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33화 (33/346)

제33화 천하제일쾌검

“당장 비켜라! 한시가 급한 일이다.”

마부가 고압적인 자세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채찍을 높이 치켜들고 있는 자세가 말을 듣지 않으면 그대로 휘두를 것처럼 보였다.

“이 다리를 지나가려는 겁니까?”

지강백이 물었다.

하필 마차의 위치가 참 공교로웠다.

지강백 일행의 사두마차가 비좁은 다리 입구를 꽉 채우고 있는 바람에 그 뒤로 다가온 남궁세가의 마차는 도무지 다리를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지강백의 마차가 길을 돌리거나, 아니면 비켜서거나 해야 할 텐데 지금은 그것도 어려운 상태였다.

남궁세가의 마차가 너무 바싹 다가와 있는 탓이었다.

“보면 모르겠느냐! 어서 비키래도!”

“지금으로서는 비킬 공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부가 이어지는 지강백의 말을 끊었다.

“네놈들이 어서 마차를 몰아가면 되지 않느냐! 한시가 급하다는데 웬 잡소리가 그리 많아! 귓구멍에 돌덩이라도 틀어박혀 있느냐?”

계속되는 거친 하대에 지강백도 조금은 기분이 나빠졌다.

“이쪽은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마차를 막 돌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조금만 뒤로 물러나 주시면 길은 기꺼이 비켜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 다리를 건너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아마도 매복이……,”

“뭐얏?”

철썩!

지강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찍이 날아왔다.

교묘한 편의 움직임은 보통의 마부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적절한 빠르기와 탄성, 그리고 사나운 공세를 지니고 있었다.

남궁세가처럼 대단한 무가의 마부라면 이 정도 실력은 갖추고 있어야 된다는 듯, 제법 날카로운 한 수였다.

“남궁세가의 마차임을 알아보고도 비키지 않겠다고?”

생각에 앞서 몸이 먼저 반응했다.

지강백은 반 보를 뒤로 물려 어깨를 비스듬히 내렸다. 그렇게 흘려 넘긴 채찍 끝을 오뢰정인의 한 수로 낚아채려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손은 정체 모를 마비독에 중독된 상태였고, 그 바람에 채찍이 지강백의 손을 치고 가는 형태가 되었다.

별것 아닌 공격에 손해를 입어야 했던 지강백이 인상을 썼다.

“이런…….”

남궁세가의 일꾼으로서 무공을 한 자락 익혔다 하나, 마부는 마부였다.

그는 방금 일어난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공격이 성공했다 착각했다.

“이 채찍으로 갈가리 찢어 죽이기 전에 어서 마차를 앞으로 몰아라!”

“……후.”

지강백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은 오른손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이놈이 그런데도!”

휘리릭!

다시 채찍이 날아왔다.

지강백의 몸이 스르륵 움직여 잔상을 만들었다. 채찍이 잔상을 찢는 동안, 지강백은 회심퇴를 발휘해 채찍의 중간을 걷어찼다.

퍽!

질긴 가죽편은 휘어지거나 찢기는 게 아니라 아예 터져나갔다.

조각이 되어 흩어지는 채찍 조각을 보며 마부가 새파랗게 질렸다.

“이, 이게 무슨……,”

“남궁세가의 마차인 것은 알겠으나 그렇다고 위험을 부러 감출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저 다리에는 매복이 있는 듯하니 건너지 않는 편이 나을 겁니다.”

지강백은 끝까지 예의를 지켜 말하고자 했다.

허나 강호의 예의란 때때로 세상의 예의와 어긋날 때도 있기 마련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말로 해서는 비키지 않을 작정인 모양이로군.”

소리 없이 남궁세가의 마차 문이 열리고, 소리 없이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때 한 점 없는 은빛의 장포에, 같은 색으로 맞춘 화사한 영웅건을 이마에 두른 중년의 사내.

온몸으로 잘 갈린 칼과 같은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는 그는 바로 천하제일쾌검 남궁진현이었다.

그가 뾰족한 턱 끝으로 지강백을 가리켰다.

“본인은 호영장으로 가는 길이다. 호영장에 가기 위해서는 이 다리를 지나야만 하는 터. 그 길을 가로막고 서는 네놈은 무연객의 하수인이라도 되느냐?”

* * *

“아닙니다.”

지강백은 침착한 태도로 천하제일쾌검의 시선을 마주했다.

딴에는 차분해지려 애쓰고 있었지만 심장이 쿵쿵대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서 있는 자의 칼날 같은 예기.

그것이 지강백의 심장을 뛰게 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손이 꿈틀거릴 것 같아 지강백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대는 천하제일의 쾌검이라 했다.

자신은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무섭도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럼 무어냐.”

“우연히도 같은 길을 지나가게 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다 다리에 설치된 함정 탓에 약간의 손해를 입게 된 사람입니다.”

지강백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핏기가 사라진 손은 아예 파랗게 굳어 이제 더는 경련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강백의 얼굴은 덤덤했다.

신기하게도, 아무런 걱정도 들지 않았다. 채희유가 있으면 제 손은 언제나처럼 무사할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은 손에 대한 걱정은 잠시 미뤄 놔도 괜찮았다.

