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4화 (4/346)

제4화 미친놈의 은밀한 취미 생활

날이 밝았다.

지강백은 늘 하던 대로 아침 일과를 시작했다.

눈 뜨자마자 운기조식. 가볍게 몸이 덥혀지면 계곡으로 달려가 물을 긷는다. 계곡까지 가는 길에는 북두천강보를 밟았다.

물통을 한 손에 다섯 개씩, 총 열 개를 드는데 손 위에 차곡차곡 쌓아 검지로만 균형을 잡는 이유는 천강지의 수련을 위해서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은하유영비를 밟았다.

은하유영비는 단순한 보법이 아닌, 몸 전체를 응용하는 경신술이었다.

물통을 열 개나 들고 경신술을 펼치면 당연히 극도의 집중력과 세밀한 균형감각이 필요했다.

이 모든 동작은 내력이 없이 이루어졌다.

종남의 무학이 더디고 고된 이유.

초식의 흐름이 지난한 까닭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동작이 극도로 단련된 신체와 웅혼한 내력의 조화를 밑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도가적 내공심법과 실전무학이 만나 일궈온 종남 무학의 특징이었다.

“후우.”

계속에서 돌아온 지강백은 물통을 바닥에 차곡차곡 올린 다음 속눈썹에 매달린 땀방울을 닦았다.

내력을 전혀 운용하지 않고 오로지 근력으로만 움직이려니 땀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물독을 가득 채운 지강백은 쌀을 씻고 솥에 밥을 올렸다. 하루 세 끼 먹을 밥을 한꺼번에 하는 통에 양이 제법 됐다.

익숙한 손길로 밥을 안친 지강백은 빗자루를 들었다. 북두천강보를 이용해 그 넓은 연무장을 부리나케 돌았다. 청소는 지법과 인법을 적절히 섞어 가능한 넓은 곳을 한꺼번에 쓸고 닦도록 했다.

매사가 수련이었다.

늘 부족하다 모자란다 말하는 사부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무공을 증진시키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

본당에 이어 내원까지 모두 비질을 마쳤다. 지강백은 상쾌한 기분으로 식당을 향했다.

그러나.

“사부님……?”

식당 앞에 온 지강백이 뻣뻣하게 굳었다.

식당 안은 평소답지 않게 많은 사람으로 복작이고 있었다. 상 앞에 앉은 사람은 양영천과 용천휘 단둘뿐이었지만, 그들에게 음식을 나르는 일꾼들은 제법 수가 되었다.

“어, 그래. 이제 오는 게냐.”

상 위는 호화찬란했다.

지강백이 이제껏 보도 듣도 못했던 각종 요리가, 그것도 모두 고기 위주로, 한 가득 차려져 있었다.

더 기가 막혔던 건 아직 상이 다 차려지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일꾼들은 여전히 요리를 나르는 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찌 되긴. 네 사제가 아침상 좀 차렸느니라.”

그러면서 양영천은 크흠, 하고 머쓱한 헛기침을 했다.

매일 따듯한 밥 차려 올리던 제자에게 어찌 미안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간만의 고기 냄새에 콧구멍이 먼저 벌름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머리에 앉아서 젓가락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막 고기 한 점 집어먹으려던 찰나에 제자가 도착했다. 참 유감이었다.

“제자도 아침밥을 지었습니다만.”

“…….”

차마 대놓고 미안하다, 시장했다. 그간 고기반찬 너무 먹고 싶었다. 따위의 말을 할 수 없었던 양영천은 지강백의 억울한 눈초리를 외면하기로 마음먹었다.

“어흠흠. 어흠. 사부님께서 진지 드시는데 이 무슨 버르장머리냐. 거기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일단 상에 앉던가 해라.”

그때였다.

“아아, 설마 사형도 같이 먹겠다는 건가?”

용천휘가 젓가락을 탁탁 두들기며 말했다.

음식 휘적대던 젓가락을 어디 감히 사부님 앞에서 두들기고 자빠졌느냐 엄하게 말해줘야 할 시점이었지만 아무도 그런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깟 침상 하나 양보 안 해주던 사형이, 밥은 또 이렇게 얻어먹으려고 하네. 별로 마음에는 안 들지만 어쩌겠어. 와서 들어.”

