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39화 (39/346)

제39화 넷 중의 셋

펑!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탄구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지강백은 순간 연기로 인해 시야가 막히고야 말았다.

“두고 보자!”

살수가 던지는 마지막 음성이 귀에 꽂혔다.

그가 좀 전에 터트린 것은 탄구가 아니라 연막탄이었다.

두터운 연기 사이로 살수는 아지랑이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거기 서!”

지강백은 따끔한 눈을 비비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

곧 걸음을 멈췄다.

인기척 탓이었다.

정돈이 되어 있는, 묵직한 발걸음이 본능적으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발걸음 소리는 한 사람의 것만이 아니었다.

“대체 웬 놈이냐!”

내력이 담긴 우렁찬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경계를 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무릎이 꺾일 뻔했다.

지강백은 아직 연막탄을 맞은 후유증이 남아 있는 눈을 억지로 떴다.

시야가 아직 뿌연 터라 제대로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누군가의 패기 넘치는 기도는 느낄 수 있었다.

“감히 내 집 안마당에 내가 모르는 것이 섞여 있다니!”

휘잉!

길이가 네 척(尺: 1척은 약 30.3센티미터)은 될 법한 삼첨양인도가 공기를 찢으며 다가왔다.

아직 거리가 스무 걸음 이상 떨어진 상태인데도, 지강백은 뺨이 베일 것 같은 예기를 느꼈다.

“……읏!”

아직 시야가 탁하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지강백은 순전히 감각에 의존해 삼첨양인도의 공세를 피했다.

호흡처럼 익숙한 북두천강보가 발휘되었다. 두 발이 빠르게 교차하며 이동의 축이 바뀌었다. 지강백의 신형이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우측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 순간 양인도의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허리춤을 스쳐 갔다.

“한가락 재주가 있는 몸이었군.”

이어서 재빨리 거리를 벌리는 지강백을 보며 삼첨양인도의 주인이 말했다.

커다란 체구가 곰을 연상시킬 정도로 용맹한 느낌의 중년인이었다. 생김새마저 자세히 살필 수는 없었지만 그는 지강백이 쉽게 수준을 파악할 수 없는 경지의 고수였다.

“허나 피하는 게 고작이라면 내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는 안 될 일.”

호영장을 내 집이라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일 것이다.

삼첨양인도의 주인은 호영장주 호곽이었다.

지강백은 어떻게든 그를 마주 보려 애썼다.

“잠시만…… 귀하가 호영장주시라면 드릴 말씀이 있…….”

하지만 호곽은 이미 무기를 고쳐 쥐고 있었다.

“우선은 그 무례한 다리부터 거두겠다. 얘기는 그 다음에 들어 주마!”

물갈퀴처럼 생긴 넓적한 도가 날을 세워 하체를 찔러왔다.

길고 묵직한 병장기라면 그만큼 패도적인 힘을 내는 대신 다른 것을 감수해야 했다.

속도가 떨어지거나, 세심한 조절이 힘들다거나 하는 제약이 따라야 했다. 혹은 병기를 움직일 때 내는 소리가 크거나 해야 했다.

“……!”

그러나 호영장주 호곽의 저 무식한 삼첨양인도는 그 어떠한 제약도 없었다.

나비처럼 사뿐히, 섬광보다 빠르게 날아와 기척을 한껏 죽인 채 소리 없이 발목을 베어 갔다.

조만간 섬서의 호가를 포함해 오대세가가 아니라 육대세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괜히 강호를 떠도는 게 아니었다.

“큿,”

지강백은 다급히 발을 물리며 몸을 뒤로 뺐다.

움직이는 장창은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등 뒤에 있던, 움직이지 않는 정원석까지 느낄 수는 없었다.

턱!

바위틈에 뒤꿈치가 걸리며 보법이 흐트러졌다.

실전 경험이 거의 없다는 지강백의 약점은 일시적으로 시야가 막혔다는 사실과 얽혀 결정적인 실수를 야기했다.

호곽의 얼굴에 살기를 닮은 미소가 떠올랐다.

“걸렸구나!”

쐐액!

그가 삼첨양인도를 수직으로 치켜세웠다.

그대로 발목이 날아갈 상황에서, 지강백은 빠른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공격을 피하거나, 혹은 상대를 공격하거나.

어느 쪽이든 다리 한 쪽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무사히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

지강백이 그렇게 다리의 부상을 각오하는 순간이었다.

“이보게.”

서겅!

지강백은 갑자기 발밑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찰나의 순간,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지강백이 몸을 날렸다.

캉!

호곽의 삼첨양인도가 헛되이 땅을 후려쳤다.

공격이 허수(虛手)로 돌아가자 호곽이 미간에 어렴풋이 주름을 그으며 말했다.

“어째서 말리는가?”

이어지는 답은, 지강백도 익히 음성을 아는 자에게서 흘러나왔다.

“내가 그자에게 빚이 있네.”

호곽과 함께 나타난 자는 남궁진현이었다.

“아…….”

비로소 지강백은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았다.

호곽이 그를 공격하기 직전, 남궁진현이 나서서 발을 묶었던 바위를 검으로 쪼개 주었던 것이었다.

