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나들이 전야 (1)
“불허한다.”
역시나였다.
양영천은 소림사 나들이 얘기를 단칼에 잘라냈다.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양영천은 매몰차게 자리를 떴다.
소림사 구경 가자는 얘기를 꺼낸 용천휘가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불쌍해 보였던지, 제자 후보들이 와서 한 마디씩 위로를 던졌다.
지강백은 양영천을 대신해서 용천휘를 혼냈다.
“바보 같은 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왜 말이 안 되냐며 필목현이 대신 발끈했다.
그 바람에 용천휘가 아닌 필목현에게 바보 같은 놈이라는 욕을 한 것 같은 상황이 된 지강백이 무안해진 얼굴로 자리를 떴다.
용천휘는 지강백의 등 뒤에 대고 이 정도로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외쳤다.
낮이 그렇게 저물었다.
그리고, 밤이 시작되었다.
* * *
슷. 스슷.
어둠 속에서 세 개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신중한 몸놀림이었다. 모처럼 왕년에 쓰던 검은색 복면까지 얼굴에 쓴 그들은 왕대환과 염창, 구악이었다.
표정이 심각했다.
그들은 곧 정식 사부가 될 것을 약속한 양영천의 명을 받아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밤이다. 둘째가 제 가신과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낱낱이 듣고 오너라.
소림사 나들이가 그냥 나온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 양영천의 짐작이었다.
하필 콕 집어 지월의 얘기를 꺼내는 게 퍽도 수상했다. 분명히 저들은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종남파에 들어온 것이었다.
지강백을 속여서 그 영약들을 꿀떡꿀떡 먹이는 것도 그랬다.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캐내는 것이 지금 세 명의 제자 후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명심들 해라. 이 일은 아직 사부님과 우리들만 알고 있어야 한다.”
왕대환이 구악과 염창에게 속삭였다.
둘은 심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저는 작은형님이 그리 나쁜 줄 모르겠지 말입니다. 좀 짓궂어 탈이지 큰형님께 따로 악심을 품은 것 같지는 않은데…….”
구악이 약한 소리를 하자 염창이 딱 잘라 말했다.
“작은형님이 먹인 게 독이 아니라면 나쁘다 할 건 없지 않소. 당신도 약이라 생각해서 먹인 거겠지.”
왕대환도 그 말에는 동감이었다.
그러나 사부님이 저리 경계심을 세우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나 역시 그렇다. 난들 어찌 작은 형님을 의심하고 싶겠느냐. 허나 사람은 모르는 법이다.”
왕대환은 보았다.
용천휘의 눈이 붉어지던 것을.
그때는 뭐에 홀린 듯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냥 넘어갔었다. 나중이 되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도무지 잘 믿기지 않아 혼자서 벙어리 냉가슴이 되었다.
멀쩡하던 사람 눈이 갑자기 벌게지다니.
세상천지에 그런 일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혹시 몰라 큰형님이나 누구에게 말을 꺼내볼까 해도 헛소리 취급을 당할까 싶어 입은 열어보지도 못했다.
일단 자신부터가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렸으니까.
그런데.
‘만일 그게 진짜라 하면…….’
용천휘는 뭔가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를 종남의 제자로 만든 것도 작은형님이었다. 게다가 무공을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말을 했어.’
용천휘가 무얼 감추고 있는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오늘은 그가 감추고 있던 것을 드러내는 날이 되리라는 것을.
“가자.”
왕대환은 주먹을 꾹 움켜쥐고 말했다.
제자들의 처소가 있는 내평당으로 향하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사뭇 비장했다.
* * *
“……는 그럼 못 가게 되는 겁니까?”
“그렇다고 하잖아.”
시큰둥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뭐, 어찌 보면 다행한 일이로군요. 소림에 가봤자 뭐 그리 뾰족한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게 지금 내 앞에서 할 소리야?”
용천휘가 짜증을 부렸다.