“…….”

졸지에 지강백은 대단히 염치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돈 써서 사람을 괴롭히는 게 취미라더니, 그 취미 생활 참 열심히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입 안이 써졌다. 입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생각 없다. 사부님, 진지 맛있게 드십시오.”

지강백이 휙 몸을 돌려 식당을 나섰다.

* * *

쾅, 쾅!

오늘따라 연무장에서는 거친 소리가 울렸다.

혈 자리를 붉은 점으로 표시한 목인형을 놓고 홍엽수를 연마 중인 지강백의 손에서 나는 소리였다.

평소라면 소리 없이 혈 자리만 스쳐갔을 손이, 오늘은 유난히도 거칠게 목 인형을 두들겨 댔다.

“…….”

그러다 갑자기 소리가 뚝 멎었다. 지강백이 동작을 잠시 멈춘 탓이었다.

그의 표정이 사나워지는 것과 동시에,

“어이, 사형.”

용천휘가 어슬렁대는 걸음으로 연무장에 나타났다.

쾅!

잠깐 멈추었던 홍엽수가 이어지며 목 인형의 가슴께에 주먹만 한 구멍이 퀭 뚫려 버렸다.

“저런.”

용천휘가 놀란 듯 어깨를 슬쩍 움츠렸다. 그러나 느릿한 표정은 별로 놀란 태가 드러나지 않았다.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는 것 같네……?”

“후우.”

지강백이 거친 한숨을 내뱉었다.

이 도련님이 너무 눈치가 없어서 이딴 소리를 지껄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히 둔한 척하면서 저를 놀리려는 수작일 것이다.

“내게 볼일 있나?”

쾅!

지강백은 내친 김에 목인형의 배도 뚫어버렸다.

“아아, 사형이 아침을 굶은 것 같아서. 배 안 고프냐고 물어보려고.”

퍽!

이번에는 수도로 목을 가격했다. 목인형의 머리가 맥없이 부러져 연무장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지강백은 목인형의 머리통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묻지 마라.”

“저런. 나는 묻고 싶은데. 사형을 걱정하는 사제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줄래?”

“개소리.”

지강백이 다리를 들어 목인형의 머리통을 밟았다. 삼 할의 내력을 개방해 다리에 싣자 그 머리통은 소리도 없이 바스러졌다.

“그건 이 몸한테 하는 욕인가? 말버릇하곤.”

“말버릇은 네놈이 더 더럽지.”

지강백이 비로소 눈을 돌려 용천휘를 마주했다.

형편없이 망가진 목인형을 통해서 깨달았다. 그를 어쩌고 싶은지를.

지강백은 이 소용도 없고 의미도 없는 싸움이 불편했다.

“그래, 인정하지. 남을 괴롭히는 데는 네가 나보다 더 낫다는 것을. 나는 네놈 상대가 안 돼.”

용천휘가 혀끝으로 입술을 스윽 쓸었다.

“뭐야. 그런 말은 너무 이르잖아. 나는 이제 겨우 시작인데?”

“뭐든 네 멋대로 해라. 아침마다 밥을 짓던 말던. 내 방이 더 나으면 내 방을 써.”

용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으음. 벌써부터 그러지 말라니까. 나는 사형을 좀 더 괴롭…….”

“대신 내 눈에 띄지 마라. 너와 쓸데없이 말을 섞는 시간은 내게 몹시 귀한 것이다. 이렇게 낭비할 게 아니야.”

지강백은 순간의 울화를 다스리지 못해 목인형을 망쳐버린 사실이 후회스러웠다. 목인형을 다시 마련하려면 나무를 베어와 적어도 한 시진은 다듬어야 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무공 수련에 써야 하는 귀한 시간을 그렇게나 낭비해 버리다니.

“나는 너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다. 너 역시 그렇게 해라. 그게 피차 편할 것 같으니.”

지강백은 그 말을 끝으로 용천휘에게 느꼈던 사소한 반감들을 깨끗이 털어냈다.

용천휘가 무림인이 되고 싶어 종남파를 이용하는 것처럼, 그 역시 필요한 만큼만 이 가짜 사제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그저 오만 냥이라는 거금일 뿐이었고, 사부의 진수성찬 아침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용천휘가 짜증스럽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이봐, 사형. 피차 편하다는 것 대체 누구 기준에서…….”

