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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동지-14화 (14/346)

제14화 종남산에 비가 내리면 (1)

운기조식이 끝났다.

지강백은 일주천을 마친 태을신기가 다시 단전으로 갈무리 되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혹 독기가 느껴지십니까?”

눈을 뜨자마자 채희유의 얼굴이 가까이 보였다.

울큰, 그녀의 체향이 밀려들었다. 청량한 수향에 과실처럼 단 내음이 미묘하게 섞여 있었다.

지강백은 저도 모르게 숨소리를 낮췄다. 어쩐지 지금은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릴 것 같아서였다.

“괜찮습니다. 아직 독기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강백이 말을 잇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운기조식 중에 이상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라니요?”

채희유가 물었다. 지강백의 눈이 채희유를 향했다.

심각한 표정 탓에 그의 눈매는 몇 배나 더 날카롭게 보였다.

“내력이 는 것 같습니다.”

대환단은 십 년의 공력을, 소환단은 반년의 공력을 늘려준다고 알려져 있지만 어디까지나 대략적인 것이지 정확한 수치로 따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복용한 자의 내공 성질과 몸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의 차이를 보이는 게 대환단과 소환단이었다.

십 년 치의 공력은 어마어마한 변화이기에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하지만 지강백이 먹은 것은 소환단이었고, 단 한 알이었다.

게다가 지강백은 엊그제 은도끼파를 상대하면서 몸으로 작은 깨달음을 얻은 상태였다. 대천강검과 태을분광검의 초식을 섞으면서, 그는 무학의 원리에 한 발을 내디뎠다.

깨달음은 곧 무공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지강백이 모르는 사이 그의 몸은 계속 강해지고 있었다.

거기에 반년 치의 공력이 더해졌다. 빈 그릇에 한 바가지의 물이 더해지면 단박에 표시가 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물이 가득 담겨 넘실대는 그릇에 한 바가지를 더한들, 그것은 아주 미묘한 차이일 뿐이었다.

그래서 지강백은 확신하지 못했다.

“도련님의 사형 분께서는, 혹시 좀양지 독을 복용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좀양지에도 독이 있습니까?”

좀양지는 종남산 어디에서나 흔히 피는 산야초로, 지혈과 해열에 효과가 있는 풀이었다.

거기에 독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채희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없으나 꽃이 피는 시기의 짧은 계절에는 독성이 나타납니다. 그 꽃을 말려 도련님의 약으로 쓰고 있지요. 좀양지의 독성은 조금 독특하여 무공을 익힌 분에게는 간혹 단전이 커지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고도 합니다.”

얼핏 듣기에는 흠 잡을 데 없는 말이었다.

지강백은 순진하게도 그 말을 믿었다.

걱정으로 미간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독을 먹었다는데 멀쩡할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 심한 독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약이 되기도 하는 독이니까요. 해약만 드시면 곧 사라질 겁니다.”

“해약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채희유의 거짓말은 여기서 잠깐 실수를 했다.

“좀양지가 흔하듯, 그에 상극인 염주초도 흔합니다. 그 열매만 복용하면 됩니다.”

지강백이 먹은 게 독이라는 것만 빼면, 채희유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좀양지에 독이 있다는 것도, 그것의 해독제가 염주초의 열매라는 것도 틀림이 없었다.

다만 지강백이 의외로 종남산에서 자라는 산야초에 관해 해박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십칠 년간이나 사문의 살림살이를 해왔으니 그럴 법도 했다. 산나물을 뜯어다 찬을 만드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므로.

“염주초 열매란 즉석에서 딴 게 아니라면 시들어 못 쓰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맞는 말이기에 그렇다고 답하던 채희유의 안색이 한 박자 늦게 달라졌다.

“그럼 한시라도 빨리 염주초 열매를 구해야겠군요.”

“그렇……습니다만.”

지강백이 몸을 일으켰다.

“열매만 복용하면 되는 겁니까?”

“그게…….”

사실 너는 독을 먹지 않았고, 네 몸은 아주 멀쩡하며, 그런 인간이 염주초 열매를 생으로 씹어 먹었다간 배앓이나 호되게 하기 딱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던 채희유는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무조건 드시면 안 됩니다.”

사람은 평소에 뿌린 업을 제 손으로 거둔다 하였던가.

지강백을 위하고자 했던 용천휘의 선심은 이렇게 뜻밖의 난처함으로 되돌아왔다.

그것도 용천휘 본인이 아닌, 채희유에게.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채희유가 알게 모르게 용천휘를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용천휘는 빙긋 웃으며 그 시선을 모른 척했다.

“어이쿠, 그래. 어서 다녀와. 내 약사지만 특별히 오늘은 사형에게 빌려주지.”

지강백이 용천휘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입 다물어라. 네 실없는 장난질로 지금 몇 사람이 고생이냐.”

