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이 앓는 놈 뺨치기
“그게 살막의 비기라고?”
용천휘가 태연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우리 집에 한 대여섯 벌은 있었던 것 같았는데.”
필목현이 옆에서 그 말을 거들었다.
“웬걸요. 대여섯 벌이 뭡니까.”
“그보다 적었나?”
“아니요. 많았습니다. 도련님이 그걸 입으시고 숨바꼭질을 하느라 두어 벌 태워 드셨고, 저 역시 도련님을 잡겠다며 먹물을 뿌린 게 몇 벌 되지요. 그래서 남아 있는 게 대여섯 벌일 겝니다.”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에잇!”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살수가 복면을 잡아챘다.
드러나는 얼굴은 의외로 앳된 태가 나는 젊은 모습이었다.
묘한 것은 살수라던 그의 인상이었다.
흔히 살수라 하면 표정에 살업이 쌓여 있기 마련일 텐데, 그에게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수더분하고 어리숙한 인상이 강했다.
“천잠투의는 그렇게 흔한 게 아니야! 천잠투의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으로부터 육십칠 년 전, 직포(織布: 베로 옷감을 짜는 일)의 명가로 이름 높은 절강 황가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지. 주변을 반사해 그것을 입은 이의 종적을 숨겨주는 이 옷감은 강호에 나오자마자 단숨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천잠투의의 역사를 읊는 살수는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특히나 살수나 야객(夜客: 도둑)처럼 은신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절대적인 기보가 되었지. 황가에서 이 옷감으로 만들어낸 천잠투의는 모두 열한 벌! 열한 벌의 천잠투의를 놓고 강호는 일대 파란을 맞이해야 할 정도였다. 이 보물을 독차지하려는 일부의 욕심 탓에 절강의 황가는 하루아침에 모든 식솔이 몰살당하는 참화까지 겪어야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참 사연 많은 옷이었다.
“심지어 당시 무림맹주 격이었던 소림 방장까지 나서 강호의 안녕을 위한다는 이유로 천잠투의를 수거해 장경각(藏經閣: 각종 무공비급과 경전들을 보관하는 소림사의 서고)에 보관하겠다는 개소리마저 지껄였지.”
정말 난리긴 했던 모양이다.
“때문에 천잠투의를 좇는 자는 그 사특한 소림방장의 간계로 인해 무림공적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총 열한 벌이었던 천잠투의가 몇 벌로 줄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 게 바로 천잠투의였어! 본 막이 마지막 남은 천잠투의를 손에 넣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그 물음에 용천휘는 부채질을 했고, 필목현은 고개를 저었으며 채희유는 조금의 관심도 드러내질 않았고 지강백은 솔직하게 말했다.
“모른다.”
너무 솔직한 게 탈이었을까.
살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천잠투의는! 비기라는 말이 아깝지 않단 말이다! 천잠투의가 살막의 백우환영보와 한데 어우러지면! 그 누구도 살막이 드리우는 죽음의 장막을 벗어날 수 없다!”
분명 그럴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가 이런 말을 하는 상대가 용천휘와 필목현이라는 것이었다.
집에 천잠투의를 가볍게 대여섯 벌 정도 쟁여놓고 사는, 대체 춘부장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는지 도통 모를 그런 집안이라서.
“아, 그런데 천잠투의라는 건 사실 망가트리는 게 간단합니다.”
대체 언제부터 지니고 있었는지 필목현이 짐승 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원래는 먹물이 훨씬 더 효과가 좋습니다만, 지금 당장은 먹이 없으니.”
“뭐…… 뭘 하려는 거야?”
살수가 안색을 바꾸는 것과 동시에, 필목현이 물주머니를 지강백에게 건넸다.
“뿌리십시오. 저 옷은 젖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살수가 펄쩍 뛰었다.
“뭐? 천잠투의를 젖게 하겠다는 거야? 그럼 이 옷은 무용지물이 된다고!”
용천휘가 혀를 찼다.