필목현이 그를 어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래는 것처럼 인자한 말투였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련님께서 너무 성급하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소림에 가자 하면, 분명히 의심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의심은 무슨.”
“그리 가벼이 여기실 게 아닙니다, 도련님. 도련님께서 애초에 종남파 문하가 되겠다 생각하신 이유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게 소림이라는 걸 이리 성급히 드러내시다니요.”
용천휘의 망설이는 듯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런가?”
이 시점에서 제자 후보들은 숨을 죽였다.
종남파에 입문한 또 다른 이유.
결국 용천휘가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양영천의 의심이 맞은 것이다.
왕대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염창은 그보다 더 심각했다. 붉으락푸르락 변해가는 안색은 폭발 직전이었다.
그는 배신과 상처에 유독 민감한 성정이었으니까.
필목현의 말이 이어졌다.
“뭐, 계기를 만들어야지요. 도련님께서 정 그리 소림에 가야겠다고 말씀하신다면 말입니다.”
“응. 가야 해. 가서 내 눈으로 비교해 봐야 해.”
“그럼 사형분을 어떻게 속일 것인지 생각을 해보도록 하지요. 이번에도 잘 속아 넘어가 준다면 좋겠습니다만…….”
“물론 그럴 거야. 사형은 이제껏 내가 속여 본 그 어떤 인간보다도 속이기 쉬웠거든.”
“원 참. 도련님도. 그리 말씀하시면 사형분이 너무 가엾지 않습니까.”
“뭐 어때. 어차피 그 인간은 그렇게 이용해 먹으려고……,”
그때였다.
“으와압! 더는 못 참겠다!”
염창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그는 다짜고짜 염라도를 뽑아들고는 문짝을 몸으로 부수며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죽어라! 이 배신자! 감히 큰형님을 배신해?”
휘잉!
무식할 정도로 크고 넓적한 도가 방 안의 공기를 휘저었다.
필목현과 용천휘가 뒤로 물러났다.
“감히 우리를…… 우리를 배신……, 흡!”
염창이 입술을 질끈 물어뜯으며 도를 휘둘렀다.
배신감을 이기지 못하고 손이 덜덜 떨려왔다. 그는 금방이라도 터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는 중이었다.
작은형님이, 큰형님을 배신했다.
그것은 곧 작은형님이 저를 배신했다는 뜻이었다.
“죽어…… 윽!”
염창은 제 가슴을 갈라내는 심정으로 용천휘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염라도가 용천휘를 썩둑 베어내기 전 왕대환이 염창을 막아섰다.
“비키시오, 두목!”
“이 바보 같은 놈! 네가 먼저 설쳐서 어쩌자는 거냐! 아직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는데!”
“두목은 못 들었소? 제 입으로 우리 큰형님을 이용한다지 않소! 속여먹을 거라고! 그럼 말 다 한 거지! 뭘 더 알아낼 게 있다고!”
“사부님이 하신 말 그새 까먹었냐! 무슨 목적으로 종남파에 들어왔는지 알아내라 하지 않았냐!”
“아 그야 두 놈이니까 한 놈만 우선 죽이고 나서 들어도……!”
옥신각신 말다툼과 몸 다툼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보며 구악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저기, 두 분이 그리 다투시면 어쩝니까요……. 정작 붙들어 족쳐야 할 사람들은 저기 있는데.”
대답처럼 차르륵, 부채 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천휘였다.
“쯧쯧. 뭐야, 염탐하려고 왔으면 조심스러워야지. 왜 왔는지 묻기도 전에 제 입으로 술술 불고 있으니…… 이거 참.”
염창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닥쳐라! 배신자 주제에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냐! 네가 감히 우리 큰형님을!”
“큰형님을 뭐?”
“큰형님을…… 큰형님을 배신하지 않았느냐!”
“배신은.”
용천휘가 코웃음을 쳤다.
“소환단에 만년설삼까지 먹이는 걸 배신이라 하나?”
당당한 말투는 조금도 거짓이 없는 것 같다.
