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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동지-32화 (32/346)

제32화 다리 위의 암수(暗數)

“몸종아. 몸에 익숙지도 않은 마부 노릇이 힘들지는 않느냐?”

다음 날.

지강백 일행은 새벽부터 일어나 잔평객잔을 떠났다.

일어났다는 말이 무색한 시간이었다. 일행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그만큼 잔평객잔의 객실 수준이 엉망이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침상에서 자야 한다며 우기던 용천휘는, 천장 대들보를 따라 구렁이 한 마리가 스르륵 내려오는 꼴을 목격한 뒤 당장 지강백을 깨워 마차를 몰게 했다.

따사로운 계절이었지만 코끝에는 새벽의 시린 바람이 스쳐 갔다.

잠을 제대로 못 자긴 사람이나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말들도 어째 기운이 없이 목을 축 늘어트리고 타박타박 걷는데 문득 저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뭐라는 거냐. 깨운 사람이 누군데.”

지강백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용천휘가 부채를 살살 흔들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몸종인 네가 제대로 된 객잔을 구했으면 될 게 아니냐. 왜 하필 골라도 그런 곳을 골라서 말이지. 쯧쯧.”

객잔이 거기밖에 없었다는 말을 대체 몇 번이나 더 해야 하냐는 항변은 무의미했다.

객잔을 잡으라 우겼던 사람이 용천휘라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곳에 남아 하루 묵기로 결정을 한 사람도 용천휘였다.

“……됐다.”

지강백은 그냥 입을 다물고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힘들면 말하든가. 뭐, 마차 정도야 내가 잠깐 대신 몰아줄 수도 있으니. 나는 내 사람들에겐 제법 관대한 주인이야.”

지강백은 속지 않았다. 용천휘가 눈웃음을 살살 지을 때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수작 부리지 마라.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거냐?”

“흠. 이제 사형도 좀 똑똑해진 모양인데.”

“이 세상에는 너 같은 인간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거다.”

“뭐, 모자란 사람은 그렇게 배우면서 성장해 나가는 거지. 사형처럼.”

“…….”

더는 대꾸하기 귀찮아진 지강백이 등 뒤로 손을 돌려 마차와 마부석 사이에 난 작은 창을 닫았다.

쾅!

그의 인내심이 조금만 더 모자랐어도 용천휘는 창문 틈새에 그 잘생긴 코가 찍혔을 것이다.

드르륵.

지강백이 닫은 창이 다시 열렸다.

“쯧. 좀 조심하라고. 이 귀한 얼굴에 생채기가 날 뻔했잖아. 아, 그건 그렇고 말이야.”

용천휘가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오른쪽을 가리켰다.

물론 지강백의 등 뒤에서 한 짓이라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용천휘는 그 점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고, 미세한 공기의 흐름으로 용천휘의 동작을 읽어낸 지강백 또한 별다른 타박을 하지 않았다.

“저쪽 길로 가자.”

눈앞으로 갈림길이 펼쳐져 있었다. 용천휘의 말은 갈림길 중에 오른쪽 길로 가자는 것이었다.

“왜?”

“그냥. 저 길이 더 좋아 보이잖아.”

오른쪽 길은 더 비좁았다. 그 앞은 곧 마차 한 대가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좁은 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게다가 결정적인 것은,

“안 돼. 돌아가는 길이다.”

숭산으로 가는 방향과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평평하게 잘 닦인 관도를 놔두고 왜 굳이 비좁고 거친 소도를 달리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용천휘는 어떻게든 저를 골리기 위해 매사에 기를 쓰는 인간이었으니까.

“좀 돌아가는 게 어때서?”

“시간 낭비야. 무엇보다 저쪽 길은 마차가 달리기에도 마땅치 않다.”

“원 참. 대신 더 운치 있잖아.”

“뭐라는 거냐. 갈 길이 멀다는 걸 잊었나?”

“자고로 여행의 묘미란 목적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에 있는 것이지. 하여간 가난뱅이가 어디 여행을 다녀봤어야지.”

그 말에 지강백은 이렇게 대꾸했다.

“이렷!”

히이이잉.

말들이 속도를 높여 앞으로 튀어 나갔다. 오른쪽 길이 아닌, 왼쪽을 향해.

“오른쪽으로 가자니까!”

“시끄러워.”

제 말을 못 들은 척 해버리는 지강백의 뒤통수를 잠시 노려보던 용천휘가 느닷없이 채희유의 머리장식을 뽑아들었다.

“흥.”

그러더니 그것을 창밖으로 휙 던져버렸다.

“도련님!”

채희유가 용천휘를 질책했지만,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어이, 몸종아. 내 약사가 머리장식을 떨어트려서 말이지. 내려서 좀 주워 오너라.”

“……망할.”

결국 마차가 멎었다.

