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8화 (8/346)

제8화 적혈대법

채희유는 산자락 아래 작은 마을의 한 민가를 빌어 묵고 있었다.

산을 내려서자마자 있는 마을이라 크게 멀지는 않았다.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고 번거로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까지 온 지강백은 땀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주르륵 훑어보는 채희유 탓이었다.

처음 봤던 그날처럼, 먹을 칠한 듯 까만 눈이었다.

지강백은 그 눈이 혹시 독이 아닐까 싶었다.

음용하면 내공을 흩어지게 하는 산공독이 있다고 했다. 산공독에 중독되면 사지가 풀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고 했다.

지강백에게는 채희유의 까만 눈이 꼭 그런 느낌이었다.

“또 다치게 하셨다고요?”

“그게…….”

그게 꼭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인질극에서 구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많이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피도 좀 흐르다가 금세 멎었습니다. 딱지도 안 질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상처에는 침도 바르지 않습니다.

하루 자고 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나으니까요.

그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잘못한 사람처럼 입을 열지 못하는 지강백을 대신해 답을 한 사람은 용천휘였다.

“뭐, 그렇게 됐어.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채희유의 눈이 용천휘를 향해 옮겨갔다.

지강백은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도련님이 괜찮으신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번거롭게 된 사람은 저니까요.”

용천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받았다.

“원 참. 우리 사형이 설마 널 귀찮게 하려고 일부러 그랬겠어? 물론 제정신인 사람 같지는 않아. 하지만 일부러 여자를 괴롭히는 말종은 아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허나 일전에도 도련님을 물에 빠지게 하신 분 아닙니까. 공교롭게도 그런 일이 연달아 이어지니 도련님의 사형께서 계속 저를 번거롭게 만드시는 분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겠습니다.”

지강백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에 이어 공교롭게도 여인을 번거롭게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듣고 있자니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기왕 오셨으니 들어오십시오. 상처는 보아야 하니까요.”

채희유가 옆으로 비켜서며 안쪽을 가리켰다.

“그럼.”

지강백이 채희유의 손짓에 따라 대문을 넘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채희유가 말했다.

“그런데 도련님은 지금 두 발로 못 걸으십니까?”

“……예?”

그녀의 눈이 지강백의 등을 가리켰다.

“제 눈에는 그 정도로 다치신 것 같진 않아 보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

지강백이 그때서야 이제껏 내내 업고 있던 용천휘를 돌아보았다.

눈이 험악해졌다. 바보처럼 용천휘를 등에 업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산을 내려오는 길에 징검다리가 놓여 있는 작은 냇가가 있었다.

용천휘는 징검다리가 척 보기에도 미끄러워 보이니 제 발로는 건널 수 없다고 했다.

지강백은 그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 걷지도 못하냐고 핀잔을 주었다. 용천휘는 자신이 신는 매우매우 비싼 고급 가죽신은 잘 닦인 평지용이지 이따위 징검다리용이 아니라고 했다.

지강백은 그럼 신을 벗고 건너라고 했다. 용천휘는 이 몸이 왜 맨발로 걸어야 하냐며 저항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것이다.

결국 지강백이 그를 업고 개울을 건넜다.

그 뒤로 용천휘는 갖가지 핑계를 대가며 등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태연하게 사람을 말 취급 하는 그 뻔뻔함에는 몹시 짜증이 났지만, 채희유가 묵고 있다는 집이 가까워올수록 짜증을 잊었다.

짜증이 아니라 다른 것도 잊었다.

그 산공독처럼 까만 눈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만 내려와라.”

지강백이 용천휘를 덜컥 내려놓았다. 본심을 말하자면 확 집어던지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아야 했다.

“읏차, 너무하는데. 기왕이면 안까지 태워다 주지. 사형이 내 적혈마보다 더 편한 것 같았는데. 말보다 말도 더 잘 알아듣고 말이야.”

떠밀리듯 지강백의 등에서 내려온 용천휘가 뭐라고 투덜거렸으나 이미 발이 땅에 닿은 후였다.

용천휘가 부채를 펴서 설렁설렁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형, 그거 알아? 말과 사람에게도 궁합이 있다는 걸. 궁합이 잘 맞는 말일수록 오래 타도 엉덩이가 덜 아파. 아, 사형은 가난뱅이라 말을 타 본 적이 없으려나?”

“헛소리 그만하고 어서 들어가기나 해라.”

지강백이 저도 모르게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사실 말을 타본 적이 없긴 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 얘기에 말려들면 좋을 게 없으리라는 것쯤은 이제 알았다.

