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나들이 전야 (2)
“시원찮은 것들 같으니.”
양영천은 일단 먼저 제자 후보들을 흘겨보았다.
조용히 듣고 오라 한 것을 이리 크게 떠들어 댔으니 자칫하면 지강백이 들을 수도 있었다.
지강백이 매일 늦은 시간까지 연무장에서 보내는 습관이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거…… 며, 면목 없습니다.”
왕대환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양영천은 제자 후보들을 밀치고 그 앞에 섰다. 용천휘와 필목현을 마주 보는 위치였다.
“그러하니 애써 증거를 꾸밀 건 없고. 말을 해줘야겠다. 무슨 목적으로 종남을 어지럽히려 함인지.”
한 문파의 장문인답게 무게가 서린 말이었다.
칼을 휘두르며 외쳤던 염창의 협박과는 무척 달랐다. 용천휘가 부채를 접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리 된 것, 별수 없겠군요.”
그가 필목현을 바라보았다.
“필 총관이 얘기해. 아무래도 그쪽이 더 편할 것 같군.”
필목현이 주춤, 어깨를 멈칫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별수 없잖아. 사부님을 속일 수는 없어.”
“후우. 그럼 명을 따르겠습니다, 도련님. 자, 다들 이쪽을 봐주십시오. 저희 도련님께서 왜 종남파의 제자가 되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말해 드리겠습니다.”
필목현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얘기가 시작되었다.
* * *
“……해서, 비극이 시작된 겁니다.”
요컨대 그런 얘기였다.
대천 용씨 집안은 인근을 주름잡는 거상으로, 정말로 돈이 많았다. 하지만 손이 귀했다. 용천휘는 그 집안의 오 대 독자라 했다.
오 대 독자 용천휘는 모든 면에서 빼어나게 특출했다.
외모면 외모, 학문이면 학문, 인성이면 인성까지.
“거, 인성은 좀 아니지 않나.”
듣다못한 누군가가 불쑥 내뱉었다.
다른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적극적인 동조를 드러냈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도련님께서는 섬서 제일가는 상단을 물려받으실 몸이십니다. 착하고 인정 많고 정의롭고 이딴 것은 죄다 쓸모가 없지요. 그러니 지금 인성이 가장 완벽하다는 겝니다.”
“…….”
어쨌거나.
그렇듯 완벽한 용씨 집안의 오 대 독자에게서 단 한 가지 흠을 꼽자면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온갖 약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루 세 끼 밥을 먹고 하루 다섯 번씩 약을 먹었다.
그래도 부친은 대가 끊길 것이 불안했던지, 밖에서 아이를 낳아 왔다.
서자는 용천휘에 비하면 댈 것도 아니었다만, 유감스럽게도 몹시 튼튼했다.
얼마나 튼튼하냐면 심심풀이 삼아 들어간 동네 무관을 제힘으로 제패하고, 이어서 소림사의 속가제자로 입문할 정도였다.
부친을 비롯한 집안의 어른들은 더없이 기뻐했다.
무릇 돈을 굴리는 자는 제 몸 지켜줄 자를 가까이 두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지론이었다.
몸 지켜줄 자가 제 집안 식구라면 따로 고용하지 않아도 되니 돈도 아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문제는 그 배다른 아우가 머리가 굵어지며 자꾸만 용천휘의 자리를 넘본다는 것이었다.
“참 가당치도 않지요. 아니, 몸 좀 튼튼하면 다랍니까? 그쪽은 저희 도련님에 댈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필목현이 몹시 화가 난다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세상에나, 그 얼굴이라니……! 대체 그 얼굴 어디가 대천 용씨 집안 핏줄이랍니까? 들창코에 게딱지 같은 피부에 송충이 눈썹을 하고서!”
“…….”
“우리 대천 용씨 가문은 예부터 인물 잘나기로 유명한 집안이란 말입니다! 그 얼굴이라니! 절대 인정할 수 없습니다!”
