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7화 (7/346)

제7화 종남산의 살인귀

터덩!

두 번째, 이어서 세 번째 나무도 깔끔하게 분리되었다.

이번에는 눈알 비비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라고 했나?”

지강백은 은도끼 왕대환이 콕 집어 가리켰던 제일 밑의 나무를 보았다.

아깝긴 했다. 토대가 될 나무라 제일 단단한 것으로 골랐는데.

하지만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강백이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하압!”

펑! 우지직!

지강백이 주먹으로 통나무를 내리쳤다. 벽운천강권이었다.

주먹으로 내리친 나무는 신기하게도 부서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세로로 쪼개져 버렸다.

마치, 잘 벼린 칼로 베어낸 것처럼.

“으…… 으잉?”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무리 봐도 애송이였다. 풋풋한 터벅머리를 보면 잘해봐야 스무 살 언저리일 것이다.

그런데 주먹만으로 나무를 쪼갰다.

아니다. 저것은 베었다고 말해야 옳았다. 듣도 보도 못한 고수의 경지였다.

“안 보이는데. 이 나무가 맞나?”

지강백이 쪼개진 나무를 들고 돌아섰다.

그러자 들려오는 건,

“으악! 가, 가까이 오지 마!”

본심이 담긴 비명 소리였다.

이건 횡액이었다. 쭉 폈던 가슴이 콩알만 하게 오그라들었다.

“뭐, 뭐 이런 미친……!”

“미친놈?”

지강백이 저도 모르게 용천휘를 힐긋 돌아보았다. 용천휘는 왜 저를 보냐는 듯, 설렁대던 부채질을 멈추었다.

“왜 자꾸 나를 쳐다 봐. 이름이 없었으면 다른 나무를 쪼개 보든가. 저쪽에서 착각했을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겠군.”

지강백이 다른 나무를 쪼갰다. 두 번째 나무 역시 깨끗하게 반으로 나뉘었고, 지강백은 그마저도 의심스러웠는지 쪼개진 것을 또 반으로 쪼갰다.

“여기도 없다. 뭘 잘못 안 모양인데.”

지강백이 쪼개진 나무를 옆으로 내던지며 말했다.

기껏 형태를 갖춰가던 집을 부순 것과 다름없게 된 상황이라 그도 짜증이 났다. 멋대로 이쪽을 도둑 취급하던 것도 생각해 보니 몹시 불쾌해졌다.

“이제 사과를 받고 싶다.”

지강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끔은 사부인 양영천도 겁을 먹는 매서운 눈이, 곧장 산적들을 향했다.

연달아 벽운천강권을 펼쳤더니 주먹이 조금 저릿했다. 요즘은 태을분광검 수련에 매진하는 통에 권법 수련을 조금 게을리 했더니 당장 이 모양이었다.

지강백은 혀를 차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관절에서 뚜두둑, 소리가 울렸다. 내일부터는 주먹 단련에도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사과하겠어?”

맹세코 말하지만 지강백은 미안하다, 착각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 이 세 마디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나 산적들의 입장은 그게 아니었다.

“히, 히익”

누군가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 도망쳐라!”

동시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은도끼 왕대환이 도망치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들 그 전부터 벌써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꺼번에 우르르 나타났던 산적들이 다시금 우르르 숲길을 달려갔다.

“사과하라니까!”

지강백이 산적들을 쫓아 몸을 날렸다.

걸음으로 치자면 지강백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산적은 없었다.

“멈춰!”

지강백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산적의 목덜미를 덥석 움켜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꾸에엑!”

산적은 괴상한 비명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지강백은 한 명씩 따라잡을 때마다 목덜미를 낚아채 등 뒤로 던져버렸다. 황망 중에 몸이 번쩍 들려 바닥에 콱 메다 꽂힌 산적들은 사양하지 않고 정신을 잃었다.

“이런 씨발!”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더군다나 도망치는 상황에서, 등 뒤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면 머릿속의 상상은 끔찍함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금 그들의 머릿속에서 지강백은 이미 강호제일의 살성이자 피에 굶주린 살인마였다.

“으아악! 살려줘! 쫓아오지 마!”

“두목! 두목! 살려주십쇼!”

