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진실을 감춰야 하는 경우
“그렇다면 살수는 어디 있단 말이냐?”
호곽이 기가 찬 표정으로 물었다.
시비의 안색이 새파래지는 순간, 모두가 알았다. 그가 살수라는 것을.
자세히 보니 그럴듯하던 예쁘장한 얼굴도 역용이라는 게 보였다. 분칠이 조금 떴고 긴 머리카락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이 느껴졌다.
웬 놈의 말이 다 맞았다는 소리였다.
순간 욱하는 반감이 치솟았지만, 호곽은 자신이 물러나야 할 때라는 것도 알았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일은 호영장을 이런 수모의 늪에 빠트린 살수의 목을 갈라 본때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니라니.
그것도 살수가 여기 있노라고 우겨대던 웬 놈이 제 입으로 아니라니.
이건 또 무슨 수작질인가 싶어 칼을 쥔 손이 떨려 왔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지강백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생 처음 해 보는 거짓말일 것이다. 자칫 눈빛이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는데 의외로 무던하게 말할 수 있었다.
지강백은 스스로도 놀라워하며 말을 이었다.
“술에 독이 든 것만 알아냈을 뿐입니다.”
“술에 독을 탄 자가 저 시비는 아니고? 이제 보니 낯선 얼굴이다. 내 집에서 일하는 자의 얼굴이 아니야.”
지강백은 일부러 힐긋 어깨 너머로 적하조의 얼굴을 쳐다본 다음 고개를 저었다.
“제가 본 살수의 얼굴과는 다릅니다.”
호곽의 표정이 망친 그림처럼 구깃구깃해졌다.
“……살수가 역용을 했다면?”
“그자는 남자였습니다. 역용이 정교하다 해도 남자가 여자처럼 보이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 옷을 벗겨 확인해 보면 될 터.”
슷!
호곽이 소리도 없이 출수했다. 삼첨양인도의 칼날이 지강백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사정을 보아 주십시오. 일꾼이라 하나 여인의 몸입니다.”
탁!
지강백이 고개를 좌측으로 돌리며 등 뒤로 팔을 뻗어 적하조를 호곽의 공세에서 감추었다.
“걱정 마라. 남자인지 아닌지만 확인하면 될 일이니.”
“그런 것치고는 칼이 너무 날카롭습니다.”
“무례하군. 이 칼과 더불어 지내 온 세월이 삼십 년인 것을. 남의 걱정을 살 만한 칼이 아니다.”
“아닙니다. 지금 호 장주님의 칼은 힘없는 여인으로 하여금 걱정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 뭐라?”
이쯤 되면 호곽도 진심으로 분노하고 싶어졌다.
“그래, 좋아. 자네 말이 맞다고 하지. 그렇다면 그 말에 책임을 질 준비도 되어 있겠군.”
살수를 찾지 못했으니 약속한 대로 목을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휘잉, 츳!
삼첨양인도가 방향을 바꾸어 지강백의 미간을 겨냥했다.
호곽이 두 눈에 살심을 담아 외쳤다.
“당장 그자를 내어놓거라! 아니면 네놈과 무슨 약조를 했건 간에 두 놈을 한패로 여기겠다!”
지강백의 덤덤하던 표정에 동요가 일어났다.
“저는 살수와 한패가 아닙니다. 제게는 남궁 대협이나 호영장에 해를 끼치려는 어떠한 의도도 없습니다.”
“이놈이 기어코……! 그렇다면 왜 살수를 감싸고 돈단 말이냐!”
이해할 수 없는 지강백의 행동은 호곽에게 일종의 모욕으로 다가왔다.
“이제 더는 나를 말리지 말게나! 내 인내는 이미 차고도 넘쳤어!”
남궁진현을 향해 일갈한 호곽이 삼첨양인도를 머리 위로 치켜세웠다.
“하앗!”
혈풍치연이라는 이름의 초식이 발휘되었다.
호영장의 도법이 지닌 스물일곱 개의 초식 중 가장 위력이 큰 초식이었다.