그러나 그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지강백은 망가진 목인형을 우두둑 뽑아 들더니 옆구리에 끼고 저벅저벅 걸어가 가버렸다.

“이봐!”

용천휘가 등 뒤에서 불렀으나 지강백은 반응하지 않았다.

피차 없는 사람으로 남자는 말을 벌써부터 단호하게 지키는 듯 보였다.

“이봐, 너! 거기 속 좁은 가난뱅이! 이 몸이 말을 하면 들어야 될 것 아냐!”

대답을 대신해 들려오는 것은 빠른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거기 서라고 했잖아!”

그마저도 연무장을 벗어나자 아예 경신술을 발휘해 용천휘의 눈앞에서 훌쩍 사라져 버렸다.

“……제기랄.”

용천휘가 욕설을 내뱉었다.

“내가 너무 심했나. 아니, 내가 뭘 얼마나 했다고.”

불쑥, 대답이 들려왔다.

“너무 심하셨던 게 맞습니다, 소야(少爷: 도련님).”

어느샌가 나타난 필목현이었다.

그가 올 줄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용천휘에게는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렇게 많이 놀려먹지도 않았어. 고작해야 하루 지났을 뿐이라고.”

“무척 영리한 자로군요.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인데 소야를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깨닫다니.”

필목현이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천휘가 힐긋 그를 곁눈질했다. 평소에는 느슨하던 눈매가 지금은 잘 갈린 칼 같았다.

“저렇게 나오면 친해지기 어렵잖아.”

“말은 똑바로 하시지요, 소야. 친해지기 어려운 게 아니라 괴롭히기 어려운 거지요. 소야의 유일무이한 취미 생활이.”

“잘도 기어오르는군. 그쯤 해둬. 난 지금 정말로 마음 아파하는 중이니까. 저런 인물이라면 정면승부를 해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심지가 강한 만큼 영리한 자라니까요.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것을 깨달은 거지요.”

용천휘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벽운천강권에 이어 홍엽수까지. 둘 다 거의 완성이 되었어. 내력을 응용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는 것을 보면 대천강검도 완성 단계야. 태을기공은 칠 성 이상. 곧 팔 성을 달성할 테고.”

“호오. 벌써 그렇습니까?”

“굉장하지 않아? 양영천 같은 이류 아래서 저만한 인물이 나왔다는 게?”

필목천이 곤란하다는 듯 양 손을 내저었다.

“왜 그러십니까. 양영천은 무공이야 건질 게 없지만 눈썰미는 제법 매서운 자입니다. 저런 기재를 찾아 데려온 것부터가 그렇지 않습니까. 듣기로는 십 년이 걸렸다더군요.”

“그마저도 없었으면 종남은 진작 강호에서 사라졌겠지.”

용천휘가 미묘하게 입술 끝을 비틀었다.

“하긴. 지금도 사라진 것과 진배없지만.”

“저자가 되살려 놓겠지요.”

“그때까지 강호가 살아남는다면.”

입술의 비틀림은 곧 얼굴 전체로 번졌다.

무언가를 비웃듯, 혹은 무언가를 증오하듯.

용천휘의 표정을 읽은 필목천이 턱을 절레절레 저었다.

“소야. 혹 저자를 염두에 두시는 겁니까?”

“저만하면 쓸모가 있을 법도 하잖아.”

필목현이 잘라 말했다.

“어차피 중원인입니다.”

“중원인이니까 쓸모가 있는 거지.”

“원 참. 그만 두십시오. 쓸모로 따지자면 저자는 지월의 발끝도 못 따라갑니다.”

“그렇게 생각해?”

지월.

현 소림의 방장이자 당대 최고의 백련신권을 일궈냈다고 알려진 절정의 고수였다. 순위를 매겨 떠들기 좋아하는 강호의 호사가 중 하나는 그를 이번 천하무도회의 제일인으로 꼽기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천하무도회의 제일인이라는 것은, 곧 천하제일인이라 불러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런 소림의 방장을, 무공 한 줄 할 줄 모른다던 도련님이 무척 잘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예. 될 성싶은 떡잎이라지만 아직 애송이니까요. 반면 지월은 벌써 정점을 찍은 몸입니다. 애송이가 지월만 한 경지에 오르려면 최소한 이십 년은 더 있어야 할 겁니다.”

