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98화
제사장이 치밀하게 그린 그림에서 나라는 존재는 그저 밑그림일 뿐이었다.
화룡점정(畵龍點睛).
화려하나 생명이 없이 그려진 용이 바로 나였다.
그리고…….
그림뿐인 용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 제사장은 정점을 찍으려 하고 있었다.
정점을 찍어 탄생하는 것은 새로운 신(神).
지금 제사장은 나에게 정점을 찍기 위해 이 자리에 있었다.
새로운 신을 만드는 기적 같은 일에 필요한 것은 긴 기다림과 희생이었다.
수많은 진천인과 무인들이 흘린 피는 신의 혈(血)이 되었다.
고통과 상실감은 신의 탄생을 위한 산고(産苦)였으며, 내게 쥐여 주었던 신의 조각은 살이 되었다.
용보다 훨씬 더 고귀한 존재가 긴 시간끝에 나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던가.
바라트의 신도였다면 영광되었다 할지 모르나, 난 신도가 아니었다.
내가 믿는 것이 있다면 오직 희망이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인간의 희망(希望).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미래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갖췄건만, 신의 탄생을 위한 하나의 밑바탕에 지나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나를 바라보는 제사장이 보였다.
“이제야 알았나 보군.”
그는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수백 년을 이어온 제사장의 염원이 이루어지기 직전인 것을.
“나를…… 어떻게 할 셈이지?”
제사장의 기쁨과는 달리, 내게서는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무엇을 하려고?”
“네 몸에 바라트의 조각을 심을 것이다.”
“일곱 조각 모두를 말인가?”
“그래.”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은 바라트의 조각과 네 몸속에 있는 조각들이 합쳐지는 순간, 진정한 혈신의 육체가 만들어지지.”
“……하나만 묻자.”
들떠 있는 제사장에게 어둑한 눈빛이 닿았다.
“신의 육체로 태어나 동화율을 높인 과정들이 모두 바라트의 그릇이 되기 위함이었나?”
“당연하지. 신을 담는 그릇이 그냥 만들어질 리 있겠느냐? 제련과정은 필수였지.”
이제는 대놓고 나를 그릇이라 부르며 겪어온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제련이라 부르는 제사장.
그를 보는 시선에 분노가 실렸음에도 제사장은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이 모든 걸 계획하고 실행하기까지 결코 쉬운 건 아니었어. 실패할 가능성도 컸지. 다른 세계로 와서까지 신이 재림할 육체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으니까.”
“……만약 실패했다면?”
“여기서 끝이었겠지.”
그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성공했다.”
제사장의 얼굴에 뿌듯한 감정이 차올랐다.
반면, 내 얼굴은 굳어졌다.
“바라트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
질문을 받은 그가 큰 목소리로 웃어댔다.
“하하! 무려 신이 되는 일이다. 가만히 있으면 신이 되는데 그걸 거부한다고?”
“원했던 일이 아니니까.”
정색하며 답하는 모습에 제사장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뭐, 다 생각은 다른 법이니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말이야.”
말을 하는 제사장의 눈이 사나움을 머금었다.
“네놈이 거부하는 걸 가만히 두고 보고 있으리라 생각하나?”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그에게서 검은 연기가 번져 나왔다.
보기만 해도 질식할듯한 칠흑과도 같은 흑연은 주위를 넘실대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킨 제사장의 눈이 시뻘건 불을 품은 듯 번득이고, 그에게서 뻗어 나간 검은 연기는 회오리 몰아치듯 휘날렸다.
휘리릭.
점차 몸집을 키우던 검은 회오리는 나를 중심으로 원을 빠르게 그려나갔다.
제사장의 몸은 어느새 검은 회오리와 한 몸이 되더니, 위협적으로 내 주변을 휘돌았다.
[너는─]
검은 회오리 속에서 붉은 눈빛이 나를 내려다보며 음습한 목소리를 내었다.
[처음부터 바라트의 새로운 그릇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이다.]
[그릇에게 의지는 필요 없는 법이니.]
[네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거라.]
“……운명?”
휘몰아치는 검은 태풍 속에서 울분을 담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개수작하지 마라! 남의 손에서 실험하듯 이뤄진 게 어떻게 운명이란 말이지?”
