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강호는 넓으니 미친놈은 반드시 있다.
“그으으으으…….”
“…….”
두 쌍의 눈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핏발이 돋아난 눈은 짐승의 것이었고, 침착하다 못해 무감해 보이는 눈은 사람의 것이었다.
“그으…….”
먼저 인내가 다한 것은 짐승 쪽이었다.
“크!”
칼날처럼 번뜩이는 엄니를 온통 드러낸 멧돼지 한 마리가 인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휙!
지강백의 신형이 가볍게 솟구쳤다.
멧돼지라는 놈은 정면으로 곧장 달려와 그 튼튼한 대가리로 무조건 들이박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그는 엄니에 옆구리를 긁히고 나서야 알아챘다.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 앞서야겠구나.”
무공 비급을 펴놓고 연구하는 것처럼 평연한 목소리였다.
허공에서 신형을 반 바퀴 뒤집은 지강백이 오른발 끝으로 정확히 멧돼지의 등짝을 짚었다. 그 상태에서 천근추를 응용하니,
“……꾸엑!”
멧돼지가 비명을 내지르며 네 발을 납작 꺾었다. 동시에 지강백의 손목이 흐르는 물처럼 꺾였다.
뻑!
칼등이 멧돼지의 목 뒤를 내리쳤다. 비명도 없이 숨이 멎었다.
벌건 혀가 엄니 사이로 길게 삐져나왔다. 멧돼지의 두 눈은 제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허공을 향해 부릅뜬 채였다.
멧돼지의 등에서 내려온 지강백은 두 손을 잠깐 모았다.
“좋은 곳으로 가라. 그런 곳이 있다면.”
멧돼지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지강백은 오늘의 사냥을 마쳤다.
검을 허리춤에 꽂은 지강백은 근처에 놓아둔 커다란 자루를 들어올렸다.
자루는 한 눈에 보기에도 묵직했다. 밑면에는 핏물이 고여 똑똑 떨어지는 것을 보건대 그 안에는 갓 잡은 짐승이 몇 마리나 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만족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사부님을 뵐 면목이 없게 생겼군. 하지 말라 하셨던 사냥을 기어코 나섰으면 범이라도 몇 마리 잡았어야 했을 것을.”
지강백은 멧돼지를 들어 어깨에 걸치고 자루는 옆구리에 끼웠다. 멧돼지 하나만으로도 성인 남자 세 명을 넘는 무게였지만, 그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슷, 스슷.
그러고 보니 발걸음도 사냥이 아니라 소풍을 나선 듯 경쾌했다.
종남파의 신법인 은하유영비였다. 지강백은 길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험준한 산을 평탄한 대로처럼 슥슥 내달렸다.
“그런데 사부님은 오늘도 안 오시려나.”
지강백이 부지런히 발을 놀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양영천이 제자를 데려 오겠다며 하산한 지 오늘로 벌써 나흘째.
지강백도 처음부터 사부가 없는 틈을 타 몰래 사냥을 해야겠다고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소식이 없는 채로 나흘이나 지나고 나니 제자를 받는 일이 그리 쉽지 않겠다는 판단을 한 것뿐이었다.
사부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강백은 저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늘 사부에게 걱정만 끼치는 못난 제자인 것을 알기에 그 마음은 더욱 간절했다.
“사부님처럼 용이라도 잡을 수 있으면 제법 도움이 될 텐데.”
지강백이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용이 보기 힘든 짐승이라는 것은 안다. 멧돼지니 범이니 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부가 사냥에 나서면 한 번씩 잡는 놈이라고 했으니, 산을 뒤지고 뒤지다 보면 저도 한 번쯤은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 내 실력으로는 무리겠지만.”
물론 무리였다. 지강백이 아니라 그 어떤 고수라도 무리였다.
인간이 용을 잡을 수 있는가는 둘째 치고, 용이 과연 현실에 존재하느냐도 문제였다.
그러나 지강백은 사부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았다.
