을 그때 다 잃어버린 게 퍽 유감이야. 남은 독이라고는 삼 좌위가 가지고 있던 대반하독이 마지막이었을 것 같은데.”

“아쉬운 대로 다음에는 약전이라도 들르도록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 그러자고. 그럼 일단 대반하독부터 처리해 볼까.”

용천휘가 상 위에 올려진 술병을 집어 들었다.

때마침 지강백은 일전을 치르기에 앞서 사내에게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느니 장소를 옮기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던 참이었다.

“그럴 필요 없다, 몸종아.”

태연하게 두 사람 사이로 걸어간 용천휘가 백육혈장 위에 술병의 술을 홱 뿌렸다.

“으앗! 이게 무슨 짓이오!”

사내가 접시를 돌려 술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러자니 공교롭게도 지강백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가 손을 움직이는 시점에서 지강백이 충분히 손을 써서 접시를 도로 빼앗을 수 있을 정도였다.

촤륵!

결국 백육혈장은 술에 흠뻑 젖어 버리고 말았다.

용천휘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느릿하게 입을 뗐다.

“우리 집안에 적선이란 없다고. 그건 돈 벌 생각이 없는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지. 공짜로 남 주느니 차라리 버리라는 게 가친의 평생 가르침이야.”

백의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내 점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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