다시 말해 호곽이 지강백을 베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읏,”
지강백은 미간을 향해 쏘아져 오는 거대한 도를 맞서 어금니를 물었다.
패도적이며 동시에 빈틈이 없는 초식이었다.
이 공세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등 뒤로 감춘 살수를 저 대신 칼날 앞에 밀어 넣고 달아나는 것뿐이었다.
“아악!”
비명은 지강백이 아닌, 그의 등 뒤에서 터졌다.
적하조가 호곽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먼저 소리를 지른 것이다.
“죽어라!”
절체절명이 한없이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
휘이익!
갑자기 엉뚱한 곳에서 누군가가 던져 낸 암기가 삼첨양인도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지강백은 그것이 살막의 탄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피하십시오! 탄구입니다!”
지강백이 왼팔로 살수를 낚아채며 있는 힘껏 몸을 뒤로 물렸다.
그와 동시에,
퍼엉!
탄구가 폭발했다.
사방으로 흙먼지가 요동치며 매캐한 화약 냄새가 사정없이 코를 후벼 팠다. 별수 없이 몸을 구부리고 기침을 내뱉어야 했다.
“호 장주님! 남궁 대협! 두 분 모두 괜찮으십니까?”
기침이 어느 정도 멎자 지강백이 소매를 휘둘러 흙먼지를 밀어내며 외쳤다.
곧 뿌옇던 시야가 트이며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남궁진현은 상대적으로 괜찮아 보였지만, 호곽은 꽤나 손해를 많이 본 모습이었다.
그마저도 폭발 직전의 탄구를 삼첨양인도가 제대로 받아쳤기에 폭발의 위력이 많이 감소한 것이었다.
반쯤 타다 만 옷 틈으로 군데군데 벌겋게 익은 살갗이 내비쳤다. 특히나 가장 못 봐줄 곳은 삼첨양인도를 쥐고 있던 두 손이었다. 화상을 입은 손은 피와 재가 범벅이 되어 엉겨 있었다.
“이게 무슨…….”
졸지에 암습을 당한 호곽이 분노에 물든 눈을 치켜뜨는 순간,
―남궁세가 쪽으로 들어온 청부는 공식적으로 철회하겠습니다. 그 증거로 본 막에서는 두 번 다시 남궁세가의 이가주께 해를 가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일은 부디 잊어주십시오.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엉뚱하게도 제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기 수십 마리가 웅웅대는 것처럼 허공을 기묘하게 울리는 음성이었다. 따라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좀처럼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누구냐!”
남궁진현이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상대의 발은 천하제일쾌검이라는 남궁진현의 칼보다 빨랐다.
―이 녀석! 집에 돌아가 볼기짝 맞을 각오나 해라.
이런 소리를 하며 적하조를 덥석 들어 올려서 사라져 가는 그의 신법이 살막의 백우환영보인 탓이었다.
“…….”
그야말로 바람처럼 사라져 간 살막의 두 살수들을 놓고 남은 세 사람들은 말을 잃었다.
탄구의 폭발로 인해 목이 아직도 칼칼한 탓만은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살수는 사라졌다.
더불어 청부조차 공식 철회한다고 했으니 남궁진현은 무사할 테고, 지강백으로서는 할 일을 마친 셈이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지강백이 호곽과 남궁진현을 향해 꾸벅 포권으로 인사를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호영장주 호곽은 뒤끝이 제법 긴 사내였다.
“어딜 간단 말이냐!”
쾅!
호곽은 분풀이라도 하듯 삼첨양인도로 거칠게 땅을 후려쳤다.
“나는 아직 의심을 거둔 게 아니다! 네놈은 살수의 정체를 두고 내게 끝까지 거짓말을 했다! 이것은 어찌 해명할 참이냐!”
“아, 그것은……”
거기에 대해서는 지강백도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가 몹시 곤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그게……”
지강백을 곤란에서 구한 것은 용천휘였다.