“뭐, 이론으로만 따지면 그렇겠지.”

필목현의 눈썹이 재미나게 구부러졌다.

“이론이 아닌 쪽으로는 다른 의견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글쎄.”

용천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한번 확인해 보자고. 약을 준비해.”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뭘 어쩌시게요?”

필목현이 펄쩍 뛰었다.

“그리 함부로 쓸 약이 아니라는 건 소야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고작 저런 자를 확인해 보는데 쓰신다고요?”

“고작 저런 자가 아닐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원 참. 대체 그 말을 어찌 믿으라는 겝니까. 차라리 그냥 괴롭히고 싶어서라고 하십시오. 모처럼 괴롭히기 좋은 인물을 찾아서 마냥 즐거우시다고요.”

탁.

용천휘가 부채를 소리 나게 접었다. 딱 부러질 것처럼 진지한 얼굴이었다.

“지금이 한가하게 취미생활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건 알아. 시간이 고작 십 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도. 그 십 개월 안에 우리의 명운이, 그리고 중원의 명줄이 걸려 있다는 것도. 아니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필목현도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가 한 팔을 이마에 대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뜻대로.”

그날, 섬서에서는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필목현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은밀한 전령이었다.

비둘기가 찾아간 이는 하얀 새를 닮은 한 여인이었다.

* * *

지강백은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앞으로는 없는 사람으로 여기겠다는 말대로, 그는 용천휘의 존재를 철저히 외면했다.

말을 걸어도 무시했고 욕을 해도 듣지 않았다. 시비를 걸어오면 신법을 발휘해서 훌쩍 지나쳐 버렸다.

물론 용천휘도 가만히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진 않았다.

용천휘는 아침상에 이어 그보다 더 거한 점심상을 차리게 했다. 하지만 지강백은 그 시간에 계곡에서 묵은 빨래를 했다.

이어서 용천휘는 점심 때 사용한 그 엄청난 그릇들을 부엌에 고스란히 쌓아두게 했다. 지강백은 불평 한 마디 없이 그것들을 갖다 버렸다.

그러자 용천휘는 빨래를 널어놓은 장대를 엎는 것으로 복수했다. 지강백은 묵묵히 다시 빨래를 해왔다.

물론 그가 빨래를 하는 계곡 쪽에서 무언가 괴성이 들려오는 것 같긴 했지만, 어쨌거나 용천휘에게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용천휘는 기회를 틈타 두 번째 빨래마저도 장대를 넘어트리고자 했다. 지강백도 나름 대비를 해두었다. 장대를 아주 깊숙이 땅에 박아두었던 것이다.

용천휘는 코웃음을 치며 빨랫줄을 끊어 버렸다. 사형은 아직 멀었어, 라는 말과 함께.

지강백은 세 번째로 빨래를 해왔다. 때마침 종남산 깊은 곳까지 나무를 하러 왔던 산사람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줄 알고 서둘러 산을 내려가야 했다.

용천휘는 기꺼운 마음으로 지강백이 빨랫감과 함께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지강백도 멍청하진 않았다. 이번에는 아예 빨래를 가장 높은 나무에 줄을 쳐 널어두었다. 용천휘가 절대 손댈 수 없는 없는 높이였다.

용천휘는 저 높은 곳에서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를 보며 이를 아드득 갈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침내 지강백이 이긴 것이다.

사제의 괴롭힘이 없는 일상은 다시 평온해졌다. 규칙적이고, 촌음의 낭비도 없었으며 그런고로 심신이 만족스러웠다.

간만에 정신을 온통 집중해 태을분광검의 초식을 연마한 지강백은 운기 조식으로 오전 수련을 마무리 했다.

아니, 막 하려던 참이었다.

“안녕, 사형. 좋은 아침이네?”

“…….”

과연 좋은 아침일까.

객관적으로 본다면 나쁜 아침은 아닐 것이다.

