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인연의 시작
“그 무슨 소릴! 지엄한 도가의 경내에 어찌 여인을 들이란 말씀이오!”
양영천이 펄쩍 뛰었다.
당연한 노릇이다. 이제껏 이런 일은 유례가 없었다. 종남에서 여인의 방문을 허하는 것은 오로지 외당의 사원뿐으로, 그것도 일 년에 단 두 차례 춘절과 중추절뿐이었다.
그런 곳에 여인을 데려다 놓겠다?
그것도 본문의 제자들만 거하는 내당에?
당연히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안 될 노릇이었다!
“한 발 양보하겠소이다. 특별히 몸이 아프고 하는 시기니, 약사가 남아의 몸이라면 내당에 거하는 것을 허락하겠소. 여인은 아니 되오!”
양영천이 차라리 내 눈에 흙을 뿌려라, 하는 기세로 두 눈 부릅뜨고 반대하니 필목현과 용천휘도 난처한 기색을 띄울 수밖에 없……
……지는 않았다.
“쿨럭, 쿨럭!”
용천휘가 자지러지게 기침을 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지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오늘따라 창백한 손이 애처롭게도 떨려왔다.
“사부님. 제자는…… 아무 약이나 먹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저희 도련님께서 물에 닿기만 해도 금방 사경을 헤매는 몸이 된 것은 어린 시절 아무 약이나 분별없이 받아먹은 탓이지요.”
필목현이 가세했고, 용천휘는 금방이라도 각혈을 할 듯 한층 더 격하게 기침을 했다.
“예,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답변을 해보시지요, 장문인. 저희 도련님께서 지금 이렇게 사경을 헤매는 까닭은 대체 무언지요? 그야 다 저 사형되시는 분께서 저희 가엾은 도련님을, 인정사정없이 물가로 끌고 가서는 어디 한번 죽어봐라, 이런 잔인무도한 심정으로 콱 처박았기 때문 아닙니까?”
허리밖에 안 차는 얕은 물에 힘 조절을 해서 밀어넣긴 했다.
“세상에나,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입문금을 오만 냥이나 내고 들어온 문파에서? 아, 그야 물론 나머지 잔금 사만구천오백 냥은 아직 내어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말입니다.”
그러니 잔금을 받으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답은 뻔했다.
하지만 아무리 거금이라 해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는 법이다.
“그래도 여인은 들일 수 없소! 조사동의 조사님들이 시퍼렇게 보고 계실 텐데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허허……. 왜 본가에서는 잔금을 보냈단 소식이 아직 없을꼬……. 도련님, 혹시 따로 말씀 들은 바 있으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 쿨럭! 쿨럭, 쿨럭!”
격렬하게 기침을 내뱉던 용천휘가 손을 헛짚었는지 침상 아래로 울컥 몸을 기울였다. 바닥을 구르기 전, 용케도 그를 받아든 것은 이제껏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지강백이었다.
“미안하다.”
지강백이 용천휘에게 말했다.
“내 잘못이니 책임은 내 몫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할 테니 사부님께 억지는 쓰지 마라.”
용천휘가 눈을 끔벅이며 지강백을 쳐다보았다.
“사형이 책임지겠다는 소리야? 어떻게? 내 약이라도 달일 생각인가?”
“뭐든지. 하지만 내 잘못을 핑계로 사문을 어지럽히려고는 하지 마라. 너도 종남의 제자다. 사문의 법도는 따라라.”
“나 참.”
용천휘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이렇게 나오면 내가 마음이 약해지잖아. 사형도 참 약았다니까.”
금방이라도 큰 일이 날 것처럼 터지던 기침이 지금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뭐, 좋습니다. 사형이 저렇게 나오니 별수가 없군요. 약사를 경내에 들이는 문제는 저도 한 발 양보하지요. 내당에 상시 거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양영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대강 일이 수습되어지나 싶었는데, 용천휘가 잊지 않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사형도 할 일을 해야지. 가서 죽 좀 끓여와. 내가 몸이 이래서 밥은 통 못 먹겠네.”
“……알았다.”
지강백이 군말 없이 부엌으로 사라졌다.
아픈 용천휘를 위해, 정성껏 죽을 쑤기 위해.
* * *
“끓여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죽 그릇을 채반에 받쳐 들고 지강백이 돌아왔다.