산적들은 숨이 끊어져라 달리면서 왕대환을 찾았다. 이럴 때 믿을 것은 두목밖에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이 매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은도끼 왕대환이 제법 강호밥을 먹은 자였던 탓이다.

왕대환은 그들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냈다.

“꼬, 꼼짝 마!”

왕대환이 소리쳤다.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용천휘의 목에 도끼를 가져다 대었다.

“이런 잡혀 버렸네.”

용천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눈매가 조금은 미안해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돼버렸네. 사형이 구해줄 거지?”

“…….”

아니면, 몹시 재미있어 하는 듯 보이거나.

* * *

왕대환은 침착해지려고 애쓰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설마하니 두 놈 다 고수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이쪽도 살아남을 구석은 있다!’

얌전히 붙들린 것을 보면 이 비단옷 도령은 무공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좀 전에 나무를 쪼개 보라 부추긴 것을 보면 바보임이 분명했다.

그런 확신을 담아 왕대환이 외쳤다.

“이놈 모가지가 뎅겅 잘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더는 움직이지 마라!”

왕대환은 용천휘를 붙들고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일단은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애초에 나무에 주인이 있다고 한 것부터 거짓이었어.”

지강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의 침착하고 무감한 말투가 돌아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침착함은 왕대환의 귀에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병장기를 보아 무림인이고, 무리지어 다니는 데다 두목이라는 호칭을 썼지. 게다가 무고한 사람을 인질로 잡아 협박을 서슴지 않는 것을 보면…… 네놈들은 녹림도겠군.”

“……뭐, 뭐라?”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재물을 갈취하는 건가.”

이제 당황하는 쪽은 왕대환이었다.

녹림도 십 년 경력을 걸고 맹세하건대 이렇게 진지하게 은도끼파의 정체성을 따져 묻는 인간은 지강백이 처음이었다.

“네놈은 뭐……,”

바보냐?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애써 씹어 삼켰다.

“종남산에 녹림도 무리가 횡행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다.”

지강백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의 제자로서 불의를 못 본 척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종남산.

종남파의 터에 저런 악의 무리가 제멋대로 활보해서야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인질로 잡힌 용천휘였다.

말이 나왔으니 얘기지만 지강백이 실전에서 무공을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될 터였다.

사부인 양영천이 네놈 실력으로 두들겨 맞기밖에 더하겠냐며 매번 비무를 거절한 탓에, 그는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전혀 감을 잡고 있지도 못했다.

어쩌면 용천휘를 구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따를지도 모르겠다.

지강백이 용천휘를 향해 말했다.

“조금만 참아.”

한 가지 다행한 일이라면 용천휘가 별로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강백은 그것을 사형과 사문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용천휘가 기댈 곳이라고는 부족한 사형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지강백에게 의기를 불어넣었다.

용천휘는 앞으로도 한 열 번쯤 물속에 처박아 주고 싶은 인간이긴 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사제였으니까.

“너는 반드시 내가 구할 테니.”

탓!

지강백은 내력을 모두 끌어올려 다리에 힘을 실었다.

몸이 살처럼 튀어나갔다. 거리를 좁힌 지강백은 천강지로 왕대환의 은도끼를 노렸다.

턱!

은도끼가 날아갔다.

“으악!”

왕대환이 손목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천강지가 때린 것은 은도끼였지만 도끼를 쥐고 있던 왕대환의 손목도 무사하지 못했다. 훌떡 뒤로 꺾인 것을 보면 필히 손목이 부러진 것이리라.

그러나 왕대환에게는 손목의 부상을 느낄 만한 여유도 없었다.

탓, 타다닷!

도끼를 날려버린 지강백이 달려오던 속도의 탄력을 이용해 왕대환을 걷어찬 것이다.

왕대환의 몸이 뒤로 홱 밀렸다. 그사이 지강백은 한 발로 신형을 고정시키며 회심퇴를 전개했다.

가슴팍과 옆구리, 대퇴부를 연타로 얻어맞은 왕대환은 그대로 납작 뻗어버렸다.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졸지에 바닥을 나뒹구는 왕대환이나, 그를 그렇게 만든 지강백이나 서로 놀란 얼굴들이었다.

“뭐야, 이건. 형편없군.”

설마하니 왕대환이 단 한 방에 나가떨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지강백이었다.

“괜찮나?”

그가 묻자 용천휘가 목덜미를 손으로 짚으며 짜증을 부렸다.