용천휘가 얄밉게도 부채를 살랑거렸다.

“뭐 어때. 내가 고생하는 것도 아닌데. 내 취미가 뭔지 잊었어? 번번이 당하는 인간이 바보 아냐?”

작정하고 뻔뻔하게 나오는 인간을 상대하려면 뻔뻔하지 못한 쪽이 손해 보기 마련이었다.

“……됐다. 나중에 보자.”

지강백은 고개를 털었다.

지금 중독당한 사람은 그였고, 허투루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운 것도 그였다.

용천휘를 강제로라도 반성하게 만드는 것은 뒤로 미뤄야 했다. 몹시 아쉬운 노릇이었지만.

“그럼 길을 서두르겠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지강백과 채희유가 집을 나섰다. 지강백의 등 뒤에 대고 용천휘가 손을 흔들었다.

“그럼 잘들 다녀와.”

“……다녀와서 꼭 보자.”

우드득.

지강백의 발 아래서 뭔가가 일부러 밟히는 소리가 났으나 용천휘도, 지강백도 개의치 않았다.

* * *

종남산은 지강백에게 제집이나 다름없었다.

염주초가 어디에 많이 피어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빨래터를 오가며 한두 번은 꼭 볼 정도로 흔한 들풀이었다.

“저 중턱까지만 올라가면 염주초가 제법 보일 겁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습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여인의 걸음은 느렸다.

지강백은 틈틈이 뒤를 돌아보며 채희유를 살폈다. 험준한 산을 당혜를 신은 작은 발로 오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채희유의 흰 얼굴이 살짝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왔다.

“그리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직 갈 만합니다.”

“예, 그럼.”

여린 겉모습과는 달리 채희유는 강단 있는 성격이었다. 여인이라는 이유로 우선적인 보살핌을 받는 것도 싫어했다.

힘들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지강백의 뒤를 따라왔다.

그런데,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이는 듯싶었다.

이쪽에서 먼저 신경을 쓰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먼저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라서.

이런 말을 못 하는 지강백은 계속 조금씩 발걸음을 늦추는 수밖에 없었다.

독기가 걱정되긴 했지만 지금껏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래도 빠르게 운기조식을 한 탓에 태을신기가 독기를 잘 억누르고 있는 듯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산을 올랐을까.

지강백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등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보다 얼굴이 더 붉어진 채희유가 숨을 쌔액 내쉬며 그를 마주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무리가 아니라면 길을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지강백이 저 멀리 산봉우리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가리켰다.

무척 맑은 하늘이었다. 그러나 구름이 뭉글대고 있었다.

“곧 비가 한바탕 쏟아질 것 같습니다. 바람에 비 냄새가 섞여 있군요.”

산에서 곧이라는 말은 언제나 생각보다 빨랐다. 산에서는 날씨와 관계된 모든 것이 변화무쌍했다.

“비가 내린다는 말씀입니까?”

채희유의 안색이 달라졌다.

갑자기 그녀가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당황한 모습을 본 적이 없는 터라 지강백도 덩달아 놀랐다.

“하필이면…….”

그렇게 달싹이며 입술을 깨문 채희유는 곧,

“……읏!”

발을 헛디디고야 말았다.

지강백이 일보에 채희유의 곁으로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흙먼지가 묻은 치맛단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무릎이 까진 모양이었다.

“상처를 봐도 되겠습니까?”

지강백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미는 순간,

후드드득!

비가 쏟아졌다.

두 사람의 어깨 위를 빗물이 세차게 두들겼다. 뭘 어쩔 틈도 없이 몸이 젖어 버렸다.

“손을 이리 주십시오.”

지강백은 채희유를 일으켜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탁!

그러나 채희유는 지강백의 손을 쳐냈다. 진저리를 치는 듯 거센 동작이었다.

“채 소저……?”

“건드리지…… 건드리지 마세요.”

채희유가 정신없이 몸을 일으켰다. 비에 젖은 입술은 질리다 못해 보라색이 되었다.

빗방울이 매달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이 하도 애처로워 보여서 지강백은 떨리는 그녀를 붙들어주고 싶었다.

“왜 그러십니까?”

“비를…… 비를 맞는 게 싫습니다. 어서 피할 곳을……,”

비를 맞는 게 그렇게나 싫을까.

물이라면 질색을 하던 용천휘가 얼핏 떠올랐다. 용천휘는 제 지병 탓에 급격한 체온 변화가 위험하다고 말했다.

채희유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몰랐다. 단순히 비를 맞는 게 싫은 이유라면 저렇게 엉망으로 몸을 떨지는 않을 것이다.

“예. 멀지 않은 곳에 동굴이 있습니다. 그곳이라면,”

“그게 어딥니까?”

채희유가 다급하게 지강백의 말꼬리를 가로챘다.

“저쪽입니다.”

