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아득한 저 구름 위
“아니외다, 그것은.”
답을 한 이는 나이가 많은 죽립인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점잖고 푸근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이번만큼은 단호했다.
“이 몸은 호영장주 앞으로 첩지를 보내지 않았소이다. 섬서는 너무 멀지. 요새는 아무리 뱃길이 잘 돼 있다고 해도 말이야. 그래도 하남에서 오려면……,”
젊은 죽립인이 서둘러 그의 말을 잘랐다.
“하, 하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야.”
“……오라, 내가 또 실수를 했구나.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허허.”
“미안하시면 좀 가만히 계십시오. 말씀은 최대한 아끼시고요.”
“알겠네. 그럼 호영장주께 드릴 말은 자네가 맡게.”
“예, 노야. 진작부터 그리하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젊은 죽립인이 앞으로 나서서 호곽을 향해 정중한 포권을 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호 장주님. 이 몸은 사해의 동도들이 무연객이라 부르는 노야를 보필하는 사람입니다.”
“무연객이 정말로 내 집에 볼일이 있었던가!”
호곽이 외치자 젊은 죽립인은 펄쩍 뛸 기세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댔다.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첩지는?”
“아, 그게 말입니다. 노야께서는 무연객의 이름으로 첩지를 보내는 일이 결코 없으십니다. 어떻게 생긴 첩지를 받으셨건 간에 모두 오해입니다.”
“뭐라고? 하지만 분명……”
“요새 강호에 무연객의 첩지라 하여 일종의 비무첩이 도는 모양입니다만, 그것은 노야와 하등 상관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저희 측에서도 물론 사실을 밝히려 애를 써 보았습니다만, 그게 소용없는 지경에까지 온지라…….”
젊은 죽립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우연히 섬서에 볼일이 있어 오는 길에 호영장에서 첩지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건너 듣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도무지 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간에 떠도는 말에 의하면 남궁세가의 이가주, 섬격검께서도 연관이 있다 하니 본의 아니게 두 가문에 폐를 끼치게 되는 셈이 아닙니까? 해서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왔으니 강호의 두 의협께서는 부디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정중한 포권이 이어졌다.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죽립인의 의도를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살막에 의해서 호곽이 놀아난 꼴이 되었다. 그의 섣부른 판단이 친우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 뻔했다.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애꿎은 지강백을 들볶은 꼴이 되었다는 것도 이제는 감출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랬……구려.”
전의를 잃은 호곽이 고개를 떨구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호곽의 시선은 지강백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살수는…… 어째서 그를 놓아주었는가.”
“그게…… 살려달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청부를 맡은 것을 몹시 후회하는 눈치라서……”
지강백이 객쩍은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본 호곽은 확신을 얻었다.
“그게 영 이상하다 싶었지. 그렇게 된 것이로군.”
지강백이 조심스레 한마디 덧붙였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라 들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실수를 되돌릴 길을 찾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호곽이 지강백의 말을 곱씹었다.
“실수라…….”
실수는 모두가 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자신이 한 실수가 가장 클 것이다.
호곽은 남궁진현이 왜 지강백에게 그토록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열패감 탓이었다.
그가 경험이 적다는 것도, 분명 무공만으로는 저를 따라올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공으로 패했을 때보다 더 진득한 패배감으로 마음 한구석을 뭉근히 짓눌렀다.
“그래, 내가 실수를 했다.”
호곽이 어금니를 지그시 물며 말했다.
“내 모자란 심성이 자네를 의심의 벽으로 몰아세웠네. 자네는 내게 이 점을 탓해도 좋아.”
자신이 졌음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지강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도,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할 일을 했다 여겨 주신다면 감사드릴 뿐입니다.”
“……끝내 그리 말할 것인가.”
호곽의 말이 한숨처럼 낮아졌다.
그들을 보며 난데없이 무연객이 흐르는 물처럼 잔잔히 웃었다.
“허허. 그렇지. 살생(殺生)을 이기는 것은 양생(養生)인 법. 젊은 친구가 벌써 정도를 아는구나. 허허, 기특한지고.”
분명 훈훈하게 웃으며 던지는 말인데 죽립 아래 눈빛은 지강백을 향해 번뜩이고 있었다.
지강백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한 발 물렸다.
“……그럼 이제, 저희 일행은 가던 길을 가 보겠습니다.”
놀랍게도 호곽이 그를 말렸다.
“잠깐.”