지강백은 이를 갈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용천휘가 제 부채를 집어 던졌다면 무시하고 갈 수 있었지만, 채희유의 머리장식이라면 얘기가 틀렸다.

유감스럽게도 마차의 속도는 꽤 빨랐던 터였고, 머리장식은 너무 작았으며 관도는 너무 넓었다.

지강백은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 안력을 돋우어 머리장식을 찾아야 했다.

“이때다!”

용천휘가 마차 문을 열고 나와 재빨리 마부석에 올랐다.

“이럇! 달려!”

마차가 방향을 바꾸어 오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자세를 낮추고 머리장식을 찾느라 지강백은 한 박자 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 자식이!”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지만 지강백은 일의 선후를 잊지 않았다.

어금니를 한 번 꾹 씹고 다시 수색에 들어간 그는 결국 채희유의 머리장식을 찾아냈다.

진주와 산호로 장식된 나비 모양의 머리장식은 나비 더듬이 한쪽이 부러져 있었다.

더는 머리장식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품에 잘 갈무리한 지강백이 유운비를 발휘해 마차를 뒤쫓았다.

“세워!”

마부석에 앉은 용천휘가 힐긋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싫어!”

“이 미친놈!”

탓!

지강백이 오른발에 공력을 집중해 지면을 걷어찼다.

그 반동으로 신형이 솟구쳤다. 하체의 힘으로 허공에서 신형을 밀어낸 지강백이 다음 순간 마차의 지붕 위에 착지했다.

놀라운 한 수였다.

만일 양영천이 이 광경을 곁에서 지켜보았다면 수염이 또 한 토막 뚝 끊어졌을 것이다.

능공답보(凌空踏步).

심후한 내공을 바탕으로, 마치 허공을 걷는 듯한 초절정의 경공은 아니었지만 지강백은 순전히 잘 단련된 하체의 힘만으로 얼추 그 비슷한 형태를 갖춘 것이다.

“쳇.”

지강백이 마차를 따라잡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용천휘가 혀를 찼다.

지붕을 걸어 마부석으로 내려온 지강백이 용천휘의 손에서 말고삐를 낚아챘다. 용천휘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고 버텼다.

지강백은 몰랐지만 지금 용천휘가 가려는 길은 호영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무연객은 분명 호영장으로 향할 테니 먼저 가 있으면 반드시 그와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란 계산이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종놈 주제에 어디서 주인님을 협박이냐.”

“셋까지 센다. 하나.”

“세지 마.”

“둘.”

“너무 빨리 세는 거 아냐?”

지강백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셋.”

“이런, 쳇. 안 돼. 난 반드시 저쪽 길로 갈……,”

지강백은 더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말고삐를 빼앗았다.

일행을 실은 마차가 막 아슬아슬하게 그 좁은 다리 위로 오르려던 순간이었다.

“아앗, 안,”

용천휘가 두 손으로 지강백을 덥석 붙들고, 지강백은 그것과 아랑곳없이 말머리를 돌리려는 그 때.

슷!

작은 파공음이 이쪽을 향해 닥쳐왔다.

“숙여!”

지강백이 용천휘의 몸을 누르며 허공에서 날아오는 것을 잡아챘다.

손가락 사이에 머리카락만큼이나 가는 암기가 쥐였다.

연미침이었다.

“뭐야, 그게?”

그새 고개를 들어 올린 용천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그러나 그도 잠깐,

“숙이라니까!”

지강백은 또 한 번 용천휘를 누르며 연이어 날아오는 연미침을 걷어냈다.

후드득!

한 줌이나 될 것 같은 연미침이 지강백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끝이 저릿했다.

누군가 그들을 노리는 자가 있었다. 잔평객잔을 떠나온 지 불과 몇 시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또 다시 무림인을 만난 것이다.

대체 강호란 어떤 곳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늘 이렇게 언제 누가 목숨을 노릴지 모르는, 마치 칼끝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곳일까.

“누구냐!”

지강백이 안력을 돋우어 주위를 살폈다.

내력을 끌어올려 오감을 바싹 달구었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살펴보고 올 테니.”

지강백은 용천휘의 고개를 인정사정없이 눌러놓은 뒤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

여전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강백은 내력을 끌어올려 오감을 달구었다. 오 장(丈: 1장은 대략 3미터) 밖의 나뭇가지에서 나뭇잎 한 장이 떨어지는 것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저벅.

지강백이 한 걸음을 앞서 나갔다.

스읏, 하고 공기 중의 무언가가 당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어서,

파바밧!

연미침이 한 무더기 날아들었다.

지강백은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양팔을 휘둘러 소맷자락으로 연미침을 받아냈다.

그가 피한다면 뒤편에 서 있는 일행이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저벅.

다시 한 걸음이 이어졌다.

연미침이 날아들고, 지강백은 같은 수로 연미침을 받아냈다.

저벅.

또 다시 한 걸음을 걷자 이제 더 이상 연미침이 날아들지 않았다.

