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총명탕의 비밀
“…….”
지강백은 할 말을 잃었다.
그야 낮에만 해도 터밖에 없어 휑하던 곳에 번듯한 집 한 채가 들어서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선 채로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나중에는 엉뚱한 남의 집에 와 있는 줄 알았고, 그 다음에는 시간이 후다닥 흘러버렸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봐도 분명히 집이었다.
“이게 왜…….”
그러다 산적 떼에 생각이 미쳤다.
적으로 온 게 아니고, 일단 얘기나 좀 들어보고, 이유부터 말하라고 필사적으로 외치던 눈빛이 이제야 떠올랐다.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이 흘렀다.
“이렇게 사과하려고 했던 건가.”
지강백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집을 지어놓은 건 은도끼파가 맞았지만 그들은 단순히 사과를 하려는 게 아니었다.
물론 지강백이 지금 시점에서 저를 산적 떼의 새로운 채주로 옹립하려는 그들의 야욕을 알 턱이 없었지만.
산적들을 수련용 목인형 대신으로 썼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목검으로 두들겨 팬 것은 산적들이 아니라 그들의 진심이었다.
표정이 써졌다.
“나도 사과해야겠다.”
지강백이 뭔가를 털어내듯 내뱉었다.
후회는 쉬웠다. 반성도 쉬웠다.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것에 비하면.
그 어려운 일을, 악인으로 치부했던 산적들이 하려고 했다.
본성은 강하고 정직한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지강백을 괴롭게 하는 것은 진심으로 다가온 사람들을 저는 움직이는 목인형 취급했다는 것이었다.
너무 미안해서 그저 사과로는 안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강백은 생각했다.
“그쪽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사과하는 수밖에.”
팔을 부러트렸으니 공평하게 이쪽도 팔을 내어주는 게 맞을까.
지강백은 제 팔을 바라보다 꾹 주먹을 쥐었다.
“수련은 계속할 수 있게 왼팔로 해주면 고맙겠는데.”
지강백은 산적들이, 아니 오늘 낮까지 산적이었던 이들이 지어놓은 말끔한 통나무집을 잠시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그들 덕에 시간을 벌었다.
이 아까운 시간을 더 아껴 수련에 써야 했다.
석 달에서 벌써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 *
“이봐, 사형.”
“…….”
“사형.”
“…….”
“사형!”
지강백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흠칫 눈을 떴다.
그를 깨운 것은 용천휘였다.
지강백은 왠지 지금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아 눈을 끔벅였다.
시간은 아주 이른 새벽.
이 게으름뱅이 사제가 결코 일어날 리 없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자고 있었나?”
“나 참.”
용천휘가 혀를 끌끌 찼다.
“아주 잘 자고 있었지. 잠꼬대도 하던걸.”
지강백은 어제 집이 완성된 것을 보고 사문으로 돌아왔다. 연무장에서 태을분광검의 제이 초식을 연마하며 새벽별이 지는 것을 보았다. 가까스로 수련을 마치고 운기조식을 했다.
그리고…….
기억은 거기에서 끊겨 있었다.
운기조식 후 그대로 기절하듯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 차가운 연무장 바닥에서. 이불 대신 목검을 끌어안은 채.
지강백은 몸을 일으켜 팔 다리를 휘둘러 보았다. 살짝 뻐근한 것 같은 허리를 한껏 젖히자 우드득 소리가 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력은 운용해 보았지만 막히거나 이상한 데는 없었다.
그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이 든 것이었다.
“내가 뭐라고 잠꼬대를 했는데?”
용천휘의 눈매가 한참 못마땅한 듯 구부러져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며 갑자기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종남파에 왔을 때만 해도 용천휘는 세상 모든 게 따분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표정이 다양해졌다. 엄청나게 못마땅한 얼굴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새벽에 일어나 저를 깨우기까지 했다.
이 게으른 도련님이 제 방을 나서며 투덜댔을 걸 생각하자 조금 우습기도 했다.
용천휘도 종남파 문하 생활이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뭐야, 기억 안 나?”
“잠꼬대를 기억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땅바닥에서 자는 사람이 할 잠꼬대야 뻔하지.”
“그게 뭔데?”
“한 푼 주십쇼.”
지강백의 눈매가 단숨에 험악해졌다.
“잠결에 사람 죽인다는 옛말은 들어봤나?”
“추운데서 자면 입 돌아간다는 말은 들어 봤어? 가서 거울이나 좀 보던가.”
“멀쩡히 말이 나오는 걸 보면 괜찮아.”