그는 필목현과 채희유를 거느리고 이쪽으로 설렁설렁 걸어오고 있었다.
“어라? 우리 사형이네. 사형! 여기 있었어?”
“어, 그래!”
용천휘의 얼굴이 이렇게나 반가울 줄이야.
지강백은 생사의 위기를 함께 헤쳐 온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이 용천휘를 얼싸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살수는 찾았어?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통 못 찾겠던데.”
애를 썼다는 사람치고 걸음은 너무 여유로웠고 땀 한 방울의 흔적도 찾기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지강백은 용천휘가 진심으로 반가웠다.
“어, 그래. 살수는 도주했다. 암중의 조력이 있었어.”
“저런. 무슨 그런 맥 빠지는 일이.”
“그게 무슨 소리냐. 사람이 무사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입으로는 타박을 해도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용천휘가 지강백의 어깨 너머로 힐긋 눈짓을 던지며 마주 웃었다.
“흐음. 정말 다행인 건가? 그런데 왜 내 눈에는 사형이 고양이 앞의 쥐처럼 보이지?”
용천휘와 호곽의 눈이 마주쳤다.
본의 아니게 고양이로 불린 호곽의 노기가 배가 되었다.
“예의를 모르는 것들이 하나가 아니었구나.”
용천휘의 등장 탓에 잠시 멎었던 긴장감이 다시 팽팽히 일어섰다.
“네가 말하지 않겠다면 일행에게 묻겠다. 너희들의 정체가 무어냐? 살막에서 던진 미끼인가?”
“뭐?”
용천휘가 혀를 찼다. 정말로 기가 차다는 듯이.
“이 몸을 대체 뭐로 보고. 나는 태어난 이래로 어떻게 하면 돈을 더 잘, 더 많이 쓸 수 있을지를 고민해 온 사람이라고. 그런데 돈을 받고 사람을 대신 죽여? 그런 귀찮고 번잡한 일을? 나 참.”
“뭐……”
지강백은 보았다.
가뜩이나 험악하던 호곽의 인상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순간을.
그것은 인내였다.
자칫 큰일이 날 것 같은 상황이 되었음을 바보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지강백이 용천휘를 등으로 감추며 호곽에게 말했다.
“……이 결례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이제 입문한 지 달포밖에 되지 않은 터라 사제가 강호 사정에 많이 어둡습니다.”
호곽의 대꾸에는 이 가는 소리가 묻어 나왔다.
“하, 입문한 지 달포라?”
“……그것보다는 며칠 더 됐을 수도 있습니다만. 어쨌거나 그 달포 간에도 배운 것 하나 없는 사제입니다.”
“이런 고얀! 어수룩함을 가장하여 이대로 답을 회피하려는 게냐! 어서 네놈이 살막과 한패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라지 않느냐! 증명할 수 없다면 네놈은 물론이거니와 네놈의 일행들까지 살아서 호영장을 나서지 못할 것이다!”
살기를 담아 외치는 호곽의 말에 맞서 지강백이 더욱 주의 깊게 용천휘를 감쌌다.
“말씀이 너무 과하신 것 같습니다. 남궁 대협께서는 무사하시고, 이후로도 살막의 암수에서 자유로우실 게 아닙니까? 그런데도 꼭 저와 제 일행의 목숨을 받으셔야겠습니까?”
“애초에 네놈이 불러들인 화라면 은이라 할 것도 없을 터!”
“저 역시 은이라 할 것 없다 말씀드렸습니다. 무인으로서 도의를 다했을 뿐입니다. 할 일을 마쳤으니 그만 가던 길을 가게 해 주십시오.”
지강백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호곽 또한 틀리지 않았다. 그는 지강백이 살수를 놓아주려 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호영장의 체면을 걸고 그럴 수 없다 했다. 네놈은 두 눈으로 번연히 본 사실을 아니라 할 수 있겠느냐?”
지강백은 물러날 수 없었고, 호곽은 물러나지 않으려 했다.