지강백은 확신했다.

“함정이군.”

이 다리를 지나치길 원하지 않는 누군가가 있는 것이다. 그가 분명 이런 함정을 꾸며 놓았으리라.

무작정 달렸다가 자칫 일행 전체가 크게 곤혹을 겪을 뻔했다.

자연 용천휘에게 화가 미쳤다.

“미친놈. 그러게 왜 이 길로 가자고 우겨서…….”

지강백은 몸을 돌렸다.

함정까지 있으니 더는 이 길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길을 돌려 원래 가려던 길로 가자고 할 참이었다.

“이제 괜찮은 거야?”

지강백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용천휘가 물었다. 지강백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함정인 것 같다. 길을 돌려야 해.”

“뭐?”

용천휘가 처음에는 표정을 구기다가, 이어서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누가 함정을 만들어놨단 소리야?”

“그래.”

“왜?”

“이 길을 지나치길 원치 않는 것 같다.”

“그럼 저기 뭐가 있다는 소리잖아?”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거냐?”

“그러니까 더 확인해 봐야하지 않겠어?”

그 철모르는 소리에 지강백이 한숨을 탁 내쉬었다.

“그럼 직접 가서 보든지.”

“에이, 그건 말도 안 되지. 사형이…… 아니, 그런 건 원래 종놈이 하는 거지. 가서 확인해 보고 와라, 내 몸종 강백아.”

“직접 갈 용기는 없나? 원한다면 등은 떠밀어 주겠다.”

“멀쩡한 몸종을 놔두고 내가 왜. 어서 다녀오래도.”

“…….”

지강백은 방금 전 한 무더기씩 날아왔던 연미침을 그대로 피해버릴 걸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운이 좋았다면 용천휘가 그중 하나에 맞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길은 못 지나가. 암기보다 더한 매복이 깔려 있을 수도 있다.”

지강백은 마부석으로 가서 일단 먼저 용천휘를 끌어내렸다.

“들어가 있어. 쓸데없이 다치지 말고.”

용천휘가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면서 저항했다.

“겁쟁이 같으니. 그깟 매복이 무서워 달아나? 사형이 그러고도 사부님의 제자라 할 수 있어?”

“마음대로 지껄여라. 나는 들어줄 생각이 없으니까.”

쾅!

지강백이 마차 문을 열었다. 필목현과 채희유가 놀라 눈을 둥글게 뜨는 가운데, 지강백은 용천휘를 마치 짐짝처럼 마차 안으로 던져 넣었다.

“사제가 나오지 못하도록 잘 감시해 주십시오.”

용천휘가 벌떡 일어나 지강백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정말 이러기야?”

“너야말로 철 좀 들어. 네 같잖은 호기심으로 왜 남을 위태롭게 만들려는 거냐.”

“같잖다니. 그만한 재미도 없으면 이 몸이 뭐 하러 강호유람에 나섰겠냐고.”

“유람이라는 말부터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나?”

지강백은 제 옷자락을 붙든 용천휘의 손을 강제로 떼어내려고 들었다.

그러나.

“……?”

용천휘의 손목을 붙든 오른손에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푸들푸들 떨리기까지 했다.

“독이군요.”

채희유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지강백의 앞으로 다가왔다.

“혹 무언가를 만지셨습니까?”

“예. 연미침을 받아냈는데……,”

“독이 발라져 있던 모양입니다. 신경을 마비시키는 종류인 것 같습니다.”

독이라는 말에 지강백의 얼굴에는 그늘이 돋아났다. 용천휘도 조금은 미안해하는 표정이었고 필목현도 걱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모든 마음을 합해도 채희유의 마음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손을 이리…… 이리 주십시오.”

경련이 일어나는 손을 향해 내미는 그녀의 하얀 손이 오히려 더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지강백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손에 닿아 중독 증상이 일어나는 독이라면 채 소저도 위험합니다.”

채희유가 안타깝다는 듯 단아한 눈매를 구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 정도 독은 다룰 줄 압니다. 어서 이리,”

채희유는 스스로 지강백의 손을 잡아 끌 것처럼 양손을 더 내밀었다.

하지만 그 손은 허공에서 멈춰야 했다.

두두두두!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고막을 찢을 것처럼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지강백이 즉시 몸을 돌려 소리가 난 쪽을 향했다.

“비켜라!”

한 대의 마차가 그들의 뒤편에서 새벽 공기를 짓밟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썩 꺼져라! 감히 누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냐!”

마차의 양 옆으로 화려한 금술을 단 깃발이 펄럭였다.

마차가 가까워질수록, 깃발에 수놓인 글자가 똑똑히 보였다.

한 쪽은 쾌(快), 다른 한 쪽의 글자는 남궁(南宮).

당대 천하제일의 쾌검이라는 남궁세가의 이가주(二家主) 남궁진현의 마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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