용천휘가 부채 끝을 채희유 쪽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너는 말하고 궁합이 맞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지? 난 이제까지 내 말 궁합이 적혈마하고 제일 잘 맞는 줄 알았거든. 중원 땅에서 제일 비싼 말이라고 하면 단연코 적혈마잖아. 그러니 제일 좋은 말일 수밖에 없지 않아? 그런데 오늘 우리 사형을 타보니…… 엇, 실수. 우리 사형에게 업혀보니 적혈마보다 더 좋은 것 같더라 이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채희유는 용천휘의 헛소리에 조금도 웃지 않았다.

“제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도련님 취향이신 것을요.”

“취향이 아니라 궁합이라고 했잖아.”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요.”

“좀 알아보는 건 어때?”

아무리 들어도 실없는 농지거리 같은 말이었지만, 채희유는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하신다면.”

“그래,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채희유가 앞장서서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오십시오.”

끼이익.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용천휘와 지강백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의 풍경은 단출했다.

탁자가 하나 있었고, 그 뒤로 커다란 약장이 있었다. 탁자의 앞으로는 의자가, 의자 옆으로 화로가 놓여 있었다.

여기까지는 크게 이상할 것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채희유의 방은 몹시 어두웠다. 창을 두터운 천으로 온통 가려둔 것이 보였다.

“왜 이렇게 어둡습니까?”

지강백이 물었다. 인위적인 어둠은 밤이 되면 찾아오는 어둠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것 같은 기분.

“약을 두는 곳이라 그렇습니다. 약에 따라 빛에 변질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간단히 답을 한 채희유는 화로에 말린 풀잎으로 보이는 것을 집어넣었다.

“향을 피워 냄새가 날지도 모릅니다. 낯설어도 참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참아보겠습니다.”

“도련님은 이쪽에 앉아 주시겠습니까? 상처를 돌보아야 하니.”

용천휘는 채희유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채희유가 그 맞은편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용천휘를 마주했다.

“목을 베이셨군요.”

“응. 피도 났다고. 정말 아팠어.”

“예. 피가 났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렇게 아팠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채희유는 화로에 마른풀을 좀 더 집어넣었다. 지강백이 물었다.

“제가 뭐 거들 것은 없습니까?”

“의술을 아십니까?”

“……아니요.”

“그럼 그 자리에 가만히 계십시오. 의술도 모르는 분이 도울 일은 없을 줄로 압니다.”

무를 써는 것 같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무안해진 지강백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가 입을 다물자 어두운 방 안에는 침묵이 고였다. 너무 고요해서인지 화로 안에서 숯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향이 계속 짙어졌다. 숨이 조금 답답해질 정도였다.

지강백은 밖에서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앉았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는 나가 볼 테니 치료가 끝나면 알려……,”

“앗.”

그런데.

시차가 공교로웠다.

지강백이 일어서는 그 찰나에 채희유가 뭔가를 가지러 몸을 돌렸고, 그러는 통에 두 사람은 거의 스칠 정도로 동선이 겹쳤다.

채희유가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 그러다 발을 헛디뎠는지 신형을 휘청거렸다.

“조심하십시오.”

지강백이 덥석 채희유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신형을 바로 잡아주려던 것이었는데, 채희유의 몸이 그를 향해 불쑥 기우는 꼴이 되었다.

“……놓아, 주세요.”

잠깐 시간이 흐른 뒤 채희유가 말했다.

얼굴이 몹시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말을 할 때 숨결이 닿을 정도로 아주 가까이.

채희유의 숨결이 안개가 되어 몸을 휘감는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지강백이 서둘러 채희유의 손을 놓아주었다.

“실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손을 놓았지만 채희유의 몸은 그렇게 빨리 멀어지지 않았다. 숨결도 마찬가지였다.

체온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지강백은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것 같은 감각에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좀 더운 것 같습니다만.”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저만 그런가 봅니다. 바람이라도 쐬면 나아지겠지요.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지강백이 채희유에게서 몸을 돌렸다. 방문을 열고 나서는 그는 조금 서두르는 듯 보였다.

문이 쿵, 하고 닫혔다.

지강백이 사라지고 둘만 남은 방 안은 다시 어둠으로 채워졌다.

사람이 그림자가 되어버리는 어둠 속에서 용천휘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어때?”

밑도 끝도 없는 말.

그러나 채희유는 용천휘의 말뜻을 곧장 알아들었다.

“사형 분의 체질 말입니까?”

“그래. 방금 하독했을 테니 알 것 아냐.”

채희유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독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군요. 저는 독을 쓴 게 아니라 약을 썼으니까요.”

“그 약이라면 독하고 크게 다를 것도 없잖아.”