지금껏 스스로 개척하며 만들어갈 길이 곧 운명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나는 네놈이 만든 그릇이 아닌, 한 명의 인간일 뿐이야!”
운명이 어쩔 수 없이 몰아치는 회오리라면, 두 발로 굳건히 서서 거센 바람을 견디는 것 또한 인간이었다.
[감히…….]
쉽게 바라트의 그릇이 되지 않을 나를 보던 제사장의 붉은 눈이 분노를 뿜어냈다.
[벌레보다도 못한 인간 따위가 내 명을 거역해?]
강하게 휘몰아치는 검은 회오리는 흉포한 기운을 쏟아냈다.
[네게 선택권 따윈 없다.]
[넌 온전히 바라트의 재림을 받아들여야 할 터.]
[남은 신의 조각들은 네 의지와 상관없이 합쳐질 것이다!]
파앗.
제사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은 회오리 안으로 다섯 개의 빛나는 조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것들이 신의 조각……!’
칠흑처럼 검은 회오리와 달리 신의 조각들은 영롱한 빛을 뿜어내며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한순간 시선을 빼앗길 정도의 환한 눈부심.
신의 조각들은 곧이어 검은 회오리와 함께 내 주위를 빙글거리며 돌기 시작했다.
……두근.
그에 답하듯 심장에 심어진 바라트의 조각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천갑마저 남은 신의 조각들을 만나자 피부 겉면의 쇠들이 소름 돋듯 오소소 일어났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 안에서 들썩이며 서로를 끌어당기는 조각들.
“윽!”
순간, 강렬한 고통이 심장과 온몸에 전해졌다.
심장과 온몸에서 전해지는 극렬한 통각(痛覺).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날 보던 제사장에게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
[말하지 않았느냐?]
[바라트의 조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네 의지와 상관없다고 말이다!]
[순순히 네 운명을 받아들이거라!]
휘돌던 다섯 개의 날카로운 조각 중 하나가 오른팔로 날아와 박혔다.
“허억!”
첫 번째 조각이 날아와 박히고, 피할 틈도 없이 두 번째 조각이 왼 다리로 날아왔다.
촤악, 촥─!
세 번째 조각이 박힌 곳은 왼팔.
조각들이 살 속을 파고들 때마다 정신이 마비될 정도로 강렬한 통증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드드드.
조각들은 마치 몸속으로 파고들 듯 형태를 바꿔가며 내 몸을 지배하려 했다.
“……안 돼.”
정신을 잃을 만큼 아득해지는 찰나.
쐐액!
마지막 신의 조각이 오른 다리로 긴 호선을 그리며 쏘아졌다.
“헉!”
심장을 비롯한 모든 신체에 신의 조각이 박히는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정지했다.
마치, 새로운 몸을 탐색하는 것처럼 조각들이 일순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드디어.]
[신의 조각이 완전한 모습을 이루었도다!]
기쁨이 넘치는 제사장의 목소리와 함께 눈이 멀 만큼 환한 빛과 함께 강렬한 쾌락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화악─!
극렬한 고통 뒤에 이어지는 짜릿하다 못해 고통스러울 정도의 희열(喜悅).
머릿속이 텅 빌 정도의 고통과 쾌락이라는 커다란 간극 속에서…….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 * *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어두운 공간이었다.
‘여긴 어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은 회오리가 몰아치는 곳의 중심에 서 있던 나였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검은 어둠뿐이었다.
검회색의 구름 같은 연기로 사방이 둘러싸인 공간.
‘설마…… 신의 공간인가?’
바라트의 조각 중 하나가 가지는 힘이 신의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신의 공간 안에 있는 것일까.
의문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의해서 깨졌다.
[……너로군.]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무척이나 듣기 좋은 중저음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는 음성이 또다시 말을 뱉어냈다.
[흐음. 마음에 들어.]
흡족한 듯한 목소리를 내던 존재는 검회색의 연기 사이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붉고 긴 머리칼에 빛나는 구릿빛 육체를 가진, 아름다운 사내.