“사부님만 한 고수가 되는 날이 오면 잡을 수 있겠지.”
지강백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혼잣말을 무섭도록 진지한 얼굴로 하고 있을 때였다.
그으으…….
바람에 실려 스산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샌가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시간이었다. 야행성 짐승들이 슬슬 사냥감을 찾아 몸을 움직일 때가 된 것이다.
“커흥!”
황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유독 선명한 거대한 짐승이 지강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범이구나!”
지강백은 들고 있던 짐승들을 내려놓으며 허리춤의 칼을 뽑았다.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위험한 시간, 이 깊은 산 속에서 범과 마주친 사람의 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타닷!
칼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인간과 범이 한데 뒤엉켰다. 범은 발톱을 들이댔고 인간은 칼을 휘둘렀다.
그리고 잠시 후.
“끅!”
쿵!
미간이 꿰뚫린 범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사이 지강백은 한 손으로 땅을 짚어 착지했다. 그가 호흡을 고르며 검을 뽑아들었다.
토독.
검을 뽑은 자리에서 피가 두어 방울 흘러 흙으로 떨어졌다. 상처는 아주 작아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어디선가 짐승 가죽은 흠이 적을수록 값이 비싸다는 말을 들었기에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운 성취였다.
만약 지강백이 사냥꾼이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이 일화는 관련 업계에서 영원히 회자되는 전설로 남을 것이다.
“범은 못 잡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전설의 사냥꾼이 될 뻔한 지강백은 여느 때처럼 덤덤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용은 아니니 뭐.”
아니, 덤덤한 얼굴이 아니었다. 적잖이 실망한 얼굴이었다.
용을 잡지 못해서.
오른쪽 어깨에는 멧돼지를, 왼쪽 어깨에는 범을 걸친 지강백이 자루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기 시작했다.
* * *
그 다음 날.
“흠.”
부엌 바닥에는 짐승의 시체가 크기순으로 조르륵 누웠다.
지강백은 일단 가장 작은 삵부터 붙들고 가죽을 벗기는 중이었다.
“으음.”
지강백이 한 손에는 방금 숫돌에 간 비도를, 다른 한 손에는 삵을 들고서 그들을 지그시 노려보는 중이었다. 삵은 뱃가죽이 반쯤 갈라지다 말았고 비도를 쥔 지강백의 손은 온통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실패인가.”
지강백이 드물게 난처한 얼굴을 했다.
가죽을 벗기는 것은 때려잡는 것과는 또 달랐다. 팔아서 돈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니 무턱대고 저질러 버릴 수도 없었다.
“어설프게 손질을 하느니 차라리 통째로 넘기는 게 나으려나.”
그러자면 저잣거리로 나가 수소문을 해야 했다.
시장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도 모르니 그것도 몇 군데를 돌며 알아봐야 할 것이다.
“그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혹 그사이 사부님이 오시면 곤란한…….”
마침 그때였다.
“강백아아아아! 아이고, 제자야아아!”
저를 부르는 소리가 쩌렁쩌렁 산을 울려왔다.
하산한 지 오 일만에 돌아온 사부였다. 그런데 저렇게 숨넘어갈 기세로 사람을 부른다.
“사부님?”
지강백이 벌떡 일어서서 부엌문을 나서는 것과 동시에,
쾅!
양영천이 종남파의 대문을 왈칵 젖히며 들어섰다.
“강백아!”
“무슨 일입니까, 사부님?”
양영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종남산을 단숨에 뛰어올라온 것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무리 노쇠했다 한들 양영천은 무인이었다. 그런 이가 복날 저 혼자 살아남은 뒷골목 개처럼 숨을 헥헥 몰아쉬고 있다면 당연히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아, 그…… 그게 말이다!”
“예, 사부님. 말씀하십시오.”
양영천이 지강백의 소매를 붙들고 붕붕 흔들어댔다.
“미…… 미친, 웬 미친놈이……!”
“예……? 광인……이라 하셨습니까?”
