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1화 (1/346)

제1화 감 떨어지던 날

인생에서 가장 무의미한 짓은 감나무 아래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이라 했던가.

그러나 인생은 워낙 예상치 못한 것이라서, 때때로 노랗게 익은 감이 저절로 나무에서 떨어지는 기연이 찾아오기도 했다.

지금은 바야흐로 그런 기연이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

때와 먼지가 잔뜩 앉은 초라한 도포를 걸친 도사가 눈을 크게 뜨고, 남의 집 담벼락 아래 서서 곧 떨어질 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아무나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기연이라 하는 것이다. 때마침 도사에게는 지금 이 기연이 꼭 필요할 듯싶었다.

비쭉 마른 얼굴과 거친 살갗을 보면 그가 얼마나 굶주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기연은 그런 이가 얻어야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엥?”

다음 순간 도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감이 떨어지면 바로 똑 굴러갈 그 자리에, 웬 꼬마 아이가 와서 턱 하니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허, 이것 참…….”

아무리 눈 먼 감에 임자 없다지만 이렇게 경우 없는 꼬맹이를 다 보나 싶어 혀를 찼다.

그러나 또 꼬맹이를 내쫓을 수도 없는 게, 아이의 행색은 도사보다 몇 배나 더 애처로웠던 것이다.

아이가 나 불쌍해요,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낡은 누더기며 까치집이 돼버린 머리를 보면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후…….”

도사는 하늘 한 번 바라보고, 감 한 번 바라보고, 이어서 땅을 향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뱃속에 뭘 넣는 것이 얼마 만이던가.

저 감은 그저 감 하나가 아니었다. 하늘이 그에게 주신 기연이었다. 기연을 그리 쉽게 포기하는 바보가 어디 있을까.

더군다나 지금,

꼬르르르륵.

뱃속이 기연을 기다리며 이렇게 아우성을 치는데.

도사는 눈에 힘을 주었다. 정 안되면 아이와 감을 갈라 먹을 생각까지 하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암. 그리 쉽게는 안 되지.

기연은 그리 함부로 오고 그러는 게 아니다. 그러니 함부로 양보할 것도 못 되지.

도사가 그리 생각하며 홀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헉…….”

아이가 갑자기 숨을 훅 들이켰다.

이유는 뻔했다. 제3의 인물이 등장했던 것이다.

제3의 인물은, 한쪽 팔이 없고, 한쪽 눈은 감겼으며 그나마 하나 남은 팔로는 지팡이를 짚고 한쪽 다리를 절룩대고 있는 거지였다.

도사와 아이의 꾀죄죄한 행색을 전부 합해도 그보다 더 불쌍해 보이진 않을 것이다.

“…….”

“…….”

도사와 아이의 얼굴이 마주쳤다.

아이의 얼굴에는 제 배고픔보다 남의 배고픔을 위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살신성인의 갈등이 스쳐갔다.

도사는 문득 콧방울이 시큰한 것을 느꼈다.

‘저 쥐방울만 한 게. 그래, 저도 그리 박복해 보이는 것을. 그런데도 저보다 못한 남을 더 위하겠다고……. 내 반평생을 도인으로 지내왔지만 어찌 글 한 줄 모르게 생긴 아이보다 생각이 못했을꼬.’

도사는 생각했다.

까짓 두 눈 딱 감고 저 감은 양보하기로. 배고픔은 달리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도사가 등을 돌려 몇 걸음 물러나는데,

툭.

때를 기다리던 감이 드디어 가지에서 떨어졌다.

감은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가장 좋은 위치에 서 있던 아이의 헤진 옷깃 속으로 쑥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으잉?”

이렇게 소리친 외팔이 애꾸 절름발이 거지가 두 눈을 번쩍 떴다. 텅 비어 있던 소매에서 갑자기 한 팔이 불쑥 나와 아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거 이리 내놔라!”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아이의 옷깃을 뜯어 툭 굴러 떨어지는 감을 잽싸게 주운 거지는 멀쩡해진 두 다리로 휑하니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런! 게 서지 못할까!”