“예?”
“길이 급하지 않다면 호영장에서 하루 묵고 가는 것이 어떻겠나. 친우를 도운 답례는 해야겠으니.”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말을 무연객이 거들었다는 것이다.
“오오, 그래. 그것 참 잘된 일이로군. 하루 묵으시게나.”
그러면서 또 죽립 아래 눈이 번쩍였다.
지강백이 또 주춤 뒷걸음질을 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답례는 과합니다. 도우려 했다고는 하지만 결과는 어쩐지 그와 거리가 멀게 되어 버려서……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허허, 그러지 말고.”
무연객이 지강백을 향해 한 발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젊은 죽립인이 재빨리 붙들었다.
“아이고, 노야. 참으십시오. 여기가 지금 숭…… 아니, 저희 집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런가. 이것 참. 호 장주께 결례를 범할 뻔했군.”
그러면서 무연객은 입맛을 다셨다. 눈은 여전히 지강백을 향한 채였다.
사람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맛을 다시는 동작은,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지기에 충분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뜻하지 않게 남궁 대협과 호 장주님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의 인연을 항상 가슴속에 간직하겠습니다.”
지강백이 걸음을 물리며 일행에게 합류했다.
“가자.”
그때였다.
“그렇다면 자네, 길을 떠나기 전에 잠시 짬을 내어 나와 한 수 겨루지 않겠나?”
무연객이 한 말이었다.
그 말이 호영장을 떠나려던 지강백의 목덜미를 덥석 잡아챘다.
“그건…… 비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무연객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죽립이 앞으로 쏠릴 지경이었다.
“아이고, 노야!”
젊은 죽립인이 화들짝 놀라 무연객의 죽립을 단단히 붙들었다.
“이러다 큰일 납니다! 제발 좀 조심 하십시오!”
죽립 아래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몰라도, 그는 죽립이 벗겨지는 것을 극도로 저어하는 듯했다.
“내 이 죽립을 쓰고 다닌 시간이 있는데 설마 놓치겠나. 괜한 걱정 마시게.”
부드러운 동작으로 젊은 죽립인을 밀어낸 무연객이 지강백에게 말했다.
“이대로 보내기엔 너무 아쉬워서 말이야. 어떤가. 노부와 손을 한번 섞어 보겠나? 자네가 원한다면 노부가 제약을 두겠네. 자네는 지금 한 팔을 쓰지 못하는 것 같으니 노부는 두 팔을 쓰지 않겠네.”
“…….”
지강백이 입술을 꾹 물었다.
곤란해서가 아니라, 너무 가슴이 뛰어서였다. 입을 벌리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안다. 자신은 그가 두 팔, 두 다리를 쓰지 않는다 해도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런데 이렇게나 가슴이 뛰었다.
더는 생각이 필요 없었다.
지강백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한 팔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연객의 눈에 이채가 스쳐 갔다.
“그럼 자네가 너무 곤란하지 않겠나? 오른손을 주로 쓰는 사람이.”
“괜찮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허허…… 욕심도 있는 게로군. 좋다, 좋아. 이렇게 좋은 몸으로 그보다 더 좋은 것도 갖고 있다니. 오늘은 내 무운(武運)이 아주 좋은 날일세.”
“그렇다면 장소를 어디로……”
지강백이 흥분을 애써 가라앉히며 막 입을 떼는 순간이었다.
“잠깐.”
이제껏 아무 말 없던 남궁진현이 무연객과 지강백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벅저벅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다른 소음들을 잡아먹으며 긴장감을 쑥 자라나게 했다.
* * *
“무연객. 그 기괴한 비무행은 익히 들은 바 있지.”
딸칵.
남궁진현이 검 자루를 엄지로 쓸었다. 그 손의 미세한 움직임에 따라 검이 미묘한 소리를 냈다.
“무연객이라는 이름처럼 그는 인연을 만들지 않는 자이며, 동시에 연고가 없는 자이기도 하다고. 그에 대해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터라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런데 딱 하나 알려진 것이 있으니,”
딸칵.
“강호에서 제일가는 무광(武狂)이라는 것. 그가 비무행을 하는 이유는 스스로가 창안한 새 무공을 시험해 보는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했다.”
딸칵.
“그러니 묻지. 귀하의 비무에 이 남궁 모가 부족하다 생각하시오?”
칼에서 나던 소리가 멎었다.