그러나 용맹스러우면서도 극강의 미(美)를 지닌 사내의 눈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맹수처럼 노랗게 빛나며 세로 형태로 가늘어진 눈동자는 그가 인간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면 앞의 존재가 가지는 이름은 단 하나였다.
“당신이…… 바라트, 인가?”
묻는 목소리가 떨려왔다.
신격을 지닌 그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제사장의 말대로 인간 따윈 정말 하찮은 미물에 지나지 않을 정도의 존재감.
진짜 신 앞에서 온몸이 떨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이름을 듣는 건 정말 오랜만이로군.]
기다란 손가락이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바라트란 이름보다는.]
[네 세상에서 불리는 혈신(血神)이 더 마음에 드는구나.]
바라트의 듣기 좋은 목소리는 날것의 섬뜩함을 담고 있었다.
나른한 그의 얼굴에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맛을 다시는 사내를 본 순간,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혈신이란 피에 미친 신(神).
저놈을 세상에 내놨다가는 지상은 시체가 가득 찬 폐허가 될지도 몰랐다.
진천의 세계에서야 다른 신들의 눈치라도 보았을 테지만, 지상에 존재할 신은 오직 그 하나였다.
내 모습을 한 괴물이 인간들을 먹어 치울 것을 상상하자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저놈을 내놔서는 절대 안 되었다.
혈신을 그대로 내놓았다가는 무림뿐만 아니라, 세상이 망할 테니까.
놈은 내 속을 읽었는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네 육체는 이미 신의 조각으로 신화(神化)된 상태다.]
[고작 정신만 남은 상태로 뭘 어쩌겠다는 것이지?]
정신만 남은 상태라는 것은, 마지막으로 바라트가 내 혼을 집어삼키기 전이라는 것을 뜻했다.
육체는 이미 흡수된 신의 조각들로 인해 반항해 볼 틈도 없이 다른 조각들과 합체되어 버렸다.
그러나 정신은 온전한 나의 것.
내 혼과 생명은 아직은 오롯이 내 의지 아래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네놈이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광오한 웃음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는 샛노란 눈동자가 머릿속을 훑는 것이 느껴졌다.
자꾸만 속마음을 읽는 놈을 보며 나는 최대한 생각을 지우며 이를 갈았다.
“인간이 신을 이기긴 쉽지 않겠지.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아.”
명백히 바라트를 도발하고자 꺼낸 말이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홀로 있었던 바라트는 내 말에 흥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불가능하진 않다라.]
[꽤 흥미로운 말이로군.]
샛노란 두 눈이 흥미를 가득 담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오자 더욱 거세지는 그의 존재감은 혼마저 날아갈 정도였다.
애써 정신을 부여잡는 가운데, 그의 나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 말은 날 이길 수도 있다고 들리는데?]
진천의 세계에서조차 상급신들이 체면을 내던지고 합공을 해서야 겨우 죽일 수 있었던 신이 바라트였다.
그런 자신을 고작 인간이 이길 수 있다니?
지금껏 신의 공간에서 정신만이 남아 자휘를 지켜보던 그로서는 꽤 흥미로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나는 바라트를 보며 애써 긴장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같은 조건의 자극이나 공격이 주어진다면 널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
[……뭐라?]
잠시 눈을 크게 뜨던 바라트가 곧이어 큰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그렇게 안 봤건만 네놈이 미친 게로구나.]
[감히, 인간이 신을 이긴다고?]
최상급 신인 그가 봤을 때 인간은 개미와도 같았다.
작은 생명들이 어떻게든 살고자 발버둥 치는 장면들이 어쩔 땐 가소롭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아무 이유 없이 짓밟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런 벌레 주제에 신을 이겨?
같은 조건의 공격이나 자극이라 해도 그의 힘 앞에서는 떨어져 나가는 이파리와도 같건만.
얼마나 웃긴 말이란 말인가!
간만에 즐겁다는 듯 광소를 흘리던 바라트가 잦아드는 웃음을 거두며 물었다.
[내기할까?]
이것은 고작 개미 주제에 신을 웃게 만든 일종의 즉흥적인 보답과도 같았다.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거지?”
내 물음에 바라트가 오만한 얼굴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