도사는 이제껏 외팔이 애꾸 절름발이 거지인 줄 철석같이 믿었던 사기꾼 놈을 뒤쫓아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감을 양보한 것은 아이였지, 저런 악질 사기꾼이 아니었다.

그러나.

쏜살같이 달려도 모자랄 몸이 우뚝 멈춰서 버렸다.

보았던 것이다. 감을 빼앗기자마자 아이가 어떻게 하는지를.

아이는 그 잠깐 사이에 당황을 털어냈다. 그리고 재빠르게 눈길을 돌려 길바닥의 돌멩이를 잡은 다음, 사기꾼을 조준해 던졌다.

아이가 던진 돌은 시원하게 허공을 날아 사기꾼의 바른편 정강이를 때렸다.

“끄엑!”

사기꾼이 발을 꼬며 넘어졌다. 아이가 잽싸게 달려가 사기꾼의 손에서 감을 가로챘다.

“이 쥐 거시기만 한 애새끼가!”

사기꾼이 상소리를 뱉어내며 아이의 바지자락을 와락 잡아당겼다.

쿵!

아이가 감을 쥔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사이 몸을 일으킨 사기꾼이 아이의 등짝을 발로 걷어찼다.

“그거 어서 내놓지 못하겠느냐! 이대로 등을 콱 분질러 버릴까 보다!”

아이는 넘어지는 와중에서도 감을 쥔 손을 제 몸으로 감추었다. 사기꾼이 두어 번 더 등을 걷어찼으나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이 어르신 코딱지만도 못한 애새끼가……!”

턱!

도사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무얼 어떻게 했는지, 보이지도 않는 걸음으로 슥 다가간 도사는 방금 사기꾼이 아이에게 한 것처럼 그를 냅다 걷어찼다.

“으아아악! 아이고, 나 죽는다아!”

사기꾼이 꽤액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그마저도 도사는,

“시끄럽다.”

라고 말하며 목덜미를 한 번 지그시 밟아주었다. 사기꾼이 곧 눈을 뒤집으며 정신을 놓았다.

“괜찮으냐?”

도사는 점잖게 말하며 아이를 일으켜주었다. 아이는 한 손으로는 여전히 감을 꼭 쥔 채였다.

다 일어선 아이가 도사에게 꾸벅 절을 했다.

“어디 다친 데 없고?”

기분 탓일까.

이렇게 묻는 도사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듯했다. 아이를 보는 눈빛이 좀 전과는 다른 듯도 보였다.

아니, 사실 가장 떨리고 있는 것은 가슴이었다.

‘세……세상에나! 정말로 기연이 있구나!’

도사는 지금 두 눈에 불이 붙은 기분이었다. 눈이 번쩍 뜨인다는 게 무슨 말인지 문자 그대로 알 수 있었다.

‘이런 기재를 찾다니! 감 따위가 다 무에냐! 이것이 진정 기연인 것을!’

도사가 제자로 삼을 인재를 찾아 떠돈 세월이 장장 구 년하고도 반.

오늘에서야 인재를 찾은 것이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았다.

이 아이가 처음 감을 빼앗겼을 때의 그 침착성, 돌을 던질 때의 민첩성과 정확성을.

어디 그뿐이랴. 신법 한 번 배운 적 없었을 아이의 달음박질이 어찌 그리 경쾌하던지. 아이는 본능적으로 몸을 쓰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발로 채여도 신음 한 번 내뱉지 않는 독기와, 몇 대 맞은 것 가지고는 끄떡없다는 저 맷집까지.

아이의 자질은 정말이지 보기 드문 것이었다.

“…….”

아이는 괜찮냐는 물음에는 대꾸 없이 손에 쥔 감을 물끄러미 보았다. 온몸으로 사수한 감은 그 난리통에도 멀끔했다.

