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대환단인지 대환란인지
“이것입니다.”
채희유는 벽장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큰 목갑을 꺼내왔다.
목갑의 뚜껑을 열자 맑고 은은한 나무 향이 번졌다. 붉은 비단이 깔린 목갑 안에는 모두 다섯 개의 환약이 들어 있었다.
하나하나가 기름종이에 단단히 쌓여 있는데도 향기가 또렷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매우 귀한 약일 듯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무공 증진을 도와주는 약이 귀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만일 그런 약이 흔했다면 이 세상에는 고수인 자가 그렇지 않은 자들보다 훨씬 많았을 테니까.
“에걔.”
그러나 용천휘는 채희유가 가져온 환약을 보고 혀를 찼다.
“이게 뭐야. 작고 둥근 단약이잖아. 크고 둥근 단약은 없어?”
채희유가 미간을 살풋 찡그렸다.
“크고 둥근 단약이라니…… 설마 그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건 제가 지닐 물건이 아닙니다. 함부로 쓸 수도 없고요.”
“뭐 어때. 쓰고 나서 또 사오면 그만이지.”
채희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오면 된다니요. 그게 대체 얼마짜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이쪽의 작고 둥근 단약도 마찬가지고요.”
“작고 둥근 건 효과가 크고 둥근 것의 오 푼밖에 안 되는 거 아니었어?”
“그 효과도 남들은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것이 아닙니까.”
“흥. 쩨쩨하긴.”
용천휘가 작은 환단을 하나 집어 들고 냉큼 기름종이를 벗겼다.
“자, 먹어.”
무공 증진을 돕는 명약이 아니라 무슨 노점에서 산 과자를 하나 건네는 것 같은 태도였다.
작고 둥근 단약은 검은 구슬처럼 생겼다.
약향은 종이를 벗겨내자 오히려 더 은은해졌다. 숨을 쉴 때마다 자꾸만 그 맑고 선한 향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아니. 안 먹겠다.”
지강백이 말했다. 그 대답에는 망설인 흔적이 없었다.
용천휘가 눈썹을 치켜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약을 먹겠다고 여기 온 거 아니었어?”
아니, 채희유에게 거처를 옮기라는 말을 하려고 왔다.
총명탕이라는 게 정말로 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귀한 약이라니 아껴둬라. 너도 언젠간 무공을 배울 날이 올지도 모르니 그때 네가 먹으면 되겠군.”
용천휘는 그를 통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석 달이 그렇게 길 것 같아?”
“물론 짧겠지. 내 자질이 부족한 것처럼.”
“그런데 왜 안 먹겠다는 거야? 사형은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지푸라기가 아니라 더한 것이라도 붙들어야 했다. 거미줄밖에 없다고 하면 거미줄에라도 매달렸을 것이다.
“이런 것을 거저 얻을 수는 없다. 애초에 내 몫이 아니야.”
하지만 제 것이 아닌 거미줄을 붙들 수는 없는 것이다.
“사부님이 석 달을 말씀하셨을 때는 따로 생각이 있으셨을 것이다. 이런 우연을 염두에 두지는 않으셨을 거야. 내가 이 약을 먹고 어떻게든 도움을 얻는다면 그것은 사부님의 뜻에도 어긋나게 된다.”
지강백은 펄쩍 뛸 기세인 용천휘가 아닌 채희유에게 포권으로 인사를 했다.
“호의는 감사하나 받아들이지 못함을 양해해 주십시오.”
채희유가 담담한 눈으로 지강백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양해할 일은 없습니다. 이 약은 제 소유도 아니고, 선심을 쓰려던 분은 도련님이시니까요. 다만 도련님이 그간 쌓으신 업이 있으니 선심이 그저 선하게 되지 못한 것이지요.”
평소에 용천휘가 한 짓이 있으니 그래도 싸다는 소리인 걸까. 그런 거라면 물론 적극 찬성이었다.
사실 채희유가 한 말이 아니라면 무공을 증진시켜 주는 약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용천휘가 제게 뭘 먹이려는 건지 알 게 뭐란 말인가.
어쨌거나.
“본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처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산속이라 불편함은 있겠지만 옮기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지강백이 여기 온 본래의 목적을 꺼내 들었다.
채희유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쳐 갔다.
“거처를 만드셨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집을 지었습니다. 더 이상 본문과의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설마 손수 지으신 겁니까? 고작 며칠 만에요?”
“꼭 그런 것은 아니고……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니, 손을 전부 빌렸다고 해야겠군요. 사실상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어서요. 아, 하지만 처음부터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라 어쩌다 보니…….”
대답이 매끄럽지 않았다.
채희유의 집을 짓기 위해서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한 마디로 요약할 재주가 그에게는 없었다.