깊은 산사의 공기는 청량했고 바람은 고요했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키면 몸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꿈틀대는 대자연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지강백은 아침 수련을 마친 뒤 운기조식을 하는 중이었다. 용천휘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의 코앞에서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 무시하는 거야? 그러지 말라니까. 요 며칠 사형이 그러는 바람에 난 정말로 상처 받았다고. 그러니까 이 아침에 연무장까지 쫓아왔지.”

“…….”

상처는 이쪽이 받게 생겼다.

지금 용천휘가 손을 뻗어 우연찮게라도 주요 혈을 건드린다면.

단순히 마음이 조금 아프고 말 그런 상처가 아니라 기가 역류해 온몸의 혈이 꼬이고 내장이 바스라지는 끝에 절명하게 되는, 그런 어마어마한 상처가.

“어이, 사형.”

용천휘가 정말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닿을 듯 말 듯, 놀리는 듯 아닌 듯 지강백의 미간을 향해 다가왔다.

“정말 이러기야?”

지강백은 외치고 싶었다.

너야말로 이러기냐고.

“사혀엉.”

용천휘의 손가락이 그저 투정을 부리려는 것처럼, 기가 막힌 우연을 가장해 가장 건드려서는 안 될 사점(死點)을 쿡 누르려는 그 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아슬아슬하게 일주천을 마친 지강백이 용천휘의 손목을 낚아챘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절묘한 시차였다.

용천휘가 눈매를 느슨히 늘였다. 입술이 벌어지며 헤헤, 하는 물색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와. 이제 아는 척하네. 좋은 아침이야, 사형.”

감상을 덧붙이자면, 너무 잘 어울려서 짜증이 날 것만 같은 순박한 웃음이었다.

방금 전 우연을 빌려 사람을 죽일 뻔한 사람치고는.

“무공 수련할 때는 아는 척을 하네. 사형이 계속 날 무시하면 앞으로는 꼭 수련 중에 찾아와야겠어.”

“…….”

과연 우연인 걸까.

아니, 우연이 아니라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황색 가사를 놓고도 소림을 모른다는 무림일자무식 사제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지금 심심해. 놀아줘, 사형.”

“…….”

용천휘는 고작 심심하다고 사제 간의 골육상쟁을 저지를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난 할 일이 있다.”

지강백은 내일부터 수련 장소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련을 할 때마다 사부의 지도가 필요했던 시기는 진작 지났으니, 장소야 어디든 상관없었다.

이참에 벽곡단이라도 싸들고 어디 동굴에라도 처박혀야겠다. 끼니마다 사부님 뜨신 진지 걱정할 일도 없으니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그 할 일에는 나와 놀아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잖아.”

아니, 내일부터가 아니라 지금 당장.

가뜩이나 날카로운 눈매가 아예 범처럼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용천휘가 히죽 웃었다.

“잊었어? 사부님께서 이 사제를 잘 보살펴 주라고 했잖아. 사부님의 지엄하신 말씀을 어기면 안 되지.”

“…….”

으득.

지강백의 입에서 작게 이를 무는 소리가 들려왔다.

턱이 좀 빠듯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한 가지 깨달음이 왔다.

이 영악하고 뻔뻔한 사제와는 항상 이런 식일 것이다. 피한다고 될 게 아니었다.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좋아. 놀아주지.”

“오, 정말이야?”

용천휘가 반색을 했다.

“단, 내 사정에 맞춰. 나는 너처럼 한가한 몸이 아니다.”

“그러지 뭐.”

용천휘는 순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강백은 연무장 바닥에 벗어서 던져놓았던 땀투성이 무복을 다시 몸에 걸쳤다.

“따라 와.”

“어딜 가는데? 근사한 데라도 가나? 자주 가는 데 있어?”

용천휘는 섬서에서는 어디어디의 주루가 요새 제일 물이 좋지, 라는 답을 기대하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강백이 그 말뜻을 알아차릴 리 만무했다.

“꽤 괜찮지.”

“우와, 정말?”

“가자.”

지강백이 몸을 돌렸다.

그가 향하는 곳은 며칠 전 이를 갈며 세 번이나 빨래를 해야 했던 그 계곡이었다.

* * *

“분명히 좋은 데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계곡을 힐긋 둘러본 용천휘의 감상이었다.

