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강호란 칼을 섞다 마음을 섞는 곳
“감사합니다.”
채희유가 동굴 밖으로 나왔다.
차림새가 평소와 비슷해 보이는 것을 보니 옷을 맞게 가져온 모양이었다.
“다행입니다.”
지강백은 긴장이 풀려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어떤 걸 가져와야 될지 몰라 고민을 좀 했다.
여자 옷은 아랫도리 윗도리 하나씩이 아니었으며, 쓰임새를 통 알 수 없는 천 쪼가리도 몇 개씩이나 있었다.
별수 없이 용천휘와 머리를 맞대야 했다. 용천휘는 어차피 가리기만 하면 될 테니 정 모르겠으면 이불이나 가져가라는 말까지 했다.
지강백이 그럼 너부터 이불에 말아주겠다고 하자 다시 옷 고르는 시늉을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고민이 헛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지강백은 매우 어려운 수련을 하나 무사히 마친 기분이었다.
본의 아니게 궂은일을 겪어야 했던 채희유가 다시 말끔한 모습이 된 것도 꼭 제 공인 양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럼 이제 그 염주초라던가 하는 걸 따러 가면 되는 건가? 또 산길을 걸어야 한다니. 그러다 내 비싼 가죽신이 닳으면 어쩌라고.”
지강백을 중독시킨 당사자인 용천휘가 태연하게 이런 말을 했다.
“…….”
“뭐야. 왜 그렇게 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지강백이 지난 일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 아니라는 게 용천휘에게는 퍽 다행한 일일 것이다.
“……됐다. 해약이나 구하러 가자.”
염주초가 자라나는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용천휘가 가는 내내 길이 가파르다며 투덜대긴 했지만 세 사람은 곧 염주초 열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합니까?”
열매를 따기 전 지강백이 물었다.
채희유는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답했다.
“적당히 알아서 드십시오.”
이해 못 할 대답이었다.
분명 채희유는 염주초 열매를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며 산길을 동행했다. 중간에 비가 내리는 바람에 살짝 길을 돌아오긴 했지만.
“먹는 방법이 따로 있다 하신 게 아닙니까?”
채희유는 답을 하면서도 지강백을 보지 않았다.
“그리 번거로울 필요가 뭐 있나 싶군요. 배앓이를 좀 하겠지만 죽을 정도는 아닐 겁니다.”
말에 냉기가 돌았다.
지강백은 이제야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이유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혹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지강백이 말했다.
시선을 피하는 그녀와는 달리 그는 곧은 직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채희유도 느꼈을 것이다.
가녀린 목선이 더 위태롭게 휘었다.
“딱히 그렇다 말할 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저를 저어하십니까.”
휘던 목선이 움찔 굳었다.
대답은 그렇게 굳은 듯 흘러나왔다.
“생각해 보니 제가 기꺼워할 이유도 없더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황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채희유는 용천휘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종남파의 손님이었다.
비록 용천휘가 그리 썩 마음에 드는 사제는 아니라고 해도 채희유가 종남파의 손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오늘의 일 말입니다.”
채희유는 전혀 손님답지 않은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저는 도련님의 일을 보아드리러 왔습니다. 이런 외지에서 불편을 감내하는 것은 제 일이니 괜찮습니다. 허나 도련님이 아닌 다른 분의 일로 번거로워지는 것은 제 일이 아닙니다. 정말이지, 산속에서 비를 다 맞다니.”
무어라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처음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저 말만으로는 소용이 없는 듯하니 제가 스스로 거리를 두는 수밖에요. 앞으로는 서로 부딪힐 일이 없기를 바라겠습니다.”
채희유가 작별인사를 하듯 고개를 까닥 숙였다.
“늦기 전에 해약이나 알아서 드십시오. 다음부터는 도련님의 괴악한 장난 같은 건 알아서 조심하시고요.”
“…….”
그녀가 등을 휙 돌렸다.
지강백이 할 말도 그렇게 몸을 돌려 가버리는가 싶었다.
툭.
그가 염주초 열매를 하나 땄다. 시들기 전에 입에 넣고 씹자 비리고 쓴 맛이 가득 채워졌다.
“번거로우셨다니 면목이 없습니다. 해약은 틀림없이 복용했으니 걱정 마십시오.”
표정이 썼다.
지강백은 이 쓴 맛이 순전히 염주초 열매 탓인지, 아니면 갑자기 돌변한 채희유의 태도 탓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채희유가 걸음을 옮긴 만큼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사이에 용천휘가 끼어들었다.
“볼일 다 끝났으면 어서 돌아가자고. 이 몸을 언제까지 산속에 세워둘 셈이야.”