아이는 도사의 얼굴과 감을 번갈아 보더니 감을 양손으로 쥐었다. 감을 쥔 손가락에 힘이 뿌득 들어갔다.

“지금 뭐 하는 게냐?”

아이의 볼이 달아올랐다. 생각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을 때 보통 사람들이 짓곤 하는 표정이었다.

“감을 쪼개려는 게냐?”

아이가 멈칫, 시선을 들었다.

“네 감을 왜? 아아, 설마…… 내게 나눠 주려고?”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사는 순간 눈시울이 벌게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이럴 수가!’

그 순간 확신이 왔다. 바로 이 아이라는 것을. 지난 구 년 반은 이 아이를 만나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을 뿐이다.

그간 자질이 있는 이는 몇몇 보긴 했다. 그러나 딱히 이놈이다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쪽 자질이 풍부하면 저쪽 자질은 모자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누더기 자락 사이로 아이의 근골이 눈에 들어왔다. 천상의 근골이었다.

거기에 더해 저 조그만 게 신의를 지키려는 심정마저 지니고 있다니.

그것은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고 근골이 반듯한 기재라 해도 쉬이 지니지 못하는 가장 마지막 조건이었다.

‘그래, 너로구나! 이건 바로 조사님이 도우신 게지! 암만……!’

도사는 잔뜩 붉어진 눈시울로, 주책없이 콧물을 크르릉 들이키며 아이에게서 감을 건네받았다.

“이리 다오. 아무래도 너보다는 내가 잘 쪼개겠다.”

아이는 그를 완전히 믿는 눈치인지 얌전히 감을 건네주었다.

도사는 감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다른 손은 수도(手刀)로 만들어 감을 내리쳤다.

탁, 하는 둔탁한 소리 대신 싸악, 하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우와!”

이제껏 말이 없던 아이가 입을 딱 벌렸다.

감은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깨끗하게 반으로 갈렸다. 어린 눈에도 그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엣헴.”

감탄에 여념이 없는 그 순수한 눈을 앞두고 도사는 짐짓 어깨를 폈다.

“이것은 홍엽수라고 한다. 본문의 절학 중 하나이지. 보통 사람 같으면 엄두도 못 내는 이런 것을 무공이라고 한단다. 어떠냐, 내 밑에서 무공을 배워보겠느냐?”

“아…….”

아이가 벌어진 입을 한 채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미 운명은 시작되었다.

……고 종남파 제삼십구 대 장문인 양영천은 그로부터 십칠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굳게 믿고 있었다. 십 년 가까이 강호를 이 잡듯 뒤진 끝에 찾아낸 제자는 제 운명이자 종남파의 운명이라고.

그러니 약간의 거짓말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듣기에 따라서 약간이 아니라 꽤 심각한 거짓말일지도 모르지만.

그 거짓말은 장장 십칠 년에 걸쳐 이어지는 중이었다.

* * *

휘이익, 슥!

사삭!

허공을 가르는 칼날 소리는 각을 세운 듯 정갈했다.

바람마저도 크기를 맞춰 반듯하게 베어낼 것만 같은 소리였다.

상체를 드러낸 한 청년 무인이 허공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

그곳에 달빛 조각 같은 칼 그림자가 허공을 갈랐다.

스슷, 슷!

낙화하는 검영 하나하나가 대천강검의 오의를 품고 흩날렸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청년의 나이를 짐작해 본다면 도무지 믿지 못할 성취였다.

“허, 허허……!”

그런 청년의 모습을 훔쳐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청년의 사부, 양영천이었다. 연무장 한구석에 몸을 감추고 있던 양영천이 두 눈에서 번쩍 불을 뿜었다.

“서, 설마……. 벌써 연환강을 완성했다는 말이더냐!”

연환강.

종남파의 절학이라는 대천강검의 마지막 초식이다. 달리 말하면 대천강검을 완성했다는 뜻이 된다.

놀라움은 잠시, 곧이어 양영천의 입이 양옆으로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으, 으하……! 내가 이리 제자를 잘뒀…… 흡!”

