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38화 (38/346)

제38화 이미 온 자는 선하지 않다

“시간이 없으니 따로 움직이자. 나는 이쪽으로 움직이겠다. 그자의 얼굴은 기억해?”

호영장으로 들어선 지강백의 말이었다.

용천휘는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내 생각에도 따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사형은 어서 가 봐.”

“그래.”

탁, 스슥!

지강백은 마차가 멈춰 서기도 전에 먼저 신형을 날렸다.

그가 재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호영장의 안내인이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어, 어디를 가는 것이냐!”

탁!

그때 용천휘가 부채를 접어 창문틀을 때렸다.

“무연객이 이미 호영장 안에 들어섰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있기에 내가 행적을 쫓으라 시켰다. 내 몸종은 익히 무연객의 얼굴을 보아 알고 있다.”

“아……,”

“그렇기에 이가주님보다 내가 먼저 온 것이지. 무연객의 행적을 미리 쫓기 위해 말이다.”

그렇다는데 더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시군요.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쯧. 안내나 해라.”

“예.”

안내인은 용천휘의 호칭을 무어라 해야 좋을지 몰라 조금 망설이는 듯 보였으나 곧 일행의 마차를 내원으로 이끌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채희유가 아주 작은 음성으로 물었다.

“안으로 들어가 무얼 어쩌실 생각이신지요.”

용천휘가 느릿하게 턱 끝을 휘저었다.

“아무 생각 없어. 어떻게든 되겠지.”

“남궁세가에서 보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들통이 날 텐데요.”

“그 전에 누구든 오겠지. 무연객이든, 남궁진현이든. 그걸 구경하기 위해 미리 자리를 잡고 있자는 거야.”

채희유가 조금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너무 무책임하신 것 아닙니까. 소야의 행사가 어디로 향하든, 저와 삼좌위가 함께 보좌하는 한 별다른 문제는 없겠습니다만…… 지금은 사형분께서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 앞에서 함부로 저희들의 본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잔소리는.”

용천휘가 시큰둥한 어조로 채희유의 말을 잘랐다.

“잔소리 많은 여자는 매력이 없다고. 사내를 금방 질리게 한다니까. 적당히 해, 적당히.”

“저는 지금 여인으로서 소야를 보필하는 게 아닙니다.”

“무슨 상관이야. 내가 원하면 넌 언제든 여자가 되어야 하는데.”

“…….”

채희유가 입을 다물었다.

용천휘는 무겁게 가라앉는 하얀 얼굴을 보며 장난처럼 웃었다.

“그게 바로 너와 내 사형이 재미있는 이유지. 그 바보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나올지 나는 몹시 기대하는 중이야. 가끔은, 참지 못할 정도로.”

채희유의 입술 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시간이 약간 흐른 뒤였다.

“저는…… 소야께서 그를 각별히 여기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맞아.”

용천휘가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은 너무 해맑아서 잔인함과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각별하게 괴롭혀 주고 있잖아. 한껏 공을 들여서. 너도 이미 알고 있던 일 아닌가?”

티 없이 선명하고 깨끗한 동공이 채희유를 향했다.

그 눈이 말하고 있었다.

너 역시, 그를 괴롭히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중이라고.

“…….”

채희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탓, 타닷!

“거기 서!”

지강백은 마침내 아지랑이 조각 같은 천잠투의의 옷자락을 발견했다.

“……들켰군.”

스스슷.

살수가 동작을 멈추고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빈틈없이 감싼 천잠투의의 사이로 눈만 뻐끔히 드러났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은 살의로 불타고 있었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죽음을 각오한 것이냐?”

“아니. 그렇진 않아.”

지강백은 침착한 눈길로 살수를 살폈다.

용천휘는 그의 무위가 별 볼 일 없는 수준일 것이라 했다. 과연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지강백은 예리하게 그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좇았다.

“남궁 대협의 암살을 말리기 위해 왔다.”

“흥.”

살수가 코웃음을 쳤다.

