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뼈에 새겨 잊지 않는다
“산적이라니!”
지강백이 소리쳤다.
은도끼 왕대환을 비롯한 산적들의 얼굴이 노랗게 뜨는 동안 용천휘는 부채로 슬쩍 얼굴을 가렸다.
웃음을 참느라 떨리는 어깨를 감추기 위해 그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아무도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지강백이나 산적들이나 서로 너무 놀란 탓이었다.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다 지은 밥에 노랗게 콧물이 번진 모습을 보는 심정이 이럴까.
왕대환은 조금은 억울한 심정을 담아 물었다.
“종남산이 큰형님 댁 선산이라도 되오? 아니, 산이면 산마다 있는 산적들인데 왜 종남에는 안 된다는 거요?”
지강백이 말했다.
“종남의 일대제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뭐…… 뭐라고?”
왕대환이 뒤로 훌렁 자빠졌다.
한눈에도 놀랐다는 태가 나는 모습이었는데, 그것은 다른 산적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저를 무슨 십 년 만에 살아 돌아온 귀신 보듯 하는 의제들의 태도에 지강백이 곤혹스러워할 차례였다.
“그게 참말이오?”
“사문을 두고 거짓말은 하지 않아.”
“하이고, 그럼……,”
왕대환은 차마 말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였을까.
대체 왜 그를 종남파 제자라고 생각을 못 해봤을까.
아니, 그게 당연했다.
종남파 무공이 강호에서 싹 자취를 감춘 지도 어언 십수 년.
세가 강맹한 문파일수록 제자 수가 많으니 강호에서 마주치며 무공을 견식할 기회도 많았지만 종남파는 그렇지 않았다.
제자가 남아 있어야 무공을 쓰든 뭘 하든 할 것 아닌가.
그러니 대천강검이니 천강지니 하는 종남파의 독문무공을 써대도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고수인가 보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강백이 종남파의 제자라고 한다면 얘기가 복잡해진다.
종남파 제자더러 종남산에서 산적질 하라 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 그럼…… 우리는 이제 어쩌오?”
왕대환이 꺼질 듯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염라도 염창이 벌떡 일어선 것은 그 때였다.
“이런, 옘병! 내 이리 될 줄 알았어! 이럴 거 왜 받아준다 말을 해서는! 화산파 도사놈들 등쌀에 못 이겨 멀쩡한 산채 불 지르고 도망쳐 왔더니……! 사람답게 살아보겠다고 기껏 발버둥친 게 이거야? 이제 여기서도 쫓겨나는 거냐고! 옘병, 무슨 놈의 팔자가 이 따위야! 더는 못 해먹겠네!”
이제서 하는 말이었지만, 염라도 염창은 퍽 우울한 인생을 살았다.
그 역시 사연이 깊은 산적 중 하나였다. 듣기로는 젊어 혼인했는데,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었다 했다.
그게 세상 탓이라 여긴 그는 가슴 속에 울화를 품고 산적이 되었다. 그렇게나마 이 더러운 세상에 반항하려 했던 것이다.
이후로 산채 생활 십 년.
잃은 가족을 대신할 동지들을 만나면서 차츰 상처가 아물어가나 싶었지만 그래도 한번 둥지를 튼 상처는 어지간해서는 아물지 않았다.
그가 유독 까칠하고 상처 받기 두려워하는 것도 그런 탓이었다.
염창은 지금, 무엇해도 달라질 게 없는 팔자에 절망하는 중이었다.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아직 술이 덜 깨긴 했다. 술이 들어가면 그간 잘 다독이던 상처가 갑자기 툭 벌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죽을라요!”
염창이 투박한 도를 치켜들어 턱을 겨누었다.
도는 길고 팔은 그보다 짧아서 안타깝게도 당장 죽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염창의 비관적 술주정을 몇 번이고 봐온 산적들은 그를 보며 눈을 끔뻑끔뻑거렸다.
처음 얼마 동안은 다들 겁을 먹기도 했고, 애써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면 그러려니 하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동작이 가장 빨랐던 사람은 지강백이 되었다.
뭐가 휙 날아온다 싶자,
빡!
뒤통수를 후려치는 강렬한 충격이 혀를 빼물게 했다.