웃음소리가 터져 나올 뻔하다 다급히 멎었다.

양영천이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은 탓이었다. 그도 모자라 그는 발자국 소리를 죽여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려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그렇게.

하지만.

“아, 사부님 오셨습니까?”

무공이 형통하듯 오감도 뻥뻥 뚫린 모양인지 제자가 귀신처럼 양영천을 알아보았다.

“아, 그게 좀…….”

제자가 검을 갈무리하고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 날렵한 몸놀림에 양영천은 또 입이 헤벌쭉 벌어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벌써 주무실 시간이 아닙니까? 왜 잠을 이루지 못하시고…… 아, 혹 제자의 수련을 봐주시러 오신 겁니까?”

제자가 양영천을 향해 훤히 웃었다.

그러자 인상이 대번에 달라졌다.

눈빛이 너무 사납고 강렬한 탓에 무뚝뚝한 것을 넘어 싸늘해 보이는 제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부드러운 미소 탓에 본연의 준미한 생김새가 훈훈하게 드러났다.

그 또한 양영천에게는 또 다른 자랑거리였다.

조사님들께서 보우하사 하늘에서 친히 내려 보내신 것 같은 이 제자는 도무지 빠지는 게 없었다.

재능이면 재능, 노력이면 노력, 인성이면 인성. 게다가 걸출한 외모까지.

물론 가끔 사람 오금 저리게 하는 저 날카로운 눈빛은 좀 과하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건 다른 수많은 장점에 비춰볼 때 흠도 아니었다.

세상 어느 사부가 이런 제자를 길바닥에서 감 줍듯 줍겠는가. 암만 생각해도 제자는 분명 종남파의 복덩이였다.

그러나.

“아, 봐주긴 뭘? 오늘은 내 그저 잠이 안 와 나왔느니.”

양영천에게는 눈에 백 번을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자에게 필사적으로 감춰야 하는 사실이 있었으니.

“사부님. 제자가 방금…….”

방금 연환강을 완성했습니다. 좀 봐주십시오, 사부님.

그런 말이 나오리라는 것을 직감한 양영천이 재빨리 선수를 쳤다.

“아, 방금 뭐? 연환강을 완성한 것 같다고? 나 원 참. 종남의 제자라면 서당개 천자문 떼듯 삼 년 만에 떼는 것이 대천강검이거늘. 그게 뭐 그리 큰 자랑거리라고 이 연로하신 사부를 붙들고 밤이슬을 맞히는 게야.”

“……예?”

제자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양영천은 저도 모르게 쭈뼛 뒷목의 솜털이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그야 물론 저 완벽한 제자가 사부님께 살기를 일으킬 리는 없겠다만, 그냥 어쩌다 원래 저렇게 타고난 것일 뿐이라지만, 저 눈빛은 가끔 해도 너무할 때가 있었다.

“남들은 삼 년 만에 뗍니까?”

물론 아니었다.

자고로 대천강검이라는 것은 종남의 수많은 무학 중에서도 상승의 검술로, 지난하기는 으뜸이요, 그래서 대성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한 세월이었다.

“당연하지, 이놈아! 네놈이 대천강검을 익힌 지 얼마나 됐지? 오호라, 그래. 오늘이 딱 삼 년하고도 육 개월 보름이 되는 날이렷다?”

날짜를 계산해 보던 제자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통 무심해 보이던 사부가 언제 그런 걸 일일이 손가락 꼽아 세고 있었나 싶기도 할 것이다.

“그쯤 되는 것 같습니다.”

“남들보다 반 년 하고도 보름이나 더 걸렸으면! 으스댈 게 아니라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고 더욱 정진해야지! 예끼, 이 아둔하고 모자란 놈.”

결코 아니었다.

아둔하고 모자라기는커녕 향후 백 년 동안 내리 칭찬만 해줘도 모자랄 일이었다.