“못 쓰게 만들려고 그러는 거지, 당연히. 너는 우리를 살인멸구할 거라며?”
“이, 이게 어떤 물건인지 내가 그만큼 말을 했는데도!”
“알 게 뭐야. 우리 집에는 대여섯 벌이나 있다는데.”
“이, 이런…… 이런 무식한 놈들! 비기를 아낄 줄 모른다니! 이런 저급하고 후안무치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던지 살수가 아드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미 의미를 잃은 분노였다.
물주머니를 손에 든 지강백이 앞으로 달려 나갔던 것이다.
“오, 오지 마!”
휘익, 타닷!
살수가 저만치 뒤로 물러났다.
사람은 바보 같다지만 실력마저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순식간에 지강백과 거리를 벌렸다.
“다, 다음에 두고 보자! 내가 이대로 물러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너희들은 이미 살막의 그물 안에 걸린 물고기나 다름없는 목숨!”
팟!
그리고 그는 천잠투의의 힘을 빌려 마치 꺼지듯 모습을 감추었다.
“놓쳤군.”
지강백이 애꿎은 땅을 차며 말하자 용천휘가 고개를 갸웃댔다.
“쫓아보낸 게 아니고? 귀찮은데 잘된 거 아냐?”
지강백이 한심하다는 듯 그를 마주 보았다.
“못 들었나? 이대로 물러나지 않겠다고 했잖아. 우리가 살막이라는 청부 집단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그래서?”
위기의식이라고는 벼룩의 콧물만큼도 없는 심드렁한 대꾸였다.
지강백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그 얼굴에 대고 내뱉었다.
“살인 청부 집단이란 게 어떤 곳인지 모르겠나?”
“내가 그걸 알아야 해?”
“그쪽에서 네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하면 마땅히 알아 둬야지.”
용천휘가 피식 웃었다.
“노려 봤자지.”
“뭐라고?”
용천휘의 다음 말은 지강백을 놀라게 했다.
“저런 실력으로는 노려 봤자라고.”
“그걸 어떻게 장담하나?”
기가 차서 한 말이었는데, 용천휘의 답은 의외로 일리가 있었다.
“저 바보는 분명히 살막에서도 꽤 위치가 높은 자일 거야. 나이는 어리고 실력은 별 볼 일 없더라도 말이지. 어디 보자, 살막주의 막내아들쯤 되겠군.”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천잠투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제 말로 살막의 비보라고 했잖아. 딱 한 벌 남은 거라고도 했고. 그러니 막내아들쯤 되지 않으면 함부로 걸치고 다니지도 못할 거라고. 내 말이 틀려?”
“……틀리지는 않는 것 같군.”
그러나 용천휘가 틀린 점도 있었다.
“그렇지만 실력이 없다는 말에는 동의 못 하겠다. 천잠투의를 배제하고 보더라도, 그자의 신법은 놀라운 경지였어.”
“글쎄. 과연 그럴까?”
탁탁.
용천휘가 부채 끝으로 제 손바닥을 가볍게 내려치며 말을 이었다.
“천잠투의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는 게 들통 나자마자 달아났지. 살수라 하지만 직접 손을 쓰는 것은 피하고 함정을 설치하거나 탄구를 썼어. 그리고 사형이 부상을 당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지. 그게 다 무슨 의미라고 생각해?”
지강백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설마…… 무공에 자신이 없어서 그랬다는 말인가?”
“정답. 생각해 보면 뻔한 일이잖아. 아까 다리가 무너졌던 함정도 우리가 아닌 남궁세가의 마차를 노렸던 걸 거야.”
“그래서 함정이 이중이었군. 남궁 대협이 마부석에 타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독침으로 마부를 먼저 제압한 뒤 그대로 다리를 건너게 하려고 했던 거야.”
“맞아. 그런데 우리가 재수 없게 그 다리를 먼저 건너려고 했던 거지.”
지강백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마부석에 타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로군.”
용천휘가 지강백을 향해 씨익 웃었다.