“무슨 짓이야! 나이도 어린 게!”
“…….”
염라도를 떨어트린 염창이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뒤통수가 엄청나게 얼얼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귓구멍에 이상이 온 것 같기도 했다.
“몇 년이나 살았다고 팔자니 인생이니 얘기하는 거냐. 그런 건 좀 더 살아보고 나서 말해도 늦지 않아. 인간의 나이로 반백 년을 살아야 하늘의 뜻을 안다 했다. 그 반도 못 산 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라, 아닌 모양이다.
어린 게 어쩌고 하는 게 진심인 모양.
염창이 떨떠름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내 나이가 지천명(知天命: 50세)까지는 못돼도 곧 불혹(不惑: 40세)이 머잖…… 으악!”
염창이 돌연 비명을 질렀다.
귀신눈 구악이 눈치 빠르게 왕대환의 옆구리를 쿡 찔렀고, 그 뜻을 알아챈 왕대환이 득달같이 달려가 염창의 뒤통수를 후려쳤던 것이다.
방금 전 지강백에게 맞은 자리가 아직도 얼얼한데 왕대환까지 보태니 세상에 온통 노래지는 듯했다.
“그래, 이놈아! 아직 약관도 안 된 새파란 게 어디 큰형님 앞에서 팔자타령 하고 자빠졌냐! 당장 정신 못 차리냐!”
“야, 약관?”
“그래 이놈아!”
염창이 얼빠진 표정으로 약관, 약관이라니……를 반복했다. 왕대환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강백에 하소연을 했다.
“큰형님. 이놈이 아직 어려 마음이 여려 그렇소. 그러나 저놈 마음을 우리도 모르는 바가 아닌 걸 어쩌오. 산적놈들더러 산적질이 안 된다 하시니…… 그럼 큰형님은 형님 하시겠다는 말씀도 다 버리고 이 의제들을 그냥 그렇게 내팽개치실 거요?”
용천휘가 시기적절하게 끼어들었다.
“흐음. 의형제연이 그렇게 쉬운 거였군 그래. 신의와 책임을 아는 자들이라서 좋다더니, 정작 사형은 신의 따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쯧쯧.”
귀신눈 구악이 슬금슬금 몸을 움직여 용천휘의 뒤에 섰다. 말 대신 행동이었다.
다른 산적들도 어물쩍 몸을 움직여 구악을 따랐다.
지강백과 다른 산적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고랑이 깊이 패여 편을 가르는 듯 보였다.
신의를 아는 자들과, 그런 건 쥐뿔도 모르는 자로.
입을 꾹 다물고 생각을 잇던 지강백이 한숨을 토했다.
“……그래도 산적질을 용납할 수는 없어. 이곳은 종남의 땅이다.”
왕대환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럼 우린 어쩌오?”
이대로 쫓겨나기는 싫었다.
큰형님을 떠나기도 싫었다.
산채를 해산하는 것도 안 될 말이었다. 벌써 십 년째 같이 지낸 가족들이었다. 생이별은 말도 안 된다.
이번에도 용천휘가 시기적절하게 말을 꺼냈다.
“사형이 책임져야지. 큰형님으로서.”
“어떻게 하라는 소리냐?”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방법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 어려운 것을 용천휘는 아주 쉽게도 말했다.
“종남파에 들여.”
“뭐?”
“으잉, 뭐시라고요?”
용천휘의 말에 지강백와 산적들이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자빠졌냐, 하는 표정.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새 출발 하는 거야. 산적보다야 종남파 제자가 낫지 않겠어?”
“으, 으잉?”
“지금 종남파 제자는 우리 둘이 전부잖아. 새 제자가 생긴다면 사부님도 기뻐하시겠지. 너희들도 그래. 고작 약관에 인생의 목표가 산적질 하다 죽는 게 아니라면 명문정파의 제자가 돼서 어깨에 힘주고 사는 것도 괜찮지.”
용천휘의 말은 영악하게도 양측의 가장 약한 부분을 찔렀다.
지강백은 사부님이 기뻐하실 거라는 말에 마음이 기울었고, 산적들은 어디 가서 어깨 펴고 살 거라는 말에 가슴이 설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나쁠 거 없잖아.”
