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전통과 연륜의 녹림도
“방법이라…….”
그러나 감도 오지 않았다.
사문의 법도는 지엄했고 양영천은 그 법도보다 훨씬 더 완고했다.
채희유가 피풍의를 버린 일로 양영천은 그녀를 미워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지강백이 방법을 찾겠다 나선 것도 몹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지강백은 그런 쓰잘머리 없는 일로 고민하는 시간에 무공이라도 한 줄 더 익히라는 잔소리를 새벽별이 총총 떠오르는 시간까지 들어야 했다.
“으음…….”
하지만 양영천의 반대는 썩 의미가 없었다.
일단 용천휘는 이쪽의 돈줄이었고, 그 돈줄의 옥체가 미령하신 탓에 약사가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양영천이 고집을 피울 수 있는 부분은 채희유가 종남의 문턱을 넘지 말 것, 딱 하나였다.
“분명히 있을 텐…… 아,”
지강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만들면 되겠군.”
지금 그가 있는 곳은 굵은 나뭇가지를 대충 얽어 만든 조그마한 움막이었다.
사냥에서 잡은 짐승들을 보관하기 위해 급한 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산 공기가 워낙 청량하다 보니 종남파 안에 놓아두면 분명 냄새를 지우지 못할 것 같기에 부러 외부에 만들어 두었다.
그러니 채희유가 지낼 공간도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종남파 내부가 아닌, 종남과 매우 가까운 곳에.
지강백이 활짝 웃었다.
늘 무뚝뚝해 보이던 강인한 인상이 한눈에 달라졌다. 그처럼 표정이 없는 이에게 미소 한 번의 힘은 놀라웠다.
“집을 짓는 거야.”
길을 찾았다. 이제 달리는 일이 남았다.
지강백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집을 지으려면 적당한 나무를 베어야 했고, 마침 그런 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을 알고 있었다.
* * *
섬서의 산들은 원래 청경하기로 이름 높았다.
단지 풍광이나 산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산에는 짐승이나 물, 바람 같은 것들만 살지 않았다. 그 못지않게 사람도 많이 살았다.
약초꾼이나 사냥꾼, 뱀꾼, 화전민……. 녹림도도 그중 하나였다.
사람이 많으면 산이 더러워지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떼로 다니며 도적질을 일삼는 녹림도는 산을 더럽히는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섬서 땅에는 녹림도가 유독 적고, 있다 해도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는데 이는 대대로 섬서에 화산과 종남이라는 걸출한 두 문파가 든든히 자리를 잡고 있는 탓이었다.
그러나.
종남의 세가 갈수록 기울어 구대문파에서도 쫓겨난 지금.
나날이 위명을 더해가는 화산의 기세에 눌린 섬서 땅의 한 산도적 무리가 종남산으로 터전을 옮기기로 막 결정을 내린 참이었다.
* * *
“어떤 개종자가!”
종남이나 화산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근 백 리 안에서는 제법 충실히 무명(武名)을 쌓아온 연륜 있는 녹림도(綠林徒:산적) 은도끼 왕대환.
그가 분노하고 있었다.
“어떤 썩을 놈이 남의 집 앞마당을 이따위로 만들어 놨냐!”
그는 요 몇 달간 종남산 언저리를 헤매며 새로운 산채를 지을 만한 터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산채는 길이 좋아야 했고, 동시에 은밀해야 했다. 또한 물이 있고 볕이 넉넉하며 나무가 많아야 했다.
제법 덩치가 있는 무리였으니 그 수십의 인원이 먹고 잘 집을 지으려면 잘 자란 나무가 수월찮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눈여겨 보아두었던 나무들이 똑똑 부러져 있었다.
간이 제대로 부운 놈이었다. 제일 실하게 잘 자랐다며 일부러 찜해 놓은 아름드리나무만 골라 들고 튀었다.
“누군지 몰라도! 이 깽깽이 강아지 새끼 같은 놈! 이 어르신이 찾아내 족쳐 버린다!”
은도끼 왕대환의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메아리를 만들었다.
근 십 년간이나 은도끼 왕대환의 충실한 수하 노릇을 해오는 귀신눈 구악이 난처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를 귀신눈이라 부르는 이유는 귀신처럼 눈치가 빨라서였다.
“저기, 두목…… 아니아니, 채주님. 근데 말입니다요.”
“뭐?”
“그게 참…… 사람이 한 짓이 맞을깝쇼?”
“으엥?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귀신눈 구악이 손가락을 뻗어 썽둥 잘려나간 나무 밑둥 하나를 가리켰다.