제자 후보들은 “그 작고 둥근 게 진인 말씀대로 진짜 소환단이었구나…….” 어쩌고 중얼대다 다시 눈빛을 덧세워 물었다.
“아니, 그렇다 쳐도! 그걸 애초에 독약이라 거짓말을 한 게 누구요! 선한 의도였다면 그럴 수가 있나!”
용천휘의 부채질 소리가 포닥포닥, 고요해진 방 안을 울렸다.
“무공이 강해진다 했더니 그 바보가 안 먹겠다잖아. 자기 노력으로 얻는 게 아니라면 소용이 없다느니 하면서.”
제자 후보들이 동시에 외쳤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물론 그러고 나서 매우 죄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긴 했다.
하지만 지강백이 바보라는 말은 맞았다.
소림사에서 태어나 소림사에서 뼈를 묻는 무승들도 소환단을 한 번 먹기는커녕 구경하기도 힘들어 한다 했다.
대환단은 심지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의심하는 제자들도 부지기수라 했다.
어쨌거나.
그리도 귀한 물건이라는 소리다.
무인의 몸으로 주어지는 영약을 마다하는 인간은 바보라는 말을 들어도 쌌다.
“어흠, 험. 아니, 그러니까…… 그게 꼭 큰형님을 욕하는 소리는 아니고…… 그게 좀 안타까워서…….”
왕대환이 주섬주섬 변명을 삼켰다.
염창은 큰형님께 감히 바보라는 말을 내뱉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지 손을 들어 제 입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그런데 왜 그 귀한 영약들을 그리 먹이셨습니까요?”
오로지 구악만이 자신들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괜히 귀신눈이 아니다.
왕대환과 염창도 정신을 차렸다.
“맞소! 분명 큰형님을 이용해 먹는다니 어쩌느니 하지 않았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염창이 다시금 염라도를 치켜세웠다.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으면 내 칼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염라도의 넓적한 도면에 용천휘가 비쳤다.
눈썹 한 올 흔들리지 않는 태평한 얼굴이었다.
“너희들도 동조했잖아. 신이 나서 먹인 주제에.”
“…….”
거기에는 할 말이 없었다.
“아, 거…… 그거야 작은형님이 상까지 내걸고 몰아가시니…….”
염창이 다시 외쳤다.
“작은형님은 무슨! 두목, 자꾸 그래 넘어가지 마오! 이래서야 될 얘기도 안 되지 않소!”
“아, 그래. 네 말이 맞다!”
왕대환은 이제 더는 휘둘리지 않겠다는 듯, 주먹을 굳게 쥐고 결연히 외쳤다.
“우리는 사부님의 명을 따라야 한다. 대체 이 종남파에 무슨 원한이 있어 이런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지를 알아내야 해!”
이어서 위협적으로 치켜드는 도끼는, 어서 말하지 않으면 손을 쓰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드러냈다.
용천휘가 도끼를 힐긋 보며 말했다.
“사부님의 명이라고?”
“그렇소! 아니, 그렇다!”
용천휘가 피식 웃었다.
“이미 어겼잖아.”
“뭐라고?”
“사부님이 날 위협해서 억지로 입을 열게 만들라고 하셨어? 그렇진 않을 텐데.”
“그, 그건…….”
물론 그렇지 않았다. 양영천은 몰래 가서 단서가 될 만한 얘기를 듣고 오라 했다.
절대 이쪽에서 의심하고 있다는 표시를 내지 않아야 된다고도 했다.
“……이게 다 네 탓이잖냐!”
퍽!
왕대환이 염창의 뒤통수를 갈겼다. 염창은 하마터면 염라도를 떨어트릴 뻔하다가, 이어서 휘청대는 신형을 바로 세우고 대들었다.
“내 탓이라니!”
“그럼 아니냐? 잘 숨어 있다가 왜 갑자기 튀어 나가!”
“아, 그래! 내가 그랬소! 그럼 사내가 되어 가지고 어찌 그런 말을 그냥 듣고 있으란 말이오! 저놈이 우리 큰형님을 배신하겠다는데!”