“…….”
스스로 생각하기에 잘난 구석이 없는 외양을 지닌 제자 후보 셋은 몹시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성질이라도 부리고 싶은데 그러자니 용천휘의 외모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인지라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런데 예부터 바보는 장수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에 넘어가는 인간도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외모가 못나면 왜 그게 곧장 바보와 같은 말이 되는지는 따져보아야 할 여지가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필목현의 신세 한탄은 이어졌다.
“저희 도련님께서는, 어린 시절에 잠시 지니셨던 유일한 흠을 극복하고, 이렇듯 훌륭하게 장성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건강을 핑계로 그쪽의 편을 드는 인간들이 집안 내부에 있다 이 말입니다.”
결국 용천휘도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해야 했다.
그래서 이런 시시콜콜한 집안 사정은 숨기고 적당한 문파를 골라 입문했다.
그쪽이 속가제자라 하면 이쪽은 정식제자가 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무공 수련을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므로 일부러 골라 골라 종남파에 들어왔다.
정식제자에 일대제자에, 장문인의 직전제자라 하면 까짓 소림의 속가제자보다 못할 게 뭐 있냐 싶었다.
“후우……. 그런데 잘못 생각했지 뭡니까.”
여기서 필목현이 꺼지듯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쪽은 어디까지나 서출이니 대놓고 도련님께 시비를 걸진 못하지만 계속해서 흠집을 내려고 들지 뭡니까. 종남파는 이미 망했고, 그 이유는 무공이 별 볼 일 없어서인데 그딴 걸 배워 봤자 제 발끝에도 못 미칠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양영천은 마땅히 분노를 내뿜었다.
“뭣이? 어디서 감히 속가제자 나부랭이 따위가!”
필목현이 양손을 내저어 양영천을 달랬다.
“자자, 진정하십시오. 장문인께서 그러시면 어쩝니까. 여하간 저희 도련님께서는 그간 사문에 머무시느라 집안 내부 사정은 잘 몰랐으나, 이미 용씨 집안 안에서는 저런 얘기가 파다하게 돌고 있습니다.”
그 얘기를 필목현이 간간이 전해주었다. 용천휘는 자존심에 몹시 큰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단순하신 도련님 생각으로는, 종남파 무공이 소림의 무공보다 더 나으면 되지 않겠냐, 하신 게지요. 하지만 당신께서는 절대 스스로 무공을 익힐 생각 따위는 없으시고요.”
그러니 소림의 속가제자보다 훨씬 더 훌륭한 종남의 무공을 지녀야 하는 인간은 누가 되겠는가.
지강백밖에 없었다.
“에…… 그래서 무공에 좋다 하는 약을 제 나름대로 구해 사형 되시는 분께 드렸던 겁니다. 그런데 사형 분께서는 대체 어찌 된 인간이 성정이 그리 글러 먹으셨는지, 엇, 죄송합니다. 그만 본심이 나왔군요. 이런 건 원래 혼자 생각하고 말아야 할 일인데…… 허허. 예, 어쨌거나 저희 도련님께서 무공에 도움이 되는 약이라 아무리 타이르셔도 도통 믿지를 않는 바람에……,”
그래서 거짓말까지 해가며 그 영약들을 먹였단다.
이어 그 영약들이 제 몫을 톡톡히 발휘했다는 게 필목현의 주장이었다.
그것은 용씨 가문의 약사, 채희유가 증명해줄 것이라 했다.
“예, 사형 분께서 석 달 만에 무슨 검을 익혀야 하는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한 달도 안 되어 끝났다지요. 저희 도련님께서 성의껏 드시게 한 그 영약들의 힘이 아니었으면 어찌 그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으음…….”
양영천은 고민에 빠졌다.