미친놈이라는 말에 지강백의 표정이 당장 심각해졌다.
천마광인, 혈천광인, 광마혈성, 마광자…….
그간 강호에서 미친놈이라는 공식 별호가 붙은 인간들은 모두 끔찍한 혈겁을 일으켰더랬다. 이것은 어린 시절 주워들은 이야기와 무협지 몇 권으로 강호를 접해본 것이 다인 지강백도 아는 얘기였다.
한 번 사냥에 나서면 용도 때려잡을 만한 절정고수인 사부를 놀라게 할 정도의 광인이라면 대체…….
지강백의 얼굴이 긴장으로 싸늘히 굳었다. 비도를 꽉 움켜쥐고 있는 피투성이 손이 눈빛과 어우러져 섬뜩한 인상을 던졌다.
“사부님. 그가 지금 어디에…….”
“아, 글쎄 입문금을 내고 들어오겠다고 하지 뭐냐!”
말이 서로 엉켰다. 그것도, 꽤나 이상한 말이.
양영천은 지금 너무 정신없이 흥분한 나머지 지강백이 어떤 모습인지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예?”
“그것도 오, 오백 냥이나! 세상에 그런 미친놈이 정말로 있었다!”
사부를 놀라게 한 광인은, 돈이 아주 많은 미친놈이었다.
“…….”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던 지강백이 잠시 침묵했다.
그사이 숨을 고른 양영천이 지강백의 소맷자락을 놓고 신형을 바로 세웠다.
“아, 그래도 그런 미친놈이 있으니 이제 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게…… 어어, 흠흠. 아니, 그러니까 이 사부 말은……!”
양영천은 이제야 제자 앞에서 본심을 떠들어 댔다는 것을 깨닫고는 말을 멈췄다.
식은땀이 흘렀다. 하마터면 이제껏 잘 감춰왔던 진실이 허무하게 드러날 뻔했다.
“……어흠, 흠! 새 제자가 들어올 것이니 오늘 중으로 본당과 처소 건물을 깨끗이 청소해 놓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어이쿠, 그간 네놈이 청소를 얼마나 게을리 했으면 이리 케케묵은 비린내가 다 난단 말이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놈.”
그건 좀 억울했다.
살림집처럼 꼼꼼히 쓸고 닦고 광내는 것까진 못 했지만 아침마다 비질은 성실히 하고 있었다.
“사부님. 이 비린내는 제자가 잡아온 짐승 때문에…….”
“아, 뭐하고 섰느냐! 어서 가서 청소 하라니까! 오늘 아침을 먹고 출발한다 하였으니 해가 높아지면 도착할 것이니라. 어서 어서!”
사부는 팽 등을 돌리더니 본당 쪽으로 사라지셨다.
홀로 남은 제자는 피투성이 손으로 비수를 꼭 움켜쥐고 이른 아침,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백 냥이라고…….”
그것도 제법 길게.
* * *
종남파의 지객당.
차향이 그윽했다. 깊은 산속 누가 와서 먹나 묻고 싶은 맑은 옹달샘 물로 끓인 차는 과연 달랐다.
남은 찻잎을 탈탈 떨어 간신히 끓여 내온 차라는 표시가 나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었다.
낡았지만 정갈한 다탁을 앞에 두고 종남파의 장문인과 일대제자가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은 모두 두 명.
그중 한 명은 종남파에 입문을 희망하는 자였고, 다른 하나는 그를 따라온 가신이었다. 제자 희망자의 이름은 용천휘, 가신의 이름은 필목현이라 했다.
“해서, 저희 도련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간단합니다.”
필목현이 찻잔을 슥 밀며 입을 뗐다.
마치 이딴 싸구려 차는 냄새도 맡기 싫습니다만, 하는 소리 같아 차를 끓여온 지강백은 조금 기분이 언짢았다.
“무공은 됐습니다. 저희 도련님을 보셨으면 짐작하셨겠지만 무공 수련이라니, 씨알도 안 먹힐 소립니다.”
