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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89화 (189/200)

제189화

모든 창을 가린 어두운 방 안에 낮은 웃음이 얕게 깔렸다.

약 두 장 넓이의 방은 소박했으나, 의외로 안을 구성하는 가구와 물품들은 꽤 고급스러웠다.

그러나 이것은 고급품을 볼 줄 아는 이들만 알 수 있는 것들.

이런 소박한 방과 집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알아볼 수 없는 희귀하고도 비싼 물품들이었다.

“쉽게 지지는 않는다라…….”

흐뭇한 표정의 노인이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노인의 얼굴은 마치 신선처럼 고요하면서도 신성했으며, 흰 수염은 외양을 더욱 고고하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보고 있는 거울 안은 신기하게도 검회색의 구름이 회오리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검회색의 공간이 거울 속으로 이어진 듯한 모습.

신비한 거울을 통해 소박한 형태의 방으로 넘어온 존재의 정체는 바로 ‘그분’이었다.

그는 거울의 중앙에 보이는 소년과 거울 안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잠시 신안(神眼)이 보이지 않아 걱정했는데 무라흔 때문이었나 보군.”

그는 탐탁지 않다는 듯 혀를 찼다. 아마도 무라흔이 사도의 몸으로 강림하면서 뭔가 실수를 한 듯했다.

무라흔이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가자 얼마 후 신안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만나게 되면 혼을 내야겠어.’

충성스럽긴 한데, 약간 머리가 모자란 것이 흠인 놈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우습게도 그가 무라흔을 믿는 이유 중 하나였다.

노인은 다시 거울 안을 들여다보며 중앙에 자리한 소년을 향해 매우 즐겁다는 듯 말했다.

“역시 난 놈이야.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검은 공간에서 이곳으로 빠져나온 그가 희다 못해 푸른 기마저 도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오랜 시간 기다려 왔던가.

이곳에서만 이백 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진천의 세계의 시간까지 합친다면 무려 삼백 년이 넘는 시간을 하나의 목적을 위해 달려왔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계획에 수많은 목숨들이 희생되었지만…….

자신의 고귀한 뜻을 이룸에 있어 이 정도 희생이야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였다.

아니, 어쩌면 부족할지 몰랐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옛것들은 모두 파괴되어야만 했으니까.

파멸의 재 속에서 탄생하는 생명은 그만큼 찬란할 터.

그만큼 그의 목적은 크고 원대했으며 누구도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

삼백 년이 넘도록 매진했던 일의 끝이 이제야 보이고 있었다.

바싹 마른 손가락이 거울 안 소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 나의 ……이여.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종족을 배신하고, 믿음을 깨부수며, 수많은 생명을 죽이고 또 죽여왔음이니.

“필요하다면 이 세계를 모조리 불태워서라도 널 탄생시킬 것이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목숨일지라도.

비루한 생명이 위대하고도 새로운 탄생에 비료가 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다.

광기가 어려 새파랗게 빛나는 두 눈동자가 여전히 거울 안 소년의 모습을 쫓았다.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새로운 세계를 위한 종장(終場)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콰쾅─!

거대한 폭발과 함께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폭발음과 함께 분지의 바위들은 잘게 쪼개어져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바위들과 조각들은 사방으로 흩날리며 회백색의 뭉게구름 같은 먼지들은 만들어냈다.

먼지가 사라지자 드러난 것은 거대한 하나의 무덤이었다.

무덤에 자리한 것은 신녀의 시체.

이제, 혈신의 사도가 되어 싸웠던 흔적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

나는 높은 곳에 올라 이제는 무덤이 되어버린 곳을 덤덤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사도와의 싸움은 내 승리로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그분’이라는 존재와의 싸움이었다.

수백 년간 모든 것을 암중에서 조종한 자이자, 얼마나 강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

그와의 싸움은 어디서 이뤄야 져야 할까.

만약 이대로 진천세가로 돌아간다면, 그곳은 쑥대밭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곳으로 갈 수는 없어.’

정파인들이 나를 돕는다며 끼어들어 목숨만 헛되이 잃게 할 수는 없었다.