유감스럽게도 볼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진작 했어야 했던 일이었다.
“채 소저의 거처가 될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 근방입니다.”
지강백이 먼저 훌쩍 걸음을 옮겼다.
멀어져 가는 등을 보며 용천휘가 힐긋 채희유를 곁눈질했다.
“안 가?”
“먼저 가십시오.”
“거 참.”
용천휘가 움직이고 나서야 채희유가 발을 뗐다.
지강백의 등은 용천휘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채희유는 애써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다신 눈에 담을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듯이.
두 사람 사이에 낀 용천휘가 재미있다는 듯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물론 지강백이나 채희유는 보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 * *
“여깁니다.”
지강백은 계곡 옆에 새로 지은 집으로 채희유를 안내했다.
재미있게도 채희유를 위한 집은 그새 또 모양새가 달라져 있었다.
벽이 늘어나고 창이 더 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집은 덩치가 더 커져 있었다.
“생각보다 크잖아. 혼자 살라는 게 아니라 같이 살자는 거였어? 음흉하긴.”
이제 지강백은 용천휘의 헛소리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들어가시지요.”
지강백이 제법 규모가 있어진 집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반듯하게 짜 맞춘 대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이음매에 벌써 기름칠도 해 놓은 모양이었다.
“……?”
그러나 집은 얌전히 채희유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문을 열자마자 구수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 기름진 향은 분명 장작불에 구운 고기 냄새였다. 그와 더불어 비릿한 술 냄새와 텁터름한 사람 냄새도 났다.
이어서 소리도 들려왔다.
코 고는 소리, 이 가는 소리, 잠꼬대인지 술주정인지 하는 소리들이.
집 안 곳곳에는 시커먼 사내들이 너부러져 자고 있었다.
고기는 안주요, 술판은 거나했을 것이다.
배불리 먹고 취할 만큼 마셨으니 잠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
먹다 남은 안주에 술병과 잔 같지도 않은 잔들이 뒤섞여 집 안은 난장판이었다. 험악한 병장기가 구석구석을 굴러다녔다. 마구잡이로 벗어놓은 옷가지와 신도 마찬가지였다.
시큼한 술 냄새가 어찌나 강한지 방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으로도 덩달아 취할 것 같았다.
“어라……? 아는 얼굴 같은데?”
용천휘가 사내들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모두 은도끼파였다.
집이 작아서 지강백이 화를 낸 게 아니냐는 은도끼 왕대환의 말에 따라 그들은 다시 팔을 걷어붙이고 증축에 나섰다.
한창 일하는 와중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도리 없이 집 안으로 들어와 비를 피했다. 그런데 누가 “이런 날에는 기름 진 것을 먹어줘야 하는데…….” 라고 말한 게 화근이 되어 난데없이 고기가 구워졌다.
고기가 있으니 술이 빠질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잠시 비를 긋는다는 게 이 꼴이 되어버렸다.
“그때 그 산적들 아냐?”
용천휘가 부채 끝으로 은도끼 왕대환을 가리켰다. 그는 아직 지강백이 옷자락으로 감아준 부목을 대고 있었다. 알아보는 것도 쉬웠다.
“퍽 좋은 거처로군요. 어디 녹림도가 쓰는 집을 빌려오신 모양입니다?”
채희유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왔다.
분명 차분한 말투였는데 듣는 지강백은 등골이 썽둥 썰려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냄새조차 불결한 집이라니, 이런 곳은 생전 처음 봅니다.”
채희유가 그대로 등을 돌려 문을 나섰다.
“그게 아니,”
지강백이 채희유를 붙들려 했다.
만일 용천휘가 매우 교묘한 위치에 버티고 서서 동선을 곧장 가로막지 않았다면 제때 붙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사형?”
지강백이 인상을 썼다.
“비켜.”
“이번에도 뭘 물어내라는 게 아냐? 그때도 나무 값 물어내라 그랬잖아.”
“궁금하면 직접 깨워서 물어. 비켜라.”
지강백은 참 절묘하게 앞길을 막고 있는 용천휘의 양어깨를 붙들어 옆으로 휙 옮겼다.
용천휘가 이 몸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면 안 되는데 어쩌는데 구시렁대는 것 같았지만 더는 듣지 않고 문을 나섰다.
“채 소저!”
저 만치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는 채희유가 보였다.
채희유는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걸음을 더 빨리 했으니까.
그녀는 멈출 생각도, 얘기를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지강백은 은하유영비를 밟아 단숨에 채희유를 따라잡았다.
“……!”
부지런히 걷던 채희유는 지강백이 갑자기 정면을 가로막자 깜짝 놀라 멈춰 섰다.
