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변화
정신이 없었다.
지강백은 이마를 비껴 흐르는 땀줄기를 느꼈다.
늘 입는 무복은 비라도 맞은 듯 흠뻑 젖어 버렸다.
“왜……,”
지강백이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고전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다치게 하지 말라는 조건도 어렵지 않았다. 점혈은 단 한 번의 틈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으니.
가장 어려운 일은 태을분광검만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껏 종남의 모든 무학을 대성해야 한다는 자세로 다양한 무공을 익혔다. 권법, 각법, 수법, 지법 등의 수련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딱히 무공의 구분이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수백 수천 번 되풀이하던 동작이 아예 몸에 새겨진 덕분이었다.
그것을 배제하고 오로지 검만을 쓰자니 움직임에 제약이 생겨났다.
미완의 태을분광검만 써야 한다는 것도 한몫을 거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더해도 지강백이 이토록 고전할 까닭은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는 용천휘였다.
하는 것 없이 그저 싸움판에 끼어들어 있는 용천휘가 이리저리 툭툭 움직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아슬아슬한 공격이 이어졌다.
용천휘가 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어설프게 몸을 피하다 앞을 가로막거나, 혹은 엉뚱한 사람의 발목을 걸어 넘어트리거나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꼭 기가 막힌 우연이 되어 번번이 검로를 망쳐놓았다.
태을분광검의 그 복잡하고 끝 모를 검로들이 용천휘의 생각 없는 움직임 한 번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아무리 정확히 초식을 전개해도 소용이 없었다.
‘자꾸만……,’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가 잘못되어 있다고.
초식을 정확히 이어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대체 그게 뭐지.’
생각이 많아지자 몸에도 무리가 왔다. 팔과 어깨의 근육이 급격한 움직임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비틀렸다.
지강백이 소매를 끌어내려 얼굴의 땀을 훌쩍 닦아내며 소리쳤다.
“너는 좀 빠져!”
용천휘가 부채를 설렁설렁 내저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나도 적당히 물러나 있으려고 했는데 말이야. 이거 내가 은근히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망할.”
“더 애써봐, 사형. 이러다 지겠는데?”
“닥쳐라.”
그때 마침 누군가가 지강백을 향해 두툼한 곤을 치켜들었다.
“으합! 죄송합니다, 큰형님!”
지강백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곤을 피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와 동시에 허공을 치는 곤을 목검으로 걷어냈다.
빡!
손을 벗어난 곤이 허공으로 날았다. 힘이 너무 과했던 것이다. 곤을 놓친 제자 후보가 시큰한 손목을 쥐고 울상을 짓는 동안, 지강백은 재빨리 그의 수혈을 짚었다.
“열하나.”
쓰러지는 그를 받으며 지강백이 숫자를 읊었다.
그러나 용천휘의 말이 이어졌다.
“사형이 졌어.”
지강백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마가 벌게진 왕대환과 그의 발치에 떨어진 곤이 보였다.
그가 쳐낸 곤에 이마를 맞은 것이다.
“하……,”
지강백이 목검을 아래로 내렸다. 힘이 다한 듯, 그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생각보다 훨씬 어렵군.”
땀에 흠뻑 젖어 이런 말을 중얼거리는 지강백이 안되어 보였던 걸까.
귀신눈 구악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아니, 저 그런데…… 꼭 큰형님이 다치게 만드신 거라고 보기도 어렵지 않을깝쇼? 아직 졌다고는 하기 좀……,”
“아니. 내가 졌다.”
단호한 대꾸가 구악의 말을 잘랐다.
“좀 전의 한 수는 태을분광검이 아니라 대천강검의 초식이었어.”
물론 그걸 구분 지을 만큼 식견이 뛰어난 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용천휘를 제외하면.
“흠. 잘 몰라서 그러는데 말이야, 초식이란 게 그렇게 달라?”
지강백이 흘깃 용천휘를 쳐다보았다.
표정에 놀리는 기색이 없었다. 정말로 그저 궁금한 모양이었다.
“무공마다 다르지. 대천강검과 태을분광검은 특히나 궤를 달리하는 검이고.”
“흐음. 어떻게 다른데?”
“대천강검은 직선적이다. 곧고 빠른 만큼 강맹한 검이지. 태을분광검은 곡선적이다. 하나의 초식이 수십 개의 변화로 이어진다. 한번 출수할 때 수십 개의 검로를 미리 열어두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가 말한 얘기를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는 이도 없었다. 그저 어림짐작으로 아아, 큰형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구나, 할 뿐이었다.
“뭐, 그런 건 모르겠고. 변화라는 게 뭐야?”