싸움은 서장의 경계인 이곳에서 끝내야만 했다.

이곳은 허허벌판이 대부분이며 야트막한 산 아래 혈천교가 있었던 자리.

혈천교가 사라진 지금, 인적이 드문 이곳이야말로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기에 최상의 전쟁터였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지.’

하후홍은 그와의 만남이 곧 다가온다고 했었다.

놈은 내가 알지 못하는 시선으로 감시한다고 했으니 이곳에서 놈을 기다리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다.

“놈을 만나기 전까지 무공수준을 최고로 올려놔야 한다.”

적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면 그만이었다.

‘진천기공은 팔 성, 진천비급은 팔 장까지 열었지.’

이것만으로도 현존하는 무인들 중에 나를 이길 자는 없을 테지만 내가 상대할 자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괴물.

괴물을 상대하자면 나 역시 한계를 벗어난 힘을 가져야만 했다.

본래는 십이 성으로 구성된 진천기공과 십이 장으로 만들어진 진천비급.

가야의 말에 의하면, 지상에서는 십 성과 십 장이 인간이 익힐 수 있는 최대치라 했다.

아깝긴 했지만, 굳이 지상에서 쓸 수 없는 것을 익힐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필요할 때 다시 발현된다고 하였으니.

‘대신 십 장까지 한꺼번에 연다!’

내공은 차고 넘쳤다.

이곳으로 오기 전, 진천유화의 비고에서 좋다는 영약들은 모두 먹어치운 터라, 현재 이 갑자에 준하는 내공이 단전 안에 가득했다.

“가야. 진천기공 십 성과 친천비급 십 장까지 한 번에 열어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야의 음성이 공손하게 답했다.

[주인의 뜻에 따릅니다.]

[먼저, 진천기공을 십 성까지 연속으로 엽니다.]

빠져나가는 이십 년의 내공.

그러나 이십 년의 내공이 빠져나갔음에도 아직 백 년의 내공이 단전 안에 넘쳐났다.

[진천기공 구 성.]

[초강철화(超鋼鐵化).]

피부가 처음에는 강철처럼 은회색의 빛을 띠었다가 반짝였다.

말 그대로 강철을 초월한 다음 단계의 단단함이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종류의 느낌.

마치 천갑의 재질과도 비슷한 경지의 단단함과도 같아 보였다.

신기하단 듯이 은은하게 빛나는 팔을 바라보고 있는데 또다시 가야의 음성이 들려왔다.

[진천기공 십 성.]

[신피화(神皮化).]

신피화는 신의 피부가 아닌가?

초강철화가 된 몸에서 얼마나 더 강해질까 궁금했건만 가야는 신을 언급하고 있었다.

츠츠츳.

은은한 은빛을 발하던 몸이 점차 사람의 피부색으로 돌아갔다.

겉으로 보기엔 일반 사람의 피부 같으나 피부 자체가 빛을 발하는 듯 보였다.

뭐랄까, 마치 신의 후광이 피부에서 나는 느낌?

지금까지 진천기공과 비급을 수련했던 바에 의하면, 진천기공은 비급을 수련하기 전에 그에 따른 몸으로 바꿔주는 순서였다.

‘뭘 하려고 신의 피부까지 지녀야 한다는 거지?’

궁금증과 함께 보기만 해도 경건해지는 기분으로 바뀐 몸을 바라보는데, 가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천비급을 엽니다.]

이제 진천비급의 남은 두 장만 연다면 진천비급은 끝난다.

[진천비급 구 장.]

[허공접격(虛空摺格).]

촤르르.

진천비급 구 장이 열리자, 늘 그랬듯 빛으로 된 서책이 공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접격(虛空摺格)은 공간을 접는 이동형 공격법이다.]

[공간 자체를 접는 것이 아닌, 공간의 극히 일부를 일그러뜨려 접히게 만드는 것으로서, 접힌 곳을 단숨에 통과해 몸을 움직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신의 신체가 필요하다.]

