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미친놈의 몸값
“여기가 앞으로 네가 지낼 곳이다.”
지강백은 사제를 처소로 안내했다.
제자들이 먹고 자고 하는 곳은 연무장 뒤로 있는 커다란 전각이었다. 전각의 규모를 보면 한때 종남이 얼마나 위세가 대단했는지 짐작이 갔다. 지금 그 커다란 전각을 쓰는 이는 지강백 한 명이 전부였다.
지강백이 용천휘를 안내한 곳은 자신의 옆방이었다. 방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서른 명이 한꺼번에 사용하던 곳이라 공간은 넉넉했다.
새로 제자가 온다기에 그래도 아침 동안 대강 먼지는 털어두었다.
“흐음.”
도련님의 그 게을러터진 눈이 방을 한번 스윽 훑었다.
오래도록 비워 놓은 처소에서는 묵은 먼지내가 났다.
봄이 돌아왔을 때 대청소를 하며 한 번 쓸고 닦긴 했으나 너무 오래된 일이었다. 천장에는 거미줄 하나가 대롱대롱 늘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쓸 처소를 둘러본 도련님의 감상은 이랬다.
“오백 냥이 부족했나?”
용천휘가 부채 끝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손톱 반만 한 크기의 거미가 새로이 집을 짓고 있는 곳이었다.
“무슨 뜻이냐?”
“이런 곳에서 묵으라 하다니. 돈이 부족했냐고 물을 수밖에 없잖아.”
지강백은 섣불리 화내지 않았다.
사실 그는 눈매가 쓸데없이 날카로워서 그렇지 신경질적이거나 화를 잘 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참을 수 있는 일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아는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그럴 줄 알고 가져왔다.”
지강백은 용천휘의 품에 빗자루와 걸레를 턱 안겨주었다.
“뭐?”
용천휘가 황당한 듯 얼굴을 구겼다.
“원하는 만큼 깨끗하게 쓸고 닦아. 청소할 시간은 넉넉할 테니. 다른 곳은 지금까지처럼 내가 할 거니까 너는 네 방만 청소하면 될 거다.”
말을 마친 지강백이 휙 몸을 돌렸다.
“잠깐.”
용천휘가 그를 불렀다. 지강백은 잠시 고민하다 등을 돌려주었다.
그래도 첫날인데 너무 매정히 구는 것도 사형으로서 못할 짓이다 싶었던 것이다.
“얼마야?”
“무슨 소리냐?”
후드득.
지강백이 방금 안겨주었던 걸레와 빗자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용천휘는 잘생긴 턱 끝으로 그것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얼마를 더 줘야지 제대로 된 방을 안내해 줄 거냐고.”
“……여기 내평각이 제자들이 쓰는 처소다. 다른 곳은 없어.”
“아아, 그래? 그렇다면 얼마를 줘야 내 마음에 들도록 여기를 청소해 줄래?”
용천휘는 한 번 말을 끊고 나서 뒷말을 덧붙였다.
“사형.”
그러니까 왠지, 아니 저러니까 더 열이 받았다.
지강백은 일단 먼저 한숨을 쉬고, 그런 다음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초식만 수십 가지였다. 그중 하나만 써도 저 잘난 면상에서 눈물을 쏙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참자. 일단은. 도련님의 몸값은 오백 냥이니까.
지강백이 입술을 달싹대며 오백 냥, 오백 냥이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누구한테 오백 냥이라는 거금을 떼먹힌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도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제법 효과가 있었다.
“정식으로 조사동에서 구배지례를 올리는 건 내일이다.”
“……그런데?”
“요컨대 너는 지금 당장은 내 사제가 아니라는 거야.”
지강백은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리고,
쾅—!
침상 머리를 후려쳤다. 주먹 모양으로 움푹 자국이 패더니 그 주변으로 나뭇조각이 부스스 흩어졌다.
“그러니 오늘은 봐주겠다. 청소해라. 깨끗한 데서 잘 마음이 있다면.”
탓, 타닷.
말을 마친 지강백은 아예 경신술을 발휘해 재빨리 자리를 떴다.
저 미끈한 얼굴을 더 보고 있노라면 참지 못하고 한 대 패주고 싶을 것 같아서였다.
* * *
“흐음.”
지강백이 떠난 자리에 용천휘가 거미와 단둘이 방에 남았다.
방금 전까지 나른하게 반쯤 풀려있던 게으른 도련님 눈이, 혼자가 되자 전혀 다른 모습을 했다.