“식기 전에 먹도록.”
죽 그릇을 침상에 올려준 지강백이 몸을 돌리려는데 용천휘가 부스럭대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냥 가려고?”
“더 필요한 게 있나?”
“죽을 이따위로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당연히 식혀 줘야지. 그건 상식 아냐?”
이런 말에도 화를 낼 수 없는 것은 지은 죄가 너무 무겁고 큰 탓이 아니라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감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었다.
“알았다.”
지강백은 군소리 없이 죽을 수저로 휘젓기 시작했다. 용천휘가 놀리듯 뒷말을 이었다.
“사형이 얌전하니 그것도 수상한데. 죽 그릇 엎는 일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안 먹는 것보단 낫겠지. 먹어서 빨리 낫는 쪽이 내게도 이로울 테고.”
“내가 아픈 게 미안하긴 한가 보지?”
“네가 아픈 게 정말이라고는 믿지 못하겠다. 하지만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은 지킬 작정이다.”
“사형도 의심을 할 줄 알긴 하는군. 그건 의왼데.”
용천휘가 손을 내밀었다.
“수저 줘. 먹을 테니.”
지강백이 수저를 건넸고, 용천휘가 적당히 식은 죽을 제 손으로 느릿느릿 떠먹기 시작했다.
지강백이 한 발치 물러나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떠먹여 달라는 말도 할 줄 알았는데. 너도 의외로군.”
용천휘가 수저를 든 채 피식 웃었다.
“사형도 이제 나한테 익숙해져 가는 모양인데? 그러려고 했지. 처음에는.”
“그런데?”
“사형이 얌전하게 나오니까 재미없어서.”
“네 말대로 맞춰주면 흥미를 잃나?”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난 삐뚤어진 인간이라서.”
용천휘다운 말이었다. 이어지는 지강백의 대답도 딱 지강백다웠다.
“삐뚤어진 걸 알면 바로 잡아.”
“잘못되면 바로 잡는 건 사형 같은 사람한테나 상식인 거고. 나는 아니라서.”
“너는 뭐가 그렇게 다른데?”
“나? 많이 다르지.”
탁.
용천휘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사형은 가진 게 몸뿐이잖아? 그런데 나는 다 가지고 태어났거든.”
“…….”
언제나처럼 용천휘는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몸만 빼고.”
“……뭐?”
“내 몸이 약하다는 말은 들었잖아. 그게 그냥 약한 정도가 아니라 병신이란 소리야.”
용천휘가 제 흰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다시 편 손가락은 유독 마디가 도드라져 보였다. 천생 귀한 집 도련님의 것으로 보이는 수려한 손은 지금 이 순간 용천휘의 자조였다.
“급격한 체온의 변화는 독만큼 치명적이야. 내 몸에.”
“…….”
지강백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용천휘를 다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용천휘는 분명히 물에 빠진 것을 두고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닌 것일까.
“먹는 것도 마찬가지지. 어떤 음식은 독보다 더 해롭거든. 입맛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지.”
그래서 매끼마다 그런 산해진미를 먹어야 한다는 건 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몸이 이러니까 내가 직접 나서서 뭘 하는 것도 어려울 때가 많아. 그래서 사람들을 시키지. 내 몸에 탈이 나는 것보다 나으니까. 이건 부자라서 한 가지 다행인 점이라고 해야겠군.”
청소 한 번 해본 적이 없다는 말에는 그런 이유가 숨어 있었던 걸까.
“뭐, 그래서 삐뚤어진 척 살아야 한다는 거지. 그런 걸 일일이 몸이 병신이라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면 내가 너무 불쌍해 보일 거 아냐.”
용천휘가 손을 내리고 씨익 웃었다. 그가 늘 짓는 웃음 그대로였는데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달라보였다.
용천휘가 어떤 인간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날 동정하지 마, 사형. 차라리 성격 이상한 놈이라는 말이 훨씬 더 듣기 좋으니까.”
“……그래, 알았다.”
가신이라는 필목현의 그 이상한 화법도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말끝마다 성질이 참 뭣 같으신 우리 도련님께서는, 이라고 꼬박꼬박 덧붙이는 이유가. 그것은 그가 그만큼 용천휘를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쉬어라.”
용천휘가 턱 끝으로 죽 그릇을 가리켰다.