지강백이 턱으로 방향을 가리키자마자 채희유가 서둘러 걸음을 뗐다.

“조심하십시오, 채 소저.”

채희유가 가느다란 발목을 비틀거렸다. 지강백이 즉시 손을 뻗었으나 건드리지 말라던 말이 생각나 저 혼자 주먹을 쥐었다.

“넘어지지 마십시오. 비가 오면 산길은 미끄러워집니다.”

채희유는 이미 그의 얘길 듣고 있지 않았다.

정신없이 동굴이 있다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거의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후드득!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흔히 그렇듯 구름이 지나가면 금방 걷힐 비였다. 그러나 먹구름은 오늘따라 유난히 두꺼웠고, 걷히기 전까지는 계속 이렇게 사정없이 비를 내릴 듯했다.

마침내 동굴이 나타났다.

“하아, 하…….”

채희유의 입가에서 가는 숨이 흘러나왔다.

기분 탓일까.

지강백은 문득 그녀의 숨이 무척 단 내음을 풍긴다고 느꼈다.

‘뭐지……?’

일전에도 맡아본 적이 있는 냄새였다.

얼마 전, 산적 떼에게 인질로 잡힌 용천휘가 부상을 입었다며 채희유의 거처로 갔을 때였다.

그때 화로에 향을 태우던 채희유와 실수로 부딪힐 뻔했을 때, 성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숨결이 다가왔었다.

그때 맡았던 냄새였다.

동굴 입구에 다다르자 지강백이 말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안에 혹 산짐승이 둥지를 틀었을지도 모르니 제가 먼저 들어가 살펴 보겠,”

그러나 지강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희유가 동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채 소저!”

지강백이 채희유를 불렀다.

채희유는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뾰족한 소리를 냈다.

“따라오지 마십시오!”

“……예?”

“절대, 절대 들어오지 마세요!”

“…….”

쏴아아아!

장대비는 더욱 거세져서 산 전체에 뿌연 물의 장막을 드리울 정도였다.

지강백은 도리 없이 온몸이 젖었다. 속옷과 신발 속까지 남김없이 젖었다.

“채 소저.”

지강백이 동굴 안을 향해 말했다.

그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동굴이었다. 얼마나 깊은지, 안에는 무엇이 살고 있는지 조금도 모르는 상태였다.

“위험한 곳일지도 모릅니다.”

지강백은 일부러 내공을 실어 말했다. 낮은 음성이지만 동굴 안쪽까지 또렷이 들릴 것이다.

“제가 한번 살피는 편이 낫습니다. 같이 있기 저어하신다면 저는 안쪽만 확인하고 이 밖에서 있겠습니다.”

대답은 한참 후에나 들려왔다.

작으나마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아주 깊은 동굴은 아닌 듯했다.

“괜……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이십니까?”

“예……. 그러니 들어오지…… 마십시오.”

방금 전처럼 날카로운 음성은 아니었다. 조금은 안정을 찾은 듯했다.

하지만 평소의 담담하고 고요한 말투와는 차이가 있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다.’

지강백은 생각했다. 그러나 저렇게도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보면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나 혹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제가 필요하면 부르십시오.”

“괜찮…… 습니다. 계속 비를 맞으실…… 텐데 어디 다른 곳에라도…….”

“금방 그칠 빕니다.”

지강백은 근처를 구르던 적당한 돌을 찾아 그 위에 앉았다.

쏟아지는 비가 오늘따라 무거웠다. 흠뻑 젖은 무복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지강백은 동굴을 등지고 앉아 묵묵한 얼굴로 눈앞에 펼쳐진 종남산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릴없이 비를 마주하는 것은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쏴아아아.

산의 빗소리는 야생의 습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맑고도 거칠었다. 피할 곳을 찾지 못할 인간 따위야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인정사정없었다. 하지만 이 빗물은 땅 깊숙이 스며들어 산에 사는 모든 것들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러니 잠깐 맞아도 괜찮았다.

그 역시 오래도록 산과 더불어 온 존재였다. 모두에게 유익한 산비라면 그에게도 해로울 것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곧 그칠 비라고는 했지만 마냥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제법 긴 시간이었다.

지강백은 속눈썹을 처마삼아 매달려 있는 빗방울을 털어냈다.

“……?”

갑자기 그가 손짓을 뚝 멈추었다.

스스스슷…….

무언가가 젖은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휙 돌리자 볼 수 있었다. 동굴 안쪽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노란 뱀을.

뾰족한 삼각형 머리, 새빨간 눈, 요사스러울 정도로 선명한 비늘.

흡사 화려한 꽃처럼 보이는 그 뱀은 화적사였다.

한번 물리면 온몸의 피가 서서히 굳어 하루를 채 넘기기 전에 죽는다는 무서운 독사였다.

“채 소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강백이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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