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97화
무라흔도 강하다고 생각했건만 신의 조각을 가진 제사장은 훨씬 더 강력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최상급 신이라니!’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졌다.
그때였다.
가슴에 있던 혈상의 마지막 팔 하나가 내려가다가 멈추는 것이 아닌가.
급히 꺼내어 보니 혈상의 팔은 완전히 내려가지 않은 채, 반만 내려와 있었다.
“……!”
이것은 제사장이 완전한 최상급 신의 힘을 갖추지 못함을 의미했다.
그나마 다행인 상황.
팔 하나가 신의 눈을 일 장씩 가린다고 치면, 반 장 거리를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제사장의 눈을 잠시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거대한 혈상의 모습이 된 제사장의 눈이 서서히 내가 있는 바닥으로 향했다.
희번덕거리는 제사장의 눈빛이 바닥으로 닿으려 하는 순간.
[……안 돼!]
천갑이 되어버린 과학자의 몸이 거대화된 제사장을 향해 땅을 박찼다.
높이 솟아오른 천갑의 주먹이 거대한 제사장의 얼굴을 빠르게 연달아 가격했다.
온 힘을 실은 과학자의 공격에도 제사장의 얼굴은 살짝만 돌아갔을 뿐,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퍼퍼퍽!
천갑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형을 움직이며 거대한 혈상을 공격했다.
그러나 최상급 신의 능력을 갖춘 제사장에게는 인간이 만든 천갑 따위야 가소로웠다.
[[고작 이건가?]]
비웃음 실린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작게 낸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속을 진탕 시킬 정도였다.
붉은 혈상처럼 네 개의 팔을 가진 제사장이 팔을 기괴하게 휘둘렀다.
휘익.
거대한 팔이 전광석화처럼 지나간 자리는 수십 개의 붉은 호선이 그려졌다.
눈 몇 번 깜빡할 시간에 천갑과 제사장의 공수는 백번 가까이 이어졌고, 네 개의 손은 결국 천갑을 잡고야 말았다.
[크윽.]
천재 과학자가 평생을 바쳐 만든 천갑이었다.
생명까지 버리며 만든 천갑이건만, 최상급 신이 가진 압도적인 힘에는 도저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우드득.
강력한 손아귀에 천갑이 구겨지며 과학자의 비명이 울렸다.
하지만 과학자가 누구인가.
음흉한 머리를 굴리던 그가 제사장의 힘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이기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지가 없어 보였던 천갑은 잠시간의 시간을 거쳐 이미 과학자의 생명과 영혼이 맞물려 한 몸이 된 상태였다.
혈상의 손에 잡혀 허우적대던 천갑의 눈에서 흰빛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내가 바란 것은…….]
말을 하는 천갑의 얼굴이 처음으로 표정을 보였다.
동시에 온몸이 희게 변하며 구겨진 천갑의 실금 사이로 밝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네놈을 박살 내어 본모습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지!]
[[뭐라?]]
제사장이 이상함을 느끼고 천갑을 내동댕이치려 했으나, 천갑은 되려 그의 팔에 달라붙었다.
콰득.
제사장의 손 하나가 급히 달라붙은 천갑의 팔을 생으로 뜯어냈다.
그러나 두 발까지 사용해 제사장을 꽉 붙들고 있는 천갑을 바로 떼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번득이는 천갑의 눈이 제사장을 노려보며 마지막 말을 뇌까렸다.
[이곳은 너의 무덤이 될 터.]
[우리는 지옥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말이 끝나는 동시에 귀가 멀 듯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쾅, 콰콰쾅!
커다란 굉음은 흰빛과 함께 순식간에 퍼져나가며 거대한 혈상을 삼켜 버렸다.
* * *
흰빛이 거대화된 제사장과 함께 폭발하기 직전.
과학자는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바닥을 잠시 바라보며 말을 남겼다.
[진실이 궁금하다고 했나?]
[네 생각보다 진실은 가혹하다.]
전음과 비슷하나,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 음성.
그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말한 것은 제사장의 진짜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말을 듣자마자 멍한 눈으로 과학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제사장의 정체가 그 사람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죽어가면서 남긴 말이 거짓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강력하게 과학자의 말을 거부하고 있었다.
“직접 확인해 봐야 해.”
반드시 확인해 봐야 했다.
