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의리란 무엇인가
“……하나!”
슷!
검영이 허공을 갈랐다.
낡은 목검에서 비롯되는 칼 그림자는 유려하고 부드러웠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우어…….”
지강백의 수련을 쳐다보던 왕대환이 넋을 놓고 입을 벌렸다.
주먹으로 어린애 머리통만 한 바위를 깨부술 때와는 또 달랐다. 그때는 사람이 아닌 살인귀를 보는 것처럼 몰골이 송연했다면 지금은 너무 까마득해서 범접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저런 건 대체 뭐라 하는 거요, 작은 형님?”
왕대환이 빗자루를 턱에 괴고 물었다.
그는 지금 앞마당을 쓰는 중이었다.
정직 제자는 아직 아니고, 제자 후보 비슷한 신분이 된 그들은 알아서 사문의 살림살이를 떠맡았다.
그 무시무시하던 큰형님도 집 한 채 지어주는 것으로 어떻게 구워삶았으니 사부도 그 비슷하겠지, 라는 흑심에서 이러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말단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그 전에 큰형님께서 새벽마다 밥 짓고 물 길어와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시는 꼴을 두고 볼 배짱은 그들 중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런데 다들 알아서 구역을 나눠 살림살이를 맡으니 그걸 멀찍한 데서 지켜보시는 사부님 안색이 좀 흐뭇해지시는 것 같기도 하고 좀 그랬다.
어쨌거나.
그래도 제자 후보 중 맏이라는 이유로 왕대환은 제일 편한 일을 맡았다.
비질이 생각보다 고된 일이라 하더라도 왕대환은 기꺼이 저가 빗자루를 쥐었을 것이다.
연무장을 쓸고 있으면 이렇게 겸사겸사 큰형님의 수련도 훔쳐볼 수 있으니.
오늘도 콧바람을 불며 어제도 박박 쓸어 깨끗하디깨끗한 연무장을 또 신나게 쓸고 또 쓸었다.
오늘은 작은형님도 나오셨다. 괜히 더 신이 났다.
그래서 한 마디 던졌더니 작은형님의 대꾸는 이러했다.
“헛다리 짚기.”
“……엥?”
냉정한 표정도 그렇고 말하는 내용도 그렇고 뭔가 좋은 뜻은 아닌 게 확실했다.
왕대환이 곤란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작은형님?”
설마 저렇게 멋진 검술에 무슨 문제라도 있다는 소리일까.
용천휘가 가볍게 턱 끝을 저었다.
“저 바보는 너무 곧아서 변초가 왜 변초인지를 몰라. 몸이 머리보다 더 뛰어나니 이해를 못하는 상태에서도 따라가고 있을 뿐이지. 그런데 저런 식이면 석 달 안에 대성하기는 글렀어.”
“……으음?”
용천휘의 말은 왕대환을 놀라게 했다.
척 보기에도 용천휘는 종남파 둘째 제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무공은 한 자락도 익히지 않은 태가 줄줄 흘렀다.
저 고운 손은 부채 말고는 쥐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걸음걸이나 몸가짐은 귀티가 나긴 했어도 무인의 느낌은 없었다.
그런 그가 저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게다가 쳐다보면서 눈을 끔벅이고 있자니 용천휘의 눈 색깔이 자꾸만 짐승처럼, 아니 짐승이라기보단 무슨 옛이야기 속 전설의 영물처럼 붉게 변해가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더 당황스러웠다.
“가서 애들 좀 불러와.”
“……저, 저한테 하시는…… 말씀……입,”
“그럼 누구한테 하겠어.”
용천휘는 이제 완전히 붉어진 눈으로 왕대환을 바라보았다.
왕대환이 입을 딱 벌렸다. 마침 빗자루로 턱을 괴고 있던 중이라 턱이 빠지는 것은 면했다.
“어, 으…….”
왕대환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최소한 작은형님 대체 눈이 왜 그러시오? 라고 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저 붉은 눈앞에서는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말이고 뭐고 넙죽 엎드리고 싶어서 이가 달달 떨려왔다.
그런 왕대환에게 용천휘가 말했다.
겉보기로는 여전히 상냥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듣는 왕대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서.”
“아…… 아이고, 옙!”
간신히 대답을 한 왕대환은 빗자루를 놓고 뛰어갔다.
* * *
그렇게 지강백은 제자 후보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제자 후보들과 용천휘를.
지강백은 제자 후보들 틈새에 끼어 있는 용천휘를 마주 보았다. 인상이 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체 너는 왜?”
용천휘가 짓궂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수련이 장난 같나?”
“천만에. 나름 진지하다고.”
“그럼 내 검이 우스워 보이나?”
용천휘의 대답은 지강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지금으로서는, 솔직히.”
“…….”
지강백의 미간이 구겨졌다.
동시에 불끈 오기가 치솟았다.
그의 자질이 모자라다는 것과는 별개로, 강호 일자무식에게 종남의 검을 우습게 보일 수는 없었다.