남궁진현이 왜 천하제일의 쾌검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출수가 한 박자나 늦었음에도, 남궁진현의 검은 이 자리에 있던 누구보다 빨랐다.

“자네가 빚을 졌다고?”

그는 새삼스럽다는 듯 지강백의 위아래를 훑었다.

“도통 믿지 못할 얘기로군.”

호곽이 보기에 지강백은 아직 풋내기였다.

보기 드문 자질을 지니고 있긴 했다. 좀 전에 한 차례 그의 공격을 피해낸 것만 보아도 남다른 성취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이제 갓 약관을 넘겼을 풋내기는 아직 강호가 무언지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호곽이 알기로 남궁세가의 이가주가 그런 풋내기에게 신세를 질 일이란 결코 없었다.

“대체 무슨 빚을 진 게지? 이쪽은 내 창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는데 말이야.”

남궁진현의 말을 더욱 못 믿게 하는 것은 그의 표정이었다.

남궁진현은 은인이나 지인을 보는 얼굴로 지강백을 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는 눈에는 적의가 더 많았다.

“……눈에 손해를 본 모양이군.”

역시나 지강백을 훑어보고 있던 남궁진현이 한 말이었다.

눈이 멀쩡했다면 지강백의 대응이 달랐을 것이라는 말이었지만, 호곽은 그 뜻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지강백은 강제로 눈에 안력을 돋우며 한 차례 호흡을 골랐다.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다 보니 차츰 시야가 맑아졌다.

“예, 방금 전 눈에 연기를 맞았습니다.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남궁 대협.”

늦게나마 포권으로 인사를 하는 지강백을 남궁진현이 말렸다.

“하지 마라.”

“……예?”

“내게 인사를 하지 말란 말이다. 한 번은 네놈 목숨을 붙여두겠다 했다. 이번이 그 한 번이다. 두 번째는 기필코 네 목숨을 취할 것이다.”

“…….”

여전히 그는 지강백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두 번째가 시작되기 전에 어서 사라져라. 나는 네놈이 어여뻐 살려두는 것이 아니다.”

남궁진현을 보는 지강백의 표정이 굳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무어라?”

“남궁 대협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상황이 급한 터라 결례를 무릅쓰고 호영장의 문턱을 넘었습니다.”

남궁진현이 그 말의 진위를 따져보는 사이 호곽이 나섰다.

“좀 전에는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번에는 그게 아니라 섬격검에게 할 말이 있었다? 어느 쪽이 사실이냐.”

“정확히는 두 분께서 아셔야 하는 일입니다.”

지강백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남궁진현과 처음으로 맞부딪혔던 다리 위의 상황과, 그 함정은 살막에서 설치했다는 것.

그들이 처음부터 노렸던 것은 남궁진현의 목숨이었으며 그를 남궁세가에서 끌어내기 위해 무연객의 첩지를 이용했다는 얘기가 짧게 축약되어 이어졌다.

“……해서 급하게 들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수는 이미 호영장 내부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가 무슨 수를 쓸지 모르는 이상,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야 합니다.”

남궁세가의 깃발을 이용해서 호영장의 문지기들을 속였다는 고백을 할 때는, 별수 없이 목덜미 쪽이 벌겋게 달아오르긴 했다.

“멋대로 남궁세가를 사칭한 것은 사과드리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지강백을 바라보는 남궁진현은 계속 날이 선 표정이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살인청부를 했다는 말을 듣는 것은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살막의 이름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강호에서 가장 이름값이 높은 살인청부 집단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남궁진현은 그 얘기를 하필이면 지강백이 해주었다는 사실이 더 언짢았다.

어쩐지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결코 달갑지 않은 그 빚을, 또 한 번 지게 되는 셈이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 애송이와 계속 얽히는 이 목숨빚은 인연인 것인지, 아니면 악연이라 해야 하는지.

남궁진현을 대신해 호곽이 나섰다.

“그런데 그 얘기에는 가장 중요한 게 빠졌군.”

“그게 무엇입니까?”

“자네.”

“……예?”

지강백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호곽을 마주 보았다.

“자네가 누구이기에 우리를 위해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지가 빠졌잖은가. 자네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자네의 사문은?”

“아……,”

지강백의 눈초리가 난처해졌다.

“죄송합니다. 그것은 사부님의 명이 있는 터라 밝힐 수가 없습니다.”

“밝힐 수 없다? 그것 참 저 편할 대로군. 누군지 밝히지도 못하면서 자네 말은 믿으라는 소린가? 애초에 거짓으로 내 집 담을 넘은 자의 말을?”

호곽은 지강백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무연객의 첩지가 거짓이라니. 그렇다면 이 내가, 호영장 전체가 일개 자객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소리냐?”

“그건……,”

“제 사문도 밝히지 못하는 자가 감히 나를 모욕할 주제가 되는지부터 따져봐야 하는 일이겠군.”

일순 말문이 막혔다.

지강백은 남궁진현을 돕고자 했던 자신의 선의가 이렇게나 잘못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낯빛을 무겁게 가라앉힌 지강백이 말했다.