“초식이 전개되는 모양새가 흐름을 바꾼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봐. 이거에서 저거로 바뀌는 게 변화라는 거야?”
“단순히 얘기하자면.”
용천휘가 싱겁다는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흐음. 좀 웃긴데.”
“뭐가 우습나.”
“생각해 봐. 그럼 태을분광검에서 대천강검으로 바뀌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는 소리야?”
“뭐……?”
지강백의 눈빛이 변했다.
“이거에서 저거로 바뀌는 거라며. 그런데 사형은 지금 이거에서 이거로만 바뀌는 게 변화라고 하는 거잖아. 그러니 웃기지. 내 말이 틀려?”
“…….”
이번에는 반대로 눈매가 가늘어졌다.
언젠가 지강백은 그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태을분광검 대신 자연스럽게 대천강검이 이어지던 순간을.
그때는 대천강검이 더 익숙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수련을 계속할수록 초식이 모호해져 갔다. 그래서 태을분광검의 초식을 익히기 위해 일부러 대천강검의 동작을 잊고자 애썼다.
하지만 태을분광검의 초식에만 매진한다는 것.
그를 위해서 다른 검과 구분을 짓는다는 것.
그것은 태을분광검을 고인 물에 가둬두는 것과 같았다.
그런 식이라면 초식은 정확히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태을분광검은 그 자체로 변화가 되어야 하는 검이었다.
“그런…… 건가.”
지강백이 입술을 달싹였다.
초식을 정확히 익히는 것은 중요했다. 그 복잡하고 화려한 변초들을 하나하나 정확히 체득하다 보면 언젠가는 변화라는 뜻도 제 것으로 흡수가 될 것이다.
그것이 원래 태을분광검을 대성하는 순서였다.
하지만 지금의 깨달음으로 지강백은 그 순서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의 입구에 닿았다.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강백은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빛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가 할 일은 두 손을 내밀어 문을 활짝 여는 것이었다.
지강백이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는 용천휘가 있었다.
“한 번 더 해도 되나?”
“뭘? 다 같이 노는 거?”
“부탁한다.”
용천휘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부채를 포닥였다.
“까짓, 뭐가 어려워. 놀이야 재미있으면 그만인데. 대신 그 전에 챙길 건 챙겨야지. 사형은 내가 하라는 걸 해야 해.”
지강백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하면 되나?”
용천휘가 미소가 진득하게 들러붙은 얼굴로 소맷자락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걸 보는 지강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약 좀 대신 먹어.”
“…….”
용천휘가 손에 든 그것은 전에도 먹은 적이 있었던 작고 둥근 단약이었다.
지강백에게 한 시진가량 배앓이를 하게 만들었던.
“뭐, 싫음 말고.”
“…….”
지강백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용천휘가 몸을 기울여 작고 둥근 단약을 그의 입술에 가져왔다.
“자. 아, 해.”
“…….”
지강백은 한껏 구겨진 얼굴로 그가 건네는 약을 받아 삼켰다.
“옳지. 다 먹었으면 운기조식도 하고.”
“…….”
지강백이 군말 없이 가부좌를 틀었다. 말을 대신해 으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다.
* * *
그리고 사흘이 더 지났다.
지강백은 용천휘의 작고 둥근 약을 세 개 더 먹어야 했다. 도합 다섯 개의 소환단을 먹은 것이다. 그 덕에 이년하고도 반년 치의 공력이 더 생겨났다.
지강백은 여전히 그것이 독성 때문에 단전이 늘어난 기분이 드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이겠군요.”
지강백에게 염주초 열매를 건네며 채희유가 건넨 말이었다.
“예. 약이 총 다섯 개라 하셨으니 오늘 먹은 게 마지막일 겁니다.”
“어제도 드린 말씀이지만…… 참 잘도 드십니다.”
지강백이 잠시 어깨를 움찔했다.
그가 염주초 열매를 삼켰다. 여느 때처럼 쓰고 떫었다. 그래도 처음에 비한다면 삼킬 만했다.
한 번 헛기침을 하고 난 지강백이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뭘 말입니까?”
“채 소저가 따주시면 그리 쓰지 않습니다. 배앓이도 없고.”
“……기분, 탓일 겁니다.”
“그래서 먹을 만했습니다.”
“…….”
채희유가 대꾸 없이 휙 등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언뜻 돌아서는 그녀의 볼에 붉은 기색이 어리는 것도 같았지만 그것도 기분 탓이리라.
지강백이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거리는 정확히 세 발자국이었다.
어쩌다 몸이 스칠 일이 없도록 넉넉한 거리지만, 혹시라도 채희유가 넘어질 일이 생기면 즉시 붙들어 줄 수 있도록 가까운 거리였다.
“거처는 지낼 만하십니까?”