용천휘가 산적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들은 어때? 종남파 문하가 될 마음은 있어?”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물론 말단 제자겠지만.”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리 하겠소! 받아만 주신다면!”
왕대환이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종남파의 제자라니. 물론 열아홉도 아니고, 그 곱절에 가까워지는 나이에 까마득한 말단 제자가 되는 것이었다만 그래도 종남파 제자라니.
다 망한 문파라 볼 것도 하나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종남파에는 지강백 같은 인물이 있었다.
이제 고작 스물하나라던 그가 저는 발끝도 못 대볼 고수였다.
문하인이 되면 앞으로 밥벌이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싶어서 이러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받아주시오, 큰형님!”
왕대환이 지강백 앞에 넙죽 절을 했다.
다른 산적들도 앞을 다투어 비좁은 바닥에 엉덩이를 밀어 넣으며 왕대환을 따라 했다.
“일어나. 너희들이 절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사부님이시다.”
지강백이 왕대환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 많은 새 제자들이라니.
적당히 있다 게으름이나 부리겠다고 공언한 용천휘가 입문하는 것으로도 내심 기뻐하던 사부님이셨다. 어쩌면 이들도 그리 기뻐하실지 모르겠다.
“일단 사부님께 여쭤 보겠다.”
십칠 년간 제자 하나, 장문인 하나였던 종남파였다.
과연 종남의 제삼십구 대 장문인은 이 다 늙어빠진 말단 제자들을 놓고 무어라 말할까.
* * *
“……이, 이게 무슨…….”
양영천은 저도 모르게 뒷목을 잡았다.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지강백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양영천을 부축하려 들었다. 양영천은 너무 신경질이 난 나머지 소리를 빽 질렀다.
“아, 네놈은 잠자코 있어라! 더는 한 마디도 하지 말고!”
“…….”
지강백이 몹시 송구한 얼굴로 몸을 물렸다. 걱정과 미안함, 그리고 면구함이 뒤섞인 얼굴은 한껏 어두웠다. 너무 어두운 나머지 온통 깜깜한 얼굴에 안광만 번뜩였다.
“눈도 감아!”
양영천이 다시 소리를 꽥 지르자 지강백이 눈을 질끈 감았다.
“후, 하…… 내, 내 이런……. 이놈이 또 밖에 나가서 사고를……,”
양영천이 뒷목을 꼭 움켜쥔 채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제자로 받아달라며 우르르 몰려든 수십 명의 장한들을 보는 심정은 대체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듣기로는 종남산으로 옮겨온 전직 산적들이었고, 지강백이 두들겨 패서 제정신을 차리게 만들었고, 그런고로 산적질 같은 건 집어치우고 이제 종남의 제자가 되어 바른 길을 걷겠단다.
그것만큼은 과연 내 제자답구나, 오냐 기특하다 싶었다.
그런데 그건 그거고. 등골에 섬뜩한 한기가 고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 그렇다는 것은…….’
산적들이 왜 갑자기 정신을 차렸겠는가.
당연히 지강백이 저들은 상대가 안 될 고수라는 것을 알아차려서 그럴 것이다.
지강백이 종남산에 산적이 활개 치는 것을 두고 볼 성격도 아니고, 분명히 참으로 올바르고 적절한 방식으로 이들을 훈계했을 것이다.
그러니 넋이 나가서 제자로 받아 달라는 흰소리를 대낮부터 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 말은 즉,
‘내, 내가 그간 거짓말 해온 것을 이놈들이 말하기라도 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이놈들을 당장 제자와 떨어트려 놓아야 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더냐! 어찌 악인을 경내에 들이라는 말이냐. 강백이 너는 장문의 직전제자라는 신분으로 그리 생각 없이 구는 게야!”
본심을 감추는 호통은 도둑이 제 발 저려하듯, 더욱 준열했다.
“…….”
지강백은 입 다물고 있으라는 사부의 명 탓에 아무 소리도 못 했고, 산적들은 다 같이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작은형님, 큰형님을 간신히 넘어 섰더니 이번에는 사부님이었다.
“아, 악인이라니! 한때는 그랬을지도 모르나 이제 더는 아니올시다! 이 두 눈이 큰형님 같은 대인을 보았는데 어찌 과거의 산적질에 연연하겠소이까!”