“이건 도로 가져가. 먹으려고 애는 썼는데 입맛에 너무 안 맞아. 영 못 먹겠어.”
지강백은 그새 차갑게 식어버린 죽 그릇을 바라보았다.
몇 수저는 들어 올린 것을 보면 오로지 저를 괴롭히기 위해서 만들어오라 떼를 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강백은 이렇게 말했다.
“끓여다 준 건 이쪽이니 들고 나오는 것 정도는 네가 해라. 대신 당장 하라고는 하지 않겠다. 몸이 낫거든 그때 해.”
지강백은 죽 그릇을 놔둔 채 방을 나섰다.
용천휘는 같은 자리에 고집스럽게 남아 있는 그릇을 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우리 사형은 착하기도 하지. 해달라는 건 결국 다 해준다니까.”
단지 죽 얘기가 아니었다.
동정하지 말라는 말대로 지강백이 용천휘를 새삼스럽게 특별 취급하지 않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아아, 이러면 곤란한데.”
그때 필목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나지 않았다. 분명 그는 지강백이 닫았던 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지만, 그 과정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것이 무공이라면 그는 지강백이 짐작도 못할 정도로 절정의 고수이리라.
“아셨으면 그렇게 놀려먹지 좀 마십시오. 이제는 저도 그자가 가여워지려는 참입니다.”
“안 속아. 양심 없는 건 너나 나나 똑같은 종자들이지.”
“원 참. 사람의 진심을 무시하지 마시지요. 적어도 소야보다는 제가 더 진실 어린 인간입니다. 이렇게 될지 뻔히 다 알면서도 물에 빠지신 양반이 무슨 소립니까.”
“하하.”
용천휘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기침이 터지는 바람에 한동안 쿨럭대는 소리가 울렸다.
아픈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단지 제 몸이 아픈 것마저도 이용해 먹을 정도로 용천휘가 삐뚤어진 인간일 뿐이었다.
“아아, 진짜 재미있었지. 아플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 같아.”
필목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 마음에 드신 겝니까? 좀 위험하지 않습니까?”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너무 정을 붙이시는 게요. 소야께서 곤란하다 말씀하신 게 그런 뜻 아닙니까. 어차피 종남파는 한 번 이용하고 말 패입니다. 때가 되면 버려야 할 텐데 그땐 어쩌시려고요.”
“네 멋대로 단정 짓지 마. 버리고 버리지 않고는 내가 결정해.”
“이미 계획해둔 바가 있지 않습니까. 단순히 소야께서 생각이 달라지셨다고 하면 그 계획들은 대체……,”
“토 달지 마.”
용천휘가 필목현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희고 맑은 피부, 수려한 이목구비, 꽃잎처럼 붉은 입술.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이 달랐다.
검은색이어야 할 홍채가 진득한 붉은 빛을 뿜고 있었다.
“나는 네가 볼 수 없는 걸 볼 수 있다는 걸 잊었나?”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 용천휘의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필목현이 한 발 뒤로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소야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래.”
고개를 돌리자 붉은 빛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표정도 그랬다. 용천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히죽 웃으며 다른 것을 물었다.
“약은 준비됐나?”
“출발했다 기별이 왔습니다. 곧 당도할 겁니다.”
“반가운 소리로군. 재미있을 거야.”
필목현은 뭔가를 얘기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용천휘가 먼저 묻지 않은 이상 다른 얘기는 사족이었다.
“하지만 소야, 이것은 알아두십시오. 약의 존재는 아는 자가 적을수록 더 가치를 지니는 법입니다.”
“약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까지 간섭할 생각은 마. 그건 오로지 내 몫이니까.”
“예, 소야.”
이어서 용천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대되는데. 우리 사형은 과연 얼마만큼의 이용가치가 있을지.”
약이 도착한 것은 다음 날이었다.
약을 가지고 온 것은 자그마한 얼굴이 겨울 눈꽃처럼 새하얀 여인이었다.
* * *
“채희유라고 합니다. 대천 용 씨 가문에 고용된 약사입니다.”
여인은 눈을 빚어 만든 사람 같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길고 가는 목이었다.
아름답지만 위태로운. 아니, 위태롭기에 아름다운.
보는 사람은 문득 눈이 시렸다.