“호 장주님께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진실이 어찌 모욕이 될 수 있습니까. 저는 남궁 대협을 돕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게 문제라는 말이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남궁세가의 이가주에게 빚을 지우려 함이냐?”

“자격이 필요한 일입니까?”

지강백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단순했다.

그는 자신이 믿고 있지 않는 바를 내뱉은 적이 없었다.

그가 하는 말이 곧 그라는 사람이었다.

“도울 수 있는데 일부러 돕지 않는 게 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무어라?”

“제게는 그래야 마땅한 일입니다. 선이라 할 것도 없고 빚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니 빚이라 여기지 마십시오. 빚이라 여겨 되갚길 바라는 것이 아니니 제가 누군지 아실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호곽이 이를 부득 갈았다.

“이런 건방진……! 지금 내게 강호의 도의를 가르치겠다는 것이냐!”

호곽이 다시 삼첨양인도를 치켜세웠다.

지강백도 호락호락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제 도의를 따지시기 전에 먼저 호 장주님의 도의를 생각하셔야 할 듯합니다. 살수가 목숨을 노리는 쪽은 호 장주님의 친우 되시는 분입니다.”

“닥쳐라!”

부웅!

삼첨양인도가 크게 허공을 가르며 지강백을 겨냥했다.

그를 말린 것은 남궁진현이었다.

“그만두게.”

호곽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끝까지 이자를 감싸겠다고?”

“감싸려는 게 아니야. 한 번은 살려두겠다 한 내 말을 지키려는 것이지.”

“그래서 나도 한 번은 인내를 보였잖은가! 자네가 한 번을 살려두기로 했으니 나도 한 번으로 참겠네! 더는 말리지 말게!”

호곽이 남궁진현을 무시하고 출수하려 들었다.

그 순간,

턱!

남궁진현은 저도 모르게 호곽의 팔뚝을 붙들고 있었다.

“……!”

“…….”

호곽도 놀랐지만 남궁진현 스스로도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살수의…… 유무부터 살펴도 늦지 않아.”

남궁진현은 당혹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믿을 수 없다면 증거를 갖추면 될 터. 저자의 말을 다 믿을 이유도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믿지 않을 이유도 없네.”

“지금 나보다 저자를 더 신뢰하겠다는 말인가? 호영장은 확실히 무연객의 첩지를 받았네!”

남궁진현이 눈빛을 세웠다.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이지. 친우인 자네를 돕기 위해. 허나 만약 그것이 저자의 말대로 나를 해하기 위한 살막의 함정이었다면, 자네는 이를 어쩔 셈인가?”

혹시라도 오늘 이 자리가 남궁진현에게 살(殺)이 끼인 날이라면.

호곽은 그 죄책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아!”

홱!

호곽이 남궁진현의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자네가 그리 말한다니 나 또한 한 번을 더 인내하지.”

이어서 호곽의 시선이 지강백을 향했다.

“네가 있다던 살수를 찾아 내 앞에 데려오너라. 그때는 네 비례(非禮)를 용서하는 것은 물론이요, 호영장주의 친우를 위한 것에 대한 감사도 더하겠다.”

지강백은 덤덤한 얼굴로 그에게 포권을 취했다.

“말씀드렸듯이, 감사는 필요치 않은 일입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호곽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불거졌다.

“끝까지 그리 건방을……. 아직 마음을 놓지 마라. 나는 아직 너를 믿는 게 아니다. 만약 살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네 말이 거짓이라는 뜻. 그때는 남궁세가와 호영장을 농락한 대가를 네 목으로 치러야 할 것이다.”

지강백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두 가문 모두 농락한 적이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럼 이만 먼저 가서 살수의 행적을 뒤쫓겠습니다.”

말을 마친 지강백이 몸을 돌렸다.

휘잇, 탓!

군더더기 없는 신법이 경쾌한 바람을 일으켰다.

“괘씸한 것 같으니.”

호곽이 지강백의 등을 보며 중얼거렸다.

“천하제일쾌검에 이어 호영장주도 꼴을 우습게 만드는군. 대체 얼마나 대단하신 사문이기에 이런 짓을 저지르고 다니면서도 밝히지 않는다는 겐지, 그것 참 아주 궁금하군그래.”

그 순간 말이 엉켰다.

“방금 그 수,”

“음?”

호곽이 말을 멈췄다.

남궁진현이 경직된 얼굴로 지강백이 남긴 발자국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이었다.

“왜 그러는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본 적이 있다고?”

나올 듯 말듯 흐물대는 기억을 더듬는 남궁진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서 온 자란 말이냐.”

그런 친우를 보며 호곽이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로군. 누군가 암살청부를 넣었다고 하는데 정작 자네는 그보단 저자에게 관심이 더 많아 보이니.”

“…….”

남궁진현은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그 스스로도 조금 전부터 이상한 일이라 여기고 있었으므로.

“뭐, 그렇다 치고. 우리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경계를 세워야겠군.”

호곽의 말이 맞았다.

이곳 어딘가에는 남궁세가 이가주의 목숨을 노리는 살수가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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