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9화 (9/346)

제9화 이매향(魑魅香)- 유령이 되는 약

“그럼 살펴 가십시오, 도련님. 약은 곧장 준비해둘 테니 짬이 날 때마다 들러서 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용천휘와 채희유가 방에서 나왔다.

지강백은 몽롱했던 머릿속을 털어내듯이 고개를 돌렸다.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았다.

꿈이 깨어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저를 보던 채희유의 까만 눈동자가 유일했다.

“아아, 역시 귀찮아. 이 멀리까지 매번 와야 한다니. 이게 다 누구 탓이지.”

그렇게 말하며 용천휘가 대놓고 지강백을 쳐다보았다.

거기에 대해서는 지강백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치료는 다 받은 거냐?”

용천휘의 목덜미에는 치료의 흔적이 없었다. 애초에 상처도 별게 아니긴 했다.

“아아, 쟤가 안 해주더라고. 나는 아파 죽을 것 같은데.”

그 말에 채희유가 아미를 치켜떴다.

“이미 피도 멎은 상처라 제가 손 댈 게 없었습니다. 앞으로는 이 정도 부상을 가지고 일일이 찾아오지 마십시오. 산을 내려오는 길이 더 위험하겠습니다.”

용천휘가 떼를 쓰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그런 말을. 정 떨어지게.”

“본가에 계실 때는 상처를 돌본다 하면 그리 질색을 하고 도망 다니시던 분 아닙니까. 갑자기 별것도 아닌 상처로 부지런을 떨면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지요.”

채희유의 눈이 지강백에게로 옮겨왔다.

방금 전 숨결이 섞이던 기억이 떠올라 지강백은 몸 어딘가가 굳는 듯했다.

“아무래도 그 이유는 사형 분을 놀리기 위함이겠지요. 앞으로는 도련님의 변덕에 일일이 놀아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천휘가 끼어들었다.

“뭐야, 지금. 우리 사형 편드는 거야?”

“아니요.”

대답은 이번에도 무를 성둥 자르는 듯했다.

“사형 분이 놀림을 당하는 것은 저와 상관없습니다. 허나 이렇게 계속 휘둘리시면 제가 번거롭지 않습니까. 제게 할 일이 많다는 걸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들 가보세요.”

이렇게 칼 같은 대꾸에는 뭐라 덧붙일 말이 없었다.

아직 손에는 그녀를 쥐던 감촉이 들러붙어 있지만, 그것은 벌써 꿈에서나 있었던 일 같았다. 조금쯤은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는데 역시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지강백은 머쓱한 기분에 고개를 돌렸다. 속으로 생각하는 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라 다행이었다.

“그럼.”

지강백이 꾸벅 포권을 하며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한 줄기 바람이 코앞을 스쳐갔다.

지강백은 본능적으로 걸음을 뒤로 물렸다.

슷!

바람의 정체는 수리검이었다. 꼬리에 붉은 술을 매단 손바닥만 한 칼이 아슬아슬하게 지강백을 스쳐 땅바닥에 꽂혔다.

수리검을 본 용천휘와 채희유의 안색이 달라졌다.

“이게 무슨……!”

감각이 예민해졌다.

이제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신경이 예리하게 솟구쳐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지강백은 몰랐지만 그것은 살기에 대한 반응이었다.

슷! 스슷!

연달아 수리검이 날아왔다.

“움직이지 마!”

지강백이 소리쳤다.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지강백은 두 개의 수리검을 허공에서 낚아채며 하나는 무릎으로, 남은 것은 이어서 발등으로 퉁겨냈다.

지강백은 용천휘와 채희유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눈은 수리검이 날아온 방향을 매섭게 훑고 있었다.

저 어딘가에, 이유는 몰라도 이쪽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좀 전에 시비가 붙었던 산적들의 잔당이 복수를 한답시고 다시 나타난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전혀 다른 놈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에 맞서 용천휘와 채희유를 지켜야 했다.

“수리검이 또 날아올지 몰라. 내가 신호를 하면 집 안으로 들어가라.”

지강백이 침착하게 말했다.

“안에서 이쪽을 살펴. 놈들의 숫자가 많지 않다면 본문으로 돌아가. 여기는 내가 맡을,”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 너는 채 소저와 함께 도망쳐.

본문에는 사부님이 계시니까 걱정할 것 없다.

그렇게 얘기하려던 지강백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사형.”

용천휘의 낮은 목소리가 목덜미에 들러붙었다.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용천휘의 손도 목에 와 닿았다.