날카로운, 그래서 마음의 저 바닥까지 꿰뚫어 볼 것 같은 눈.
그는 무식하게 망가진 침상을 보고도 별로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벽운천강권이라는 건가. 내력도 끌어올리지 않고 이만한 위력이라니. 생각 이상인데.”
그는 지강백이 쓴 무공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무공의 종류뿐만이 아니라, 내력의 사용 유무까지 알아보았다.
무공을 익히는 것은 싫지만 무림인이 되고 싶어 종남파에 돈을 주고 입문한 도련님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이거 어쩌나.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겠어.”
느리게, 그러나 선명하게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맑고 깨끗한 피부도, 속눈썹이 촘촘한 눈도, 시원스레 뻗은 콧날이며 육감적인 붉은 입술이 조화를 이룬 얼굴은 단순히 잘생겼다라는 말로 끝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화사하고 화려한 생김새였다. 타인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그에게 가장 먼저 눈길이 갈 것이다.
용천휘가 방금 전까지 짓던 게으른 표정은 강렬한 인상을 감추기 위한 가면처럼 보였다.
“그럼 어디, 우리 사형이 어떤 인물인지 염탐이나 좀 해볼까.”
방문을 열자 어둠이 울컥 밀려왔다. 그대로 어둠에 몸을 내맡긴 용천휘가 어딘가를 향해 소리 죽인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챙강!
손아귀를 벗어난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큿,”
지강백이 잠시 멈춰 서서 저릿한 오른팔을 감싸 쥐었다.
“젠장.”
또였다.
팔에 힘이 풀려 검을 놓친 게.
육체를 단련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루가 열두 시진이 아니라 스물네 시진이라고 해도 그 시간을 모조리 수련에 쓸 수는 없었다. 몸이 지치는 탓이었다.
지강백은 완전히 지쳐버려 검을 쥐고 있기도 힘든 손을 내려다보며 이를 질근 물었다.
“아니, 아직은 아니야.”
그가 남은 힘을 쥐어짜 바닥에 떨어진 검을 들어올렸다.
운기조식이 간절했지만, 지강백은 그마저도 이를 물고 참아냈다. 아직은 더 할 수 있었다. 검을 쥘 힘이 남아 있다면 그것을 휘두를 힘도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아직 더 할 수 있어.”
자질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타고나는 것이니.
하지만 노력은 얼마든지 더할 수 있었다. 지강백은 적어도 노력에서만큼은 모자라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휘익! 서겅!
자정이 훌쩍 넘은 고요한 밤.
목검이 서늘하고 청량한 울음소리를 흘렸다. 지강백은 그렇게 반 시진 가량을 더 수련에 매진했다.
“어제보다 한 식경을 더 버텼군.”
지강백의 무표정한 얼굴에 비로소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수련은 고되지만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 그곳에 가기 위해 매일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지강백은 이 저릿한 통증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매 순간 순간을 충실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한 순간의 호흡이, 한 순간의 땀이.
한 순간의 고통이.
한 순간의 깨달음이.
그 모든 것이 자신이 목표한 곳을 향해 내딛는 걸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강백은 걸음이 모이면 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길은 그를 일류고수라는 정점으로 데려갈 것이다.
초식 수련을 모두 마친 지강백은 비로소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여느 때와 같은 밤이었다.
수련은 평소와 같았고 마무리 역시 다를 게 없었다. 운기조식을 마치고 나자 온몸에 정순한 충족감이 채워졌다.
“후우.”
지강백은 만족스러운 숨을 길게 내쉰 다음 연무장을 떠났다.
때마침 바람은 선선했고 달무리는 고요했다. 어쩐지 달게 잘 수 있을 것 같은 맑은 밤이었다.
그러나.
맑고 고요한 밤은 그저 헛된 꿈이었다.
왜냐. 그에게는 결코 고요하지 않은 사제가 생겼으므로.
* * *
“……?”
이상했다.
왜 자신의 방에 등잔불이 환히 켜져 있는지.
지강백은 어지간해서는 처소에 불을 켜는 일이 없었다. 거의 매일을 연무장과 부엌을 바삐 오가는 생활 속에서 처소란 그저 잠만 자는 곳이었다.
게다가 태을신공이 쌓여갈수록 오감이 맑게 트여서 딱히 어둠이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불이라니.