쓸데없이 잘생긴 미간에 주름이 한 올 생겨 있었다. 그가 난데없이 발을 불쑥 들어올렸다.

“눈이 달렸으면 좀 보지 그래? 여기 오느라 내 혁련화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이게 얼마짜린지 감은 오나?”

용천휘의 혁련화는 가볍고 얇은 가죽으로 만들어 옥으로 장식을 덧댄 사치품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험한 산을 탈 때 신을 만한 신발도 아니었다.

“돈 많다며. 하나 더 사든가.”

“쯧. 물건 아낄 줄 모르는 건 가난뱅이들이 더 하다더니. 그렇게 살면 평생 가난할 거야, 사형. 부자가 해주는 충고니 새겨듣도록.”

지강백은 이제 그런 헛소리에 일일이 열 받지 않을 정도로 단련이 되었다.

“자맥질은 할 줄 아나?”

지강백이 묻자 용천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삐뚜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자맥질을 할 줄 알아야 하지? 배를 타면 되잖아.”

“잘됐군. 내가 가르쳐 주겠다. 몹시 재미있을 거다.”

“뭐?”

용천휘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설마 놀아준다는 게 이거였어? 뭘 해?”

“놀아달라며. 자맥질은 재미있다니까.”

“사양하겠어. 그따위가 무슨 재미……,”

“괜찮아. 처음에 겁을 먹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야.”

저벅.

지강백이 용천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용천휘가 주춤대며 뒷걸음질을 쳤다.

“오지 마! 안 한다니까!”

“빠져 죽을 건 염려 안 해도 된다. 그렇게까지 깊진 않아.”

“깊고 나발이고 지금 이 몸에게 무슨……! 으헉!”

풍덩!

용천휘가 계곡 물로 곧장 떨어졌다.

경신술을 발휘해 재빠르게 다가간 지강백이, 아차 할 새도 없이 그를 집어던져 버린 것이다.

물론 죽일 작정은 아니었기에 무난히 힘 조절을 했다. 조금도 다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종남산.

섬서성에서 제일 산세 높고 험하기로 이름난 곳.

그 까마득한 산골짜기를 흐르는 계곡물이었으니, 뜨거운 한 여름에도 밑바닥 바위에는 얼음이 낄 정도로 물이 찬 것도 당연했다.

빠져 죽지 않아도 이 차가운 물에는 고생을 좀 해야 할 것이다.

“으……으악!”

지강백은 물 한 방울 튀지 않는 거리에서 용천휘를 지켜보았다.

“너무 겁먹지 마, 사제. 처음에는 다들 그러고 배우니까.”

본심을 말하자면, 허리까지밖에 안차는 얕은 물에서 허우적대는 사제를 구경하는 것이 재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몸에 힘을 빼고 천천히 숨을 쉬도록. 그럼 자연히 몸이 뜬다. 처음부터 팔다리를 너무 쓰면 뜨기 힘들어.”

“사, 살……!”

계곡 물 위로 용천휘의 머리가 불쑥 치솟았다 다시 가라앉았다.

지강백은 침착하게 서서 용천휘를 언제 건져 올려야 할지를 계산했다.

몸이 약하다고 했으니 너무 오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교훈을 얻을 만큼은 충분히 있어야 했다.

“조금 더 애를 써 봐. 정 안되면 건져줄 테니.”

“사……!”

꾸르르륵.

마지막 외침을 끝으로 용천휘의 머리가 물에 잠겼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지강백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짧은 시간이었다.

“나를 놀리는 건가?”

확신할 수 없었다. 저렇게 얕은 물에 빠져죽을 사람은 당연히 없겠지만,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빌어먹을.”

작게 욕설을 뱉어낸 지강백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용천휘는 정말로 물에 빠져 있었다. 지강백은 용천휘의 허리를 잡아 물속에서 일어서게 만들었다.

“바보 같은 놈. 네 허리밖에 안 차는 곳이다. 이런 물에도 빠질 수 있나?”

“이……,”

지강백의 어깨에 매달리다시피 일어선 용천휘가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갑자기 찬 물에 빠진 탓인지 워낙에도 흰 피부가 창백해져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입술만 색이 도드라졌다.

장난이 너무 과했던 모양이었다. 지강백은 한순간의 치기를 이기지 못했던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했다.

