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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93화 (193/200)

기갑무림 193화

“……가야.”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가야를 불렀다. 그러자 잠시 후 가야가 은은한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최상급 가이드로 진화되면서 어느새 진짜 인간의 모습을 지니게 된 가야.

“……!”

실물과 거의 동일한 가야를 보는 남자의 눈이 격정으로 흔들렸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어떻게 네가……!”

가야는 딸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흐으, 왜 네가 이런 모습으로 있단 말이냐?”

남자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가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은 허공을 갈랐다.

당혹스러운 남자를 향해 가야가 입을 열었다.

[저는 빛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환영일 뿐입니다.]

[실체가 있을 리 없지요.]

목소리는 맑았으나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가야의 말을 들은 남자는 들었던 손조차 내리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너는…… 내 딸의 모습과 목소리를 가졌지만, 진짜가 아니로구나.”

다시 보기를 수없이 원했던 딸이었다.

그러나 막상 무미건조한 눈이 자신을 향하자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내 딸은 항상 웃어주었어. 내가 최고라고, 힘내라고 말해줬었지.”

그러나 앞의 존재는 그가 알던 딸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아기 때부터 돌봐왔었던 그의 딸은…….

이미 죽었으므로.

외모와 목소리는 같을지라도, 앞의 여인은 가이드일 뿐이었다.

잠시간 혼란에 사로잡혔던 남자의 눈에 은은한 분노가 맴돌기 시작했다.

“왜…….”

그는 눈을 부릅뜨고는 가야를 향해 외쳤다.

“내 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냐?!”

남자의 노기 어린 물음에 가야가 날 돌아보았다.

마치 답을 해도 되냐는 듯이 바라보는 그녀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말해.”

말을 하는 내 목소리 또한 미세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저 역시 제 존재에 대해 잘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최상급 가이드가 된 후에야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요.]

“최상급…… 가이드?”

가야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최상급은 진천의 세계에서조차 한 개밖에 없었다. 그것도 최상급 마석을 세 개 이상 갈아 넣어서 겨우 만든 것이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야를 다그쳤다.

“그런데 네가 최상급이라고?”

하급이 진화를 거듭해서 최상급으로 거듭난다?

만약 딸의 모습으로 나타난 가야가 아니었다면 거짓말 말라며 코웃음을 쳤을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최상급이 아닙니다.]

가야의 말에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입가를 씰룩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가야의 다음 말에 깨졌다.

[그 이상인 초월급입니다.]

“뭐라?”

초월급이라는 가야의 말에 남자의 눈에 광기가 번득였다.

“내 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를 부숴 버리고 싶은 마음이건만,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가야는 정보를 숨길지언정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초월급이라니.’

갑작스레 초월급이 되었다는 말은 나조차도 놀라웠다.

그러나 가야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남자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진정하십시오. 가야의 말을 모두 들은 후에 판단을 내려도 늦지 않습니다.”

씩씩대던 그가 입술을 짓씹었다.

“만약 네 말이 헛소리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내 딸의 모습을 한 너를 없애버릴 것이다!”

남자의 말이 선을 넘어가고 있었으나,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아끼던 딸이 가이드가 된 모습은 그로서도 충격일 테니까.

만약, 이유 없이 가야가 그의 딸과 같은 모습을 지녔다면 모습을 바꾸면 될 일이었다.

초월급이 된 가야가 설마 모습을 바꾸는 일을 하지 못할 리 없었다.

“가야, 네 출생과 진화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

명령과도 같은 지시에 가야가 공손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사장이 바라트의 유해를 얻은 순간 천갑이 나타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곱 개의 유해 중 하나가 천갑으로 변한 것이지,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원래 있던 천갑이 신의 조각 중 하나 안에 스며든 것이죠. 천갑자체가 분자 형태를 지니고 있으니 말입니다.]

가야는 놀란 표정의 나와 남자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 주인은 신과의 동화율이 낮아 천갑의 운용을 할 수 없었습니다.]

[천갑에 속해 있던 저 또한 하급 가이드였지요.]