귓가로 검은 머리칼이 몇 올 흘러 있었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되었다.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몇 올의 머리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인은 눈을 곱게 내리뜨고 있었다.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귀보다 아름다운 것이 눈이었고, 머리칼보다 도드라지는 것은 촘촘한 속눈썹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여인을 스쳐 이쪽으로 흘러왔다. 그리하여 또다시 깨닫는다.
꽃이라서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고. 아름다워서 그 무엇조차 향기가 되는 것이라고.
그러나.
“격조했습니다, 도련님. 그간 뵐 일이 없어 몸도 마음도 편했습니다만 이리 다시 찾으시다니요. 유감입니다.”
생긴 것이 꽃이기에 사람도 꽃줄기처럼 여릴 것이라는 생각은 그저 착각이었다.
채희유는 다부진 말투로, 안부보다 힐난이 더 많은 인사를 건넸다.
“게다가 이번에는 하다못해 이런 산골짜기로 부르시다니요. 대체 몸 관리를 어찌 하신 겁니까?”
여인은 절대 경내에 들일 수 없다는 사문의 지엄한 법도에 따라 그들은 대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용천휘의 곁에서 지강백이 종남파의 사람으로서 객을 맞이했다. 양영천은 저 뒤에서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이쪽을 감시 중이었다. 혹시 채희유의 발 그림자라도 문턱을 넘어 들어올까 걱정하면서.
용천휘가 설렁설렁 흔들던 부채 끝을 지강백에게 돌렸다.
“아아, 그런 말은 이쪽에 하라고. 날 물에 빠트린 사람이니까.”
“그렇습니까?”
채희유가 지강백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흑백이 또렷한 눈이 너무 선명해 지강백은 순간 사람이 아닌 그림을 보는 줄 알았다.
아주 새하얀 종이에, 아주 까만 먹을 고이고이 갈아 온갖 정성을 들여 찍어놓은 단 하나의 점을.
“저를 귀찮게 만든 장본인이시군요.”
그림이 말을 거는 것처럼 신비한 느낌이었다. 그러느라 대답이 잠시 느려졌다.
“알고 그런 게 아니라……,”
“물론 몰랐으니 그러셨겠지요. 알았거나 몰랐거나 제가 이곳까지 와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테니 변명이나 사과는 필요 없습니다.”
“그게…… 죄송합니다.”
“제게 사과하실 필요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두 번 말하게 하는 수고도 끼치시는군요.”
“그…….”
지강백이 무안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이마가 여물어 사내라 부를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처음으로 여인을 마주하는 자리였다. 그런 여인이 하필이면 채희유였다는 게 사내로서 행운이라면 행운이었고, 반대로 불운이라면 또 불운이었다.
지강백은 지금, 아무리 살펴도 도무지 생로를 찾을 수 없는 복잡미묘한 진법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으니까.
“기왕 온 걸음이니 본분에는 충실하겠습니다. 일단 도련님의 상세를 살펴야 하니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채희유가 묻자 용천휘가 하나도 곤란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아아, 그게 좀 곤란해서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요.”
“넌 여기 못 들어온다는데.”
채희유가 눈썹을 깜박였다.
“이 먼 길을 온 사람에게 그 무슨 행패랍니까. 도련님의 병세가 단번에 나을 것도 아니고, 마땅히 제가 곁에 거하며 상세를 돌보아야 하는 것을요.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면 제 일을 어찌 하라는 것입니까.”
용천휘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럴 거라고 얘기는 했어. 안 된다는 걸 어떻게 해.”
“대체 연유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어느샌가 득달같이 달려온 양영천이 했다.
“어딜 감히! 더 이상은 아니 되느니.”
채희유의 눈이 양영천을 향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먹을 찍은 듯 또렷한 검은 눈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저 멀리서는 눈을 부릅뜨고 있던 양영천이 주춤, 노성을 한 겹 낮췄다.
“아니, 그러니까…… 여자는 경내에 들어올 수 없다. 흠흠.”
“그렇습니까? 이유는요?”
“본문의 법도가 그런 것을. 도를 숭앙하는 청경한 곳이다.”
“청경한 것으로 치자면 아무렴 사내들이 여인보다 더 하겠습니까. 참 기도 안 차는 말이로군요.”
“뭐…… 뭣이?”
양영천이 당황한 나머지 침을 튀겼다. 곧장 날아간 침은 채희유가 어깨에 두른 여행용 피풍의에 묻었다.