“예, 어쨌거나 거처를 옮겨주셨으면 합니다. 이곳은 너무 멀어 혹 채 소저의 신변에 우환이 닥친다 해도 제가 뒤늦게야 알게 됩니다.”
“…….”
잠시 대꾸가 없었다.
“채 소저?”
지강백이 부르자 채희유가 작게 웃었다. 희미한 웃음은 하얀 겨울 소복이 쌓인 눈밭을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런 흠 없이 하얗기만 한 눈은 이상하게도 보는 쪽의 눈을 시리게 했다.
“놀랐습니다. 정말로 길을 찾으셨군요.”
“그게……,”
채희유는 지강백이 쑥스러워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녀가 양손을 모아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약속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의 말씀입……,”
입에서 흘러나오던 말이 돌연 어딘가로 사라졌다.
고개를 숙인 여인의 뒷목이 보였다.
어지간해서는 사내가 볼 일이 없는 곳이었다. 옷깃으로 가려지거나 머리카락으로 가려지거나 하는 곳이었으니까.
희고 가느다란 목에 까만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지강백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이상하게 눈이 시었다.
너무 흰 것을 보면 가끔 눈은 제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잊어버린다고 했다.
지금 제 눈이 그런 모양이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짐을 챙겨오겠습니다.”
채희유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너무 흰 목덜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강백이 잔설을 털어내듯 고개를 한 번 흔들었다.
“예, 제가 뭐 도울 것은 없,”
그때였다.
그간 쌓인 업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무거웠던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용천휘가 일어났다.
그는 왼손을 뻗어 지강백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봐, 사형. 이렇게 거절해 버리면 곤란하지.”
그러면서 그가 지강백과 채희유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일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별것 아닌 동작은 지강백을 놀라게 했다.
마침 채희유를 돕기 위해 앞으로 걸으려던 지강백을, 용천휘가 방해한 셈이 되었다.
옆으로 선뜻 피하면 그만이었지만 그러자니 그가 쥔 소매가 걸렸다. 할 수 없이 소매를 먼저 놓게 하려고 어깨를 트는 사이, 용천휘가 제 발을 꼬며 지강백의 몸 위로 넘어졌다.
단지 용천휘가 기대 온다고 해서 지강백이 그 무게에 떠밀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정말로 교묘한 우연이 일어났다.
용천휘가 제 발을 꼬며 매우 우연히도 지강백의 발목 안쪽을 걷어찼던 것이다.
오랜 수련으로 지강백의 하체는 탄탄하게 중심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그 우연한, 서툰 발길질이 정확히 하체 균형의 축을 걷어찼다.
아예 작정을 하고 노렸다 하면 지강백은 오히려 힘으로 쉽게 버텼을 것이다. 그러나 용천휘는 말 그대로 우연히 찼을 뿐이고, 그 힘은 정면이 아니라 흘리듯 비껴들어 왔다.
“읏!”
짐작도 못 한 일이었다.
지강백은 속절없이 뒤로 넘어졌다. 그 위에 용천휘의 무게까지 실려 제법 세게 뒤통수를 찧었다.
뒤통수가 다친 것은 아니었다. 대신 혀를 조금 깨물었다.
“이런.”
지강백이 입을 벌려 고인 피를 뱉으려고 했다.
“이때다.”
그때 입으로 불쑥 뭔가가 들어왔다. 깜짝 놀라 뱉으려 했지만 그것은 혀에 고인 피에 닿자마자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입 안 가득 청량한 기운이 번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지강백이 울컥 소리를 질렀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는 제 위로 넘어지기 직전, 용천휘의 눈이 살짝 붉은색으로 보였다는 사실을 그냥 넘겨 버렸다.
별거 아닐 것이다.
멀쩡한 사람 눈이 갑자기 붉어질 리는 없으니까. 햇빛이 잘못 반사되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흥. 그러게 진작 얌전히 받아먹을 것이지.”
저는 조금도 잘못한 게 없다는 태도는 지강백을 또 한 번 울컥하게 만들었다.
뱉으려고 해도 이미 약은 녹아서 순식간에 목구멍을 넘어갔다.
“비켜라.”
지강백은 제 몸을 누르고 있는 용천휘를 홱 떠밀었다. 기우뚱하던 용천휘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마음 같아서야 아예 들어서 패대기를 치고 싶었지만 그러자니 또 귀찮은 일을 만들어 주셨냐며 미간을 찌푸릴 채희유가 눈에 선했다.
지강백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며 용천휘가 콧바람을 냈다.
“다시 앉지 그래?”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 약 먹었잖아. 운기라던가 뭐 그런 걸 해야 효과가 있을걸?”
무림 일자무식 사제의 조언이었다.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냐?”