“분명 도끼 자국이 없는데 말입니다. 사람이 한 짓이라면 도끼 자국이 있어얍죠.”
“……음? 그게 왜? 그럼 다른 걸로 뎅겅 잘라갔겠지!”
“다른 걸로요? 이 굵은 놈을요?”
“아, 다른 게…….”
도끼 대용으로 쓸 만한 다른 것을 생각해 보던 은도끼 왕대환이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별호답게 그는 도끼에 관한 한 전문가였다. 은도끼라는 별호는 실제로 은도끼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재빠르고 용맹스럽게 번뜩이는 도끼날이 꼭 은처럼 빛이 난다고 해서 붙은 별호였다.
그렇게 도끼를 잘 쓰는 인물이니 자연 도끼에 관한 것이라면 훤히 꿰고 있어야 하는데,
‘그, 그러게…… 끄응.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귀신눈 구악의 말대로 베어진 나무에는 도끼 자국이 없었다.
그런데 도끼가 아니라면 이만한 나무를 이렇게나 말끔히 잘라낼 만한 게 도통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봐도 나무를 끌고 간 자국도 없습니다요, 두목. 아니아니, 채주님.”
“……뭬야?”
그 말에 훌쩍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뭔가가 계속 수상하다 수상하다 싶었는데, 구악의 말대로 잘려진 나무가 사라진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 큰 놈을 끌고 가지 않으면 들고 갔다는 소린데…… 그게 사람 힘으로 가능하겠습니까?”
“뭐여, 그럼!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 했다는 게야?”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참. 저도 통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뭐가 이런 짓을 했는지.”
귀신눈 구악이 떨떠름한 얼굴로 덧붙였다.
“혹…… 뭐, 어마어마한 신력(神力)을 타고난 고수라거나…… 아니면 무슨 거, 전설의 검성처럼 칼을 쓴다거나…… 뭐 그런 걸깝쇼?”
“뭐라……? 검성?”
그 말에 은도끼 왕대환이 박장대소를 했다.
차라리 종남산 산신령이라 했으면 좀 더 실감이 났을 것이다.
“으하하, 거 무슨 흰소릴 하고 자빠졌냐! 종남산에 그런 게 있을 턱이 있나! 여기 있는 거라곤 진작 망해서 밑구멍 다 헐어버린 종남파 하나뿐인데!”
“그…… 그렇겠……지요?”
그간 나름 바지런히 캐고 다닌 터라 이 부근 사정은 알만큼 알았다. 소심하고 겁 많은 귀신눈 구악도 왕대환이 옳다고 믿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종남산에는 그럴 만한 고수가 있었다.
“오늘부터 여기서 매복이다! 아니, 애들 풀어! 산 뒤져서 찾아내라 해! 어떤 개종자인지 이 어르신께서 반드시 잡고야 만다!”
은도끼 왕대환을 비롯한 산적떼가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 * *
“아무리 봐도 사형은 재미있어.”
얼마 전 단단히 혼쭐이 났던 그 계곡가였다.
그렇게나 물과 상극이라던 용천휘는 별로 꺼려하는 기색도 없이 계곡 중간의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앞에서는 지강백이 땀에 온통 젖은 채 통나무 벽을 쌓는 중이었다.
“이 산꼭대기에 말이야, 혼자서 집을 짓겠다니. 그것도 며칠 만에. 보통은 그렇게까지 무식한 생각은 안 하지 않아?”
텅!
사람 몸통만 한 두께의 통나무가 하나 더 쌓였다. 지강백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털어냈다.
“그렇게 지껄이는 동안 좀 거들지 그래? 약사를 필요로 하는 건 너지 내가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난 사형만큼 미친놈은 아니라서.”
“미친놈?”
지강백이 힐긋 용천휘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떤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였다.
한 손으로 포닥포닥 부채질을 하던 용천휘는 눈이 마주치자 느슨하게 고개를 들었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왜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
저렇게까지 뻔뻔할 수 있다는 것도 재주였다.
“……됐다.”
용천휘는 지강백이 시선을 돌리자 그의 뒤통수에 대고 짧게 웃었다. 보는 사람이 없는 미소는 의미심장했다.
“뭐 하나 물어도 돼, 사형?”
“아니. 묻지 마.”
“내 약사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라.”
“사내가 여인한테 집을 마련해 줄 때는 하나지.”
“뭐라는 거냐. 채 소저를 여기로 부른 사람은 너야.”
“혼인하자 수작 걸 때.”
쾅!