용천휘가 다치면 한없이 냉정해지는 채희유의 까만 눈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지강백은 그것을 모른 척했다.
“그럼 좋다.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멋대로 해 봐. 그 되잖은 생각을 뜯어고쳐 주겠다.”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었어.”
용천휘가 슬쩍 한 발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지강백은 저마다 무기를 쥔 제자 후보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목검을 들고 있는 지강백이나 제자 후보들이나 서로 싸울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점에서 참 어색한 면대가 아닐 수 없었다.
“뭐해? 어서 덤비지 않고.”
용천휘가 그렇게 말하자 귀신눈 구악이 울상을 지었다.
“아니, 작은형님도 참. 어찌 이리 짓궂게 구십니까요. 저희 같은 것들이 어찌 큰형님 상대가 된다고.”
“왜 안 되는데?”
“예? 아, 그거야 큰형님은 엄청난 고……,”
구악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부님의 엄명이 있었다.
그들은 장차 대사형이 될지도 모르는 지강백에게 함부로 말을 걸어서도, 함부로 무공에 대한 말을 꺼내서도 안 됐다. 사부님 말로는 정식 제자도 아닌 것들이 무공이라도 훔쳐 배울까 봐 그렇단다.
무공이 말 몇 마디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들 의아해했지만 사부님이 냅다 눈에 힘을 주시는 바람에 그러고마 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정식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당분간 사부님 말씀에 무조건 넙죽 엎드리는 것이 최선이었으니까.
어쨌거나.
“뭐, 설마 다 같이 놀자고 하는 일에 사형이 진심으로 손을 쓰겠어?”
지강백이 진심으로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논다니?”
“그럼 이게 노는 게 아니고 대체 뭐야. 사형 혼자 노는 게 심심해 보이니 우리가 같이 놀아주겠다는 건데.”
목검을 쥔 손에 뿌득 힘이 들어갔다.
“정 그렇다니 기꺼이 놀아주지.”
물론 강호에서 칼을 들고 논다는 의미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노는 것과는 한참 다를 테지만.
그런 뜻을 유감없이 전하는 지강백의 매서운 눈초리에 제자 후보들이 겁을 먹고 걸음을 주춤했다.
태연한 것은 용천휘 하나였다.
“놀이니까 그 전에 규칙을 정하자. 노는 덴 규칙이 있어야 더 재미있지.”
“무슨 놈의 규칙.”
“사형은 절대 누구도 다치게 해서는 안 돼. 그리고 사형의 칼 장난에 다들 동참해주는 거니까, 사형은 칼만 써야 해. 주먹이나 발을 써서도 안 돼.”
규칙에 앞서 칼 장난이라는 말이 지강백의 사고를 흩뜨렸다. 울컥 화가 치솟았다.
“좋아. 그럼 너도 뭔가를 해라.”
“뭘?”
“놀이가 다 끝나면 한 대 맞든가.”
“내가 다치면 내 약사가 화를 낼 텐데? 그건 나도 무섭다고. 물론 사형도 그럴 테지만.”
채희유의 까만 눈이 떠오른 지강백이 잠시 움찔했다.
안 다치게 때리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겠다만 용천휘의 몸은 항상 그의 상식을 벗어났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누구도 그 앞에서 종남파의 무공을 놀이나 장난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그럼 뭘 할 거냐?”
“글쎄? 그건 사형이 정해.”
어쩌다 보니 내기가 되게 생겼다.
까다로운 조건이 달리긴 했지만 이 제자 후보들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것은 사문의 무공을 우습게 여기는 용천휘의 태도를 뜯어고치는 일이었다.
“너도 무공을 익혀.”
그래서 말했다.
직접 익혀보면 절대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테니까.
기대했던 대로 용천휘가 입을 딱 벌렸다.
“무공을 익히라니. 나한테? 말이 되는 소리야?”
“처음 입문할 때 경공 정도는 배우고 싶다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시작할 때도 됐지. 내가 직접 지도해 주겠다.”
“…….”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용천휘가 입매를 비죽 꼬았다. 그가 곧잘 짓곤 하는 못된 웃음이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못 할 건 또 뭐야.”
탁.
그가 부채를 접어 반대편 손바닥을 가볍게 쳤다.
“사형은 목검만 써서, 지금 하던 칼 장난으로, 아무도 다치게 하지 말고 제압해야 해. 한 명이라도 다치게 하면 사형이 지는 거야. 그리고 사형이 다쳐도 지는 거야.”
“알았다.”
“그리고 사형이 지면 사형은 내가 시키는 일을 한 가지 해. 그게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강백이 대답 대신 목검을 세웠다.
용천휘가 슬쩍 걸음을 물리며 말했다.
“그럼 다들 마음껏 덤벼보라고.”
그러나 선뜻 움직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큰형님을……,”
귀신눈 구악이 말끝을 흐렸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단서가 붙어 있어도 큰형님에게 덤비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 참. 같이 노는 거라니까.”