“안 괜찮아. 사형이 저 도끼를 날릴 때 살갗이 긁혔다고. 피가 나잖아.”

“피가 난다고?”

“그래. 이게 안 보여?”

용천휘가 옷깃을 끌어내려 피가 몇 방울 배어나오는 상처를 내보였다.

“제대로 하지 못하겠어? 이게 무슨 꼴이야. 나 참. 내 약사와 가신이 알면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내 몸에 상처가 생기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짐작이나 해?”

상처는 고작해야 살갗이 살짝 긁힌 정도였다. 그러나 그 상처의 주인인 용천휘는 몸이 짐작도 못 할 만큼 약했다.

급격한 체온 변화가 치명적인 것처럼 몇 방울의 출혈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미안하다.”

지강백이 안색을 흐리며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용천휘의 몸 상태를 생각한다면 좀 더 세심히 도끼날의 반동을 계산했어야 했다.

아니, 좀 더 세심히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천강지는 아직 부족했다.

“상처를 입게 할 줄은 몰랐다. 내 실력이 부족한 탓이다.”

“부끄러운 줄 알라고, 사형.”

“그래.”

두 사형제가 그런 말을 주고받는 동안.

“뭐, 뭐라는 거냐, 지금!”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왕대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듣자듣자 하니 더는 못 들어주겠다.

실력이 부족하다니. 그래서 부끄럽다니. 이 은도끼 왕대환을 한 방에 날려버린 그 실력이.

대체 뭐하는 놈들이기에 저 따위 흰소리를 저리 태연한 낯짝으로 주고받는 것일까.

“네, 네놈들은 대체 뭐기에……!”

그래, 대체 뭐기에.

막상 말을 내뱉고 보니 억울함이 몰려들었다.

“왜 종남산에 있는 거냐! 왜!”

이건 반칙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은도끼파는 화산파의 등쌀을 못 이겨 임자가 없다는 종남산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임자 없는 산인 줄 알았던 그곳에 웬 호랑이가 살고 있었을 줄이야.

왕대환은 원통함을 담아 소리쳤다.

“왜 이곳에 네놈 같은 고수가 있냔 말이다! 대체 왜!”

그러자 지강백이 눈썹을 치켜떴다.

“고수?”

“그래, 고수!”

용천휘가 목덜미를 슬슬 문지르며 입매를 꼬았다. 몹시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흐음. 우리 사형이 고수였나? 사부님은 만날 모자라다 하셨던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용천휘는 양영천이 지강백을 상대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고, 왜 그런 짓을 하는지도 짐작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이었다.

그것을 지강백은 곧이곧대로 믿었다.

용천휘는 지강백이 진심으로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설마 사부님이 거짓말을 하신 건가?”

용천휘가 은근슬쩍 찔러대는 소리를, 지강백은 듣지 않았다. 대신 그는 왕대환의 발언에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아무리 봐도 한심하다는 말을 대신하는 한숨일 것 같아 왕대환은 발끈했다.

“왜…… 왜 한숨을 쉬는 거냐!”

되묻는 왕대환을 향해 지강백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껏 제대로 된 고수를 본 적이 없는 모양이군. 실력도 없는 데다 안목까지 없으니. 대체 그간 산적질은 어떻게 해온 거냐?”

“뭐, 뭐라고?”

“잘됐군. 오늘 일을 교훈 삼아 앞으로는 얼치기 산적 노릇 말고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살아라. 보아하니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인데 강호에는 네가 짐작도 못 할 고수들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뭐…….”

왕대환이 입을 딱 벌렸다.

“알겠다고 하면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심지어 애송이는, 물론 무시무시한 고수긴 했지만, 일단 생긴 것은 저리 새파란 젊은 놈이 선심을 쓰듯 이런 말까지 했다.

저 애송이 고수는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렸다.

전통과 연륜을 자랑하는 은도끼파의 자부심을 사정없이 깔본 것이다.

왕대환은 이를 악물고 기었다. 그리고 부러지지 않은 팔로 저 짝에 떨어진 도끼를 집어들었다.

“이런 개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죽겠다! 덤벼라!”

왕대환은 도끼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지강백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지강백의 손이 몇 번을 휘리릭 움직인다 싶더니 곧 왼손이 허전해졌다. 지강백이 오뢰정인의 한 수로 왕대환의 도끼를 빼앗은 것이다.