하후홍이 남겼던 예언처럼, 제사장의 정체는 알던 사람이었다.
아니, 알기만 할까.
그는…….
내 모든 것의 시초였다.
콰득!
혼란한 상황에서 파괴음이 들려왔다.
눈을 들어보니 기괴하게 변한 제사장이 과학자의 천갑의 팔과 다리를 미친 듯 뜯어내려 하고 있었다.
천갑의 몸이 점점 빛으로 화하는 모습이 눈동자에 비췄다.
‘설마!’
당황한 무라흔이 검은 공간으로 몸을 숨기는 모습이 보이자마자 굉음이 들려왔다.
콰콰쾅!
거대한 폭발과 함께 터져 나가 사방을 덮을 듯 환히 빛나는 빛.
빛이 스쳐 간 모든 것들은 타오를 시간조차 없이 형체를 잃어갔다.
“……!”
지상에서 가장 강한 폭탄이라 일컫는 벽력탄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강력한 폭발.
폭발은 주변의 것들을 집어삼키며, 소멸의 빛 마냥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분자탄(分子彈)이군요.]
아연한 눈으로 위를 바라보는 가운데 가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빛에 닿는 순간, 모든 것들은 분자로 화해 버리는 극강의 폭탄입니다.]
[이론으로만 가능했건만.]
[결국, 성공하셨네요.]
지상이 흰빛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가야는 덤덤히 바라보았다.
이곳은 분자탄이 무너뜨릴 수 없게 만들었는지 아무런 해가 없었지만, 밖은 달랐다.
스러지는 건물과 나무들.
빛으로 타올라 온통 하얗게 물든 세상은, 모순되게도 꿈결처럼 환하고 아름다웠다.
“넌…… 괜찮은가?”
어쨌든 아버지였던 사람이다.
그의 죽음이 가야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이었다.
[글쎄요.]
가야가 눈을 내리깔더니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어느 정도 인간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추억이 없어 뭐라 정의하기가 힘듭니다.]
추억이 없으니, 슬픈 감정도 없다는 말이었다.
차라리 기억이 없는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사랑했던 아버지의 잔인하고도 이기적인 행태에 실망하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
잠깐 가야를 바라보다가 여전히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는 밖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분자탄이 제사장을 없앨 수 있을까?”
가야의 눈이 잠시간 파랗게 빛나더니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요.]
[분자탄이라 한들 이미 최상급 신의 힘을 지닌 제사장을 없애기란 불가능할 겁니다.]
[다만, 그분의 말대로 제사장의 진짜 모습을 보일 정도의 타격은 있겠지요.]
진짜 모습이라.
과학자의 마지막 말이 사실이라면 흰빛이 사라진 후 남은 것이 제사장의 진짜 모습이란 말이었다.
꾸욱.
나도 모르게 꾹 감싸 쥔 두 손이 희게 변했다.
어떻게 보면 과학자가 고마웠다.
준비 없이 진짜 정체를 들었다면 나는 필시 일순간 틈을 보일 수밖에 없었을 테다.
‘제사장이 날 흔들 수 있는 여지를 줬겠지.’
그러나 단단하게 마음을 먹은 지금, 설령 과학자의 말이 진짜라 할지라도 크게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놀라기야 할 테지만…….
‘놈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하겠어.’
생각할수록 과학자의 복수는 연쇄적인 효과를 주고 있었다.
그에게 타격을 준 것부터, 내게 정체를 알려준 것까지.
또한, 과학자의 유산을 물려받은 가야는 제사장에게 대항할 수 있는 큰 힘을 줄 터였다.
스스스.
지상을 덮었던 흰빛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아스라이 보이는 제사장의 모습.
이제, 내가 만나러 갈 차례였다.
* * *
흰빛이 사라졌다.
모든 것을 소멸시킨 흰빛이 사라진 폐허의 공간에서 생명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
고요 속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쿨럭.”
제사장의 입에서 한줄기 선혈이 흘렀다.
신의 힘을 얻었다고는 하나, 그의 신체는 인간의 것이었다.
완성만 된다면 그 어떤 것이든 태워 버릴 것이라 과학자가 장담했었던 분자탄을 맞은 지금.
완전한 힘을 발휘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간만 있다면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에 제사장의 표정은 평온했다.
달칵.