분명 자신의 처소에 자신이 아닌 다른 자가 있다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그게 사부는 아닌 것 같았다. 십칠 년간 양영천이 이런 식으로 그를 찾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강백은 기척을 낮추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어서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그리고.
“……깜짝이야. 소리 좀 내고 다니지 그래?”
“……뭐?”
지강백이 문고리를 잡은 채로 우뚝 멈춰 섰다.
제 방 침상 위에 태연히 누워 있는 사내자식을 보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내 방에서 뭐하는 거냐.”
지강백이 묻자 용천휘가 태연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이불을 끌어당겼다.
지강백이 ‘내 방’이라고 한 말은 조금도 듣지 못했다는 식이었다.
“여기는 거미줄이 없기에.”
“그래서?”
“여기서는 잘 수 있겠더라고.”
“…….”
용천휘가 이불을 당겨 얼굴을 그 안에 푹 묻었다. 이제 보니 이불도 지강백이 처음 보는 비단금침이었다. 침상 저 옆으로는 오늘 낮 일꾼 스무 명이 끙끙대며 나른 도련님의 짐이 푸짐히 쌓여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목침이었다. 지강백이 쓰는 목침이 처량하게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런 쓰레기는 뭐야, 라며 훌쩍 집어던진 것처럼.
때깔 고운 비단 이불 아래서 용천휘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 김에 불 좀 꺼, 사형. 난 이제 잘 거라서.”
우드득.
지강백의 손에서 문고리가 부서졌다.
잠시 문고리를 쳐다보던 지강백이 그것을 침상을 향해 집어던졌다.
퍽!
부서진 문고리는 머리카락 같은 차이로 용천휘의 머리통을 비켜 침상 머리에 꽂혀 버렸다.
“나가.”
용천휘가 이불을 홱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방금 자신이 황천 강을 건널 뻔했다는 것을 조금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뭐야, 지금? 나한테 뭘 던졌어?”
“내 방이다. 짐 챙겨서 나가.”
“싫은데?”
“직접 끌어내겠다.”
“뭐야. 아까하고 말이 다르잖아. 오늘 하루는 봐주겠다더니.”
용천휘가 짜증스럽게 웃었다.
“몸 쓰는 것들이라 말이 중한 걸 모르나. 하여간 무식해서.”
그때 지강백은 결론을 내렸다. 그의 오백 냥짜리 사제는, 말이 통할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성큼성큼 걸어서 침상으로 다가간 지강백이 다짜고짜 용천휘의 멱살을 쥐었다.
“읏!”
용천휘의 몸이 불쑥 들렸다. 목이 죄이며 피가 몰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 성질머리……하고……는. 이거 놓지…… 못…….”
“먼저 내 침상에 손을 댄 것은 너다.”
“그러…… 게 진작, 청소를…… 잘 해놨, 으면…….”
“네 방 청소는 네가 해라. 다른 걸 하라고 하진 않았다.”
지강백이 용천휘를 질질 끌고 방을 나섰다. 용천휘가 나름 발에 힘을 주며 버텼지만, 지강백을 힘으로 당해낼 수는 없었다.
휙!
지강백이 용천휘를 바닥에 팽개쳤다.
“윽!”
그대로 엎어졌다면 사정없이 맨바닥에 얼굴이 처박혔을 것이다.
용천휘는 그 순간 용케도 몸을 틀어 턱이 깨지는 것을 피했다. 그는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채로 지강백을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모를 얼굴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먼저 시비 걸 듯 나왔다지만 이런 꼴을 당했다면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게 마땅할 텐데, 그는 평소처럼 마냥 게으른 눈을 했다.
용천휘가 느릿느릿 입술을 뗐다.
“너…… 나한테 이 따위로 굴면 후회할 텐데.”
“너가 아니라 사형이라 했다.”
“아아……. 그래, 사형.”
권태가 내려앉은 듯 느슨한 목소리였다.
“사형은 내 시중을 드는 사람이잖아. 내가 시동처럼 하루 종일 딱 들러붙어 있으라 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사람이 이렇게 관대하게 대해 줬으면 침상 정도는 양보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시동?”
지강백이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하루 정도는 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이 사제는 매우 시급히 강호 상식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형은 윗사람이고 사제는 아랫사람이라는 것은 강호의 절대 상식이었다.
“일어나.”
“……왜?”
“사형이 어떤 건지 알려주지.”
“아아……. 왠지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닐 것 같은데.”
용천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을 놀리듯, 느리게 웃으며.