“그 부러진 팔로? 살막의 살수와 맞서겠다는 것이냐?”

“부러져?”

지강백이 제 오른손을 힐긋 들어 보였다.

채희유가 독기를 빼주고 직접 약을 발라준 손이었다. 당장 면포가 없다며 자신의 여벌옷으로 상처를 감싸 주었는데, 어찌나 단단히 둘러놓았던지 부목을 댄 것처럼 뻣뻣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부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제 손을 바라보는 지강백의 눈가가 양영천을 대할 때처럼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내 팔이 부러졌거나 말거나 지금 이 자리에서 너를 말려야겠다는 생각은 확고하다.”

“살막의 행사를 방해하겠다는 소리냐? 대체 네가 무슨 이유로, 무슨 자격으로?”

“……남궁 대협과 무연객, 둘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격도, 이유도 있다고 본다.”

하마터면 종남의 제자로서 연고가 있는 자를 해치려 하는 불의는 참을 수 없다, 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하산했을 때 종남파 제자라는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사부의 엄명은 유효했다.

살수의 눈빛이 돌변했다.

“뭐, 뭣이? 무, 무연객이라니…… 설마 내가 그 첩지를 가짜로 만들어낸 것을 알았…… 읍!”

이번에도 묻지 않은 사실을 알아서 착착 읊어주는 재주는 어디 가지 않았다.

당황한 그가 제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유감스럽게도 너무 이미 늦은 일이었다.

“역시 그랬군.”

지강백이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살수가 톡 쏘아붙였다.

“역시라니! 그럼 네가 살막의 수를 읽고 있었단 말이냐?”

“내가 아니라 내 사제가.”

“……이런 괘씸한.”

살수가 이를 갈았다.

“아무도 모르게 남궁진현을 끌어낼 절호의 수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닐 거라 보는데. 일단 내 사제가 눈치챘으니.”

지강백은 상대를 배려해서 그 사제가 돈을 주고 이제 갓 입문한 강호일자무식이라는 얘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런 인간도 눈치챈 일이니,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챌 수도 있을 거라는 게 지강백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만두는 게 낫지 않겠나. 여기서 멈춘다면 나도 더 이상 관여치 않겠다.”

“뭐라고?”

복면 안에서 살수가 입을 쩍 벌렸다.

“지금 살막의 살수를 회유하려 드는 것이냐? 청부금을 다섯 배로 올려준다 한들, 한번 착수한 일은 절대 무르는 법이 없는 게 살막의 원칙이다!”

용천휘라면 여기서 그럼 여섯 배로 올려줄게, 라고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강백은 아니었다.

“말로 회유가 되지 않는다면 몸으로 하겠다.”

“뭐? 그게 무슨……,”

뚜둑.

지강백이 왼손 주먹을 풀었다.

용천휘의 말이 옳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눈앞의 살수는 천잠투의라는 현란한 기보와 상승의 경신술, 그리고 위력적인 암기들을 지녔지만 정작 본신의 무공은 그리 대단하지 못할 것이다.

“움직이지 못할 만큼 두들겨 패면 살수 노릇도 못 하겠지.”

“이이…… 감히!”

예상했던 대로 살수는 발끈했다. 그가 품을 뒤져 뭔지 모를 암기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살인멸구하겠다! 받아라!”

휘리릿!

암기가 날아왔다. 끝이 뾰족한 삼각 표창 같은 암기였다. 그러나 표적에 일단 닿으면 용수철 장치가 움직여 삼각뿔처럼 생긴 끄트머리가 독을 내뿜는, 몹시 까다로운 물건이었다.

지강백은 암기에 대해서는 경험도, 지식도 없었지만 그가 던지는 암기에 독이 묻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미 겪어 알고 있었다.

받아내거나 맨손으로 쳐내서는 안 되었기에 지강백은 허리를 젖혀 암기를 피했다.

“흥!”

그러나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살수는 곧이어 두 번째 암기를 날렸다.

두 번째 암기는 지강백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암기를 때렸다.

탁!