왕대환이 앞으로 나서서 양영천의 앞에 넙죽 절을 했다.
“받아주시오! 받아주시면 어떻게든 선인이 되겠소이다!”
그러고 쿵, 돌바닥에 이마를 찧는데 어찌나 독하게 찧었던지 거죽이 찢겨 피가 줄줄 흘렀다.
왕대환뿐이 아니었다. 귀신눈 구악이 재빨리 동참했다. 그러나 그는 왕대환처럼 독하진 못해서 피가 흐르진 않았다.
이어서 염라도 염창도 나섰다. 염창은 왕대환과 경쟁이라도 하듯 무식하게 이마를 메다꽂았다.
퍽!
잘 찢어졌다. 피가 콸콸 흘렀다.
염창이 만족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히죽 웃었다. 왕대환이 분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기에 더욱 가슴이 부듯했다.
그는 까닥 목이 날아갈 뻔했던 술주정에서 자신을 거뜬히 살렸던 큰형님의 매서운 손맛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파서 그저 얼떨떨했는데, 조금도 분하거나 서럽지 않았다.
오히려 든든했다. 이제 그에게는 잘못된 일을 기꺼이 야단쳐 주는 큰형님이 생긴 것이다.
염창이 큰형님을 바라보는 마음은 결코 왕대환에게 지지 않았다.
채주와 부채주가 이마를 깨고 있으니 다른 산적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퍽퍽 이마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림없……,”
어림없다! 라며 근엄하게 외치려던 양영천의 목소리가 끊겼다. 대신 오래전 허옇게 센 눈썹이 떨려왔다.
한둘이라면 몰라도 저리 많은 인간이 저마다 이마를 깨고 있으면, 누가 악인이고 누가 선인인지 조금 입장이 애매해지는 법이다.
게다가 양영천은 새 제자를 받아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허, 허…….”
한때는 종남에도 늘 풋풋한 땀내음이 물씬 풍기던 시절이 있었다.
제자들은 바지런히 경내를 뛰어다녔고, 여덟 명의 장로들은 수백이나 되는 제자들을 건사하느라 늙을 새도 없었다.
그 커다란 현판과 조사동의 향로 하나하나까지 늘 잘 닦여 번쩍였다.
여기저기서 기합 소리와 검 소리와 주먹 소리가 울렸다.
그 든든하고 우렁찬 소리는 그 자체로 구파일방, 대명문정파 종남의 위상이었다.
그 시절을 하나 빠짐없이 기억하는 양영천은 이마를 깨면서까지 종남파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산적들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자니 제 거짓말이 들통 날까 이도 저도 못 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양영천이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용천휘 하나였다.
“사부님. 저들이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드시는지요.”
“그, 그게……,”
“아직 많이 부족한 이들이라는 것은 저도 알겠습니다. 무엇보다 저처럼 오만 냥이나 되는 입문금을 턱 내놓을 만한 재력도 없겠고요.”
입문금 오만 냥이라는 소리에 산적들이 이게 무슨 소리여, 하는 표정으로 하나둘씩 입을 벌렸다.
용천휘는 그들을 산뜻하게 무시했다.
“하지만 본성마저 악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었다면 사형을 따르겠다는 이유로 길을 그리 선뜻 바꾸지도 않았을 겁니다.”
용천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세상의 그 누구라도 두 번째 기회를 가질 자격은 있는 것이니까요.”
따듯하고 상냥하기까지 했다. 재미삼아 남을 괴롭히는, 비뚤어진 도련님답지 않게.
“저들이 묻혀 올 세속의 때가 이 청정한 곳을 더럽힐 것이 그리 저어되신다면 사부님께서 저들을 깨끗이 닦아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양영천이 입을 뻐끔히 벌렸다.
“……무얼 어쩌라는 게냐.”
용천휘가 부채를 내리고 웃음을 지웠다.
가끔 그도 진지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 용천휘에게는 왠지 모를 위엄 같은 게 있었다.
“그런 참선법이 있지 않습니까? 묵언 수행이라든지.”
“응?”
묵언 수행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사실 그것은 종남파와 같은 도가가 아니라 소림 같은 불가에서 하는 수행법이었지만 지금 여기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묵언 수행이라?”