[그러나 신의 조각을 품은 천갑은 진화할 수 있었고, 저 또한 진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 리 없다! 천갑이야 신의 조각을 품어 진화할 수 있었다지만 너는 그냥 기계일 뿐인데 어떻게 진화를 한단 말이냐?”

남자가 가야의 말에 반발하자, 가야의 시선이 흥분한 그에게로 향했다.

[따님이 이름이 가야라고 하셨나요?]

“……그렇다.”

가야가 그의 딸의 이름을 묻자 남자가 수긍했다.

[당신은 두 가지 의미로 제 아버지가 맞습니다.]

“뭐, 뭐라?”

당혹스러운 그의 의문 사이로 가야의 답이 들려왔다.

[첫 번째는 가이드를 창조한 당신이 절 만들었기 때문이며.]

[둘째는…….]

가야의 말이 느려졌다.

[진짜 가야의 생명과 영혼 또한 저와 섞여 있으니, 당신은 아버지나 다름없습니다.]

남자는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반박을 하려 했으나 할 수 없었다.

알고 있는 이론상으론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확인해 봐야만 했다.

죽을 듯 가빠지는 숨을 겨우 내뱉고는 이를 악물며 질문을 던졌다.

“……네게 딸의 생명과 영혼이 섞여 있다는 게, 무슨 말이지?”

[제사장께서는 천갑에 설치된 하급 가이드를 아쉬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기술로는 최상급은커녕, 중급의 가이드 조차 만들지 못했죠.]

[고민 끝에 찾은 방법은, 천갑과 가장 어울리는 생명을 가이드에게 불어 넣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진천인의 순수한 생명과 혼은 신력을 강화해 새로운 존재로의 창조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거든요.]

가야의 답을 듣던 남자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럼…… 제사장, 그 개자식이 내 딸의 생명을 변질시켰단 말이냐? 그것도, 상급 가이드로 만드는 재료로?”

[맞습니다.]

[제사장은 이곳에서 태어난 가야를 천갑을 보조할 힘으로 만들고자 희생시킨 것이죠.]

“……컥.”

미칠 듯한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남자의 입에서 울혈이 솟구쳤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흔들리는 그의 몸을 잡으려 했으나 남자가 팔을 홱 내저으며 쉰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럼…… 내 딸은, 가야는…… 죽임을 당해 너로 변하게 된 것이로구나!”

흐느낌이 허공에 울렸다.

“흐윽, 난 그것도 모르고…….”

남자는 눈물로 범벅이 된 일그러진 얼굴로 가야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섰다.

“제사장이 어떻게 해서든 널 살리겠다고 해서 뭐든 한 것이었다. 그런데─!”

놈은 그의 애끓는 부정(父精)을 이용하는 것을 넘어, 딸의 생명마저 앗아갔다.

“딸을 죽이다니!”

분노에 가득 찬 남자의 목에 핏대가 솟으며 붉게 물든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절대……. 절대, 용서 못 한다!”

용서 못 한다며 괴성을 외치며 울분을 토해내는 남자.

나 또한 생각하지도 못했던 진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언제부터 알게 된 거지?”

[주인께서 신의 조각을 품으셨던 날, 저는 최상급 가이드로 진화했습니다.]

[그때 봉인되었던 기억이 풀린 것입니다.]

새로운 신의 조각을 품게 됨으로써 가야는 망각 된 기억을 찾았다.

그러나 가야는 이미 남자의 딸이 아니며, 가족이 아니었다.

오직 내게 속한 존재일 뿐.

생명과 혼이 섞였다 한들 가야는 실체조차 없는 빛 덩어리에 불과했다.

“한 가지 더 묻겠다.”

나는 가야를 보며 굳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이걸 그놈이 알고 있나?”

질문에 가야가 생긋 웃었다.

[아닙니다.]

[전 이미 초월적인 힘을 가진 가이드.]

[적의 신안(神眼)을 막는 것이 가능하거든요.]

[적은 현재 이 상황을 알지 못합니다.]

“놈의 신안을 막았다고?”

[예.]

놀라운 사실이었다.