“하긴. 입이라도 돌아가야 동정 사기 쉽겠다. 내일 하루 더 여기서 자지 그래?”
“……관두자.”
말씨름으로 사제를 이길 날이 언젠가 오기는 할까.
지강백은 공연히 진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몸을 마저 풀었다.
“그런데 너 같은 게으름뱅이가 이 새벽에 어쩐 일이냐?”
“내가 설마 사형을 걱정해서 나왔겠어?”
“그럼?”
“내가 진짜…….”
용천휘가 돌연 이를 갈았다.
“사부님 때문에.”
“사부님이?”
지강백이 동작을 뚝 멈췄다. 눈매가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워졌다.
“설마 사부님께 무슨 변고가 생겼다는 말이냐?”
“변고는 무슨.”
용천휘가 흥, 콧바람을 내뿜었다.
“내 방 앞에 오셔서 계속 혼잣말을 하시더라고.”
“……?”
“저리 찬 데서 잠이 들면 입 돌아간다던데. 아이고, 하고. 못 들은 척하고 계속 자려고 해도 혼잣말이 어찌나 크던지. 내가 안 나오고 배겨?”
“…….”
먹이 앞의 범 같던 눈빛이 스르륵 가라앉아 버렸다.
“사부님이 그러셨다고?”
걱정한 것이리라.
차마 직접 와서 말할 수는 없었어도.
고집을 피우는 못난 제자에게 화는 내셨어도, 마음마저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둔하고 모자라도 사부는 한결 같았다. 십칠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부님…….’
가슴께가 뜨거워졌다.
반드시 석 달의 시간 안에 태을분광검을 완성할 것이다. 그래서 계속 사부의 제자로 남을 것이다.
양영천에게 지강백이 유일한 제자인 것처럼, 그에게 있어 사부는 인생의 유일한 것이었다.
처음 가져보는 사부였고 처음 가져보는 부모 대신이었다. 처음으로 제게 아낌없이 가진 것을 모두 베풀어준 사람이었다.
그 은혜를 갚으려면 아무리 애를 써도 모자랐다.
밤새도록 목검을 휘두르다 기운이 빠져 연무장 바닥에서 잠드는 일이 있더라도.
지강백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이 트는 모습을 보고 시간을 가늠하는 것이다.
지금 산을 내려가면 한 시진 안에는 채희유가 거처하는 마을까지 갈 수 있었다.
신법을 최대한 펼치면 반 시진으로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집을 지어준 산적이었던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었는데, 어젯밤 그렇게 내몰았으니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지강백은 결론을 내렸다.
“일단 채 소저의 거처를 옮겨놓고, 그 근처에서 수련을 하고 있으면 되겠군.”
하루 정도 기다려 보고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직접 나서서 찾을 작정이었다.
용천휘가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거처를 옮겨? 설마 어제 밤새 집을 다 지었다는 거야?”
“그럴 일이 있었다.”
지강백은 목검을 허리춤에 찼다.
진검은 아직 허락받지 못했다. 양영천은 그가 종남의 모든 무학을 익혀 정식으로 출도하는 날 진검을 들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럼 나는 채 소저께 다녀오겠다.”
지강백이 훌쩍 몸을 돌리려는데 용천휘가 외쳤다.
“혼자 가려고?”
“그럼?”
“당연히 이 몸도 가야지. 내 약사한테 가는 건데.”
지강백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를 데려가면 늦어.”
“까짓것 내가 업혀주면 되잖아.”
용천휘는 큰 선심이라도 쓰듯이 말했다.
별생각 없이 그래. 고맙다, 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필요 없다.”
용천휘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혀를 쑥 내밀었다.
이거 안 속네, 하는 표정이었다.
“잠깐만, 사형.”
지강백이 그대로 가버리려고 하자 용천휘가 두 번째로 그를 붙들었다.
“얘기는 좀 듣고 가라고. 내가 단순히 사부님 때문에 여기까지 온 줄 알아? 그것도 이런 새벽에? 내가 그렇게까지 남을 배려하는 성격 좋은 인간인 것 같아?”
“…….”
용천휘에게도 장점은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의 단점을 억지로 포장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럼 왜 왔는데?”
“그야 당연히 사형한테 볼일이 있어서지. 쯧, 그런 걸 일일이 말해줘야 해? 하여간 멍청하긴.”
용천휘가 부채를 좌르륵 펴들고 손목을 두어 번 까닥였다.