용천휘가 짜증스럽게 부채를 휘둘렀다. 그 아무 의미도 없는 동작은 하필이면 염창의 팔꿈치를 건드렸다.
“억!”
염창의 팔이 앞으로 쑥 뻗었다. 공교롭게도 염라도를 쥔 오른팔이었다.
“이런.”
용천휘가 놀랐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 바람에 그는 염창을 떠미는 꼴이 되었다. 염라도가 어정쩡하게 뻗어 있는 상태에서 몸이 앞으로 쏠리는 통에 염창은 출수(出手)하는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휘잉!
칼끝이 지강백을 스쳐갔다.
가만히 있었다면 찔렸을 것이다. 지강백이 적절하게 몸을 틀어 비키지 않았다면.
“잘 하는데 그래. 그렇게 덤비란 소리야.”
용천휘의 말에 염창이 억울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건 내가 그런 게 아닌데…….”
그동안 용천휘는 벌써 한 발을 더 물러나 왕대환의 어깨를 툭 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얕게 달싹인 것도 같았다. 고개를 끄덕인 왕대환이 갑자기 도끼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별로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지강백에게 덤벼들었다.
“으아압! 받으시오, 큰형님!”
오른팔이 부러졌기에 도끼는 왼손으로 들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 같은 손놀림은 나올 리 없었다.
“너는 빠지는 게 낫지 않겠어?”
지강백은 이전보다 한참은 더 어설퍼진 도끼를 보며 반 보를 옆으로 움직였다.
쉬운 동작 같았지만 왕대환과의 거리를 냉철하게 가늠한, 무척 영리한 동작이었다.
그는 왕대환이 검격 안으로 들어오면 재빨리 수혈을 짚어 잠재우겠다는 계산을 해두었다.
그런데.
“……?”
실패했다.
몸을 잔뜩 낮춘 자세로, 목을 거북이처럼 움츠린 채 왼편 옆구리를 파고드는 동작은 지강백의 예상 밖이었다.
몸을 낮춰 무릎으로 도끼날을 걷어 올리려던 찰나, 용천휘가 말했다.
“칼만 쓴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
“…….”
게을러빠진 인간이 의외로 눈썰미는 좋은 모양이었다.
지강백은 몸을 아예 솟구쳐 뒤로 재주넘기를 했다. 공중에서 훌쩍 돌았던 몸이 땅에 막 내려서는 순간,
“으익?”
누군가의 반달창 끝이 지강백의 발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염창의 어처구니없는 출수처럼, 이번 것도 전혀 의도한 공격이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 용천휘에게 떠밀려 팔을 뻗었는데 하필 그 자리에 지강백의 발목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강백의 목검이 한 차례 원을 그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 같은 목검 끝에 창날이 부딪혔다.
캉!
나무와 창이 부딪혔는데 엉뚱하게도 창날의 이가 나갔다.
태을분광검의 여운낙수라는 초식이었다.
지강백은 틈을 놓치지 않고 초식을 이었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은 목검이 반달창을 든 이의 옆통수를 지나쳐 갔다.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 덕에 눈이 가려진 상대가 허우적 고개를 흔드는 사이,
툭.
목검의 끝이 스치듯 수혈을 짚었다.
“어, 어…….”
반달창을 든 이가 몰려오는 졸음에 고개를 기울였다. 지강백은 왼팔로 그를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나.”
지강백이 용천휘를 향해 말했다.
용천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부채를 흔들었다.
“흥. 무릎을 쓸 뻔했잖아.”
“쓰려고 하다가 안 썼다.”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을걸. 그랬다면 내가 이겼을 텐데.”
“시비 걸기 좋아하는 네놈 성격 탓이지.”
“뭐, 좋아. 이제 겨우 한 명인데. 벌써부터 잘난 척은.”
용천휘가 부채 끝을 제자 후보들에게 돌렸다.
“너희들, 좀 더 열심히 덤벼. 사형을 지게 만드는 사람은 상을 주겠다.”
상이라는 얘기에 제자 후보들은 귀가 솔깃한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고개를 빼어들고 용천휘를 빤히 바라보는 모습들이 보였다.
“상이라굽쇼, 작은형님?”
용천휘는 허리띠에 매달린 구슬 장식을 톡 떼어냈다. 희고 긴 손가락 사이에서 말간 옥구슬이 반짝였다.
“묘왕에서 캐내는 청옥이다. 이거 한 알에 은 백 냥은 거뜬히 나가는데.”
“배, 백 냥!”
제자 후보들의 눈빛이 갑자기 흉흉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미 지강백은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뜻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수혈만 살짝 짚어 곱게 바닥에 눕혀 주었던 것을 모두가 똑똑히 보았다.
그렇다면 해볼 만한 것이다. 이기면 은이 백 냥이었고, 져도 아무런 손해가 없었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큰형님.”
누군가가 무기를 고쳐 쥐고 말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흐압!”
수십 명이 지강백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못했다.
가장 뒤로 물러서 있던 용천휘의 두 눈이, 때마침 붉게 변하고 있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