“그렇지. 우리가 목숨을 건진 건 다 사형에게 몸종 노릇을 하라 했던 내 선견지명 덕이란 말씀.”
가끔 지강백은 이런 생각을 했다.
저놈의 사제가 말버릇만 좀 괜찮았어도 둘은 사이가 좋은 사제지간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흰소리는 집어치워.”
“뭐야, 내 말이 틀렸다는 건가?”
“선견지명이란 말은 흰소리지. 하지만 네가 생각만으로 내가 보는 사실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던 점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 점은 인정하겠다.”
“흐음.”
지강백의 솔직한 말이 뜻밖이었던지 용천휘가 부채질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 거렸다.
“나는 말이야, 항상 우리 사형이 바보는 아닐지 걱정했거든. 그런데 이제 보니 안 해도 되겠어. 적어도 살막주의 막내아들보다는 똑똑하네.”
그래. 저 말버릇이 문제였다.
“개소리도 집어치워.”
“왜 칭찬을 해줘도 싫어하지? 이거 좀 서운한데.”
정말로 서운한 건 어느 쪽일까. 과연.
지강백은 용천휘가 내뱉는 영양가 없는 말을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있어. 네 말대로 그 자체는 별 거 아닌 인물이라 해도, 살막 전체를 별 게 아니라 말할 수는 없을 테니. 살막의 표적이 되었다고 하면 정말로 곤란할 것이다.”
용천휘는 이번에도 지강백을 놀라게 했다.
“그럴 일 없어.”
“어떻게 확신하나? 그자가 살막주의 막내아들이 확실하다면 살막에서는 더더욱 정체를 감추려고 들 텐데.”
“왜냐면 그 바보는 정식으로 청부를 수행하는 중이 아니니까.”
퍼덕퍼덕.
부채가 나비처럼 살랑거렸다.
평소 같으면 표정을 교묘하게 가리는 저 부채의 움직임이 퍽 거슬렸을 텐데 지금은 그런 것에는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뭐라고? 그걸 어떻게,”
“생각을 하면 간단한 일이야. 실력은 모자라고, 더불어 머리도 모자라고. 사형 같으면 그런 모자란 아들에게 천하제일쾌검의 살인 청부를 맡기겠어? 실패할 게 뻔할 텐데?”
답은 당연히 아니요였다.
“하지만 그자는,”
“그래. 살막은 그렇다 쳐도 개인적으로는 우리에게 제 정체를 들킨 것을 수습하려고 들 테지. 또 다시 달리는 마차 안에 탄구를 집어던진다고 생각하면 속이 메스꺼워지네, 젠장.”
탁.
부채를 접은 용천휘가 지강백을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바보를 처리하자.”
“우리가 먼저?”
“그래.”
용천휘는 부채 끝으로 지강백의 등 뒤를 가리켰다.
“남궁진현이 호영장으로 간다고 했지. 그러니까 바보 살수도 분명히 호영장으로 갈 거야. 가서 세 번째 함정을 파고 있을걸.”
용천휘의 말을 되짚어보는 지강백의 얼굴이 굳어갔다.
“호영장에는 분명 무연객을 보기 위한 인파가 몰려들 것이라 했다. 엄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 수도 있겠군.”
“그자는 바보니까. 아니라고는 말 못 하지. 우리만 해도 억울한 피해자가 된 셈이잖아.”
그러자니 이제껏 잘만 타고 왔던 남궁세가의 마차가 마음 한구석에 걸리긴 했다.
어쨌거나.
“그리고 내 짐작으로는, 호영장에 무연객의 첩지가 도착한 것도 바보가 꾸민 짓일 것 같아. 남궁진현을 불러내기 위해서 말이야.”
“……하,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
지강백으로서는 생각도 못 할 일을, 용천휘는 단지 살수를 한 번 마주쳤다는 이유로 술술 풀어내고 있었다.