그러나 이 새벽에 부채 바람은 시원한 게 아니라 차가웠다. 용천휘가 부채바람이 닿은 목덜미를 오르르 떨었다.
지강백이 그 꼴을 보다 피식 웃었다.
“멍청한 놈.”
용천휘는 발끈한 표정으로 지강백을 흘겨보았지만 반박은 하지 못했다.
그 얼굴을 좀 더 즐기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없었다.
“볼일이 뭔데? 빨리 말해라.”
용천휘의 볼일은 역시나 별게 아니었다. 기대했던 대로였다.
“사형, 약 좀 먹어.”
“무슨 약?”
“멍청함을 고쳐주는 약.”
지강백이 두 말 없이 등을 돌렸다. 상대해 줄 가치가 없었다.
그런데 용천휘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야 석 달 안에 뭘 배우지.”
“……뭐?”
지강백이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가 턱 끝만을 돌려 용천휘를 바라보았다.
“이 몸이 친히 나서서 돕겠다는데 경청하는 꼬락서니하곤……. 쯧쯧. 그런데 뭐, 지금은 그냥 넘어가겠어. 어쨌거나 사형은 머리가 나쁘니까 말이야. 그 태을 뭐라던 걸 석 달 안에 다 배우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여전히 등을 지고 선 자세 탓에 지강백은 몹시 삐뚜름해 보였다.
“그런데 생각해 봐. 석 달 안에 다 못 배우면 사형은 쫓겨나잖아? 그럼 나는 가지고 놀 상대를 잃게 되는 거고. 그 꼴을 보느니 도와주겠다고.”
지강백이 그답지 않게 비딱한 시선으로 강호일자무식 용천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네가 무슨 수로?”
“말했잖아. 약 먹으라고. 똑똑해지는 약.”
“이런 멍청한 소리를 하는 네가 먹어야 될 것 같은데. 그런 약이 정말로 있다면.”
“나 참.”
용천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 약사가 말이야,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이라 신뢰가 안 가는 건 있는데 약은 제법 잘 지어.”
“채 소저의 실력을 의심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약을 잘 짓는 것과, 세상에 없는 약을 만들어내는 건 다른 소리지 않나?”
“세상에 없는 약이라니. 고작 멍청함을 고쳐주는 약…… 아, 그래 총명탕(聰明湯) 정도로 부르면 되겠네. 그게 그렇게 불가능할 것 같아?”
용천휘는 그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지강백이 식혀준 죽을 제 손으로 떠먹던 그 때와.
“나는 세 살을 못 넘기고 죽을 거라고 했어. 혹시 명이 너무 질겨서 살아남더라도 사지를 못 쓰는 병신에 바보천치가 될 거라고. 그런데 지금껏 살아 있지. 보다시피 손발도 멀쩡히 움직이고.”
지강백이 용천휘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표정이었다.
지강백은 약자에게 약했다. 그것은 천성이었다.
용천휘가 제 유일한 약점을 드러낼 때. 그럴 때면 별수 없이 지강백의 경계심도 흐트러졌다.
“그거에 비하면 멍청한 사형을 조금 똑똑하게 만들어 주는 약 정도는 우습지.”
물론 경계심이 흐트러진다고 해서 반감이 느닷없이 호감으로 돌아선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종하기 싫은 것을 아주 조금쯤 참아줄 아량이 생겨나는 정도였다.
“데려가는 주겠다. 그러나 총명탕이 가능하다는 말은 안 믿겨.”
“믿든 말든 그거야 내 약사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고.”
안색이 환해진 용천휘가 대뜸 양 팔을 벌렸다.
“뭐해? 어서 와서 업지 않고.”
이쯤 되면 용천휘의 실제 취미는 남에게 업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 정도였다.
“그건 됐고.”
“……응? 뭐라고?”
지강백이 한 손으로 어깨를 짚고 목을 흔들었다. 우득우득, 굳었던 뼈마디가 풀어지는 소리가 났다.
“들고 가는 거라면 해줄 용의가 있는데.”
“…….”
“싫으면 말고.”
“…….”
덧붙이자면 용천휘의 잘난 얼굴이 제멋대로 구겨지는 것을 지켜보는 과정은 꽤나 재미있었다.
용천휘는 이 맛에 사람들을 괴롭히는 걸까.
* * *
“주…… 죽을 것 같…….”
채희유의 집에 도착한 용천휘가 간신히 내뱉은 말이었다.
누군가의 어깨에 짐짝처럼 실려서 산을 내려오는 것은 두 번 다시 할 짓이 아니었다.