지강백과 양영천이 그 말에 부잣집 외동아들이라는 용천휘를 새삼 쳐다보았다.
나이는 얼추 지강백 또래쯤 되었을까. 요 근래 섬서 인근에서 가장 잘나가는 대상 집 귀하신 외아들이라 했다.
아무리 봐도 무공과는 일절 연이 없게 생겨먹은 작자였다.
흠 하나 없는 매끄러운 흰 피부, 서글서글 촉촉한 눈매, 방금 석류 한 알 톡 까먹고 온 듯 붉은 입술.
잘생겨도 너무 잘생겼다.
그것도 모자라 온몸으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았다는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 도련님께서는 옥수를 들어 우아하게 부채질을 하시는 중이었다. 그 너무 잘생긴 얼굴에는 짜증과 권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백 냥이라는 거금을 입문금으로 내겠다는 도련님을 일찍이 미친놈이라 평한 바 있던 양영천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암.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놈이 맞았다. 무공도 배우지 않을 거라면서 대체 왜 제자가 되겠다는 말인가.
“그런데 저희 도련님께서 혼인하고자 하시는…… 흠, 뭐라고 해야 할까요. 경쟁 상단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간 그쪽 집안의 아가씨께서, 대체 이 좋은 계절에 뭘 잘못 드셨는지, 저희 도련님 같은 멀쩡한 구혼자를 놔두고 어떤 무림인과 야반도주를 하셨지 뭡니까. 그래서…….”
“그래서 그 무림인을 찾아 복수하겠다는 겁니까?”
지강백이 묻자 필목현이라는 가신이 그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면서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놈이야 진작 청부업체를 고용해 해결을 봤지요. 그런 일에 굳이 몸을 움직이실 도련님이 아니니까요. 그 대신 돈 쓰는 일은 좀 부지런히 하십니다.”
“……그렇습니까.”
돈 많은 집 아들이 돈 쓰는 일은 잘한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아, 그럼 왜……?”
“그런데 그 일로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셨다 하시네요.”
필목현은 자기도 귀찮아 죽겠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아가씨께서 야반도주한 이유가 글쎄, 상대가 무림인이었기 때문이랍니다. 평범한 남자는 매력이 없다고 했다나. 정말이지 무얼 단단히 잘못 처드신 거지요. 그래서 저희 도련님께서는 무한한 자금력이라는 본연의 매력에 더해, 무림인이라는 색다른 매력도 하나 더 곁들여야겠다 마음먹으신 겁니다.”
“허, 허허…….”
양영천은 맥 빠진 얼굴로 허허허 웃었다.
“그러니까 요는, 무림인이기만 하면 된다? 그런 게요?”
“바로 맞추셨습니다.”
필목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은 어떻게든 되어야겠고, 하지만 무공을 익히는 것은 힘들어서 싫고…… 해서 생각한 것이 이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세인들이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삼류 문파를 이름을 빌릴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반대로 제대로 된 일류 문파에 말단 제자로 들어가 함부로 몸 굴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에……. 에에, 뭐…… 그렇다면 그런…….”
“그러니 이곳 종남파가 딱이었습니다.”
필목현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해답을 찾아낸 스스로가 대견한 모양이었다.
“이만하면 저희 도련님과 어느 정도 격이 맞을 것 같습니다. 단박에 일대제자가 되는 것은 물론, 장문의 그 뭐냐…… 아, 직전제자도 되는 것이고요. 무엇보다 종남파는 요새 좀 그렇습니다만 한때는 구파일방의 일원이었…….”
“허허! 무슨 말인지 알겠소이다!”
양영천이 찻잔을 탕!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필목현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핏기가 쪽 빠진 얼굴로 지강백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서 대화가 더 진행된다면 무슨 얘기가 나올지 모르는 것이다.
이 대화는 서둘러 마무리 지어야 했다.