지강백이 막 들어 올리던 통나무를 용천휘를 향해 던졌다. 용천휘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날아간 통나무는 그가 앉은 바위 옆에 부딪혀 반으로 쩍 쪼개졌다.
살랑살랑.
용천휘가 부채를 움직였다. 땀이라도 식히려는 것처럼.
“눈이 너무 나쁜 거 아닌가?”
“너무 좋아 탈이다. 눈이 조금만 나빴어도 그 나무가 너한테 맞았겠지.”
“내 약사 말이야. 겉으로는 닭 모가지 하나 못 비틀 것처럼 연약하게 생겼어도 속은 안 그렇다고. 여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야.”
쾅!
두 번째 통나무가 용천휘 쪽으로 날아갔다.
이번에는 지강백의 시력이 조금 나빠졌는지 용천휘의 가죽신에 물이 몇 방울 튀었다.
“쯧쯧. 것 봐. 사형은 눈이 너무 안 좋다니까. 내 약사한테 말해서 눈에 좋은 약이라도 좀 지어오라 할까?”
“……됐다.”
지강백이 입을 다물었다.
상대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을 알면서도 번번이 말려들고 마는 자신이 한심했다. 사부가 늘 저더러 아둔하다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지강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용천휘가 뭐라던 하는 일에나 집중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쾅, 쾅!
터덩, 텅!
지강백이 다시 통나무를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연약한 여인이 혼자 지낼 거처였다. 어지간한 비바람은 들어와서도 안 되었고, 설령 산짐승이 떼로 달려든다 해도 끄떡없을 만큼 견고해야 했다.
“쓸데없는 짓이 될 텐데. 겉보기와는 다른 여자라니까.”
정신을 집중해 다시 부지런히 움직이는 지강백을 바라보던 용천휘가 불쑥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좀 전과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표정 탓에 더 깊고 복잡한 이면의 뜻이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 나야 나쁠 것 없지. 어차피 써먹으려고 불러온 것이니.”
쾅, 쾅!
지강백은 집짓기에 여념이 없었다. 용천휘의 혼잣말은 흐르는 물과 함께 흔적 없이 흘러가 버렸다.
그러나.
“……?”
갑자기 지강백이 고개를 홱 돌렸다. 용천휘의 부채질이 딱 멎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런 젖비린내 진동하는 애송이들이! 감히 이 어르신이 찜해 놓은 나무를 도둑질해 갔냐!”
한 떼의 무리가 숲 속에서 우르르 등장했다.
흉악한 인상과 위압스러운 덩치, 살벌한 무기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전통과 연륜의 녹림도가.
* * *
은도끼 왕대환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동시에 굳은살이 턱턱 박힌 두툼한 손이 도끼자루를 탁탁 퉁겨댔다.
그가 누런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고 야들야들한 모가지들 얌전히 내놓을 각오는 되어 있냐, 이 깽깽이 새끼들아.”
그간 수하들을 풀어 없어진 나무의 행방을 좇았다.
의외로 그 간 큰 놈은 멀리 있지 않았다. 쾌재를 부르며 달려왔다.
고맙게도 딱 두 놈이었다. 둘 다 풋풋한 애송이들이라는 점은 더 고마웠다.
상체를 벗고 있는 놈은 제법 힘을 쓰는 놈인지 몸이 다부지고 탄탄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한 놈이었다.
다른 놈은 부채질이나 설렁설렁 하는 것이 천상 돈 쓰는 것 말고는 아무런 재주도 없어 뵈는 도련님이었다.
놈들을 손봐주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왕대환이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가서 저것들 붙들어 와! 오늘 이 어르신이 모처럼 애송이 포를 떠서 날로 씹어드시련다!”
“예입, 두목! 아니, 채주!”
수하들이 무기를 꼬나들고 우르르 달려갔다.
은도끼 왕대환은 그사이 애송이들을 훑어보며 주판알을 퉁겼다.
“이봐, 눈깔귀신. 저짝의 저놈은 값이 제법 되겠지?”
“그러믄요. 저도 막 그 말씀을 드리려던 참이었습지요.”
귀신눈 구악의 대답이었다.
둘 중 한 녀석은 차림새가 제법 봐줄 만했다. 비단옷이며 가죽신이며 돈 냄새가 풀풀 풍겼다.
“이거 시작부터 조짐이 아주 좋은데 그래.”
은도끼 왕대환이 턱을 슬슬 긁었다. 만족스러운 미소에 입가가 활짝 벌어졌다.
비록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 * *
“……뭐라고?”
지강백은 당황했다.