“그야 상식이지. 사형은 무림인이라면서 그런 것도 몰라? 사부님이 만날 모자라다 구박하는 이유가 있었군.”
그러니까 무림 일자무식 주제에 강호의 상식을 당연한 것처럼 얘기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운기조식을 안 하면 효과가 없나?”
“뭐,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을까?”
그놈의 상식. 일자무식도 아는 상식을 모르는 자신은 그럼 뭘까.
“잘됐군. 그럼 안 하겠다.”
용천휘가 입을 딱 벌렸다.
“뭐? 미쳤어? 아깝게!”
꼭 저런 반응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통쾌했다.
그러게 누가 마음대로 먹이라고 했나.
“내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사양하겠어.”
“사형이 바보라는 건 이미 충분히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지.”
“무식한 게 아니라 정도를 지키고 싶은 거다.”
“미련을 정도라고 우기는 게 바보라는 증거지.”
지강백은 용천휘의 말을 무시했다. 이제껏 겪은 바에 의하면 용천휘를 다루는 방법으로는 무시가 가장 현명했다.
“짐은 제가 옮겨드리겠습니다. 시간을 지체할 게 없으니 채비를 마치시는 대로 안내하겠습니다.”
지강백이 채희유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좀 전에 지강백이 먹고 남은 네 개의 단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조금은 뜬금없고, 조금은 곤란한 표정으로.
“……운기조식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목소리도 표정과 비슷했다.
“약이…… 바뀐 모양입니다.”
“네?”
“비슷하게 생겨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드신 게 도련님의 열을 낮추는 약인 듯한데…….”
그러면서 말꼬리를 흐리는 게 더 불안했다.
“……이게, 도련님 체질에는 약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분께는 오히려 해가 되는 약이라서요.”
지강백은 불안해하는 채희유를 보는 게 불편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무인의 몸입니다. 보통 사람보다는 몇 배는 튼튼하니 별 탈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딱히 이상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라면 하지 그래?”
용천휘가 끼어들었다.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말이라고. 내가 말했잖아. 내 약사가 성격은 좀 이상해도 실력은 괜찮다고. 이런 말은 들어두는 게 좋아.”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채희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약을 만드는 데는 독초가 제법 들어갑니다. 지금은 몸이 괜찮은 듯해도 독기가 번질 것입니다. 운기조식으로 독기를 잠시 막아두시면 제가 해약을 만들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지강백은 채희유와 용천휘를 번갈아 보았다.
의심이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약을 먹었고, 운기조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용천휘가 바라던 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채희유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결론은 하나였다.
“설마 네가 약을 바꿔치기한 거냐?”
용천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굳이 저도 따라오겠다며 떼를 썼을 때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람을 시켜 채희유가 모르게 약을 바꿔 놓는 것도 가능한 인간이 용천휘였다.
“글쎄.”
용천휘는 작정한 사람처럼 이죽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웃지 말고 답해. 네 그 괴악한 취미 때문에 나 말고 채 소저도 이용한 거냐?”
“내 약사를 내가 이용하든 말든 사형이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나 같으면 이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니 그 시간에 운기조식을 하겠어. 내 약인데 당연히 독하지 않겠어? 알잖아. 내 몸이 얼마나 엉망인지.”
“…….”
도리가 없었다.
지강백은 후우, 한숨을 내쉰 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눈을 감고 손을 모아 단전 위에 얹었다. 단전을 묵직하게 채우고 있던 태을신기가 일어나 전신의 혈맥을 돌았다. 매일을 거르지 않는 운기조식이었다. 모든 느낌이 익숙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지강백이 눈을 감은 것을 확인하는 용천휘였다.
용천휘가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잘했어.’
라고.
채희유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네.’라는 대답이었다.
운기조식은 반 시진가량 이어졌다.
반 시진은 남은 네 알의 소환단을 어떻게 하면 마저 먹일 수 있을지 고민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것저것 생각을 해 보던 용천휘가 채희유에게 다시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본가에 기별을 넣어.’
‘무슨 기별을 말입니까?’
‘대환단 보내라고. 남은 거 다 싹싹 긁어 보내라고 해. 그깟 몇 알 아까워 말고.’
채희유가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이미 결론을 내린 용천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천하무도회 전까지만 도착하면 돼.’
채희유가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용천휘는 눈을 감은 채 미동 없이 운기조식에 빠져 있는 지강백을 응시했다.
그 눈에서 불을 피우는 것은 엉뚱하게도 탐욕이었다.
‘내가 물심양면으로 거들어주겠어. 사형의 태을분광검을.’
점점 더 완전한 제물이 되고 있는 그를 향한.
‘그건 결국 나의 태을분광검이 될 테니까.’
지강백은 용천휘가 채희유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이 방금 삼킨 것을 남들이 소림사의 소환단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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