삼십구 대에 걸친 종남파의 장구한 역사 동안 삼 년 반 만에 대천강검을 완성한 인물은 맹세코 제자가 처음일 것이다.

“그리고, 종남의 무학이 어디 대천강검 하나만 있다더냐? 대천강검을 끝냈으면 어서 다른 무공을 배울 생각을 해야지! 네 나이 벌써 스물둘이다. 그래가지고서 언제 종남의 수많은 무학을 다 익히겠느냐!”

검법만 해도 여섯 가지나 되는 종남파였다.

그 많은 것을 한 명의 무인이 온전히 다 익힌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양영천은 태연히도 내뱉고 있었으니, 이는 결코 제자가 미워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인고 하니.

“어흠흠. 그러나 별수 있겠느냐. 내 기왕 너를 제자로 삼은 것을. 네 비록 천하가 우러러보는 우리 종남의 무학을 모두 전수하기에는 아주 많이 부족하다만! 너무너무 부족해서 조사님들께 부끄러울 지경이다만! 자질이 부족하다고 너를 내칠 수도 없는 노릇. 모자란 줄 알면 더욱 정진하도록 하여라!”

제 잘난 것을 안 제자가 혹시라도 종남을 버리고 더 나은 미래를 찾아 떠나갈까 봐서였다.

섬서성 종남파.

한때는 구파일방의 일원으로, 중원 무림의 아홉 기둥 중 하나라 불리던 대 명문정파였다.

한때는 무림의 천하북두라던 소림의 위세가 부럽지 않았다. 한때는 이 깊은 산자락 저 아래까지 제자가 되겠다며 찾아오는 이들로 항상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였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차오르면 기우는 때도 있으니.

날이 갈수록 세가 기운 지금의 종남파는 어찌 된 게 장문인 하나, 그 장문인이 감 줍다 함께 주워온 일대제자 하나, 이렇게 단둘만 남은 곳이 되었다.

이런 것을 유식한 말로 패가망신이라 하였던가.

그러한 곳에.

천하제일의 기재가 제자로 들어왔으니.

그 사부는 사실을 몽땅 알게 된 제자가 제 발로 떠날까, 혹은 어떤 눈먼 고수가 와서 이 귀하디귀하신 제자를 채어갈까, 시도 때도 없이 안달복달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아, 드…… 듣고 있느냐? 이놈이 왜 대답이 없어. 내일부터 태을분광검을 연마하라 했다!”

“들었습니다, 사부님.”

제자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부는 이놈이 이제 욕먹기 싫어졌나 싶어 움찔했다.

하지만 제자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못난 제자라 송구합니다, 사부님.”

“아, 그…….”

평소에는 표정이 없는 제자였다.

그런데 사부를 대할 때면 항상 눈매가 부드러워진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사부를 대하는 극진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사부님. 잠이 오지 않는다고 이리 늦게까지 찬바람을 쐬고 다니지는 마십시오. 부족한 제자를 걱정하시는 마음은 백 번 감사할 일이나, 그로 인해 연로하신 사부님께 누라도 끼치게 되면 제자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자가 잠을 줄여서라도 모자란 재능을 메울 테니 사부님께서는 부디 건강에만 신경 쓰십시오.”

“그…….”

눈물이 울컥 솟구쳐 말문이 막혔다.

지난 십칠 년간 모자란 놈, 아둔한 놈 소리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어가며 제자는 종남파의 무학을 이토록 갈고 닦았다.

그뿐이랴.

물 긷고 빨래하고 밥 지어 사부를 보필했다. 그야 일꾼 하나 없는 이 첩첩산중에서 사부가 밥할 수는 없으니 제자가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게 양영천의 주장이었지만, 그래도 안쓰러운 마음은 부뚜막 연기 못지않았다.

변명을 하자면, 이 어여쁜 제자를 구박하는 일은 양영천에게도 몹시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런데도 제자는 늘 한결같았다. 아침상은 늘 따듯했고 밤이 되면 이부자리를 곱게 펴 제 체온으로 데워 놓았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이…… 이놈이……. 어째 그런……,”

크르릉.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양영천이 흐르는 콧물을 들이켰다.