충격이 가해진 암기가 이음매를 벌리며 치익, 독을 뿌렸다.

“읏,”

지강백은 호흡을 막음과 동시에 회심퇴의 한 수를 발휘했다. 몸의 축이 뒤꿈치로 옮겨가며 신형이 마치 떠밀린 것처럼 뒤로 한 장가량 이동했다.

그 와중에 지강백이 회심퇴로 일으킨 흙먼지는 바람이 되어 독기를 흩뜨렸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양영천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벌떡 일어나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내 어여쁜 제자는 어쩜 이리도 반사 신경이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하냐면서.

상대를 가격하는 게 원칙인 퇴법을 이렇게 응용하는 것은 내 귀한 제자가 처음일 것이라고.

어쨌거나.

“칫, 보기와는 다른 놈이군. 몸종 노릇은 그저 허울일 뿐이었느냐! 사기꾼 같으니.”

“살수가 남을 욕해도 되는 건가.”

살수가 말도 안 되는 불평을 토하는 동안 지강백은 틈을 주지 않고 곧장 정면으로 달려갔다.

“읏, 뭐 이리 빨라!”

살수가 뒤로 물러나며 이번에는 암기를 연달아 발출했다.

따당!

좀 전처럼 두 번째 암기가 첫 번째 암기를 때렸고, 독이 뿜어져 나왔다.

지강백은 좀 전처럼 신형을 물리는 대신, 허공에서 한 발을 더 띄워 공중제비를 도는 것으로 아예 독기가 쏘아진 공간을 뛰어넘어 버렸다.

안색이 변한 살수가 소리를 질렀다.

“이런 게 어디 있느냐! 아까처럼 뒤로 물러났어야지! 그럼 내가 이 흑염탄으로 독기를 더 넓게 퍼트릴 생각이었는데!”

지강백이 신형을 낮춰오며 말했다.

“어쩐지 너는 살수를 해서는 안 될 인간 같은데.”

“뭐, 뭐라는 거냐! 나는! 살막주의 아들이다! 비록 셋째긴 하지만! 장차 살막을 물려받아야 할 내가 어째서 살수가 될 수 없다는 거냐!”

지강백이 혀를 찼다.

살막주의 셋째 아들이 너무 바보 같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정체를 정확히 맞춘 용천휘가 새삼 놀라워서였다.

“사람은 겉으로만 봐서는 모르는 일이라더니…….”

지강백의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 오해한 살수는 더욱 분노했다.

“아니야! 나는 모자라지 않다! 겉도 속도 완연한 살수라고! 살수의 전설이었던 가친의 명예에 모자람이 없는 살수가 나의 꿈이다! 이걸 받아랏!”

독기를 퍼트릴 목적이었다던 흑염탄이 날아왔다.

탄구는 독보다 더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받아내거나, 받아치거나, 혹은 피해도 반드시 터지는 것이 탄구였다.

“하압!”

지강백은 왼 주먹에 내력을 집중시켰다.

부웅!

구 성의 태을신공을 가득 담은 주먹이 날아오는 탄구에 맞서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지강백은 권으로 탄구를 후려치는 게 아니라, 주먹과 탄구 사이의 공간을 때렸다.

퍼억!

주먹에 실은 진기의 영향으로, 공기의 파동이 생겨났다.

날아오던 탄구가 주춤 힘을 잃었다. 지강백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섯 손가락을 펼쳐 탄구를 손바닥으로 끌어들였다.

간단한 수인 듯 보였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북두천강권이 오뢰정인으로 순식간에 변화하는 이 흐름은 지강백이 일궈온 십칠 년의 세월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얼마 전 태을분광검을 대성하면서 초식의 변화에 대한 깨달음을 겪은 바 있었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여 지금의 한 수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으아악! 흑염탄을 맨손으로 받아 내다니! 이건 우리 큰형님도 못 할 텐데! 아악, 말도 안 돼!”

살수가 절규했다.