“무슨 말을 하시려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요 없을 듯합니다. 저는 이제껏 지내던 곳에서 지내겠습니다.”
채희유는 여전히 지강백과 눈을 마주치려 들지 않았다.
지강백은 할 말이 너무 많을 땐 오히려 말이 더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키십시오.”
“새 집, 이 맞습니다.”
어떻게든 입이 열렸다.
잠시 숨을 한 번 삼킨 채희유가 이윽고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이젠 거짓말도 하십니까?”
“제가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제 눈에는 갓 지은 새 집이 아니라 산적 소굴로 보이는 것을요.”
“의미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지강백의 대꾸도 단호했다.
“종남파에서 멀지 않을 것. 언제라도 오갈 수 있을 것. 항상 지켜볼 수 있을 것. 산세가 좋고, 길이 험하지 않을 것. 그런 곳을 찾아 터를 골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불편하시도록 열심히 생각을 했습니다. 제 의지가 아닌 다른 것이 더 많이 들어갔다 하나 열심이었던 제 마음까지 의미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
그런 그를 마주하는 채희유의 안색이 조금씩 변했다.
“그 마음은 분명히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채 소저께서 지내실 수 있도록 정리를 해놓겠습니다.”
“…….”
채희유의 입술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제가 또…… 믿어드려야 합니까? 얼마나 더요?”
“예, 믿으십시오. 채 소저께서 믿을 수 있는 만큼 전부 다 믿으십시오.”
고집스럽게 눈을 피하는 채희유를 바라보는 지강백의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그가 한 말은 다 진심이라는 것을.
“채 소저께서 저를 믿으시는 한, 저는 제가 한 말을 반드시 지킬 테니까요.”
채희유는 알지 못했다.
지강백이 믿겠다, 라는 말을 들어 본 것은 그녀한테서가 처음이라는 것을.
처음의 의미는 언제나 다른 것보다 크고 무겁기 마련이었다.
“……비키십시오.”
채희유는 한참을 망설이다 이렇게 말했다.
지강백의 곧은 시선이 흔들리려는 찰나, 그녀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짐을 챙겨두겠습니다. 얼마 안 되는 짐이지만 설마 제 손으로 옮기라 하진 않으시겠지요.”
지강백의 안색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채 소저! 그럼 저는 집 안을 정리하겠습니다. 짐을 챙겨두시면 제가 이곳으로 옮겨다 드리겠습니다.”
눈매가 풀어지자 무뚝뚝하던 인상이 사라졌다. 그는 한껏 웃는 얼굴이 되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하고 곧은, 준수한 미소를 인사와 함께 남긴 지강백이 사라졌다.
걸음이 빨랐다. 그리고 가벼웠다.
아무런 거짓 없는 그의 속내를 보는 것 같았다.
동굴 입구에서 비를 맞고 있던 등이 그 모습과 겹쳤다. 그때도 지강백의 등은 거짓 없이 반듯했다.
화를 내진 않을까 걱정했다. 무작정 들어오지 말라 하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을까, 라고.
그러나 지강백은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그가 아예 앉는 것을 보고 제 가슴도 함께 주저앉는 듯했다.
아아, 오래 걸려도 된다는 거구나.
아아, 그래도 기다리겠다는 거구나.
제 독기에 홀린 독충들이 꾸물꾸물 기어와 발목을 더럽히는 와중에도 채희유의 눈에는 그 등만 보였다.
옷자락이 녹아 흘러내렸다. 제 살갗을 문 독충들이 부르르 떨다 숨을 놓았다. 독충의 시체들도 녹았다. 독기가 발밑에 끈적한 웅덩이를 만들었다.
채희유는 녹아 흐르는 게 제 눈이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저 등이 저기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지금 이렇게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우두커니 서서 지강백의 등을 보는 지금, 여전히 그 동굴 안에 있는 기분이었다.
채희유가 입술을 달싹였다.
“……의미가 있다 하셨습니까.”
마음에는 분명 의미가 있다 하셨습니까.
저는 피 한 방울마저도 독이 되어버린 독인입니다.
저는 이전부터 제 마음 같은 것은 벌써 독에 녹아버렸다 여기고 살았습니다. 이제껏 그런 줄 알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 마음에도…… 의미가 있겠습니까.
채희유의 혼잣말은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다.
채희유는 그 말이 혼자서 의미를 잃어가길 빌고 또 빌었다.
* * *
채희유의 집인지, 은도끼파의 새 산채인지 모를 그곳의 문을 지강백이 열었다.
그리고 퍽 놀라운 광경과 마주하게 되었다.