정확히는 천극혈 부근에.

용천휘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들려왔다. 지강백은 고개를 돌려 용천휘를 쳐다보려 했다.

“이건 사형이 맡으면 안 되는 일이거든.”

용천휘의 목소리가 느릿느릿 울리는 듯했다. 아니, 저 멀리서 꿈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대…….”

대체 이건 뭐야.

하지만 말보다 먼저 눈이 감겼다. 의식이 스르륵 몸을 빠져 나갔다.

정신을 잃는 가운데 지강백은 생각했다.

지금, 용천휘의 눈이 피처럼 짙은 붉은색으로 변한 것 같다고.

지강백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지강백을 바닥에 내려놓은 용천휘의 눈은 양쪽이 모두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스스스슷.

그 눈과 같은 색깔의 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전신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 순간 용천휘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약한 몸을 핑계로 주변 사람을 괴롭히는 심술 맞은 도련님은 어디에도 없었다.

붉은 운무를 호신강기처럼 몸에 두른 그는 인간으로서의 그 어떤 한계를 넘어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잘도 찾아냈군. 이 산골짜기까지.”

용천휘의 눈이 힐긋 바닥에 꽂힌 수리검을 향했다.

그는 이 수리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그를 따라붙는 그림자들의 존재였다.

용천휘는 지강백이 습관처럼 지니고 다니는 수련용 목검을 집어 들었다.

용천휘의 눈이 붉은 유성처럼 빛을 뿌렸다.

“나와라, 이 쥐새끼들아.”

용천휘가 목검을 세웠다.

그 동작은 소름이 끼치도록 매일 아침 대천강검을 연마하는 지강백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용천휘는 지금 대천강검의 일 초식을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그것도, 막 팔 성의 경지에 접어드는 태을신공과 함께.

* * *

“후.”

용천휘가 가볍게 숨을 내뿜는 것과 동시에,

쿵!

마지막 괴한이 쓰러졌다.

채희유의 거처를 급습한 괴한의 수는 모두 여덟.

총 여덟 구의 시체가 비좁은 안마당에 흩어져 있었다.

그들을 전부 상대했을 게 뻔한 용천휘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땀 흘릴 가치도 없을 만큼 몹시 쉬운 싸움이었을 것이다.

괴한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검붉은 천이 흘러내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모습은 정말로 괴이했다. 아직 주름살 하나 없는 젊은 청년의 얼굴을 한 괴한은, 그러나 머리칼부터 눈썹까지 온통 하얗게 색이 바래 있었다.

“쯧. 역시나.”

괴한의 모습을 확인한 용천휘가 작게 혀를 찼다.

등 뒤로 채희유가 다가왔다. 원체도 하얀 얼굴이었지만 거기에 더해 지금은 희미하게 질린 기색이 어려 있었다.

“이 머리칼은…… 설마 이들이 말로만 듣던 이매(魑魅: 유령)들입니까.”

“그래.”

부욱!

용천휘가 검붉은 천을 완전히 뜯어냈다.

“이 흰 머리칼은 이매향을 복용했다는 증거. 임무를 맡은 교도들에게 내리는 본교의 약이다.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임무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하는 약이지.”

채희유의 눈가에 짙은 그늘이 돋아났다.

그늘의 이름은 근심이었다.

“예. 그래서 이매향은 본교의 행적을 감추는 용도로 쓰는 최적의 약이었습니다만…….”

“지금은 본교를 유린하는 용도가 되었지. 이렇게.”

용천휘가 바닥에 꽂힌 수리검을 뽑아들었다. 용천휘가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팔 성의 태을신공을 담은 손 안에서 수리검이 조각이 났다.

용천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말을 이었다.

“이 수리검 또한 본교의 것이지. 내 목숨을 노리는 자가 본교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놈은 그 사실을 감추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놈을 모른다. 아무리 고문을 해대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드는, 살아 있는 자를 귀신으로 만드는 이 약 때문에.”

“…….”

묵묵히 용천휘를 바라보던 채희유가 그의 손을 끌어왔다.

수리검 조각에 엉망으로 베인 손바닥이 드러났다. 채희유는 제 소맷자락으로 꼼꼼히 피를 닦아 주었다.

채희유의 표정은 무감했고, 용천휘의 표정에는 감흥이 없었다.

둘은 몇십 번, 몇백 번씩 이런 일을 해온 사람들 같았다.