제자는 사부의 때 아닌 눈물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 사문의 앞날에 대한 지대한 걱정으로 사부가 눈물마저 내비친다 여겼다.

“면목 없습니다, 사부님.”

제자는 묵묵히 제 소맷자락을 내밀었다. 다른 게 없으니 여기에라도 콧물을 닦으라는 뜻이었다.

계속 콧물을 삼킬 수도 없었던 양영천은 제자의 옷자락을 끌어당겨 힘껏 코를 풀었다.

‘아이고, 이 어여쁜 제자놈아. 내가 네놈을 앞으로 백만 년 업고만 다녀도 모자랄 지경인데……. 이 녀석은 어찌 이리 착해 빠져서는…… 이게 다 쌩 거짓인 줄도 모르고…… 아이고오, 조사님들. 대체 이놈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제자의 대천강검 대성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고기반찬이라도 먹여야겠다.

“으흠흠. 얘, 강백아.”

눈물 콧물을 수습한 양영천이 짐짓 헛기침으로 말문을 열었다.

사부가 눈물을 그치기만을 기다렸던 제자, 지강백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사부님.”

“이 사부가 내일은 홍소육이 먹고 싶나니.”

너 고기반찬 좀 해먹어라, 이리 대놓고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니 일단 말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늘에 맹세코 홍소육이 먹고 싶은 게 아니었다. 제자에게 먹이고 싶은 것이지.

“홍소육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나 되묻는 지강백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굳어졌다.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사부님.”

“응? 뭬야? 왜 안 돼? 귀찮으냐?”

“그런 게 아니라…….”

지강백이 그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린다. 이렇게 난처해하는 지강백의 모습은 몹시 보기 드물었다.

심각성을 인지한 양영천의 표정도 제자를 따라 구깃구깃해졌다.

“그런 게 아니라, 뭐?”

대답은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흘러나왔다.

“찬을 만들 만한 고기가…… 없습니다.”

“무에? 고기가 없어?”

지강백이 소리 없는 한숨을 삼키며 한 마디 덧붙였다.

“예. 그리고 조만간 쌀도…….”

“쌀이 뭐? 아니, 설마 쌀도 떨어질 때가 되었단 말이냐?”

“예, 사부님.”

머릿속이 캄캄해지는 것 같다.

양영천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듬어 팔 만한 물건이 뭐가 남았나 생각해 보았……

……으나 하나도 없었다.

장장 십칠 년이었다.

문하의 제자가 모조리 떠나고 양영천과 지강백 단둘만이 사문을 지켜온 지.

수입이 있을 리 없었다. 그간 쥐꼬리만큼 남아 있던 재산은 이미 싹싹 긁어 써버렸고, 돈 될 만한 건 조사동의 향로까지 내다 팔았다.

“허, 허허…….”

다리에 힘이 풀린 양영천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전에 지강백이 양영천을 붙들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사부님.”

“……응? 네 지금 뭐라 했느냐?”

지강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진지한 얼굴이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나 더 진중해 보였다. 쌀이 간당간당해지는 시점에서 미리 생각을 해두었으리라.

“제자가 산짐승이라도 잡아다 파는 게 어떨까 생각합니다만.”

“응?”

지강백과 눈을 맞춘 양영천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놈이 사냥에 나서면……

뭐든 잘하는 놈이니 곧 곰이며 호랑이며 여우며 쑥쑥 잡아들일 테고…… 그래서 저잣거리에 내다 팔면…… 당연히 이런 엄청난 사냥꾼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느냐며 떠들어댈 테고……

그럼 이래저래 얼굴도 팔리고 이름도 팔리고……

그러다 이놈이 돈 잘 번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분명 별 개잡놈의 파락호들이 시비를 걸 테고……

그렇다면 이놈이 그간 배운 무공으로 놈들을 단매에 때려잡아 소문이 쫙 퍼질 테고……

그때 어디선가 짠하고 남의 제자 따위나 탐내는 패륜고수가 등장해서……!