그러나 그 무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름 끼치는 긴장감이, 천하제일의 쾌검이 발출될 준비를 마쳤다고 말해 주는 듯했다.
무연객이 죽립 아래 눈을 느리게 끔벅였다.
“이 눈이 운이 좋아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검을 보게 되는구려. 그러나 비무에 끼어든다는 것은 남궁세가의 이가주께서 할 법한 짓은 아니라 생각이 드오만.”
“비례는 귀하께서 먼저 하지 않으셨소. 마땅히 이 자리에 있는 본인을 먼저 알아봤어야 하는 것을.”
남궁진현이 친우의 소식을 듣고 말을 몰아 달려왔던 것은, 기실 그를 돕고자 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무연객에 대한 소문은 강남 지역에서 더욱 빨리 퍼졌다.
소문이 속도를 입으면 필연적으로 과장이 더해지기 마련이었다.
남궁진현은 무려 마흔한 살에 천하제일쾌검이라는 무명(武名)을 얻었다. 당연히 스스로가 강남 지역에서는 적수가 없다 여겼다.
그가 노리는 것은 다음 대의 천하제일기였다.
그래서 무연객의 첩지가 호영장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몹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첩지는 자신이 아니라 친우에게 갔을까.
아마도 무연객이 남궁세가 전체를 들쑤시는 것을 저어해 그렇게 얕은 수작을 부렸을 거라는 세간의 소문을 접하고서는 오히려 화가 났다.
천하제일쾌검을 고작 그런 수준으로 봤단 말인가. 비무가 두려워 본가의 대문 뒤로 숨으려 하는 그런 한심한 작자로.
그래서 직접 얼굴을 봐주리라 결심했다.
이제껏 본 적이 없다는 무광이라는 무연객이 얼마나 대단한 작자인지 제 검으로 똑똑히 재보리라 다짐했다.
강호를 구르는 자들 중 태반은 무에 미친 자들이었다. 그러니 무인이라 하면 모두가 무광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무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천하제일쾌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궁진현은 스스로도 칼에 미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왜 무연객은, 자신이 아닌 애송이를 골랐을까.
“허허…… 이것 참. 난처하게 됐구려. 섬격검께서 말씀하신 대로, 노부의 괴이쩍은 비무행은 그저 무에 미친 늙은이의 고약한 취미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소? 여기에는 그 어떤 야욕도, 목적도 없소이다.”
답은 간단했다.
“안 되오.”
“허허…….”
남궁진현의 딱 부러지는 답은 조금도 양보가 없었다. 그 말은 한바탕 칼부림을 겪든지, 아니면 그 전에 누군가가 알아서 빠지라는 뜻이었다.
그 누군가는 지강백이 될 수밖에 없었다.
“……후배가 물러서겠습니다. 두 분의 비무를 견식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그러나 물러선다 하는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허허. 그럴 텐가?”
아쉬워하는 것은 무연객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강제로 이별하는 연인들처럼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꼴을 보던 남궁진현은 더 심기가 불편했던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시작합시다.”
“허허…… 빨라서 좋구려. 그럽시다.”
“그럼.”
남궁진현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동시에 그의 눈은 곧 칼이 되었다.
“나는 이번 비무에 예의 따위는 갖추지 않을 것이오.”
무연객은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고개만 돌린 채로 남궁진현을 마주했다.
“좋은 자세외다. 사람이 칼이고 칼이 곧 사람이니…… 그 어느 바람인들 베이지 않겠는가.”
착각이었을까.
무연객의 말처럼 바람이 스르륵 불어오는 듯했다.
바람은 남궁진현과 무연객의 사이를 채웠다. 지강백은 그 바람이 구름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자신은, 저 까마득한 구름 아래서 그 위에 있는 자들을 쳐다보는 중이라고.
남궁진현은 조용히 칼을 뽑아 지면과 수평이 되게 했다.
검봉이 향하는 곳은 정확히 무연객의 미간이었다.
스스슷.
바람이 흘렀다.
남궁진현이 한 걸음을 떼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던, 그저 하얀 선 같던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검이 지금 이 순간에는 가장 느린 바람이 되었다.
슷.
남궁진현이 걸을 때마다 자꾸만 무언가가 석둑 베이는 소리가 났다.
지강백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사형.”
지강백은 귓가에 용천휘의 말이 와 닿는 것도 몰랐다.
자신이 마디가 불거질 정도로 손을 아주 세게 움켜쥐고 있는 것도 몰랐다.