“나는 더 이상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몰라. 본교의 십위(十位)라면 누구나 이매향을 쓸 수 있다. 어쩌면 삼좌위 필목현일지도 모르지. 겉으로는 그토록 완벽히 내 사람으로 알려진 그가 말이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네 아비인 팔우위(八右位)가 이매향을 만드는 자인 이상, 나는 너도 온전히 믿지 못해.”

채희유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신뢰는 본시 주군의 몫. 제가 어떤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저와 채 씨 가문의 모든 인물은 날 때부터 그랬듯이 본교의 주인이신 소야를 모실 뿐입니다.”

“그래. 그게 너희들이 항상 하는 말이지. 다른 십위들도 너와 똑같은 말을 하더군. 그러니 더 환장하겠다는 거야. 대체 나는 누굴 상대하고 있는 거냐?”

“……송구합니다, 소야. 저는 모릅니다.”

“아아, 그래. 그 답까지 똑같지. 빌어먹을.”

용천휘는 애꿎은 땅을 후려쳤다.

흙바닥에 주먹 모양으로 땅이 움푹 파였다. 제가 만든 자국을 씁쓸히 지켜보던 용천휘가 발로 흙을 문질렀다.

지강백이 볼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이제 슬슬 시간이 됐겠군.”

용천휘의 말에 채희유가 지강백을 힐긋 돌아보았다. 지강백은 여전히 의식이 없이 두 눈을 굳게 감고 있었다.

“확실히…… 상품의 몸이로군요. 소야의 적혈대법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 정도까지 견디다니요.”

“나도 놀랄 지경이야. 이제껏 이런 몸은 없었어. 네 말대로 빌어먹을 우연이 아니라 행운이라 불러야겠군.”

채희유의 까만 눈이 용천휘에게로 옮겨 왔다.

“반소효응의 정도는 어떠십니까?”

“이제 곧 알겠지.”

이렇게 말하는 용천휘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점차 스러져 갔다. 홍채를 잠식하던 강렬한 붉은 빛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말한 대법이 끝나간다는 뜻이었다.

“사형 분이 깨어나시면 해명을 하셔야 할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마. 적당히 둘러대면 되니까.”

채희유가 눈살을 가늘게 찌푸렸다.

“너무 바보 취급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과소평가할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나는 내 사형이 바보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는 영리해. 그만큼 때 묻지 않은 게 탈이겠지만.”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용천휘의 눈이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으음…….”

지강백이 정신을 차렸다.

“여긴 어떻…… 아,”

그가 놀란 눈으로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된 거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수리검을 쓰던 놈은?”

“아아, 진정해. 사형.”

용천휘가 지강백을 향해 까닥까닥 손목을 흔들었다.

“보다시피 놈들은 다 처리했으니까.”

“뭐라고?”

지강백의 얼굴이 굳었다. 표정 위로 흰 금이 돋아날 지경이었다.

“누가?”

기억이 사라져 있었다.

분명히 그는 날아오는 수리검을 받아내고 용천휘에게 도망치라고 말했다.

수리검을 던져낸 놈들은 기척을 읽기가 어려웠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되리라는 것을.

긴장으로 인해 등줄기가 아찔하게 당겨지던 감각은 지금도 생생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거짓말처럼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나도 몰라.”

용천휘가 천연덕스럽게 두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모른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에이, 정말 모른다니까.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구해줬어. 사례하겠다고 이름을 물어봤는데 말을 안 해주더라고.”

“누가 지나갔다고?”

“응.”

용천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표정은 너무 태연해서 거짓말을 한다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저놈들 봐봐. 머리가 모두 하얗지? 뭐라더라…… 강호에 새로 생긴 집단이라고 하던데. 엄청나게 나쁜 놈들이래. 주업은 부녀자 납치 및 인신 매매. 내 약사가 여기 혼자 사는 것 같으니까 못된 짓을 하려고 온 거지. 그런데 워낙 나쁜 놈이라 그만큼 적도 많다더라고. 뭐라더라…… 무림공적? 뭐 그런 거. 여기 지나가다 우리 구해준 고수가 해준 말이야.”

“무림공적?”

“응. 다들 머리를 하얗게 염색해서 백발마인이라고 한다던데. 사형은 못 들어 봤어?”

못 들어봤다.

하지만 지강백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역시 강호사정에 문외한이라는 점이었다.

용천휘에게 황색 가사 놓고 소림의 소 자도 모르는 강호 일자무식이라고 하던 지강백이었지만,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그였다.

그래서 용천휘의 거짓은 톡톡히 제 역할을 해냈다.

