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잔평객잔에서 생긴 일 (2)
긴장감이 몸을 덮쳤다.
전신의 근육이 팽팽히 당겨지는 만큼, 머리는 차게 식었다.
지금 지강백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단 하나였다.
‘무공을 감춰야 해.’
저자들이 정말 무연객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일단 시비가 생길 일은 일절 만들지 않아야 했다.
지강백이 아는 한 일행 중 무림인을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그가 이들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강호에 숨은 고수들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다 하셨지. 나는 그들에게 삼초지적도 안 될 거라 하셨고.’
지강백은 자신의 실력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니 무공을 들키지 않는 게 최선이다.’
무인이라면 무공을 모르는 사람에게 함부로 시비를 걸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강백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점소이는 새로 온 손님들을 향해 다가갔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었지만 점소이가 손님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 또한 시빗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으니까.
“아, 저…… 친절과 배려의 가족 같은 객잔, 잔평객잔이올습니다. 두 분 손님께서는 뭐 찾으시는 거라도……?”
사실 점소이는 너무도 무연객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저 수상한 자들이
-뭐뭐뭐가 필요하다.
라고 대답하면
-어이쿠, 정말로 죄송하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요! 제발 다른 객잔으로 가십시오! 다른 데는 꼭 있을 겁니다!
라고 공손히 내쫓을 생각이었다.
“빈방이 하나 있으면 묵고자 합니다.”
그런데.
뭐 하는 인간들인지 몰라도 무연객을 참 닮은 그들은 몹시 정중했다.
단지 말투만이 아니라 태도나 분위기도 퍽 점잖았다.
호영장주 호곽을 요절내러 온 강호의 무뢰배가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비…… 빈방이오?”
“예. 이 인근 객잔들이 모두 만실이라. 허나 꼭 이 근방에 묵어야 하는 사정이 있는지라 이를 딱하게 여기신 마음씨 좋은 동도께서 이곳 잔평객잔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곳에는 반드시 빈방이 있다 하시더군요.”
점소이가 눈을 끔벅였다.
그야 빈방이 언제나 남아도는 곳이긴 했다. 그만큼 손님이 귀했다.
일단 손님이 들어서면 세상 다시없을 친절을 입에 바르고 모셔야 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무연객이고 나발이고.
손님은 손님이었다.
“물론입지요. 저희 잔평객잔은 언제, 어떤 사정으로 오실지 모르는 손님을 위해 항시 깨끗하고 아늑한 방을 준비해 두고 있습지요. 그럼 방은 몇 개나 필요하십니까요?”
무연객인지 아닌지 참으로 의심스러운 두 손님은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방은 하나만 주셔도 좋습니다.”
“아니, 뭐. 방이야 남아도는…… 게 아니라 손님의 편의를 위해 넉넉히 준비가 되어 있긴 한데. 뭐, 두 분이 함께 쓰신다 해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요. 어서 드십쇼.”
점소이가 너스레를 떨며 손님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막 지강백 일행이 앉아 있던 탁자를 스쳐 가던 중이었다.
키가 좀 더 작은 죽립인의 시선이 문득 지강백에게 닿았다.
“허, 좋은 몸이로다.”
“……예? 제게 하신 말씀입니까?”
지강백이 놀라 눈을 들었다.
그 바람에 죽립이 드리우는 그림자 안쪽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기이할 정도로 맑고 선량한 눈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강백은 처음 겪는 신기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쩐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제게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는 지금 자신이 신분과 무공을 감추고 있어야 하는 처지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최대한 몸에서 힘을 빼고 태도를 낮추었다. 정말 일꾼처럼 보이기 위해.
죽립인이 지강백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또 한 번 그가 같은 소리를 했다.
“좋은 몸이로다.”
“…….”
대체 그 좋은 몸이 어디에 어떻게 좋다는 뜻인지라도 말해줬으면 싶었다.
“실례지만,”
지강백이 다시 묻는 순간이었다.
“노야(老爺: 나이 많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또 다른 죽립인이 점잖게 앞선 죽립인을 말렸다.
말투나 목소리로 보아 그는 앞선 죽립인보다 한참은 젊은 듯했다.
그는 일행의 소매 끝을 지그시 붙들고 지강백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일꾼 노릇을 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일 텐데도 정중한 태도였다.
과연 저렇게 예의 바른 사람들이 무연객인 걸까.
“실례했습니다. 아무 일 아니니 괘념치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노야, 계속 가던 길 가시지요.”
그러나 죽립인은 지강백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
“일 합(一 合).”
스슥.
그리고 죽립인이 지강백을 향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너무 자연스러운 동작인지라 지강백은 그게 이상하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야 알아챘다.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걸어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당황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죽립인은 다른 일행에게 소맷자락이 붙잡힌 상태였다.
그리고 죽립인과 지강백 사이에는 용천휘와 필목현이 있었다. 죽립인은 그들이 아예 없는 것처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걸어온 것이다.