“받아.”
언제 어떻게 지니고 있었는지 용천휘가 지강백의 손에 그가 평소 쓰던 목검을 쥐여 주었다.
지강백은 구름 위를 쳐다보며 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서걱, 서걱.
남궁진현은 그렇게 바람을 잘라내며 걸어갔다.
무연객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를 마주했다. 남궁진현을 마중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서걱, 석!
남궁진현의 칼 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칼이 날카롭게 우는 듯했다. 지강백은 제 목검이 우는 것처럼 그것을 더욱 꼭 붙들었다.
슷!
칼이 시작과 같은 자세로, 수면과 평행을 이루었다.
남궁진현과 무연객의 사이에는 소름이 끼치는 무음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키기긱, 카악!
남궁진현의 칼은 숫제 울부짖기 시작했다.
무음은 한기를 만들었다. 핏줄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지강백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목검을 쥔 손바닥에 고인 땀이 얼어서 성에를 만들었다.
천하에서 가장 빠른,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정지해 있는 검 끝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것을 보던 무연객이 평연하던 얼굴에서 균형을 깨트렸다.
“계속 하시겠소?”
남궁진현이 이를 으득 물었다.
“물론.”
무연객이 체념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 모든 과정이 지강백에게는 구름 위에서 벌어지는 일 같았다.
땅에 발이 붙은 그는 그저 저 까마득한 곳에서 어른대는 그림자를 보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럼.”
남궁진현이 턱을 까닥여 보였다.
그것이 신호였다.
슷!
빛 한 줄기가 구름 속에서 반짝였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빛이라 했다. 그리하여 저 검은 빛이라 이름할 수밖에 없었다.
섬격(閃格).
빛은 세상 모든 것을 앞질러 갔다. 무연객의 미간을 향해.
“읏,”
지강백이 난데없이 입술을 짓씹었다.
목검을 움켜쥔 손에 힘줄이 불거져 올랐다. 채희유가 두툼히 감아 주었던 옷자락은 어느샌가 터져 나가고 없었다.
지강백은 저 섬광을 뒤쫓고 싶었다. 아예 저 섬광이 되었으면 했다. 저 빛보다 더 빠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아직도 터무니없이 느렸다.
지강백이 괴로운 표정으로 제 입술을 짓씹었다.
“아직 아니야.”
그때 용천휘의 손이 어깨에 와 닿았다.
지강백은 왜냐고 묻고 싶었다.
“빠른 게 다가 아니니까.”
“…….”
용천휘의 말이 맞았다.
구름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무연객이었다.
그림자가 너울너울 춤을 추는 듯 보였다. 그 춤사위는 아차 싶은 순간에 한 줄기 바람이 되었다.
스르륵.
바람은 세상 전부를 휘감았다.
빛도, 어둠도.
빠름도, 느림도.
결국은 세상의 일부였다. 바람은 그 모든 것을 얼싸안았다.
그리고,
펑!
“……욱!”
남궁진현의 신형이 주르륵 뒤로 밀렸다.
그는 신형을 멈춰 세우기 위해 발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
지강백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남궁진현의 발은 돌바닥을 반 치쯤 파고 들어간 상태였다.
남궁진현의 입가로 피가 한 줄기 흘렀다. 그가 입고 있던 고운 은색의 장포 위로 잿빛의 장인이 수놓였다.
“이…… 장법의 이름은?”
남궁진현이 피 묻은 입술을 열었다.
무연객이 답했다.
“아직 없소이다. 방금 생각해 낸 것이라.”
“분명…… 다 베었는데…… 어, 어째서…….”
무연객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섬격검은 분명 그 빠르기로 형체가 없는 것을 베었소이다. 허나 형체가 없다는 것은,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 흩어지면 모이고 모이면 흩어질 수 있는 것이 바람이외다.”
쿵!
무연객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궁진현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허나 천하제일쾌검의 자존심은 그 이상은 허락지 않았다. 남궁진현은 칼끝을 바닥에 꽂아 억지로 허리를 세웠다.
“졌소.”
그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무연객이 정중한 포권 자세로 살짝 허리를 숙였다.
“비무에 감사하오. 연이 닿으면 다시 뵙기를.”
무연객이 별호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사를 남기고 등을 돌렸다.
그러나 뭔가 잊었다 싶었던지 훌쩍 몸을 돌렸다. 그가 바라보고자 한 것은 지강백이었다.