필목현의 얘기는 딱히 모난 곳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입문한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집안 사정을 시시콜콜 얘기하지 않았을 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소림의 무공보다 더 나은 무공을 할 줄 아느냐를 보기 위해서 영약을 먹였다는 것은 조금 이해하기 어렵긴 했다.
그러나 용천휘의 성정을 생각하면 영 불가해한 것도 아니었다.
용천휘는 남을 괴롭히는 것이 취미라 하지 않았던가.
지강백은 그 영약들을 독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니 억지로 먹이면서 즐거움도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저 모난 구석 없이 매끄러운 얘기들이 다 믿기지 않는 이유는 대체 뭘까.
“좋아.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천하무도회 얘기는 대체 뭐였소?”
필목현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아이고, 그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듣기로는 아무리 구대문파의 제자라 해도 천하무도회는 아무나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면서요? 그쪽은 고작해야 말단 속가제자일 뿐이니 얼씬도 못 하겠지요. 하지만 저희 도련님은 천하무도회에도 갈 수 있는 일대제자라 이겁니다.”
요컨대 금전으로 산 천하무도회 입장권으로 제 배다른 아우 앞에서 어깨에 힘 좀 주겠다는 소리였다.
어쩐지 그것도 말이 되는 듯했다.
“그럼 왜 갑자기 소림사 구경을 가겠다는 게요? 그건 말이 안 되지 않소!”
이번에 필목현은 억울하다는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니, 그걸 몰라 물으십니까? 그건 다 장문인 탓 아닙니까!”
“뭐라고?”
“곧 천하무도회도 다가오니 그저 얌전히만 계셨으면 제 한 몸도 편했겠지만…… 쯧쯧. 하필 장문인께서 경신술 이야기를 하며 소림의 뭐라는 승려가 장문인보다 낫다 하시니 도련님께서 그만 마음이 초조해지신 게지요.”
“그, 그야…….”
거기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없었다.
양영천이 곤란한 얼굴이 되어 말끝을 흐렸다.
“그러니, 장문인.”
기회를 잡았다 싶었던지 필목현이 덥썩, 양영천의 손을 붙들었다.
“으, 음……? 왜, 왜 이러시오?”
“속내도, 목적도, 부끄러운 집안일도 모두 들통 난 마당이니 무얼 더 감추겠습니까. 부디 소림행을 허락해 주시지요.”
양영천이 즉각 붙들린 손을 잡아 뽑았다.
“아니 될 말이오!”
“아니…… 어찌 그리 단칼에 자르시는 겁니까?”
이유야 무수히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지강백이었다.
“강백이는 아직 강호를 겪을 준비가 덜 됐소이다. 정 소림을 가고 싶다면 따로 가든지.”
“아니, 그 험한 길을 지금 저희 도련님 혼자 가란 말씀이십니까?”
“그럼 예까진 어떻게 왔소?”
“그야 호위무사를 고용해 왔지요.”
“또 고용하시구려.”
“아닛, 그때와는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까? 명색이 저희 도련님께서도 이제 무림인이 되셨는데 호위무사를 고용하다니요. 모양 빠지게.”
“그럼 안 가면 될 것을.”
“허, 허허…….”
양영천이 고개를 홱 돌리자 필목현이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해댔다.
이때 용천휘가 나섰다.
“사부님.”
양영천이 반쯤은 의심을 거두지 않은 눈초리로 그의 말을 받았다.
아직 다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완전히 불신하지 않는 이유는, 지강백이 일궈낸 성과를 두 눈으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벽운천강검을 완성한 데는 분명 갑자기 증진된 내력의 도움이 지대했다.
용천휘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그런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왜 부르느냐.”
“이제껏 들으신 대로, 제자는 꼭 소림의 무공을 견식하고 싶습니다.”
양영천이 부러 콧방귀를 뀌었다.
“너는 무공을 모르는 이다. 네가 본들 견식이 되겠느냐.”
“그래서 사형이 동행했으면 하는 겁니다.”