지강백은 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콰직!

그의 손 안에서 도끼자루가 뎅겅 부러졌다.

“허억!”

왕대환은 마치 자기 목이 뎅겅 부러진 것처럼 신음했다. 그가 털썩 땅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러진 것은 도끼뿐만이 아니었다. 전통과 연륜의 녹림도 외길 인생의 자부심도 단 한 수에 박살이 났다.

“나를…… 죽……여라. 나는 이제…… 아무것도 못 되는…… 은도끼 왕대환은…… 이제 끝장…… 흐윽!”

고개를 땅에 처박고 끅끅 울음을 터트리는 왕대환을 보며 지강백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쯧.”

그가 부러진 도끼자루를 쥐고 왕대환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왕대환의 팔을 잡았다. 이거 놓으라는 왕대환의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지강백은 왕대환의 부러진 손목을 들어 뼈를 맞추었다.

뚜두둑, 하는 소리에 이어 왕대환이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손목 한 번 부러졌다고 안 죽어.”

지강백은 뼈를 맞춘 손목에 도끼자루를 대고는 방금 찢어진 소맷자락을 둘둘 감아 주었다.

“으…… 으으,”

왕대환이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지강백을 쳐다보았다.

상처 난 자부심과 지강백을 향한 분노, 원망. 그리고 무언가가 하나 더 추가된 복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끝장이란 건 없다.”

왕대환의 손목을 놓아준 지강백이 평소의 무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사람에게는 길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 설령 처음 선택한 길이 끝이 났다 하더라도, 그럴 땐 다른 길을 찾아서 가면 된다. 산적이 네 길이 아니었던 거다. 네게 맞는 길을 찾아라.”

“크윽…… 무슨…… 아니, 아니다……. 내게는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없…… 무려 십…… 십 년이었다. 이제와 다른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

“상관없다. 사람이 길을 가는 데 중요한 건 얼마나 빠르게 가느냐가 아니라 어떤 길을 걷느냐 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사실 지강백 자신에게 매일같이 하는 말이었다.

종남산에 몸담은 십칠 년이 고되지 않았다 하면 거짓이었다.

그래도 지강백은 자신이 바른 길을 걷고 있음을 알았다. 느리고 더뎌도 꾸준히 걷다 보면, 그것이 올바른 방향이라면 반드시 도달하고자 하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만 가라. 다시는 산적질 같은 것으로 종남의 터를 더럽힐 생각 마라. 내가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강백은 몸을 일으켰다.

왕대환의 눈에는 뒤돌아서는 등이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전히 풋내가 풀풀 나는 애송이였는데, 여전히 저 이마빡에 도끼를 찍어줘야겠다는 분노가 들끓고 있는데, 희한하게도 짓밟힌 자부심은 생각나지 않았다.

반듯하고 넓은 어깨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고 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왕대환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묻고 있었다.

“네, 네놈은 대체 누구……!”

지강백이 힐긋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말투가 저절로 바뀌었다.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그쪽…… 고수 분의 명호가 어떻게,”

이번에는 지강백이 인상을 썼다.

“고수란 말은 웃기는군. 그런 말은 내 사부님 정도가 되어야 들을 수 있는 거다.”

“무슨 그런 개소…… 아니, 그런 말, 말씀을……. 댁이…… 아니, 당신이 고수가 아니라면 이 은도끼 왕대환이 왜 여기 이러고 납작 자빠져 있,”

“하,”

지강백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툭 던졌다.

“네가 너무 약한 거겠지. 그러니 산적은 네 길이 아니라는 말이다.”

“으, 으으…….”

왕대환이 아무 말 못 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저만한 무위를 지니고도 아직 멀었다고 하는 인물이니 저를 두고 약하다 하는 것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기준이 달랐다.

갑자기 저 애송이의 등이 왜 저렇게 넓어 보이는지를 깨달았다.

그가 저 멀리, 아주 넓은 곳을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릇이 다른 것이다.

왕대환은 입술을 꾹 물고 왈칵 차오르는 눈물을 참았다.

이 눈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의미가 되리라.

그렇게 은도끼 왕대환이 제 삶의 커다란 의미 하나를 발견하려고 하는 참에.