“싫어. 안 일어날래, 사형.”
“소용없어. 나는 네게 가르침을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네 발로 안 일어서겠다면 내가 일으키겠다.”
“저런. 그건 좀 무서운데?”
무섭다는 인간이 조금도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용천휘는 사람을 놀리는 것 같은 묘한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림인은 귀가 좋다지?”
“……일어나라고 했다.”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고.”
용천휘가 대뜸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섬서에서도 가장 산세가 높고 험하기로 이름 높은 종남산. 그 산꼭대기 오롯이 위치한 종남파 본문.
밤이 되면 새들과 바람마저 잠들어 한없이 고요하고 평온한 그곳에.
웬 사내놈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자식!”
지강백이 앞으로 몸을 날려 신속하게 홍엽수를 펼쳤다. 그가 막 용천휘의 아혈을 눌러 더는 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들려던 참이었다.
“이 오밤중에 대체 무슨 소란인 게냐?”
양영천이 등장했다.
“사부님…….”
기가 막힌 등장이었다.
하긴, 이곳에서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린 것은 간만의 일이었으니 단잠을 자고 있던 사부가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 강백아. 네 지금 사제에게 손을 올리는 게냐?”
지강백은 거짓말이나 변명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부님. 사제에게 가르침을 줄…….”
지강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픕니다, 사부님.”
용천휘가 천연덕스럽게 양영천을 사부라고 불렀다.
달빛이 처연하게 용천휘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얼굴은 눈처럼 흰데 입술은 붉었다.
왜냐.
입술 한켠이 찢어져서 투둑 피를 흘리고 있었으니까.
“……?”
지강백이 눈을 끔벅거렸다.
한 대 패려고는 했지만 아직 패진 않았다. 방금 전 땅바닥에 패대기친 것도 어찌 잘 피해서 딱히 다친 곳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저 피는 어찌 된 일일까.
용천휘가 손등을 들어 피 흐르는 입술을 닦았다.
“여기 계신 사형께서는, 제가 이곳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 봅니다. 곤히 자고 있던 저를 깨워서는 직접 끌어내기 전에 나가라고 하시다니요.”
양영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엥? 뭬야? 아, 이놈아. 네가 정말로 그랬느냐?”
어처구니가 없어진 나머지 지강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락도 없이 제 침상을 차지한 것은 사제입니다, 사부님.”
“하지만 제 침상은 낮에 사형이 망가트려 놓았습니다, 사부님. 이렇게, 주먹으로, 쾅! 내리 찍어서.”
용천휘가 또 한 번 입술을 문질렀다. 입술이 붉어질수록 그가 짓는 아픈 표정은 점점 더 그럴싸해졌다.
“뭐? 그게 진짜냐? 침상을 부숴?”
미간에 잡힌 주름이 늘었다.
용천휘가 아예 없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가 말하는 것은 지강백이 겪었던 상황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게…… 그랬습니다만 사부님. 그건 사제가 청소를 하려 들지 않기에…….”
이번에도 용천휘는 지강백의 말을 가로챘다.
“송구합니다만, 사부님. 저는 아직 제 손으로 청소를 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외람되지만 사형께 대신 해주면 안 되냐 여쭈었더니 대뜸 눈앞에서 침상을 우지끈 부수어 버리는데…… 후, 거기에 대고 제가 무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상했다.
어딘지 모를 곳으로 말려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용천휘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들은 사실이라면 사실인데 분명 사실이 아니었다.
“제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습니까?”
하얀 달빛이 용천휘의 얼굴을 애잔하게 어루만지는 듯했다.
“무림인이 되고 싶었기에 이곳에 왔습니다. 날 때부터 허약했던 몸으로 무공 연마는 어렵겠지만 잠시만이라도 강호에 몸을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백 냥이라는 거금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만…….”
돈이라는 본연의 매력에 더해 무림인이라는 색다른 매력도 추가하고자 한다던 도련님이 돌연 무공을 익히고 싶어도 익히지 못하는 병약한 청년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돌아가라 하신다면, 돌아가겠습니다. 오백 냥을 아낀 셈 치면 되겠지요.”
마지막 희망이 꺼져가듯, 안타까운 음성. 애절한 말투.
그러나 그 속뜻은 협박이었다. 이대로 하산할 테니 오백 냥은 도로 토해 놓으라는 소리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양영천이 펄쩍 뛰었다.