“뭐야,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어? 요새 완전 난리라던데. 이놈들 때문에.”

종남산이 높고 험하긴 하다. 그래서 소문도 이곳까진 잘 오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나는 왜 정신을 잃은 거냐?”

“뭐야, 그것도 기억 안 나?”

용천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형 어디가 크게 잘못됐나 보다. 사형이 나한테 도망치라고, 막 그럴 때 말이야. 백발마인놈이 와서 사형을 한 대 퍽, 쳤는데 사형이 그대로 쓰러졌다고. 그거 기억 안 나?”

“……내가 그랬다고?”

“응. 아닌 게 아니라 그때 정말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지. 자기만 믿으라고 큰소리치던 사형이 한 방에 뻗는데…… 후, 말도 마.”

용천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내 약사는 저기 험한 데로 팔려가고 나하고 사형은 여기서 목이 뎅겅 잘렸을걸. 강호가 이렇게나 무서운 곳이었다니……. 진짜 십년감수했네. 봐, 여기.”

용천휘가 상처 난 제 손바닥과 피 묻은 채희유의 소맷자락을 가리켰다.

“여기 이렇게 다치기까지 했다고. 정말이지, 이 몸에 이렇게 상처가 생기다니.”

그러면서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정말로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게 정말이냐?”

일단은 확인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용천휘는 그가 한 대 맞고 기절했다고 했지만, 머리 쪽에 느껴지는 둔통은 전혀 없었다. 그토록 강력한 일격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지나가는 길이었다던 그 고수는 어떤 무공을 썼지? 병기나 생김새를 설명해 봐. 나는 강호 사정에 이목이 어두운 편이지만 사부님께서는 아실지도 모르니. 구명지은을 입었다면 마땅히 은인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

“뭐야, 지금. 사형은 내 말을 의심하는 거야?”

“의심하는 게 아니라 확인하려는 거다.”

“나 참. 그게 그거 아냐? 어처구니가 없잖아. 사형 때문에 다들 죽을 뻔했는데 말이야. 사형은 거기에 대해서는 미안해하지도 않고.”

“시차가 너무 공교롭다는 생각은 안 하나? 여덟 명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처리할 정도면 대단한 고수일 텐데. 그런 자가 때마침 이런 외진 곳을 지나치고 있었다고? 대체 무슨 이유로?”

“그 작자가 엄청난 고순지 아닌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무공 같은 건 배운 적도 없는데.”

“그래.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서.”

“아, 뭐야.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기나 해? 사형은 정신을 잃어서 하나도 몰랐다지만…… 욱!”

그때 갑자기 용천휘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지강백은 생각할 틈도 없이 용천휘를 붙들었다.

“우웨엑!”

용천휘가 그대로 속을 게워냈다.

어떻게? 지강백에게 붙들린 상태에서.

어디로? 지강백에게로.

언제? 지금.

“…….”

토사물이 종남파의 무복을 적셨다.

지강백이 아무 말 하지 않고 토사물을 내려다보았다.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용천휘가 손등으로 입술을 슥슥 문질렀다.

“젠장. 이건 다 사형 탓이야. 사형이 기절하는 바람에 완전 놀랬단 말이야. 그래서 탈이 난 모양이야. 사형도 알다시피 내 몸이 좀 섬세해야 말이지. 내가 언제 이런 험악한 일을 겪어 봤겠어?”

“대체 그런 핑계가……!”

울컥 화를 내려던 지강백은, 그러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이제야 봤던 것이다.

용천휘의 안색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다는 걸.

이마에는 식은땀이 고였고 양 손은 떨리고 있었다. 용천휘는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왜 그래?”

“반소효응.”

“반소효응이라니?”

“그런 게 있어. 지금 같은 때 내 병신 몸이 반응하는 걸 두고 하는 소리야.”

그때 얌전히 얘기를 듣고 있던 채희유가 끼어들었다.

“약이 필요하겠군요.”

“당연히 그렇지.”

“곧 지어서 올리겠습니다.”

“빨리 해. 죽을 것 같으니까.”

“예, 그런데…….”

“그런데?”

채희유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인형처럼 무표정한 그녀가 살짝이라도 웃는 효과는 지대했다.

적어도, 아직 그녀의 모든 것이 낯선 지강백에게는.

“평소보다 훨씬 좋으신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아아, 그렇지?”

용천휘가 채희유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이 아니라 행운이라는 네 말이 맞나 보군.”

그렇게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은 지강백이 모르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아직 알아서는 안 될 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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