제사장이 좌선을 한 채 내상을 다스리고 있을 때, 바닥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위로 올라왔다.
위로 올라온 사람은 제사장이 그토록 만나기를 고대했던 사람이자, 이 모든 일의 결실.
진자휘였다.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던 자휘가 몇 걸음 앞에서 발을 멈췄다.
제사장은 빙긋 미소 지었다.
“드디어 너를 만나게 되었구나.”
은연중에 기쁨이 묻어나는 제사장의 말과는 달리 자휘는 말이 없었다.
그저, 빤히 쳐다볼 뿐.
제사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사실이었다.
과학자와 무라흔에게 지금껏 이야기를 들었다 해도 궁금한 것은 차고 넘쳤다.
그런데도 꼭 들어야 할 답이 있다면 두 가지였다.
굳은 입에서 서늘한 물음이 새어 나왔다.
“당신의 진짜 정체가 뭐지?”
날 선 질문을 하는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제사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체를 이미 듣지 않았나?”
“나는 직접 듣고 싶을 뿐이야.”
“직접 듣고 싶다라…….”
처음 보았던 모습과 달리 제사장의 모습은 흰 수염을 늘어뜨린 신선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사람은 그보다 젊은 듯한 사내.
사내 또한 수염을 기르긴 했으나,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으며 미중년이라 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이것이 수없이 모습을 바꿨던 제사장의 본래 모습.
진짜 그였다.
“듣고 싶다면 알려줘야겠지. 너는 내 걸작이나 다름없으니까.”
사내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나는…….”
정체를 말하는 그를 바라보는 심장이 떨려왔다.
“천갑무신이라 불렸지.”
다시 들어도 놀라운 이름.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며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던 사내가 천갑무신이었다니.
황망함에 하얗게 변하는 자휘의 얼굴을 주시하던 사내가 다시 한번 확언하듯 말했다.
“네게 모든 것을 주었던 천갑무신(天鉀武神)이 바로 나였다.”
“……!”
이미 과학자에게 한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분노와 의문으로 떨려왔다.
마지막에 남겼던 과학자의 말대로 진실은 가혹했다.
정말 앞에 있는 사람이 천갑무신이라면, 그의 후인으로서 모든 것을 이룬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흔들리는 몸을 애써 다잡고 스스로를 천갑무신이라 부르는 사내를 향해 겨우 입을 열었다.
“거짓말 마. 천갑무신은 죽었어.”
“비고에 있는 말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건가?”
스스로를 천갑무신이라 말하던 사내가 비죽 웃었다.
“크큭, 잘 생각해 봐. 난 죽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거든.”
‘죽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당혹스러움은 제쳐두고, 진천의 비고에 떨어졌을 때를 돌이켜 보았다.
그때 발견한 것은 하나의 문구와 천갑이었다.
문구를 기억해 낸 나는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입술을 꾹 내리 물었다.
「천갑무신, 이곳에 잠들다.」
일반적으로 잠들다는 말은 죽음을 뜻했기에 당연히 죽은 줄로만 알았건만.
단지 말장난이었을 뿐이었다.
분노로 속이 울렁거림에도 차가운 머리는 그에게 정확한 진실을 요구하라 강요하고 있었다.
“……왜지?”
짓씹듯 내뱉어진 질문에 천갑무신이자 제사장인 사내가 눈을 빛냈다.
“왜냐니.”
그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나는 바라트를 모시던 제사장이었다.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벌였을 것 같나?”
답은 하나였다.
“……혈신의 재림.”
사내가 박수를 짝하고 소리 나게 치며 웃었다.
“잘 아는군! 그럼 왜 이렇게 했는지도 알 수 있겠네?”
빙글거리는 사내의 얼굴에선 그 어떤 적의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설계한 모든 것의 결말을 바라보는 자의 뿌듯함이 서려 있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천갑무신의 역할은 후인인 나를 키워주는 것.’
그렇다면 왜?
적이나 다름없는 나를 키워주었을까.
죽이지 않고 그대로 두었을뿐더러, 천갑무신의 이름으로 마교를 없애면서 혈천교를 없앨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그로 인해 죽었던 수많은 혈천교인의 생명들과, 혈신의 재물을 위해 만들었다는 적미륵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답이 이어졌다.
그리고…….
제사장이 천갑무신이었다는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자, 하나의 거대한 그림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