“……네.”
작고, 짧은 답이 들려왔다.
지강백은 만족했다.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가 마련한 집이 괜찮다는 뜻이었다.
물소리가 들린다 싶자 벌써 계곡가에 닿았다.
지강백은 그쯤에서 걸음을 멈추고 포권을 취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등을 돌리려는데 문득 채희유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래서, 도련님의 약을 대신 먹게 만든 그 일은 잘되고 있습니까.”
지강백의 눈매가 느슨해졌다. 날카롭던 인상이 지워지고 대신 온화한 미소가 머물렀다.
그것을 지켜보는 채희유의 동공이 짧게 흔들렸다.
“아니오.”
“……잘 안 되십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항상 지는 데다, 지는 시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어서요.”
“그런데 표정은 그리 보이지 않습니다만.”
“아, 그게 희한한 일입니다. 계속 지고 있지만 어쩐지 진다는 기분은 들지 않아서요.”
“그런가요? 저처럼 무공을 모르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지강백이 난처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기분이 그렇습니다. 아직 초식을 완전히 익히려면 멀었는데…… 이전처럼 아주 멀게만 느껴지진 않습니다. 매일 지는 것을 보면 그저 기분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강백은 몰랐지만 그는 지금 한 번의 도약을 위해 몸을 잔뜩 움츠린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며칠 전 어렴풋이 끝자락을 잡았던 그 깨달음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있다면 그는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이를 것이다.
무인이라면 한 번씩은 지금 지강백과 같은 상황을 마주한다.
알듯 말듯 모호하고, 무공은 꽉 눌린 듯 정체되어 있는 그런 시기가.
이 시기는 기회이자 동시에 위기였다.
늘 발을 딛는 섬돌이 갑자기 훌쩍 높아진 것과 같았다.
무사히 섬돌을 딛는다면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높이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면 계속 같은 자리에 있거나, 혹은 아예 뒤로 나자빠지거나 하는 것이다.
머리로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지강백의 몸은 이 원리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가 다시없을 천재인 이유였다. 정체를 인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체를 이해하고 있었다.
채희유의 얼굴도 온화해졌다.
어쩌면 기분 탓일지도 몰랐다. 채희유는 요새 그를 피하는 느낌이었으니까. 더는 얽힐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그 날의 얘기처럼.
“그래도 한 번은 이기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래야 도련님의 장난도 끝이 날 테니까요.”
채희유가 원한다면 자신도 그녀와 마주칠 일을 피해주고 싶었다. 잠깐의 시간이라도 그녀가 편히 머물다 가길 바랐다.
그런데도 얼굴을 보고 있으면 반갑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특히나 그녀가 저 하얀 눈꽃 같은 얼굴에 눈 그림자가 아닌 온기를 드리울 때면.
“지는 것도 싫지는 않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아우들이 성심껏 제 수련을 도와주는 것이니까요. 이젠 사제가 억지로 먹이는 약도 없으니 더욱 더 저어할 것이 없겠군요.”
그 말에 채희유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렇진 않을 겁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분명 작고 둥근 단약은 다섯 알이 전부였지만 도련님이시라면 다른 것을 준비하고도 남을 만한 분이니까요.”
“……그럴까요?”
“그럴 겁니다.”
지강백이 한숨을 내쉬었다.
“……독은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순간 채희유의 얼굴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눈밭으로 돌아갔다.
“그럼.”
그녀의 작은 어깨가 돌아섰다. 까만 머리칼이 한 올 내려앉은 흰 목덜미가 보였다.
그러나,
쾅!
너무 빠른 시간에 문이 닫히고 그녀의 모습은 사라졌다. 흰 목덜미가 잔상을 만들 여유도 없었다.
혼자 남은 지강백이 중얼거렸다.
“가끔, 아까처럼 웃으면 좋을 텐데.”
채희유를 대신하는 것처럼 작은 참새 한 마리가 짹짹,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면 더……,”
더 예뻐 보일 텐데.
눈이 아프도록.
지강백은 말을 얼버무리고 대신 멋쩍은 손길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잠시 후 그가 등을 돌려 떠났다. 이 년 반 이상의 공력이 더해진 은하유영비는 산바람처럼 거침이 없었다. 지강백이 순식간에 계곡가를 벗어났다.
그래서 그는 몰랐다.
닫힌 문 안쪽에서, 귀를 바짝 기대고 섰던 채희유가 자신이 중얼거린 말을 듣고 있었다는 것을.
“…….”
하얀 볼 위로 온기가 피어났다.
눈이 아플 만큼 고운 온기가.
그러나 보아주는 사람이 없는 온기는 너무 짧게 피었다가 곧 시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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