“네 사형은 견식보다는 무공을 익히는 게 더 중요한 시점이다.”
“정말 그렇습니까?”
용천휘의 맑은 시선이 곧게 양영천을 향했다.
눈을 곧바로 마주하게 된 양영천은 터무니없이 맑은 거울에 저를 비추는 듯해서 움찔 놀랐다.
그 눈은 거짓마저도 숨김없이 비추고 있을 듯했다.
“그, 그렇……,”
“후우. 안타깝군요.”
용천휘가 짐짓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저는 분명 제가 먹인 영약들이 사형의 무공 성취에 보탬이 되었다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소림행에는 대환단을 사서 사형에게 먹일 생각이었는데…….”
“뭣이! 대환단이라고!”
양영천의 입이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그것은 제자 후보들도 마찬가지였다.
백 발 양보해서 소환단이나 만년설삼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대환단은 분명히 다른 얘기다.
강호는 넓고 무림인은 셀 수도 없이 많으니 그들을 모두 붙잡고 일일이 물어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게 가능하다면 순위를 매길 수도 있을 것이다.
무인으로서 가장 먹고 싶은 무림의 영약 일 순위를 꼽으시오, 라고.
그럼 대답은 말할 것도 없이 대환단이오, 가 될 터였다.
소환단을 받아먹지 않는 지강백은 바보라는 말을 들어도 쌌다.
대환단을 거절한다면 지강백은 바보도 모자라 미친놈이라는 말을 들어야 마땅할 것이다.
“대…… 대환단을 어떻게! 그건 제대로 본 사람도 몇 없는 물건인데!”
용천휘는 턱이 빠질 것처럼 물어오는 양영천에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돈으로 못 사는 물건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뭐, 뭣이? 물론 당연히 있지! 그것들 중 하나가 대환단이다!”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만.”
필목현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도련님께서도 대환단의 덕을 톡톡히 보셨지요. 어릴 때 세 개 정도 드셨을 겁니다.”
“뭐, 뭐라고! 세 개나!”
“뭐, 그 덕에 저희 상단에서 소림에 들어가는 쌀을 개당 십 년씩, 총 삼십 년 치 대주기로 했습니다만. 그런데 그게 뭐 그리 큰일이겠습니까. 어차피 돈이면 다 되는 것을.”
“허, 허…….”
양영천은 까칠하게 주름 잡힌 손등으로 이마를 쓸었다.
“삼, 삼십 년 치 쌀이라니. 소림 경내의 입이 대체 얼마인데…….”
돈이라 해도 액수가 엄청나지면 그저 돈이라 할 수 없게 된다.
용천휘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어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평생 해볼 수 없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쌀이 필요하면 다른 것도 필요하겠지요. 대환단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형이 갈 수 없다 하면…….”
용천휘가 시무룩한 어조로 말끝을 흐렸다.
양영천의 얼굴이 붉어졌다 희어졌다 했다.
“네, 네가…….”
용천휘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왜 모르겠는가.
용천휘는 지금 거래를 제안해 오는 것이다.
대환단을 대가로 제 말을 들을 것인지, 아닌지를.
대상단의 오 대 독자라 했던가. 생각해 보면 그는 매사가 그렇게 흥정에 거래였다.
사문을 상대로 수작을 부리는 게 괘씸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대가로 내미는 대환단은 도무지 그냥 넘길 수 없는 제안이었다.
무려 대환단이었다.
먹으면 십 년 치의 공력을 준다는 그것.
지강백이 그것을 먹게 된다면…….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용천휘는 양영천이 어떤 상태인지 눈치챘다. 아니, 몰라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용천휘의 눈이 또 그렇게 거울이 되었다.
“도무지 안 되는 일입니까, 사부님?”
“…….”
양영천은 침을 두 번 더 삼키고, 고개를 들어 대들보도 무너트릴 만큼 커다란 한숨을 세 번 더 내쉬고 나서 대답했다.
“그, 그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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