무연객의 시선이, 꽉 쥐인 손끝에서 흔들리고 있는 목검에 닿았다.
“무어 배울 게 있었나?”
구름을 보았다. 구름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게 다였다.
“식견이 부족하여 그저 보았습니다.”
“흐음, 그래. 그럼 무엇을 보았나?”
지강백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빠름과 느림이 다르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오라? 이것 참. 기대 이상의 답이로구나. 허허…….”
무연객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짓는 미소는 장한 일을 한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처럼 자애로웠다.
이어서 그가 물었다.
“그래, 몇 년이나 걸릴 것 같은가?”
지강백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 까마득한 구름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자신을 얼마나 걸려 찾아올 수 있느냐는 뜻이리라.
“아직 잘……”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려 했던 지강백이 고개를 털었다.
이윽고 그가 마음을 정한 듯 무연객을 빤히 마주 보며 답했다.
“십 년. 십 년 후에 가겠습니다.”
“무어라?”
무연객이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그 또한 고개를 저었다.
“안 될 말이네.”
“모자랍니까?”
“글쎄. 모자랄 수도 있겠고 아닐 수도 있겠지. 허나 그 전에 큰 문제가 있으니…… 부끄럽게도 노부가 진득한 성격이 못 되어 놔서 말일세.”
그가 손가락을 꼽았다.
“칠 년! 칠 년으로 하지.”
“예?”
“칠 년 동안 자네를 기다리겠네. 부디 열심히 올라오시게나.”
“어디서 기다리시겠단,”
그러나 지강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연객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잡아볼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남궁진현이 흘린 핏자국이 아니었다면 그가 왔다 간 것도 모를 정도였다.
“제길, 가 버렸잖아.”
지강백은 용천휘가 거친 말을 내뱉는 것을 듣고는 그때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도 가야지. 서두르자.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했어.”
지강백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있는 남궁진현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 인사는 남궁진현을 대신해 호곽이 받아야 했다. 남궁진현은 지금 아득한 저 어느 곳에 홀로 머무는 중일 것이다.
이어서 지강백 일행도 호영장을 떠났다.
반나절의 소란이 모두 끝난 호영장은 다시 평소의 균형 잡힌 질서 속으로 되돌아갔다.
* * *
그리고 이튿날.
“장주님. 이걸 어째야 하겠습니까?”
호곽은 보셔야 할 게 있다는 보고를 받고 수화문을 넘어섰다. 그 옆에는 한 달 이상 정양을 해야 하는 몸으로 부득불 돌아가겠다고 나선 남궁진현도 함께였다.
“…….”
“허, 이런.”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누군가가 담벼락에 후려갈겨 쓴 낙서였다.
그러나 꼭 낙서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게, 엄밀히 말하면 서소(書疏: 편지)인 탓이었다.
―살려 줘서 고마워.
정말로 살수가 내 길이 아닌지 이제부터 고민해 볼 참이다. 그때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나면 내가 너한테 의리 꼭 지킨다.
그리고 보내는 이와 받는 이가 적혀 있었다.
보내는 이의 이름은 살막주의 삼남 적하조.
받는 이는…….
“종남의 첫째 제자라고?”
호곽이 얼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기가 막힌 건 남궁진현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본 것 같았던 그 무공이…… 설마 종남의 것이었나.”
“말도 안 돼. 종남이 이제껏 명맥을 잇고 있다니? 종남이 자취를 감춘 지 벌써 이십 년이 넘었는데.”
친우의 말에 맞춰 끄덕여지는 고개가 오늘따라 묵직했다.
“그렇지. 그리고 그의 나이가 약관을 갓 지난 듯 보였고.”
“이런…… 맙소사. 종남에 저런 자를 키워 낼 만한 인물이 남아 있었던가. 놀라운 일이로군. 이런 게 구파일방의 질긴 뿌리라는 건가.”
혼잣말을 중얼대는 호곽을 향해 남궁진현이 한마디 덧붙였다.
“만약 그게 진짜라면……”
“진짜라면?”
그는 진심이었다.
“돌아오는 천하무도회가 재미있어지겠군.”
호곽도 그 말에 동감이었다.
“그렇겠지. 올해의 천하무도회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를 테니까. 종남파의 재등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파란(波瀾)이 되겠어.”
애석하게도 지강백은 적하조가 남겨 놓은 편지도, 그 바람에 사문의 정체가 탄로 났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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