“그만하고 부상자나 어서 데려다 주지?”

용천휘의 목소리가 툭 날아들었다.

구경할 것은 다 구경한 터라 그는 슬슬 지루해져가고 있었다.

“사형 때문에 다쳤다고 또 말해줘야 알아먹을 텐가?”

“내가 데려다줘야 하나?”

용천휘가 짜증스럽게 답했다.

“우리 사형은 말이야, 분명 둘 중 하나일 거야.”

“그게 무슨 소리냐?”

“손 쓸 도리 없는 바보거나 아니면 미쳤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미친 게 아니냐는 소리에 지강백이 인상을 쓰는 사이 용천휘의 짜증이 줄줄이 이어졌다.

“내가 부상을 입었잖아. 그럼 어디로 가야겠어? 당연히 내 약사한테지. 그런데 내 약사가 지금 어디에 있지?”

“…….”

그렇게 나오면 이쪽은 할 말을 잃는 게 도리였다.

용천휘는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한층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 잘난 사문의 법도 어쩌고 하는 것 때문에 종남산에는 발도 못 붙이고 있잖아. 그러니 내 약사를 찾아 가려면 이 산을 내려가야 한다는 말 아냐?”

그럴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전 산적 일당이 우르르 도망쳤고. 그러니까 사형은 지금 이 부상자더러 산적이 떼로 우글대는 산길을 혼자 가란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이게 제정신인가?”

말투는 열이 받았지만, 유감스럽게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욱하려던 지강백은 조금 미안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데려다주겠다.”

“나 참. 업어서 가라고 할 걸 참는 거야. 한 번은 봐줄 테니 고맙게 여겨.”

지강백이 순순히 대꾸했다.

“업어 달라면 그렇게 해주지.”

그러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대는 것을 보면 그 업는다는 게 곱게 업어준다는 말은 결코 아닐 듯했다.

용천휘가 부채 끝을 빙글빙글 돌렸다.

“아아, 봐준다니까. 왜 사람이 관대하게 구는 걸 못 받아들여. 어쨌거나 가자고. 내 몸 상태가 진짜 엉망이 되기 전에.”

용천휘가 먼저 훌쩍 등을 돌렸다. 그 뒤를 지강백이 묵묵히 따랐다.

물론 그 전에 지강백이 화풀이를 하듯 일부러 밟은 돌멩이 하나가 발밑에서 빠각 부서지긴 했다.

* * *

두 사형제가 떠난 자리에 왕대환이 홀로 남았다.

그는 참 복잡한 표정으로 하늘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잠시 후 수풀이 부스럭거리며 도망쳤던 수하들이 한둘씩 돌아왔다. 다들 어디 한 군데씩 망가진 몰골이었다.

“두목…….”

도망치라고 해봤자 갈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십 년을 함께 한 수하들이었다. 그가 걷는 길을 수하들도 따라 걸었다.

그가 잘못된 길을 걸으면 저 수십 명의 인간들이 전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었다. 왕대환은 그것을 산적 노릇 십 년 만에 깨달았다.

길은 선택의 문제라던 애송이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여기선…… 아무래도 산적질은 날 샌 것 같지 않습니까?”

귀신눈 구악이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그럼 이제 어쩔깝쇼? 다시 화산으로 돌아갑니까? 그런데 거기 산채를 싹 다 불 지르고 와버려서…….”

“그랬지.”

“그럼 이제 우린 끝인 겝니까? 종남산에도, 화산에도 발을 못 붙이면 아예 섬서 땅을 떠나야 할깝쇼?”

귀신눈 구악의 눈꼬리가 힘없이 아래로 쳐졌다.

애송이의 목소리가 또 한 번 귀 안에서 들려왔다. 아니, 가슴 속에서 들려오는 듯도 했다.

끝장이란 없다. 다른 길을 찾아서 가면 되니까.

어쩌면 지금이 바로 다른 길을 찾아야 할 때일까.

왕대환이 말했다.

“아니, 끝이란 없다.”

일단 내뱉고 보니 처량 맞던 부하들의 얼굴에 언뜻 화색이 도는 것도 같았다.

“길을 찾아보자.”

왕대환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 욱신욱신 아파서 주책없이 울고 싶던 오른 손목도 더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새로운 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 걸을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한때 은도끼파라 불렸던 산적 무리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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