용천휘의 수상쩍은 말을 다 믿어서가 아니었다. 지강백이 이유도 없이 누군가를 두들겨 팰 성정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제일 잘 알았다.
다만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이 용천휘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을 뿐이었다.
당장 그가 하산한다고 하면 언제 쌀이 떨어지나 오매불망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하는 건 이쪽인 것이다.
양영천이 지강백을 잠시 애틋한 눈으로 보았다.
미안하다, 제자야. 이 사부가 능력이 없어서.
“강백이 너는 사형이 돼서는 어찌 그리 사제에게 속 좁게 구느냐. 멀쩡한 침상은 대체 왜 부순 게야. 네 사제 앞에서 그리 힘자랑을 하고 싶었느냐?”
“사부님. 그게 꼭 그런 것은 아닌…….”
“시끄럽다. 윗사람이 마땅히 아랫사람을 보듬어 살펴야 하거늘.”
“사부님. 제자도 할 말이…….”
“아, 시끄럽다 했다. 고만들 들어가서 자거라. 강백이 너는 침상을 내어주거라. 네가 부쉈으면 책임은 져야지. 쯧쯧.”
양영천이 홱 돌아섰다.
더 이상 지강백을 마주하고 있다간 양심이 너무 괴로울 것 같아서였다.
‘에고. 저 예쁜 제자 놈을 내가 이때껏 못났다 공연히 구박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젠 졸지에 편애까지 하게 생겼으니. 에고고.’
그렇게 돌아서는데 등 뒤로 지강백의 나직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사부님.”
양영천이 차마 몸을 돌리지는 못하고 뻐끔 고개만 움직였다.
“왜 부르느냐. 이 사부는 이제 뼈마디가 늙어 찬 이슬은 오래 못 맞는다.”
“오백 냥이 그리 큰돈입니까?”
그러면서 날아오는 눈빛이 참 흉흉했다.
물론 이쪽은 하늘같으신 사부고, 저쪽은 사부를 지극히 위하는 제자인지라 저 흉흉한 눈빛이 살기일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주춤 발이 꼬이긴 한다.
양영천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십칠 년간이나 함께 지내온 제자보다 오늘 들어온 놈을 더 챙겨주실 만큼, 그리 큰돈이냐 물었습니다.”
“뭬야? 아니, 그래. 고작 이 사부를 그렇게 보는 게냐? 돈 오백 냥에 사람 차별하는 늙은이로?”
“방금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지강백도 지지 않고 맞섰다.
사실 그는 지금 기분이 몹시 더러운 상태였다.
저 수상쩍은 사제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은 괜찮았다. 그야 물론 열이 받긴 했고, 추후에 어떻게든 강호 상식을 몸으로 자알 가르쳐 줄 생각이었지만.
그러나 사부가, 그에게는 유일한 사문이자 가족인 사부가 대놓고 차별을 하는 것은 결코 괜찮다고 할 수 없었다.
“제자도 오백 냥 정도는 벌어올 수 있습니다. 시간이 며칠 더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부엌에는 오늘 사냥해온 짐승들이 쌓여 있었다.
오늘은 서툴러서 몇 마리 잡지 못했다지만, 이후로는 사냥에도 익숙해질 것이다.
범 가죽이 시전에서 대강 얼마나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오백 냥은 물론 거금이긴 했지만 범 가죽도 싸진 않았다.
그러나 양영천은 그 말에 펄쩍 뛰었다.
“누가 네놈더러 돈 벌어 오랬냐! 그런 허튼 생각 하지도 말랬지! 이놈이 대천강검 하나를 대성했다고 벌써 자만에 빠져서는!”
“그럼 오백 냥하고 차별하지 마십시오.”
“뭐라고! 그럼 오백 냥이나 들고 온 놈을 어째 오백 냥이 아닌 것처럼 하랴!”
“최소한 먼저 있는 제자가 오백 냥 때문에 서러울 일은 없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 그래도 네 사제는 오백 냥이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의 말씨름을 끊은 것은 그 오백 냥짜리 사제였다.
“아아, 더는 못 들어주겠네요.”
양영천과 지강백의 시선이 동시에 휙 돌아 용천휘를 향했다.
“말끝마다 오백 냥, 오백 냥이라니요. 제가 가져온 돈이 오백 냥이라고 해도 너무 그렇게 오백 냥 취급하면 기분 나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이 그래서 뭐 어쩌라는 소리냐, 하는 표정으로 용천휘를 바라보았다.