신의 조각을 품어서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가야의 힘일 줄이야.

[주인께서 신의 조각을 품게 되신 후부터, 저 역시 단순한 가이드를 넘어 초월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하후홍 님을 만나셨을 때와 지금 이 순간 역시.]

[신안(神眼)을 막은 것은 저입니다.]

[또한─]

가야의 눈이 여전히 울분으로 흐느끼고 있는 남자를 향했다.

[제 창조자가 적에게 보내고 있는 신호를 막고 있는 중이지요.]

“신호를 막아?”

차가운 시선이 경계심을 담고 남자를 향하자, 그가 놀란 듯 흐느낌을 멈췄다.

“가야의 말이 사실입니까?”

역시 진천의 배신자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고는 뒤로는 신호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그, 그건!”

붉어진 눈으로 허둥대던 그가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남자는 고개를 떨구고는 힘없이 말했다.

“그래, 놈이 내 딸까지 죽인 걸 안 마당에 뭘 더 속이겠나.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는 이를 으득 갈았다.

“놈은 지금껏 이곳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인질 삼아 나를 조종해 왔다네. 처음에는 딸을, 그리고 딸이 죽은 후에는 내가 정을 준 인간들의 목숨으로 날 움직였지.”

남자가 회한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를 속인 건 미안하네. 하지만 이곳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그 말을 믿으란 말입니까?”

차가운 눈빛으로 냉소를 지으며 답하는 내게 남자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불신한다 해도 그건 내 업보겠지. 애초에 배신자라는 것도 놈에게 속아 그런 것이지만…… 자네에겐 모든 것이 거짓과 배신으로 느껴질 테니 말일세.”

남자는 굳은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주게.”

흔들림 없는 그의 목소리에는 살의가 듬뿍 풍겨 나왔다.

“제사장이 딸을 죽인 걸 안 이상, 그놈은 내 적이라는 것을 말이야.”

진천의 천재 과학자가 나를 도와준다면, 괴물이라 불리는 놈을 이길 확률이 조금이나마 높아질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남자는 내 선조를 배신했고, 방금전에는 적에게 신호를 보냈다.

갈등하는 내 모습을 보던 남자가 가야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를 믿지 못한다면 가야를 믿게.”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자가 가야를 향해 무엇인가를 던졌다.

던져진 것은 붉은 마석.

복잡한 회로들이 가미된 최상급의 마석이었다.

의아한 눈으로 남자의 행동을 바라보는데, 둥실 떠오른 마석을 보던 가야가 눈을 기묘하게 빛냈다.

[흐음. 이게 당신의 뜻인가요?]

“어차피 내가 죽으면 묻힐 것들이다.”

그는 조금은 기쁜듯한 얼굴로 말했다.

“넌 어쨌건 내 딸의 생명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니…… 아비의 유산을 받는다고 생각하거라.”

가야의 알 수 없는 시선이 남자에게 닿았다.

[아버지라 불리는 당신의 물건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저는 주인께 속한 존재입니다.]

[제 것은 주인의 것.]

[동의하신다면 받도록 하겠습니다.]

가야의 말에 남자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곧 죽을 나로서는 원수나 다름없는 놈에게 복수조차 못 하지.”

자신을 속이고 이용한 걸 모자라 딸까지 죽인 자다.

“네게 유산을 주어 그 자식에게 복수하는데 조금의 도움이라도 된다면…….”

그는 처음으로 가야에게 밝은 웃음을 보였다.

“난 만족한단다.”

[……그렇군요.]

가야는 감사의 인사 대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뜻을 받기로 하겠습니다.]

가야의 시선이 바닥을 향하자 붉은 마석이 찬란한 빛을 발했다.

스스스.

동시에 투명하게 변하는 바닥.

그리고─

투명한 바닥 밑으로 보이는 어둠 속에는 수십 쌍의 붉은 눈동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는 빛나는 눈동자.

눈동자들은 모두 어디선가 보았던 것들을 닮아 있었다.

“설마…….”

나는 온몸을 가로지르는 소름을 느끼며 남자와 가야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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