그가 당황한 이유는 낯선 사람들이 떼거리로 등장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이 전부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오, 손에는 듣도 보도 못한 기괴한 무기들을 들고 있던 탓도 아니었다.
한 마디 말 때문이었다.
“임자가 있는 나무였다고?”
그렇다면 자신은 도둑질을 한 게 된다.
대명문정파 종남의 일대제자라는 신분으로. 사문에 누를 끼치게 생긴 것이다.
지강백의 얼굴이 굳었다.
“이거 큰일이군. 사형 설마 도둑질을 했던 거야?”
용천휘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물론 설렁대는 부채질은 조금도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싸한 표정만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임자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나 참. 알고 하든 모르고 하든 도둑질은 도둑질이지. 왜 그랬어, 사형. 차라리 나한테 얘기를 하지. 그랬다면 내가 사주거나 했을 거 아냐. 이거 큰일인데.”
용천휘가 고개까지 끄덕끄덕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지강백이 반박하지 못하자 오히려 산적들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세상에나. 이 말을 믿다니. 이런 바보 같은 놈들이 있었나.
그러나 똑똑한 놈들보다는 바보 같은 놈들의 주머니가 더 허술한 법. 오늘은 제대로 한 건 건지게 생겼다.
어리둥절하던 얼굴은 곧 의기양양해졌다.
“오냐, 이제 알았으니 말이 잘 되겠군. 이 어르신께 끼친 손해를 대체 어떻게 되갚을 테냐!”
지강백은 최선을 다해 당황을 털어냈다.
일단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그로서도 할 말이 있었다.
“증명해 봐. 이 나무들이 이미 임자가 있었다는 걸.”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강백은 심각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어르신이라고 칭하는 무례한 작자가 배를 쥐고 웃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으하하! 뭐라, 증명? 증명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이 어르신이 그럼 흰밥 자시고 할 일이 없어 예까지 쫓아오셨겠냐!”
지강백이 아는 한 이 나무들은 종남산의 그 자리에 항상 있어 왔다. 그가 종남파에 입문한 지 십칠 년, 이 나무들과 함께 해온 시간도 십칠 년이었다.
그런데 이미 임자가 있었다니.
저 도끼를 든 예의 없는 장한이 십칠 년 전부터 종남산을 통째로 사들인 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는 얘기라 생각했다.
“그쪽이 증명할 수 없다면 이쪽도 작정하고 도둑질을 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무턱대고 이렇게 주장할 수는 없지.”
지강백의 진지한 대꾸에 은도끼 왕대환을 비롯한 산적떼가 또 와르르 웃었다.
“증거? 시방 증거라고 해쌌냐? 오냐, 그래. 증거를 내놓으라 했으니 증거를 내줘야지. 거 제일 바닥에 깔린 나무 있지 않느냐? 그놈을 반으로 쪼개 보면 이 어르신 함자가 곱게 써 있을 것이다. 그놈이 아직 어릴 때 이 어르신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미리 새겨놓은 것이지.”
용천휘가 곁에서 한 마디를 거들었다.
“하, 그거 정말 큰일이네. 그런 증거까지 있으면 빼도 박도 못 하겠군.”
산적 떼가 또다시 웃었다. 아예 바닥에 앉아 땅을 치고 웃는 이도 있었다. 지강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강백이 물었다.
“그게 가능한가?”
“허, 참. 애송이라 그런 것도 모르나 보지. 아니면 이 어르신이 이름도 하나 안 적어놓고 내 나무라 우기시겠냐?”
“그래? 그럼 확인해 보지.”
또다시 들려오는 한 바탕 웃음소리.
아이고, 애쓰는구먼. 이 어르신 물건을 건드린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았나.
애기야, 지금이라도 납작 엎드려 싹싹 비는 게 어떻겠냐. 비는 꼬락서니가 마음에 들면 이 어르신께서 한 번 봐주마.
지강백은 귓등으로 넘어오는 소리들은 무시한 채 통나무를 잡았다.
그야 저렇게 사람을 비아냥거리는 게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일단은 이쪽이 결백하다는 증거를 찾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사과를 받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하필이면 가장 밑에 토대를 잡아놓은 나무에 증거가 있다고 했다.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선 이제껏 쌓아올린 나무들을 도로 내려야 했다.
텅!
지강백이 가장 위의 나무를 들어올렸다.
아주 손쉽게. 그리고 가볍게.
마치 밥 먹기 전에 젓가락을 들어 올리듯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 어, 어라?”
산적들의 웃음이 뚝 멎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