“아, 안 된다!”

안 될 말이었다.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돈은 필요합니다.”

“안 돼! 네놈 실력에 무슨 사냥씩을……! 절대 안 된다. 그 젊은 나이에 벌써 황천 땅을 밟고 싶은 게냐!”

“사부님. 걱정은 넣어 두십시오. 아무리 아둔한 제자라 하나 무공을 익힌 세월이 있는데 설마하니 토끼 같은 날짐승 하나 못 잡겠습니까.”

네놈이 어디 토끼만 잡겠냐! 멧돼지를 떼로 잡고도 남을 놈이니 그렇지!

“안 된다! 차라리 이 사부가 돈을 벌겠다.”

급하니 별말이 다 튀어나왔다.

“예? 그럼 사부님이 사냥을 다녀오시겠습니까?”

……그건 좀 자신 없었다. 그러나 차마 사냥은 못 한다,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예끼, 이놈. 이 연로한 사부가 어디 짐승을 쫓아 험한 산길을 뒤지겠느냐. 그야 물론 이 사부의 구상검과 유운비수라면 능히 용도 때려잡을 수 있겠다만! 그래도 고수가 함부로 살생을 하고 그러면 안 되느니라.”

지강백은 ‘살생을 저어하신다면서 왜 고기반찬은 그리 찾으십니까.’ 라는 되바라진 말을 하진 않았다.

“그럼 무얼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번에도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양영천이 아는 한 강호의 문파들이 돈을 벌어들이는 방법은 하나였다.

“다른 구대문파가 하는 대로 하면 되느니라. 우리 종남도 제자를 들여 입문금을 받자꾸나.”

“예……?”

지강백이 턱을 모로 기울였다. 그가 듣기에는 퍽 이상한 말이었다.

“그럴 사람이 있겠습니까? 지난 십칠 년간 아무도 없었는데요.”

“예끼, 이놈! 지금 이 사부 말에 토를 다는 것이냐.”

양영천이 태연을 가장하며 듬성듬성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간 이 사부가 너 하나 키우느라 본문의 일을 소홀히 하여 그런 것이다. 허나 네가 대천강검을 대성하였으니, 이제 이 사부가 숨 좀 돌려도 되겠다. 하산하여 제자를 데려오겠느니라.”

“아, 그렇군요.”

지강백은 그 말을 믿었다.

안타까운 노릇이었지만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일, 특히나 강호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양영천이 기를 쓰고 이 고립무원의 본산에 가둬두다시피 무공 수련에만 전념하게 한 결과였다.

거기에 더해 지강백은 양영천을 진심으로 따르고 신뢰했다. 물짐승은 사막에서 잡아오는 것이라 해도 믿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시간은 벌었다. 양영천은 지강백을 두고 홀로 하산하여 어디서든 돈을 융통해 올 요량이었다. 아무리 다 망한 문파라 하나 근처에 사는 속가제자 하나쯤은 있었다. 구차해도 할 수 없었다. 푼돈이라도 빌려 오는 수밖에.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진짜로 제자를 들여 입문금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양영천은 그런 헛꿈으로 시간을 낭비하기엔 속세의 때를 너무 탔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돈 받고 들어온다면 몰라도 제 돈을 갖다 바치며 들어올 리가 없지.’

현실을 직시하는 입맛이 씁쓸했다.

“그러니 이 사부는 내일 하산하겠다. 그리 알고 있거라.”

“예, 사부님. 부디 살펴 다녀오십시오.”

“오냐.”

그러나 양영천은 미처 알지 못했다.

강호는 넓고,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인간군상이 있다는 걸.

그중에는 쫄딱 망해 현판마저 뜯어다 팔아야 할지도 모를 이곳 종남파에, 거금을 내밀며 정식입문을 희망하는 미친놈도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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