용천휘가 부채를 돌려 화로를 향해 저었다. 화로에서 향과 함께 은은히 솟아나던 연기가 부채바람에 밀려 흩어졌다.

“대답해. 그걸 알아보겠다고 널 불러들인 거야. 내가 노출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저를 부르셨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사형 분이셨군요.”

채희유가 화로 위에 천을 덮었다. 그러자 연기도, 향도 그쳤다.

이제 더는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소야께서 알고 싶으신 것은, 정확히 사형 분의 체질이 아니라 그분과 소야의 체질이 얼마나 상통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래.”

용천휘가 제 손을 들어올렸다.

희고 정갈한 손이었다. 용천휘가 그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용천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저주받은 몸은 본교의 적혈대법이 아니고서야 무공을 쓸 수 없으니까.”

적혈대법.

이제껏 중원 땅에는 알려지지 않은 마교의 주술이었다.

약물과 특수한 점혈을 통해 상대의 무공을 다른 몸으로 옮겨 오는 게 그 원리였다.

“하지만 적혈대법은 반드시 반소효응(反銷效應: 부메랑 효과)이 따르지. 그걸 최소화하려면 체질이 잘 맞는 인간을 찾을 수밖에 없어. 네 일은 그런 인간을 찾아서 나를 위한 제물로 만드는 것이고.”

“…….”

가만히 입을 다무는 채희유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희고, 여리고, 꽃보다 더 꽃 같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고운 외모보다도 더욱 꽃과 닮은 것은 그녀의 표정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벌레가 날아와 앉으면 앉는 대로.

아무런 저항도 감흥도 없는 무표정이 꽃과 가장 많이 닮아 있었다.

“대답해. 내 사형은 제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나?”

잠시 후 채희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얼마나?”

“아마도, 꽤 많이.”

채희유가 눈을 들어 용천휘를 바라보았다.

“좀 전에 쓴 약은 체질을 알아보는 것이라 사람에 따라 반응이 다릅니다. 사형 분께서는 거의 반응이 없으셨지요. 다른 이들은 혼절하거나, 잠시 산공 반응이 나타나거나 합니다. 경우에 따라 기가 역행하는 최악의 길을 따르기도 합니다. 반응이 덜할수록 대법에 적합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형은 최상의 몸이라는 소리겠군.”

“예. 소야께서 겪으실 반소효응이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하, 하하…….”

용천휘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소리 내어 웃었다.

“……젠장.”

웃음은 욕설이 되었다.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끝내주는 우연이로군. 천하무도회까지 가는 말로 이용하고 버릴 작정이었던 종남에서 제물까지 찾았다는 게.”

답하는 채희유는 여전히 같은 표정이었다.

“우연이 아니라 소야의 운이겠지요.”

용천휘가 얼굴을 가린 손을 떼었다. 홍채가 언젠가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준비를 하도록. 그를 제물로 만들.”

채희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야. 하지만 저도 물을 게 있습니다.”

“뭔데.”

“저는 이제껏 적혈마가 되는 것은 소림의 지월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마음을 바꾸신 겁니까?”

적혈마는 적혈대법의 제물이 될 상대를 지칭하는 은어였다.

“그건 아니야. 지월은 현 중원의 일인자다. 그를 대신할 인물은 없어.”

“그렇다면 사형 분은요?”

“나도 그걸 모르겠다.”

늘 매끄럽던 용천휘의 얼굴에 갈등이 떠올랐다.

“그의 성취는 놀랍지. 하지만 아직 완성되진 않았어. 지월과 비교할 바는 아니야. 그런데……,”

“그런데 곁에 두고 싶으신 겁니까?”

“곁에 두고 싶다니?”

채희유가 눈짓으로 지강백이 사라진 문을 가리켰다.

“지월만큼의 쓸모가 없는 게 뻔할 텐데도 그냥 놔두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니까요.”

용천휘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너나 삼좌위(三左位)나 같은 소리를 하는 이유라도 있나?”

“삼좌위께서도 보이는 대로 말씀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아아, 그래. 너희들은 다들 내 머릿속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처럼 구니까. 그래, 그렇다고 치자고. 준비나 해둬.”

“명하신다면.”

채희유가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흰 옷이 감싼 몸은 가늘고 고요했다. 작은 어깨는 한 팔로도 넉넉히 휘감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어깨는 여리다 못해 어딘지 모르게 슬픈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말씀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소야. 약의 존재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습니다. 그건 저라는 존재를 되도록 감추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제넘게 구는 것도 똑같군. 결과는 내가 정할 것이다.”

채희유가 용천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뜻대로.”

그렇게 대화가 끝났다.

지강백은 듣지 못한, 들어서도 안 될 얘기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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