“다른 사람이 같은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을 막으려 했을 뿐. 거기에는 아무런 목적도, 숨은 의도도 없습니다.”

“그렇더냐?”

남궁진현은 지강백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지강백의 오른손에 멎었다. 중독이 되어 쓰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남궁진현은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온 무인이었다.

검사가 검사의 손을 몰라볼 리 없었다.

“정직한 손이로군.”

“……예?”

“분명 한 걸음 한 걸음 제 발로 내디디며 착실히 검을 익혀 왔겠지. 그런 검을 가진 자의 성정을 굳이 의심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길을 한시라도 빨리 지나야 하니, 가장 빠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남궁진현의 얼굴에 금이 돋아났다.

그것은 아무런 자비도 없는 살기였다.

“네놈의 마차를 먼저 지나가게 만들면, 어떤 함정이 있는지 알 수 있겠지.”

휙!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예기가 들이닥쳤다.

발검이 곧장 공격으로 이루어지는 남궁세가의 검이었다.

지강백은 이토록 빠른 검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읏!”

지강백이 몸을 뒤로 젖혔고, 천하제일의 쾌검은 아슬아슬하게 지강백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른 소매 사이로 핏물이 번졌다.

날카로운 통각을 제대로 인지할 사이도 없이, 남궁진현의 두 번째 수가 날아들었다.

지강백은 몰랐지만 남궁진현은 은근히 놀란 상태였다.

그는 새파란 애송이가 빠르기로는 강호제일이라는 자신의 검에서 이렇게 쉽게 달아날 줄 짐작하지 못했다.

“보기보다는 제법이군. 목숨을 건지다니.”

덕분에 검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

카칵!

군더더기 하나 없는 하얀 선 같은 검은 눈으로는 따라갈 수 없었다.

타다닷!

지강백은 오로지 감에 의존해 세 걸음을 연달아 뒤로 물러났다. 그가 물러선 걸음의 숫자만큼 핏무리가 늘었다.

살갗이 베인 정도의 얕은 상처라 하나 실력의 차이가 곧장 드러났다.

오른손을 쓸 수 있다 하더라도, 지강백의 패배는 자명했을 것이다.

“그만 길을 비켜라.”

그러나 그 빠른 검은 허초였다.

지강백을 뒤로 물러나게 한 남궁진현은 곧장 전진했다. 그 앞에는 용천휘와 채희유가 타고 있는 마차가 있었다.

지강백은 남궁진현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그들의 마차를 다리 위로 밀어 넣으려는 것이었다.

좀 전에 한 말대로, 어떤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안 됩니다!”

지강백이 몸을 돌려 남궁진현의 뒤를 쫓았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오로지 천하제일쾌검을 말려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내력이 모두 개방되었다.

단전이 꿈틀대는 것이 느껴지자마자 내력이 전신의 맥으로 휘몰아쳤다.

소환단과 만년설삼으로 인해 최근 비약적으로 증가한 내력은 이제 태을신공 구 성의 단계를 목도에 두고 있었다.

탓!

평소보다 더 빠르고 탄력적으로 신형이 튀어 나갔다. 몸을 움직이는 지강백 스스로가 놀랄 정도였다.

지강백의 왼손이 은은한 붉은 기운을 띠며 바람을 쥐려는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종남파의 절학 중 하나인 홍엽수였다.

“감히!”

쐐액!

남궁진현은 앞으로 달려가던 그 상태로 몸을 멈췄다. 그가 상체를 낮추며 칼을 길게 뻗었다. 지강백과의 거리를 벌리려는 의도였다.

지강백도 그것을 알았다.

남궁진현의 검을 피해 몸을 뒤로 물리면, 그가 먼저 마차에 도달할 것이다.

“읏,”

도리가 없다 생각했다.

지강백은 굳어버린 오른팔을 억지로 들어 올려 오뢰정인의 초식을 전개했다.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손이 없다 생각하면 되는 것이었다.

지강백은 손이 아닌 팔 전체를 움직였다.

남궁진현의 칼을 꼭 받아낼 필요는 없었다. 단지 그의 공격을 막아낼 단 한 순간만이라도 얻어내면 그것으로 족했다.

상대는 분명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고수였다.

스스로가 아직 약하다고 생각하는 지강백은 오히려 그 차이점을 명확히 인지한 상태에서 무공을 쓸 수 있었다.

사악!

살갗이 갈렸다.

그러나 지강백의 피 흐르는 팔뚝은 마치 감싸듯 남궁진현의 검면에 저를 맞대고 있었다.

오뢰정인이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검을 가둔 것이다.

“……뭐?”

남궁진현의 안색이 달라졌다.

지강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여기서 관두신다면 저도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마차를 돌릴 테니 뜻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남궁진현은 제 칼을 막아서고도 멀쩡한 지강백의 팔을 보며 눈빛을 파랗게 세웠다.

“그건 대체 무슨 무공이냐.”

쓰는 사람도, 새로 배워 익히는 사람도 거의 사라진 오뢰정인은 실전되다시피 한 무공이었다.