용천휘는 두 사람의 눈빛에 맞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천…… 아니, 이것도 마음에 안 들어. 오만 냥으로 하지요, 사부님.”
“……응?”
처음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만 냥? 무슨 오만 냥?”
고갯짓이 더욱 느려졌다. 마치 내가 이겼다, 고 말하는 것처럼.
“만(萬) 자가 들어가니 어감이 좀 낫군요.”
“음?”
“앞으로도 사부님과 사형이 저를 계속 액수로 부르실 것 같아 말입니다. 이 몸더러 오백 냥이라니. 제 체면은 뭐가 됩니까.”
“으음?”
“본가에 기별을 넣어 전표를 가져오라 이르겠습니다. 원하시면 금이나 현찰로 가져다 드리고요. 사만구천오백 냥밖에 안되니 현찰도 그리 번거롭진 않을 겁니다.”
“으으음?”
양영천은 비로소 용천휘가 무어라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오백 냥은 체면이 상한단다. 그래서 오만 냥으로 하잖다.
……무려 오만 냥이었다!
양영천이 홱 고개를 틀어 지강백을 돌아보았다.
“제자야.”
사부의 주름진 손이 제자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침상 양보해라.”
“사부님.”
“저 어린 것이 시종 하나 없이 떨렁 산에 올라와 있는데 어찌 외롭고 불편하지 않겠느냐. 네가 사형되는 입장이니 매사 잘 보듬고 보살펴 주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사부…….”
“흐음, 흠. 그럼 이 늙은 사부는 뼈마디가 시려서 이만 들어가 보겠느니. 아, 하늘 아래 덜렁 둘 있는 사형제 간인데 좀 돈독히 지내보려무나. 어흠흠.”
“사…….”
툭, 툭. 툭툭투욱!
처음엔 다정하기만 했던 어깨를 두드리는 동작에 울컥 힘이 실렸다.
오만 냥이라잖느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그런 뜻이었다.
“흠흠. 그럼 이 사부는 진짜 들어가 잔다.”
양영천이 후다닥 멀어져갔다.
지강백이 허탈한 심정이 되어 양영천의 등을 쳐다보았다.
오백 냥으로 차별하는 거라면 마땅히 항의해 볼 수 있겠지만 오만 냥은 또 다른 차원의 얘기였다.
방금 전까지 사납던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사부님…….”
어깨를 늘어트린 지강백에게 용천휘가 다가왔다.
“그러게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그 말에 아래로 처지던 눈 꼬리가 도로 홱 당겨졌다.
“……일부러 그런 거냐?”
“뭐가?”
“오만 냥. 그리고 그 입술.”
지강백이 피딱지가 앉기 시작하는 용천휘의 입술을 가리켰다.
어쩐지 알 수 있었다. 맞지도 않고 입술에서 피가 흘렀던 이유. 아마도 양영천이 안 보는 사이 스스로 물어 피가 나게 했을 것이다.
“저런. 들켰네. 물론 일부러 그랬지.”
“편자(騙子: 사기꾼) 같은 놈. 사부님 앞에서 무슨 수작질이냐.”
지강백이 욕을 해도 용천휘는 태연했다.
“사기가 아니라 취미라 해야겠지.”
“뭐?”
“낮에 우리 집 가신이 한 말 못 들었어? 나더러 까다롭고 성격 안 좋다고 했잖아. 자고로 돈 많은 놈이 성격까지 나쁘면 취미로 삼을 만한 건 뻔하지.”
용천휘가 장난을 치듯 지강백의 턱 밑으로 불쑥 제 얼굴을 들이댔다.
“바로, 남을 괴롭히는 거야. 재미 삼아.”
“…….”
하도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지강백이 입을 다물었다.
미친놈이라더니, 그게 정말이었다.
오죽 할 짓이 없었으면 남을 괴롭히는 게 취미라고 하는 걸까. 한번 태어난 인생, 그렇게 무의미한 일로 낭비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강백은 잠을 쪼개어도 늘 시간이 모자란 게 한스러운 사람이었으므로.
“앞으로 기대해. 이 몸에게 헛돈을 사만구천오백 냥이나 쓰게 만든 대가는 아주 자알 받아낼 테니까.”
사기꾼이 씨익, 해맑은 미소를 더했다.
“……사형.”
그 순간 지강백은 직감했다.
이 미친 사기꾼 사제와 함께 하는 십 개월이 결코 평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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