우당탕!
지강백이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한 줄기 땀이 이마를 비껴 흘렀다.
예리하게 달구어진 눈가가 거친 시선을 흘렸다.
지강백은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이…… 이게 뭐지?’
꼭 급류에 한 발을 내딛다 간신히 벗어난 느낌이었다.
한번 휘말리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런 끔찍하고 거대한 물살에.
“허허……. 정말 좋은 몸이로군. 그럼 어디,”
죽립인이 다시 한 발을 움직이려는 찰나에,
“노야. 그만두십시오.”
“짜증 나, 영감.”
두 사람이 동시에 그를 말렸다.
한 명은 안절부절못하던 젊은 죽립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용천휘였다.
촤르륵!
용천휘가 부채를 활짝 펼쳐들었다. 그 동작은 꼭 죽립인의 시선으로부터 지강백을 감추려는 것처럼 보였다.
“왜 남의 몸종을 그렇게 잡아먹을 것처럼 보는 거야? 뭐 하는 인간이기에?”
그는 한 발을 턱, 탁자 위에 올려놓기까지 했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참 거만한 자세였다. 저절로 “춘부장(春府丈: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께서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라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필목현이 안절부절못하며 용천휘의 팔을 붙들었다.
“아이고, 도련님. 왜 이러십니까.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닌데요.”
“기분 나쁘잖아. 남의 몸종에게 몸이 좋다니. 아무리 봐도 내가 훨씬 더 잘생기고 훤칠한 것을.”
“그야 물론 그렇습니다만…… 어디 세상사람 보는 눈이 하나뿐이겠습니까. 가끔 눈이 이상한 인간도 있는 법이지요. 마음에 담지 마십시오.”
“그래도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니 기분 나빠. 이봐, 영감. 내가 정말 화를 내기 전에 그냥 물러가는 게 좋을걸.”
용천휘가 되도 않는 호기를 부렸다.
지강백은 그를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들이 무연객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무림인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것도 지강백은 도무지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하지만 그 전에 용천휘가 장포를 벗는 게 먼저였다.
“너, 이거 뒤집어써.”
“이게 무슨,”
“안 보이면 좋은 몸이니 뭐니 할 것도 없겠지.”
용천휘가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지강백의 머리 위에 훌쩍 제 장포를 뒤집어 씌웠다.
“헛,”
안타까운 한숨이 죽립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스슥.
용천휘가 정확히 지강백의 머리 위로 뒤집어 씌웠던 장포가 지강백의 발치로 떨어졌다.
그 역시 너무도 자연스러워 처음에는 무엇이 문제인 줄 몰랐다. 용천휘가 장포를 허술하게 씌웠거니 싶었다.
“일 합.”
지강백의 어깨가 비틀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무의식중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지강백은 자신이 왜 움찔했는지 이유를 몰랐기에 표정이 굳었다.
“허……?”
죽립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참 묘하구나. 분명히 보지 못했을 텐데 어찌 대력금(大力金)……,”
“노야!”
다른 죽립인이 크게 소리를 치며 다시 소매를 붙들었다.
그는 아예 발을 동동 굴러댔다.
“정말, 진짜, 대체, 왜,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제발 사람은 좀 가리십시오, 예?”
용천휘가 그 틈을 타서 장포를 집어 들고 지강백의 머리 위에 휙 뒤집어 씌웠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지강백의 몸이 꿈틀거렸지만, 용천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 영감이 갈 때까진 이러고 있어. 기분 나쁘니까. 젠장, 몸이 좋긴 뭐가 좋아. 당연히 내 쪽이 훨씬 더 좋지.”
그리고 용천휘가 죽립인들을 향해 돌아섰다.
“당신들, 대체 뭐 하는 인간들이야? 지금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야?”
어느 모로 보나 월등히 뛰어난 자신의 외모를 놔두고, 엉뚱한 몸종을 칭찬해서 열이 받은 주인을 가장하고 있는 용천휘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잘난 얼굴도 그랬지만 그는 지금 무공을 익힌 흔적이 조금도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죄송하게 됐습니다.”
뜻밖에도 젊은 죽립인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희 노야께서 가끔 해괴한 버릇이 도질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렇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저 버릇일 뿐, 딱히 해를 끼치거나 하려는 건 아니니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가 나이 든 죽립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나이 든 죽립인은 장포를 뒤집어쓰고 있는 지강백을 향해 입맛을 다시면서도 포권을 했다.
“노구가 결례를 범했구려. 내 평생 저리 좋은 몸은 몇 번 보질 못해서…… 허허.”
그렇게 말하는 나이 든 죽립인의 눈이 다시 번쩍이려는 것을, 젊은 죽립인이 소맷부리를 잡아당겨 말렸다.
“노야.”
“헛, 오냐. 알았느니. 내 이제 정말 그만하겠다.”