저놈이라는 말에 용천휘가 힐긋 염창을 노려보았다.
“쯧, 단순하긴. 하긴. 그러니까 종남파 제자가 됐지. 아, 아직 정식 제자가 아니니 제자라 부르지도 못하나.”
아픈 부분을 찔렸다.
“뭐, 뭣……. 지금 뭐라는 거냐! 내가 종남파에 들어온 것은 오로지 큰형님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큰형님께 해를 끼치는 꼴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두고 보지 않겠다! 어서 네 간악한 속셈을 털어 놓아라!”
염창이 아무리 흥분해도 용천휘는 절대 기죽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대놓고 혀를 찼다.
“쯧. 영약을 먹여서 무공을 늘려놨다니까. 간악하긴 뭐가 간악해.”
“자, 자꾸 그렇게 본질을 흐릴 참이냐! 네놈이 우리 큰형님을 이용해 먹으려 한다는 말을 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쯧쯧. 말이란 한 번 내뱉으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거지. 너희들이 아무리 들었다 우겨도 내가 안 했다 해버리면 그만이잖아. 증거 있어?”
“크…… 그렇게 발뺌하려는 거냐!”
“생각해 봐. 너희들은 산적 출신이다. 사부님의 명으로 나를 염탐하려 했다지만, 그거야 거짓말일지도 모르지.”
“뭐라고?”
용천휘는 산적들을 보며 느릿하게 웃었다.
그가 필목현을 향해 말했다.
“뭐라도 좀 꺼내 봐.”
필목현은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한 태도로 소맷자락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전표와 금은덩이, 돈주머니 같은 것들이 줄줄이 나왔다. 대체 소맷자락에 뭔 놈의 돈이 저렇게 많이 들어 있는지 묻고 싶은 순간이었다.
필목현은 그것을 아낌없이 방바닥에 뿌렸다.
용천휘가 부채 끝으로 그것들을 가리켰다.
“나를 염탐하려 했다. 그러다 내가 가진 돈 몇 푼에 눈이 멀어 나를 죽여 입막음을 하고 사부님께는 거짓을 고한다.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터무니없는 누명이었다.
제자 후보들이 왈칵 성을 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아아,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야. 그리고 증거까지 이렇게 명확한데, 누구 말이 더 신빙성 있겠어? 말 그대로, 우리 사형은 바보지. 어느 쪽 말을 더 믿을까?”
염창이 염라도의 끝으로 바닥을 콱 찧었다.
“더 들을 것도 없소! 내 당장 저놈의 모가지를 자를 것이오!”
“어디 한번 해봐. 재미있겠는데.”
용천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러자 분위기가 돌변했다. 언제나 느슨하고 태평해 보이던 부잣집 도련님은 더는 없었다.
눈이 붉어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왕대환은 꼭 그때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용천휘가 하는 말에 무조건 네네 고개를 숙여야 될 것 같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그러니 너희가 지금 할 것은, 나를 칼로 협박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증거를 만드는 거야. 너희 말을 믿게 만들 증거 말이야.”
다음 순간 용천휘는 태도를 바꿨다.
날카롭던 긴장감을 지우자 덩달아 보는 쪽의 긴장도 사그라지는 듯했다.
그는 태평하게도 제자 후보들이 할 일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그…… 그걸 어찌 만드오?”
왕대환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염창이 자존심도 없냐며 소리를 질렀지만, 구악이 눈치 빠르게 염창을 말렸다.
일단 얘기나 듣고 족쳐도 늦지 않았다. 어차피 용천휘는 도망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글쎄.”
“뭐요. 가르쳐 줄 것처럼 굴더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왜 필요가 없소?”
그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홱 몸을 튼 제자 후보들의 얼굴에 반가움과 놀라움이 동시에 스쳐 갔다.
“어이쿠, 이런.”
“진인!”
내평당을 고요히 채운 어둠 속에서 양영천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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