“그런 고로 잽싸게 호영장으로 먼저 달려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 바보를 잡을 수 있다는 얘기지. 사형은 어떻게 생각해? 아, 물을 것도 없지 뭐. 내 생각이 맞아.”
지강백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숭산에서는 조금 멀어지겠지만 별 수 없겠지.”
“웬일이야. 사형이 이렇게 고분고분하다니. 분명히 헛소리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다른 일이었다면 아마도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강백은 당장 살막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성보다 더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있었다.
“남궁 대협은 자신을 노리는 살수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안면을 트게 된 이상 알려주는 게 도리일 것 같다.”
“으음……. 그 대답은 좀 의외네. 남궁진현은 분명히 다음에도 또 본다면 사형을 없애버린다고 하지 않았어?”
“이번에도 도움을 준다면 그 다음이 다음다음으로 미뤄질지도 모르지.”
“뭐야, 고작 그런 이유로 도와주겠다고?”
“아니.”
지강백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도의를 모른 척하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그 말에 용천휘가 싱겁게 웃었다.
“……그래. 뭐, 그게 사형이라는 사람이지. 그래서 길을 돌아가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그래야겠지.”
“좋아. 그럼 호영장으로 가자.”
그렇게 행선지가 뜻밖의 지점에서 틀어지게 되었다.
“일단 말이나 마차부터 새로 구해야겠습니다.”
필목현은 탄구로 인해 엉망이 된 마차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허허, 대체 이를 어째야 하나…….”
귀찮은 일이 생겼다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게 용천휘가 말했다.
“신세 한탄은 관두고 가서 깃발이나 챙겨와.”
용천휘가 말하는 것이 남궁세가의 기라는 것을 알아챈 지강백이 인상을 썼다.
“그걸 대체 왜?”
굳이 따지자면 그 깃발 때문에 이 꼴이 났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걸 왜 챙기자고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챙겨 가면 분명히 쓸 데가 있어. 그때 가서 이 몸에게 감탄할 준비나 하고 있으라고.”
용천휘가 그렇게 말하자 지강백도 더는 싫은 표시를 내지 못했다. 사실 그는 용천휘가 미친놈치고는 매우 머리가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막 하고 있던 참이었다.
“에휴, 그럼 어디 가 보실까요. 일단 호영장까지 가는 길을 알아봐야겠습니다.”
필목현이 그렇게 말한 뒤 지강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빤한 시선에는, 설마 이 나이 드신 몸에게 낯선 곳에서 길을 찾아 헤매게 만드실 거냐는 애절함이 담겨 있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결국 지강백이 먼저 움직였다.
제법 거리를 벌려 부지런히 앞서 나가는 그의 등을 보며 용천휘가 작게 중얼거렸다.
“흠. 호영장으로 방향을 트는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렸군. 저 바보를 설득하려면 좀 더 곤란할 줄 알았는데.”
필목현이 곁에서 그를 점잖게 타박했다.
“너무 골리지 마십시오, 소야. 저렇게 좋은 사람이 아닙니까.”
“아아, 좋은 사람이니까 이럴 수밖에 없지 않겠어?”
용천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모를 얼굴로 계속해서 지강백의 등을 좇았다.
“정말로 기대가 되는군. 호영장에서 사형이 무연객과 맞닥뜨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필목현이 물었다.
“무연객이 호영장에 정말로 나타나리라 보십니까? 무연객의 첩지는 남궁진현을 이끌어 내기 위한 살막의 미끼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간단해. 그 미끼에 무연객도 낚인 거다. 그게 아니라면 무연객이 하필 이 시점에 이 근방에서 모습을 나타낼 리가.”
“하긴. 그도 그렇겠군요.”
지강백을 응시하는 용천휘의 눈이 점점 붉어지는 듯했다.
“세상에 그렇게 그럴싸한 우연이란 없다. 있다면 필연이겠지. 나와 무연객과 나의 사형처럼.”
지강백에게는 들릴 리 없는 그 말이 의미심장하게 허공으로 번졌다,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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