두 죽립인은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혹시라도 싸움이 벌어질까 안절부절못하던 점소이가 날아갈 것 같은 걸음으로 그들에게 방을 안내했다.
* * *
“푸하!”
지강백이 장포를 걷어냈다.
눈매가 매서웠다.
“이게 무슨 짓이냐!”
“말버릇하곤. 몸종 주제에 제 주인도 몰라보다니. 쯧쯧.”
지금은 몸종의 말투를 놓고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었다.
“무림인이었다. 시비가 붙으면 어쩌려고 함부로 굴어?”
“그렇다고 그 꼴을 가만 두고 봐?”
용천휘의 고까운 시선이 지강백의 위아래를 훑어 내렸다.
“이 인간 몸 어디가 나보다 낫다는 건지, 원.”
어이가 없어지는 쪽은 지강백이었다.
“너보다 내 쪽이 나은 것은 당연하지. 매일 단련하는 무인의 몸인데.”
“그럼 뭐 해. 이 몸이 월등히 수려한데.”
“……관두자. 이런 바보 같은 대화. 아무튼 앞으로 무림인은 조심해라. 소림에 도착할 때까지 가급적 무공을 드러내지 말라던 사부님 명을 잊었나?”
“안 잊었어. 하지만 그건 그거고. 감히 누구도 내 앞에서 나 말고 다른 인간의 외모를 칭찬할 수는 없…….”
더는 들어주기도 지쳤던지 지강백이 용천휘의 얼굴을 향해 장포를 홱 집어 던졌다.
“멍청한 놈. 칭찬이 목숨보다 중하냐?”
“뭐라는…… 큿, 거야. 그야 당연히,”
“죽을 수도 있었다. 여기 있는 전부가.”
지강백의 목소리가 시선처럼 진지함을 덧입었다.
“보통 인물이 아니었어. 내가 대응할 새도 없었다. 그자가 악심을 품었다면 단 일 합에 끝났을…… 이런,”
말을 하던 지강백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지독히도 쓴 표정을 지었다.
“일 합이라 하기에 무슨 소린가 했더니…… 그 뜻이었겠군.”
뒤늦게야 싸늘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그는 말 그대로 죽음을 한 발짝 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죽립인은 아마도 머릿속으로 자신과의 일전을 그렸으리라.
저 까마득한 고수들의 세계에서는 논검(論劍: 말로써 무학을 겨눔)이라는 게 있다 했다.
얼마나 많은 무학을, 제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보듯 얼마나 훤히 꿰고 있어야 가능한 경지일까.
그런데 죽립인은 논검이 아닌 구검(構劍: 생각으로써 무학을 겨눔)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경지인지 지강백은 말할 수 없었다.
그 어느 날, 무학의 끝을 접한다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막연하게 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죽립인은……,’
오다가다 우연히 객잔에서 부딪힌 누군가가 그런 경지에 있는 것이다.
지강백은 강호에는 상상도 못 할 고수들이 강물 속 물고기들만큼이나 많다는 양영천의 말을 몸으로 실감했다.
‘십칠 년간 열심히 단련을 해왔다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게는 고작 일초지적일 뿐이라니.’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졌다.
소림까지 가는 길이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지강백은 용천휘를 향해 진심으로 충고했다.
“네 목숨은 알아서 미리 아껴라. 내가 어쩌지 못할 경우도 있을 테니.”
그리고 지강백은 제 방으로 올라갔다.
지금 당장 무공 수련을 할 수야 없겠지만 운기조식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 * *
“이거, 믿을 수가 없겠는데.”
지강백이 사라진 빈자리에 대고 용천휘가 중얼거렸다.
필목현은 주위의 이목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말을 받았다.
“무연객이라…….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강호에 그만한 자가 있었습니까? 본 교의 정보력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용천휘가 시큰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문제가 있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이매들의 정체도 이제껏 못 밝혀냈으니.”
필목현은 몹시 무안한 얼굴이 되었다.
“송구합니다, 소야.”
“말로만 하는 사과는 집어치워. 들어봤자 쓸 데도 없으니. 가서 호영장이 어디에 들러붙어 있는지나 알아와.”
이제껏 가만히 있던 채희유가 끼어들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굳이 가셔야겠습니까. 길을 돌아가게 될 텐데요.”
“돌아가다니?”
용천휘의 눈이 언뜻 붉어진 듯도 했다.
채희유는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은 그렇게나 나를 봐오고도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하는군. 방금 전 무연객이 제 정체를 드러냈잖아. 설마하니 내가 그걸 놓쳤을 거라 여기는 건가?”
“……예?”
필목현과 채희유가 놀라움을 드러냈다.
그들의 기억 속에는 무연객의 정체를 짐작할 만한 단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용천휘만 그것을 보고, 낚아채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용천휘가 완전히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무연객을 쫓는다. 그가 소림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어줄 테니.”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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