“원하시는 대로 직전제자로 받도록 하지요. 이제껏 속가제자가 장문의 직전제자가 되는 예는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를 두도록 하겠소이다. 어흠흠.”
무림인으로 소속만 두면 된다는 이 게으름뱅이 도련님이 어디 나가서 종남파의 일대제자 노릇을 하고 다닌다 하면 분명 지하에 계신 조사님들이 떼로 무덤을 박차고 나오실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쌀이 떨어져가는, 본산의 대 위기상황.
아무리 분통이 터지고 울화가 치밀어도 이번만큼은 조사님들께서 양보해 주셔야 했다.
“어라? 속가제자라니요?”
그러나 필목현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끔벅였다.
“당연히 본산에서 머물러야지요. 그래서 미리 짐도 다 챙겨 왔습니다만?”
“으엥?”
양영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분명 수련은 필요 없다고…….”
“아아, 그거요? 물론 힘든 수련은 필요도 없고 하게 만들 수도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꼴은 갖춰야지요. 그 뭐냐…… 아, 경공이라고 하나요? 그런 것을 대충 익히면 그래도 무림인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는 해 놔야 천하무도회에 가서도 망신은 안 당하겠지요.”
양영천이 이번에는 뒷목을 잡았다.
“뭐…… 뭐라? 천하무도회?”
“예. 아무래도 무림인으로 이름을 알리려면 그 자리가 제일 빠르지 않겠습니까? 마침 다음 천하무도회가 다가오고 있으니 때를 맞춘 듯하군요.”
천하무도회란 오 년에 한 번씩 강호인들이 모여 자웅을 겨루는 자리였다.
말이 강호인이지 사실 참가 자격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대개는 구파일방의 인물들이 참석해 제 제자들을 뽐내는 자리라고 봐야 했다.
어쨌거나 각지의 강호인들이 한 번에 모이는 큰 자리이니만큼, 이름을 알리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끄응……. 그, 그렇긴 한데…….”
양영천은 망설였다.
다음 천하무도회는 일 년이 채 남지 않았다. 한 열 달쯤 남았을 것이다.
아직 때가 아니었다. 종남이 천하무도회에 나가는 때는, 일대제자 지강백이 종남의 모든 무학에 통달하는 시점이어야 했다.
제삼십팔 대 장문인은 말씀하셨다. 종남의 무학은 어느 문파에 견주어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고. 다만 대성하는 이가 드문 것뿐이라고.
종남의 무학을 모두 대성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일대종사가 되고도 남음이라고.
양영천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지강백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천하무도회에 서는 날. 그래서 그가 그 해의 천하제일기(天下第一旗)를 얻는 날.
종남파가 건재함을 만천하에 증명하는 날이 될 것이다. 양영천은 그날을 위해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천하무도회란 아무나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오. 무공 한 줄 모르는 자가 함부로 끼어들 수도 없는 곳이고. 천하무도회는 안 될 말이오.”
“저런. 그럼 매우 곤란한데요. 저희 도련님께서는 이미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굳게 드신 터라…….”
“마음을 드시거나 말거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게 아니겠소.”
“안 되는 이유가 혹시 종남파에는 참가 자격이 없어서인가요? 천하무도회가 구파일방의 제 집 잔치 같은 것이라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그렇다면 더 이상 구파일방에 끼지 못하는 종남은…….”
“떽! 그 무슨!”
양영천이 왈칵 핏대를 세웠다.
사실 지강백더러 너는 좀 나가 있거라, 하고 점잖게 말하면 되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당황한 터라 그런 생각 같은 건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지강백이 현실을 마주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필사적인 마음뿐이었다.
“천하무도회라 하셨소? 까짓, 열 달이나 남았으니 어떻게든 준비해 봅시다.”
필목현이 표정을 바꿔 웃었다.
“든든한 말씀입니다. 이리 간단히 도련님의 변덕을 처리할 수 있다니요. 보통은 뭘 하겠다 하시면 이보다 훨씬 더 번거로웠지요. 돈은 또 얼마나 많이 드는지…… 열 달에 오백 냥이면 싸게 먹힌 거지요. 정말 다행입니다.”