채희유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것 보십시오.”
그녀가 피풍의를 벗어 발치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진 곳곳에 떨어트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의도는 명확했다.
더러우니 더는 못 입겠다, 는.
“저, 저……!”
양영천이 안색이 노랗게 떠서 삿대질을 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지강백이 말려야 했을 정도였다.
“사부님. 고정하십시오.”
채희유는 눈 한 번 깜박하는 일 없이 양영천을 향해 말했다.
“여인의 몸이라 안 된다 하셨습니까? 허나 저는 여인이기 전에 약사이옵고, 이곳에 온 것은 약사라는 제 본분을 다하고자 함이니 저를 여인으로 여길 일은 없을 줄 압니다.”
“아, 눈이 먼 것도 아니고! 멀쩡한 눈으로 어찌 여자를 여자라 아니 할까!”
“그럼 여인처럼 아니 보이면 되겠군요. 간단하겠습니다.”
채희유가 소매 안을 뒤져 작은 단도를 꺼내들었다. 다른 손으로 곱게 땋아 옆으로 넘긴 머리채를 쥐더니 망설임 하나 없이 칼날을 들이댔다.
“하지 마십시오!”
그녀를 말린 사람은 지강백이었다.
사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앞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발이 한 달음에 달렸고, 손이 단도를 쥐고 있는 채희유의 가는 손목을 움켜쥐었다.
채희유도 놀랐고, 양영천도 당황했다. 용천휘도 표정을 바꾸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놀란 것은 지강백 본인일 것이다.
탱그랑.
채희유가 단도를 떨어트렸다. 그 소리에 지강백이 정신을 차렸다.
“아……. 실례했습니다. 말리려는 생각이 앞서는 통에…….”
“놓아주십시오.”
채희유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좀 전에 비하면 목소리가 한층 작아져 있었다.
지강백이 서둘러 그녀를 놓아주려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도리어 손에 힘을 주었다.
채희유가 그 까만 눈으로 지강백을 올려다보았다.
“왜 놓지 않으십니까?”
“놓아드리겠습니다. 허나 그 전에 약속하십시오. 머리칼은 그대로 놔두겠다고.”
“저는 용 도련님의 약사라는 제 본분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그걸 무슨 명분으로 막으시겠습니까?”
“종남은 여인을 힘으로 핍박하는 곳이 아닙니다. 다만 이곳에도 지켜야 할 법도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양해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종남의 고리타분한 도사분들이시겠지요. 손을 놓으십시오.”
지강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놓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지강백을 제외한 다른 세 사람들이 제각각 다양한 표정들을 지었다. 채희유는 화를 냈고, 양영천은 몹시 불안한 얼굴이 되었으며 용천휘는 새로운 장난감을 찾았다는 표정이었다.
“원해서 자르는 바는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가만 두고 보지는 않겠습니다.”
채희유가 지강백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무공도 익히지 않은 여인이 힘으로만 그를 어쩔 수는 없었다.
채희유가 노기가 서늘하게 더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저를 답이 없는 길로 내모시고 답을 찾으라 하시는군요. 대체 어쩌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지강백도 몰랐다. 답이 있어 그녀를 말린 것이 아니었다. 말리고 나서 보니 답이 아직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답을 찾겠습니다. 종남의 법도를 지키며 채 소저의 명분도 해치지 않을 답을.”
어떤 경우에라도 답을 찾겠다 하는 것. 답이 없다 하여 돌아가거나 건너뛰려 하지 않는 것.
지강백이 어떤 인물인지 이 말에 모두 녹아 있었다.
채희유가 입술 끝을 살짝 말아 올렸다.
“도련님께서 왜 사형 분을 새로운 취미로 두셨는지 알 것도 같군요. 참 다른 분이십니다.”
그 말에 용천휘는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웃음만 지었다.
채희유가 여전히 제 손목을 굳건히 움켜쥐고 있는 지강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 하시니 한번 믿어 보겠습니다. 답을 기다리지요.”
믿겠다는 여인의 말이 귓가에 파문처럼 번져왔다.
지강백은 채희유의 손목을 놓아주고, 정중히 포권으로 답했다.
“채 소저의 믿음이 헛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어쩐지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것도 같았다.
지강백은 그게 저를 믿는다는 게 고마워서인지, 혹은 그 말을 한 게 채희유라서 그런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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