용천휘가 무슨 짓을 했는지 술에 곯아 떨어져 있던 산적들은 그새 정신을 차렸다.
그것도 모자라 새 술 단지를 뜯고 있었다.
그들은 용천휘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앉아 또 한 번 술판을 벌이려던 중이었다.
“여어, 큰형님 오시네.”
용천휘가 술잔을 든 손으로 지강백을 가리켰다.
그런데 술잔이라는 게 참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분명 조그마한 어린애 신발처럼 생겼다. 그간 산적질을 하며 살았으니 그때 누군가한테 빼앗은 물건일지도 몰랐다.
“큰형님이라니. 무슨 소리냐.”
용천휘가 씨익 웃었다. 그가 자연스럽게 술잔을 내려놓고 바로 옆에 앉은 은도끼 왕대환을 탁탁 두들겼다.
“이봐, 큰형님 오셨다니까.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더니, 왜 인사도 안 해?”
“으, 으잉……. 크, 큰형님 오셨소?”
눈을 뜨고 있었지만 취기가 그 잠깐 사이에 싹 사라질 리는 없었다.
은도끼 왕대환은 얼큰히 맛이 간 얼굴로 지강백을 쳐다보았다.
“우어, 이거 참말 큰형님이시네!”
왕대환은 잘 굴러가지 않는 혀를 애써 움직였다. 딴에는 큰형님이라는 말을 아주 또박또박 내뱉었다고 생각했다.
왕대환이 헤죽 웃었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다. 지강백을 큰형님이라 부르는 일은 엄청나게 어려울 일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술김이라 그런지 의외로 술술 흘러나왔다.
왕대환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이것은 모두 저 큰형님의 잘생긴 사제가, 그러니까 이제 은도끼파의 작은형님이 될 그가 물꼬를 터주었기 때문이다.
“큰형님. 어서 술 한 잔 받으시오!”
왕대환이 술잔을 찾아 두리번거리자 용천휘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제 술잔을 쥐어주었다.
“아이고, 우리 작은형님은 참 눈치도 빠르시지. 그냥 얼굴만 훤하신 게 아니네?”
“뭘 이런 걸 가지고.”
용천휘가 눈을 휘며 웃었다. 평소 표정이 나른해서 그런지 그가 눈으로 웃을 때면 털이 하얀 여우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그 여우 같은 눈으로 왕대환을 부추겼다.
“자자. 어서 가서 큰형님께 한 잔 올려. 쭈욱 다 드시라고 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왕대환이 지강백에게 술잔인지 신발인지를 들이댔다.
“어서 쭉, 쭉! 한 잔 시원하게 넘기시고!”
지강백은 술잔을 받지도, 그렇다고 신발을 가지고 뭔 수작이냐고 거절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봐도 용천휘가 신발에 입을 가져다 대긴 싫으니 떠넘긴 것 같진 했지만 이 자리에서 그것을 따지고 들 생각은 없었다.
왜냐.
더 급한 일은 따로 있었으니까.
“큰형님이라니?”
“……아, 그야……. 그, 그러니까 그게……,”
원래 사납게 생겨먹은 지강백의 눈초리는 뭉근하던 술기운을 삽시간에 발려버리는 효과를 발휘했다.
왕대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사람 눈이 꼭 저리 범처럼 번뜩번뜩 살광을 내뿜냐던 불만도 쑥 들어가 버렸다.
지강백이 목검으로 쳐낸 돌이 어디까지 날아갔는지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그 돌에 맞은 새의 비명 소리가 꿈에서 들려와 하마터면 이부자리를 적실 뻔했다.
“그, 그러니까……,”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쪽도 산 생활을 할 거고, 이쪽도 산 생활 하던 중이었으니 기왕 이리 연이 닿은 김에 살림을 합치는 게 어떻겠냐는 게 본심이었지만 지강백이 저들을 흔쾌히 받아줄지가 문제였다.
왕대환이 알기로 고수란 두 부류였다.
무리를 거느리기 좋아하는 쪽과, 혼자 다니길 좋아하는 쪽.
전자는 무슨 장이니 무슨 파니 만들어 사람부터 모은다.
후자는 그런 걸 만들자고 들러붙는 사람들부터 잡아 족친다.
혹 지강백이 후자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이제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그러니까…… 그게 원래 강호란 데가 칼 섞다 보면 마음도 섞는 곳이고…… 그러니 마음 섞인 사람들끼리는 호형호제도 하고…… 아이고, 물론 당연히 이 몸이 큰형님으로 모시겠다는 뜻인데,”
지강백이 왕대환의 위아래를 빠르게 훑었다.
그가 한 말은 이랬다.
“내가 왜 형님이 되어야 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