도련님의 충실한 가신은 안도인지 험담인지 모를 소리를 매우 기쁘다는 투로 말했다.
반면에 양영천은 부디 이 게으른 도련님이 열 달 안에 변덕을 부려 마음을 고쳐먹길 빌기 시작했다.
‘아이고, 조사님들. 못난 저를 용서하십시오…….’
양영천은 속으로 조사님들을 불렀다. 지금껏 종남파를 굽어살피사 지강백 같은 제자를 보내주셨으니 남은 열 달 사이에 어떻게든 다른 것도 살펴주시리라 믿으며.
“그럼 그리 하는 것으로.”
“얘기가 다 된 것 같군요. 잘됐습니다, 도련님.”
필목현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도련님께 말을 건넸다.
살랑살랑 대던 부채가 그즈음 나른하게 멎었다.
“아, 그런데.”
도련님이 너무 잘생기신 입술을 움직였다.
“뭐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도련님?”
숨 쉬는 것도 가끔 귀찮아한다는 그 엄청난 게으름이 표정에서도 드러났다. 도련님은 너무 잘생긴 얼굴로,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열 달이나 여기서 지내야 하면, 그동안 내 시중은 누가 들지?”
“그야 당연히…….”
필목현이 양영천을 바라보았다. 양영천은 설마 장문인인 나를 쳐다보는 거냐며 지강백을 바라보았다.
지강백은…….
“뭐……?”
바라볼 사람이 없었다.
왜냐. 제자 하나 사부 하나, 장문 하나 일대제자 꼴랑 하나인 이 박복한 사문에서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까지 도맡아 하는 사람은 그였으므로.
그 말은 새로 생긴 사제의 밥과 빨래와 청소까지 그가 해줘야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기도 했다.
“시중이라니?”
지강백의 눈초리가 굳었다. 굳은 눈매는 그를 매우 사나워 보이도록 만들었고, 양영천과 필목현은 동시에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나 도련님은 아니었다.
탁.
도련님의 하얀 손목이 우아하게 꺾어지며 부채가 접혔다. 도련님이 부채 끝으로 지강백을 가리켰다.
“아아, 앞으로는 네가 시중을 들겠다는 소리야?”
“……너라고?”
“그래, 너.”
도련님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나태하고 나른하게.
그래서인지 그는 고운 외모에 비해 묘하게 퇴폐적인 느낌을 주었다.
“시종치고는 눈빛이 아주 건방진데. 이 몸을 그렇게 노려봐도 된다고 누가 허락했지?”
“뭐 이런……!”
지강백의 주먹이 꿈틀대는 사이,
“강백아!”
양영천이 재빨리 지강백의 팔을 붙들었다.
비록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사부의 간절한 눈빛이 무얼 말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이놈. 참아야 하느니. 지금 쌀독이 비었지 않느냐.
지강백은 사부님 체면을 봐서, 그리고 사부님 드실 고기반찬과 하얀 쌀밥을 위해서 이를 지그시 물고 참았다.
“나는 시종이 아니라 네 사형이 될 사람이다.”
“아아, 그래……? 그래서?”
“예의를 갖춰. 나도 그럴 테니. 너 말고 사형이라고 해라.”
도련님이 입매를 느른하게 움직이며 피식 웃었다.
“……돈 주고 한 사문이 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뭐,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그래.”
“예의는 챙겼으니 그럼 하던 말을 마저 할까. 내가 지금 목이 말라서 말이야. 차 좀 가져와. 이딴 싸구려 차 말고. 내가 마실 수 있는 걸로.”
도련님의 미소가 짙어졌다.
“사형.”
지강백은 깨달았다.
세상에는 수많은 미친놈이 있고, 하필이면 그 미친놈 중 하나가 자신의 사제가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하고많은 미친놈 중에서도 돈 많은 미친놈이 제일 상대하기 더럽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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