용천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듣자하니 사람 몸 밖으로 나오는 것 중 가장 더러운 것이 침도 아니요 변도 아니요 말이라 하였습니다. 묵언 수행은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더러운 것을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니, 저들의 때를 닦는 방법으로 가장 좋지 않을까 합니다.”
말을 하지 못하게 한다니.
그렇다면 뭔 말을 지껄일지 몰라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양영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얼굴에서 훤히 드러났다. 지강백이나 산적들은 눈으로 봐도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용천휘는 알았다.
“그리고 제자가 본 바로는, 쫓아낸다고 쫓겨날 이들도 아니더군요. 여기가 아니면 갈 데가 없다 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받아들이시지 않으면 종남 땅 언저리 어딘가에 끈덕지게 눌어붙어 있겠지요.”
그러니 차라리 아예 데려다 놓고 입을 콱 틀어막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허, 허…….”
양영천은 이마가 깨진 채 피를 철철 흘리는 산적들을 바라보다, 하늘을 한 번 바라보았다.
단 하나 남은 제자가 제를 올리는 쓸쓸한 조사동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당장은 안 된다.”
허나 그는 대명문정파 종남의 제 삼십구 대 장문인.
아무리 세가 기울었다 하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인간들을 제자로 넙죽 받아들일 순 없었다.
그 정도의 자존심은 아직 남아 있었다. 비록 쥐꼬리보다 짧겠지만.
“일단 너희들이 종남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먼저 보겠다. 종남이 제일로 치는 것은 무도 아니요 학문도 아니니, 인간의 기본은 선함이 근본이라. 제자의 선함은 사문을 믿고 따르는 데서 오는 것이야.”
사부님이 간만에 문자를 섞어 길게 말씀하시자 지강백이 눈을 빛냈다. 분명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실 터이니 잘 새겨 들어두어야겠다 생각하는 것이었다.
양영천이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어흠흠, 어흠!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종남의 제자가 되려면 마땅히 사부의 말을 가장, 제일 먼저, 무엇보다 우선해서 공경하고 따라야 한다는 게다. 사부의 말은 곧 사문의 뜻이요, 하늘의 뜻이니라. 너희들이 얼마나 사문의 뜻을 잘 따를 것인지 내 두고 보겠다.”
그러니 내가 입 닥치고 있으라면 찍 소리도 내지 말라는 게다. 알아듣겠느냐.
양영천의 마음을 알 길이 없던 왕대환은 다시 넙죽 절을 했다.
절절 끓는 마음이 너무 앞선 나머지 이마를 꽝 받는 실수를 했다. 깨진 이마에 혹도 얹게 생겼다. 그래도 기뻤다.
“명심하겠소이다!”
귀신눈 구악이 눈치 빠르게 왕대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응……? 왜…… 아, 가, 각골……마……아니, 난! 그래 난망하겠소……습니다!”
언젠가 구악이 각골난망이라는 유식한 말을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가 눈치껏 강호를 구르며 느낀 건데 그 말을 쓸 일이 제일 많다는 것이었다.
어떤 자리에서도 각골난망이라는 말은 말이 된다고 했다.
은인을 만나도 말이 되고 원수를 만나도 말이 되고 돈 떼먹고 달아난 자를 만나도 말이 된다 했다. 그러니 두목도 알아두시면 요긴하게 쓸 것이라 우겨댔다.
구악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종남파 장문인이 이렇게 말했으니까.
“크흠, 산적 놈이 문자는……. 오냐, 내 두고 보겠다. 뼈에 새겨 놓고 잊지 말거라. 종남 땅이라면 어디서나 사부의…… 크흠, 사문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겠습니다!”
산적들이 하나로 입을 모아 외쳤다.
양영천은 한시름을 덜었고, 지강백은 이 악인들도 크나큰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부에게 또 한 번 무한한 경외심을 느꼈다.
새 제자를 맞이한 종남파에는 당분간 이렇게 평온하고 따스한 날들이 이어질 것 같았다.
물론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종남파에는 언제나 우환을 몰고 다니는 둘째 제자가 있었으므로.
그리고 그가 불러오는 우환은 늘 생각보다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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