제자들이 모두 떠나기 한참 전부터 종남은 구대문파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남궁진현이 오뢰정인을 몰라보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이 한 수에 실린 무학적인 심오함과 질기고 꾸준한 수련으로 인한 안정감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사부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그래?”

남궁진현은 평생을 검사로 살아온 인물이었다.

검을 쥔 검사는 본능적으로 벨 것을 찾기 마련이었다. 지금, 눈앞의 상대는 그런 자였다.

“앞으로 십 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빠를지도.”

남궁진현이 입술을 달싹였다.

혼잣말인 듯했는데 눈은 정확히 지강백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남궁진현은 대답 대신 칼을 거두어 다시 검집에 꽂았다.

지강백은 남궁진현이 무기를 회수했듯, 살기를 거두었다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남궁 대협.”

그러나 지강백은 몰랐다.

남궁진현이 숨겼던 답이 무엇이었는지.

남궁진현은 앞으로 십 년, 혹은 그보다 더 빠른 시간 내에 지강백이 자신을 넘어설 것이라는 말을 감추었다.

“그 전에 없애두는 게 나으렷다!”

사악!

남궁진현이 완전히 집어넣었던 검을 다시 뽑아들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지척보다 가까웠다.

발검과 동시에 초식이 이루어지는 남궁세가의 극의쾌검은 세상 무엇보다 빠른 것이었다.

피할 수도, 달아날 수도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맞서는 것뿐이었다.

판단에 앞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 오른팔이 조금 전과 같은 오뢰정인의 수를 발휘했다.

남궁진현이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긴! 같은 수가 통할 것이라 보는가!”

남궁진현은 아예 팔을 잘라낼 작정으로 검을 눕혔다.

지강백이 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압!”

단단히 움켜쥔 왼손 주먹이 남궁진현의 검면을 때렸다.

구 성에 달하는 태을신공이 전부 실린 주먹이었다.

퍼억!

주먹이 정확히 검면을 후려쳤다.

순간 남궁진현의 검이 흔들리며 잠깐 속도를 잃었다. 지강백은 그 틈을 타 몸을 굴렸다.

칫!

핏물이 길게 튀었다.

잘리는 것은 면했지만 살이 갈리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쥐새끼 같은 놈!”

남궁진현이 이를 갈았다.

벌써 두 차례나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마음먹어 못 베는 것이 없다는 남궁세가의 검이 이미 마음을 먹은 상대를 두 번이나 놓쳤다.

남궁진현이 검을 고쳐 쥐었다.

“내 오늘 반드시 너를 이 자리에서 치워 없앨 것이다!”

증폭된 살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남궁진현은 전력을 끌어올려 지강백을 베었다.

……베었을 것이다.

때마침 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이, 이가주님! 사, 살려주십시오!”

남궁세가의 마부가 지르는 비명 소리였다.

“무슨 일이냐!”

남궁진현이 고개를 돌렸다.

지강백 일행의 사두마차가 매복이 설치된 다리로 질주하고 있었다. 마부석에는 엉뚱하게도 남궁세가의 마부가 묶여 있었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지강백과 남궁진현이 맞부딪치는 사이 용천휘와 필목현이 손을 쓴 게 분명했다.

“살려주십시오!”

마부가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남궁진현은 지강백과 마부를 번갈아 보았다. 지강백은 이제 오른팔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지금이라면 다시는 놓치는 일 없이 단칼에 끝을 낼 수 있으리라.

잠시 주춤하는 그에게 지강백이 물었다.

“저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남궁진현의 안색이 변했다.

“그걸 왜 네놈이,”

“저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으니까요. 그럼 제가 대신 가보겠습니다.”

지강백이 훌쩍 몸을 날려 마차를 향해 뛰어갔다.

걸음마다 핏자국이 찍혔다. 다친 오른팔에서 흐르는 피였다.

“멈춰라!”

남궁진현이 일갈했다.

무섭도록 끓어오르는 것은 분명 패배감이었다.

비록 가능성이 있다 하나 애송이는 분명 자신의 상대가 되려면 멀었다.

애송이는 고작 그의 공격을 두 번 받아내는 것으로 저렇게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도 남궁진현은 자신이 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견딜 수가 없었다.

“하앗!”

탓!

남궁진현의 신형이 지강백을 뛰어넘어 먼저 마차로 향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에게는 마부를 구할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지금 이러는 것도 애송이를 향한 패배감으로 인해 울컥 솟구친 충동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래서 더더욱 마부를 구해야했다.

구하지 못하면, 자신은 정말로 애송이에게 진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기다려라!”

남궁진현이 다리의 난간을 밟고 단숨에 솟구쳐 마차 지붕을 밟았다.

그가 검을 휘둘러 마부를 마부석에 동여맨 끈을 잘라냈다.

“손을 잡아!”

“이가주니임!”

마부가 감격에 젖어 손을 내밀었다.

남궁진현이 막 그 손을 잡는 순간,

와르르, 쿵!

다리가 무너져 내렸다.

“으아아악!”

히이이이잉!

사두마차가 무너지는 다리와 함께 저 거센 강물 아래로 추락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