“이봐. 괜찮아?”

지강백이 용천휘를 물가로 끌어내며 물었다. 용천휘가 무어라 입술을 달싹였다.

“이…… 조……, ……보,”

“뭐라고? 잘 안 들려.”

용천휘가 고개를 들었다. 이가 계속 떨려 턱까지 부딪히고 있었다.

“……보자고.”

그러나 지강백은 보았다.

이 정신 나간 사제가,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도 씩 웃고 있다는 것을.

용천휘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이번 건 좀 재미있었어, 사형. 어디 다음에 두고 보자고.

지강백의 부축을 받아 문으로 돌아온 용천휘는 요란하게도 앓기 시작했다. 오한으로 몸을 떨고 고열에 들떠 신음했다. 거짓으로 꾸미는 표시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지강백의 작은 복수는, 용천휘가 굳이 되갚으려고 들지 않아도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 * *

“아이고, 저런.”

필목현이 발을 동동 굴렀다.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자약했지만, 어쨌거나 동작만큼은 호들갑스러웠다.

“저희 도련님께서는 워낙 방약무인한 성정이신지라, 아, 가신인 제 책임은 아닙니다. 원체 그리 타고나신 게지요. 여하간 그따위 인격을 지니신 탓에 도통 세상 무서운 줄 모르십니다만, 그래도 무서워하는 게 딱 한 가지 있는데,”

필목현이 잠시 말을 끊었다.

그 옆 침상에서 용천휘가 때를 맞춰 콜록콜록, 작게 기침을 했다.

필목현이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지강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게 바로 물입니다.”

“…….”

“아시겠습니까? 세상 그 무엇도 두려울 게 없는 저희 도련님이, 딱 하나 무서워하는 게, 그래서 절대로 근처로 가서도 안 되는 게 바로 물이라는 겁니다.”

“…….”

“아시겠습니까? 물이란 말입니다, 물!”

무어라 하겠는가.

그런 물에 데려가 풍덩 집어던진 사람은 이쪽인 것을.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지강백이 고개를 숙였다.

덤덤한 말 한 마디였지만 눈빛이나 진중한 태도를 보면 진심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사과하는 사람 앞이라면 오히려 화를 내는 쪽이 미안해질 것이다.

“거, 알고 그런 것도 아니고……. 허리밖에 안 차는 얕은 물에 일부러 빠지는 것도 어려운 일이오만.”

보다 못한 양영천이 제자 편을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노릇 같았다. 물에 한 번 빠졌다고 저리 골골 앓는다는 건 지강백을 일부러 곤란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은 의심마저 드는 상황이었다.

“쿨럭, 쿨럭!”

용천휘가 시기적절하게 기침을 터트렸다. 그러자 필목현이 나서서 거들었다.

“아이고, 도련님. 어째 병세가 점점 더 악화되는 것 같은 우리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당장 죽을 것 같은 얼굴을 뵈니 묻지 않아도 안 괜찮으시다는 걸 알겠습니다만.”

“아아, 물론 안 괜찮지. 당분간 아주 호되게 앓을 것 같아.”

“그렇다면 별수 없군요. 약이라도 달여 드셔야지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용천휘와 필목현이 양영천을 응시했다.

이제 본론이 나오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저희 도련님께서 아무 약이나 처드실…… 받아 드실 리는 없고. 본가에서 고용한 전문 약사가 달인 약밖에 드시질 않으니.”

양영천이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전문 약사를 데려와야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무 약이나 못 처드신다는 말이 좀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몸값이 오만 냥이나 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그야 뭐가 문제겠소?”

“허나 한 가지 문제가 있어서 말입니다.”

“그게?”

필목현이 엄한 표정으로 무게를 잡고, 용천휘가 추임새를 넣듯 간간히 기침을 터트렸다.

“그 전문 약사가…… 여인이라서요.”

“으잉?”

양영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산서성 종남파. 제삼십구 대에 이르는 유서 깊은 대명문정파. 장구한 무림의 역사에 처음으로 도가의 무위자연 철학을 내공심법에 접목한 도교의 성지.

그곳에 입문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까마득한 말단 제자가 말씀하셨다.

내 이곳에 여인을 허락하겠노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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