그 누군가가 상승의 경신술을 익힌 자라면 더더욱 사양해야 했다.
천천히 걸어도 오르락내리락 험했을 길이었다. 그런 곳을 질주하는 말처럼 내달렸으니 어깨에 매달린 용천휘가 몇 차례씩 속이 뒤집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안색이 나쁘시군요.”
허옇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의자에 걸터앉은 용천휘에게 채희유가 한 말이었다.
용천휘는 대답도 귀찮은지 손을 흔들었고, 채희유는 시선을 지강백에게로 돌렸다.
또 그 눈이었다.
머릿속을 아득하게 만드는 산공독 같은 눈.
무어라 한 것도 아닌데 지강백은 그녀가 저를 탓하는 기분이 들어 괜히 목 언저리가 붉어졌다.
“시간이 아까워 걸음을 서둘렀습니다. 그러게 혼자 온다 했는데…….”
채희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용천휘가 끼어들었다. 어지간히도 혼이 난 듯, 그 얼굴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약 좀 만들어. 이 바보를 정상인으로 만드는 그런 약.”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형이 석 달 안에 머리가 좋아져야 하는 그런 일이 있어. 남들은 석 달 안에 익히는 무공인데 사형은 머리가 나빠서 그걸 못 하겠대.”
채희유가 평소처럼 담담한 어투로 대꾸했다.
“무공이라면 단순히 머리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용천휘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사형의 경우라면 머리가 나쁜 게 맞아. 대체 사람을 들고 그렇게 무식하게 내달리면 들린 사람이 흔들릴 거라는 생각을 못 하나?”
지강백이 용천휘 쪽으로 힐긋 고개를 돌렸다.
그 손목을 잡아서 똑 분질러주고 싶다는 것처럼 보이는 표정을 별로 감추려고도 하지 않은 채.
“생각했으니 그런 거다.”
“뭐라고?”
“취미를 배우는 건 무공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쉽더군.”
“…….”
용천휘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남 취미를 허락도 없이 멋대로 배워 가려거든 말이야, 사례는 해야지.”
“계속 배울 생각은 없다.”
“아아, 그건 사형 생각이겠지.”
“계속 할 정도로 재미있는 것 같진 않아서.”
“그야 두고 보면 알겠지. 사례는 내가 알아서 받아갈 테니 걱정은 하지 마. 설마 이 몸이 사형 같은 가난뱅이한테 돈으로 사례하라고 하겠어?”
“할 생각도 없다.”
“그게 무슨 소리야. 사람이 아무리 가진 게 없어도 할 도리는 하고 살아야지. 거지도 아니고, 참.”
“속은 이제 나아졌나? 돌아갈 때는 오르막이라 더 힘들 거다.”
“흥. 그건 이쪽에서 사양하겠어.”
파닥파닥!
용천휘가 제 얼굴에 대고 부채질을 했다. 그를 마주보는 지강백의 눈초리도 험악해지고 있었다.
분위기가 묘하게 살벌해지려던 찰나, 때를 적절히 맞춰 채희유가 끼어들었다.
“그런 약은 없습니다.”
“뭐라고?”
용천휘가 어깨를 으쓱대며 물었다.
“너희 집안은 내 몸을 살려놓을 정도로 대단한 곳이잖아. 그런데도 못 만드는 약이 있나?”
채희유의 시선이 짧게 지강백을 스쳐갔다.
언제나처럼 지강백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어릴 때 열이 머리로 몰리면 백치가 됩니다. 열을 낮추는 약을 미리 쓰면 백치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있지요. 하지만 이미 바보가 된 사람을 되돌리는 약은 없습니다.”
이번에는 지강백이 정색을 했다.
“그건 채 소저께서 저를 손 쓸 도리 없는 바보로 보신다는 말씀입니까?”
“다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희 도련님을 대하실 때는 그리 불러 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어찌 이리 매일 휘둘리십니까.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믿으시다니요.”
다는 아니라니요.
그럼 일부는 믿으신다는 말입니까.
항변하고 싶었다.
절대 믿지 않았다고. 총명탕의 존재를 믿은 것은 그가 아니라 용천휘라고.
그러나 채희유의 다음 말이 더 빨랐다.
“대신 무공 증진에 도움이 되는 약은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용천휘는 부채질을 멈췄고, 지강백의 눈가가 벌어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채희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채희유는 용천휘와는 다른 인물이었다. 적어도 지강백에게는 그랬다.
그녀의 말은 믿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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