하지만 조금 이른 감이 있었다. 지강백이 손가락 사이에 흑염탄을 끼운 채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무 짓도 하지 말고 여길 떠나라.”

살수는 이 상황이 기가 막힌지 발을 쿵쿵 굴렀다.

“뭐야? 지금 내게 살막이 온 힘을 기울여 만들어낸 암기의 결정판, 화약은 황궁에서만 독점으로 다루는 이 나라에서 오직 살막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이 더럽게도 비싸고 특수한 암기인 흑염탄을 던지겠다고 협박하는 것이냐!”

정답이었다.

물론 손안의 탄구가 그렇게 귀한 물건인지는 이제껏 모르고 있었지만.

“탄구를 빼앗는 일은 네 큰형님도 못 할 것이라 했으니 너는 더더욱 못 하겠군. 그래, 네 암기에 당하지 말고 곱게 꺼져라.”

“그렇게는 못 해! 살막의 위명에 내가 흙칠을 할 수는 없어!”

“이대로 제 탄구에 당하는 게 더 수치스러운 일 아닌가?”

“이, 이이잇! 물론 그렇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 청부를 꼭 성공시켜야 한단 말이다!”

말을 해놓고 보니 새삼 억울한 듯, 살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왜 갑자기 끼어들어서 내 일을 방해하고 나서는 거야! 왜! 내가 어떤 심정으로 이 청부를 행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놈이! 네놈이 대체 뭔데! 남궁진현의 숨겨놓은 자식이라도 된단 말이냐! 아니면 살막에 원수라도 졌느냐!”

“뭐라고?”

화가 난 것처럼 지강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약간 화가 나긴 했다.

퍽!

그 증거로, 방금 전까지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흑염탄이 어느샌가 주먹 안에서 깨끗이 박살이 났다.

그것을 목격한 살수가 눈을 크게 떴다. 동공이 부르르 흔들렸다.

지강백은 화약 가루가 되어버린 탄구를 미련 없이 털어냈다.

“나는 남궁세가의 인물도 아니고, 살막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다. 하지만 나는 무인이다.”

공중으로 흩어지는 탄구의 잔해는 검은 얼룩이 되었다.

“그, 그게 뭐라고! 나 역시 무인이다! 무를 익히면 누구나 무인이,”

“틀려.”

지강백의 반듯한 얼굴을, 공기 중에 번진 검은 얼룩이 점점이 감추었다.

그러자 그 반듯한 얼굴이 무슨 징조라도 되는 것처럼 불길하고 음산하게 보였다.

“내 사부님은 내가 아는 한 이 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무인이시다. 나는 사부님께서 이미 자연경에 이른 절정의 고수라 믿는다. 하지만 나는 사부님이 무공을 쓰시는 장면을 딱 한 번 보았을 뿐이다. 그것은 다섯 살 아이에게서 감을 빼앗아 달아난 길거리의 사기꾼 거지를 때려잡으실 때였다.”

“뭐……?”

그게 무슨 어울리지도 않는 헛소리냐고 했을 것이다.

자연경에 달한 고수라면 강호를 제패해도 모자랄 판국에 길거리 거지나 때려잡고 앉았다니.

그러나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지강백의 얼굴을 앞에 두고 그런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내게 무(武)란 그런 것이다. 산을 무너뜨리고 용을 산 채로 잡을 수 있다고 해도 무란 약자를 돕고 악인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제아무리 대단한 무공이라 하더라도 그저 잡기일 뿐, 무라 칭할 수 없다.”

지강백이 으득, 이를 물었다.

“하물며 가진 바 무공으로 돈을 받고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인간이라니. 내게 있어서 너는 무인이 아니다.”

그가 발권 자세를 취했다.

살기와는 다른 위협적인 기운이 지강백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그러니 같은 무인으로 대하지도 않겠다. 기어이 살수 노릇을 하겠다면 더는 설득하지도 않겠다.”

슷, 휘익!

그리고 지강백의 신형이 날아들었다.

“으악, 안 돼!”

살수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펑!

무언가가 터졌다.

지강백의 코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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