[몸이 통과할 정도의 공간만을 일그러뜨린 후 접어내기 때문에, 접힌 공간을 통과할 때 음속에 가까운 속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직 신의 신체를 가진 사람만 쓰는 방법으로써, 신의 신체를 가지지 못했다면 당장 비급의 수행을 중지하라.]

[그렇지 않다면, 접힌 허공 안에서 네 몸은 산산이 부서지고 찢어져 나가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엔 꽤 살벌한 경고였다.

‘이래서 신피화가 필요했구나.’

초강철화를 넘어 신피화를 이뤄야만 가능한 허공접격의 공격법.

이것이 가능하다면 공격뿐만이 아니라 순간이동을 하듯 몸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할 듯했다.

거부의 의사를 밝히지 않자, 공중에 떠 있던 진천비급은 허공접격의 내용을 보여주었다.

비급 내용을 모두 암기하자, 가야가 다음 단계를 알려왔다.

[지상에서 공개되는 진천비급의 마지막 장입니다.]

[진천비급 십 장.]

[신화(神化).]

‘신화……?’ 구 장까지가 무공으로 치자면 무공에 관한 것이었다면, 십 장은 뭔가 달랐다.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십 장에 이르자, 기존과는 다르게 서책이 펼쳐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공중에 뜬 서책 가까이 몸을 옮기는 순간.

쫘아아악─!

진천비급이 찢겨 나가는 것이 아닌가!

갈기갈기 찢겨 나간 진천비급은 마치 커다란 회오리를 만들어 내듯 둥글고 거친 바람에 실려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니, 이게 대체 뭐지?”

당황스러움에 찢긴 서책들이 날아다니는 것만 보고 있는데 가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천비급의 마지막은, 비급의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말과 함께 찢겨 내 주변을 회오리치며 빙빙 돌던 비급의 종이들이 푸른빛을 내며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을 흡수한다고?”

[예.]

[진천비급은 세상의 단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비급.]

[이제 주인께서 그 모든 힘을 가지실 때입니다.]

찢긴 비급을 모두 흡수한다고 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야의 말에 의하면 나쁜 것은 아닐 듯했다.

파라락─

회오리치던 진천의 비급들은 어느새 전부 푸른빛으로 변해 내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또한, 미공개된 남은 두 장의 비급은 자연히 주인의 몸에 남아 필요할 때 발현될 것입니다.]

모든 빛을 흡수한 내 몸은 심장에 있는 바라트의 조각과 맞물려 폭발할 듯한 빛을 발했다.

파앗!

어두운 밤이 한순간 밝은 낮이 될 정도로 밝은 빛.

그 빛은 마치 별이 탄생할 때 뿜어내는 빛처럼 밝았으며, 지상에 생명을 뿌리듯 어둠 속에서 영롱한 빛을 발했다.

* * *

마지막 진천비급을 흡수한 뒤로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허공접격(虛空摺格)을 산속에서 미친 듯 수련했다.

처음엔 약간의 공간을 통과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두 장 정도의 공간을 격하는 것이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다만 문제는…….

연속된 노숙과 수련으로 인해 꼴이 말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완전한 거지꼴.

이러다가 ‘그분’이라는 고고한 놈이 날 못 알아볼 정도였다.

“뭘 좀 사와야 할 듯한데.”

사도와 싸우며 넝마가 된 옷과 검댕이 된 몸.

몸이야 씻는다 쳐도, 산에 돌아다니는 동물을 잡아먹는 것도 지겨웠다.

‘잠깐만 내려갔다 오자.’

이곳에서 진천비를 이용해 조금만 더 내려가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잠깐 내려간다 한들 놈이 찾아올까 싶었다.

“찾아오면 다시 이쪽으로 오면 되겠지.”

어차피 놈의 목적은 나이니, 최대한 인명피해가 없는 방향으로 놈을 움직이게 하면 될 일이었다.

강가에서 몸을 씻은 후, 빤 옷을 내공을 이용해 말리자 그럭저럭 밖으로 나돌아다닐 모습이 되었다.

“내려가 볼까.”

간만에 마을로 내려간다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설레어 왔다.

진천비를 이용하자 촌각의 시간도 못되어 내 몸은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동안 귀에는 시끄러운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고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마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로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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