이 팽팽한 긴장을 흩뜨린 것은 아직도 철이 덜 든 사제 용천휘였다.
그가 지강백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삐죽 내밀고 말했다.
“두 눈으로 본 게 가짜면 어쩔 건데. 안 그래, 사형?”
지강백은 놀라 인상을 썼다.
“함부로 끼어들지 마. 지금 어떤,”
용천휘가 잘도 그의 말을 끊었다.
“호영장주라는 자 말이야. 무연객의 첩지를 두 눈으로 봤을 것 아냐. 그런데 그건 가짜였잖아.”
애석하게도, 용천휘 또한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종종 진실은 굳이 일깨우지 않아도 좋은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그 진실이 호영장주의 실수에 관한 것이었고, 그 호영장주가 좀 전부터 몹시도 분노한 상태에 있으며, 그 진실을 밝히는 장소가 하필이면 호영장 한복판일 그런 경우였다.
“이놈들! 너희들은 모두 이 자리에서 관도 없이 죽을 것이다!”
잠시 멈췄던 혈풍치연이 막 다시 전개되려던 순간이었다.
―계십니까.
귓가를 날아드는 점잖은 음성이 호곽과 지강백뿐 아니라 이곳에 모인 자 전부의 동작을 멎게 만들었다.
아주 멀리서, 혹은 아주 가까이에서.
속삭이듯 작게, 아니 벼락처럼 크게.
그러나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게.
그 안에 담긴 내공이 대체 얼마나 깊고 웅혼한지 짐작도 못 할 정도였다.
―이곳 호영장주께 드릴 말씀이 있어 왔소이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호영장주 호곽의 안색이 대번에 달라졌다.
들어가도 되겠느냐라는 물음은 그가 아직 호영장의 대문을 넘어서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문에서 이곳 정방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본다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 자라 하면 굳이 집주인의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호곽은 남궁진현과 한차례 눈짓을 주고받았다.
남궁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내력을 실어 외쳤다.
“……어느 고인(高人)이신지 몰라도 호영장은 귀하의 걸음을 막지 않겠소이다. 뜻대로 하시오. 밖에 있는 자들은 듣거라! 아무도 고인의 앞을 막아서지 마라!”
호곽의 목소리 또한 크고 또렷했다.
하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비하면 거칠다고 해야 했다.
용천휘는 이번에는 귀가 징징 울린다며 신경질적으로 부채질을 해 댔다. 그러나 푸덕이는 부채 안쪽으로 그가 눈을 빛내고 있음을, 필목현과 채희유는 알았다.
그가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입술을 달싹여 “올게 왔군.”이라 말하는 것도.
―허허. 환대에 감사드리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에 따라서 눈 한 번 끔벅이는 시간이기도 했고, 세수간(洗手間: 화장실)을 한 번 다녀올 시간이기도 했으며, 강산이 변했다 싶을 정도로 긴 시간이기도 했다.
“안녕들 하십니까.”
그 시간들을 견디고 나자 누군가가 이문(二門: 내원으로 들어서는 중간문)을 넘어서 모습을 드러냈다.
치렁대는 긴 머리카락. 깊이 눌러쓴 죽립.
한 명은 늙고 한 명은 젊은 그들은 잔평객잔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죽립인들이었다.
“무연객…….”
지강백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나이 든 죽립인이 고개를 돌려 지강백을 바라보았다.
“아니, 몸이 좋던 자네 아닌가. 여기서 또 보게 되다니. 허허, 이것 참 우리가 인연이긴 한가 보세.”
죽립으로도 가릴 수 없는 반가운 표정이 만면에 드러났다.
그러나 지강백은 금방이라도 달려와 저를 얼싸안고 싶다는 듯 두 팔을 벌리는 무연객을 보며 착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연객이라고?”
호곽이 긴장 어린 손끝으로 삼첨양인도를 꽈악 움켜쥐는 것을 보았던 탓이었다.
“그렇다면 첩지가 진짜였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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