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87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거대한 위용을 내뿜고 있는 무라흔을 바라보았다.
적이었을 때는 누구보다 무섭고 강력했던 상대.
그러나 가신이 된 지금은 뒤를 맡길 수 있는 든든한 언덕과도 같았다.
‘아쉽다.’
무라흔을 바라보는 내 눈에는 무척이나 깊은 아쉬움이 서렸다.
그는 나를 새로운 혈신의 재림으로 알고 수족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거짓을 말했고, 다음으로는 ‘그분’이라는 존재에게 대항할 대항마로 선택한 무라흔이었다.
‘무라흔이 진짜 가신이었다면 좋았으련만.’
진실은 드러나게 된다.
다만, 그전에 무라흔은 자신의 편과 싸우게 되면서 그 가치를 다할 터였다.
‘싸움에서 죽기 직전이 되어야만 가신의 계약은 풀리지.’
종신 가신은 배반 시 죽음이라는 벌이 따르지만, 계약 가신은 죽을 때가 되면 계약을 풀 수 있다.
제일 나은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라흔을 바라보는 눈에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이 깃들었다.
[그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공손하면서도 경외에 물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공간으로 돌아가는 건가?”
[예. 하지만 이제는 자유를 얻었으니 필요할 때 나올 수 있습니다.]
“이 모습으로?”
[아닙니다.]
[제 의지로 검은 공간에서 나올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사도의 몸에 강림한 것일 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지요.]
진짜 무라흔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아마도 지금처럼 거대한 장정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이자 무라흔은 싱긋 웃더니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인사와 함께 거대한 천갑은 검으면서도 빛나는 먼지들이 되어 훅하니 흩어졌다.
그리고 사라진 검은 먼지들의 중심에 자리한 신녀의 시체가 풀썩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무라흔이 검은 공간으로 돌아가자 원래의 신녀가 남은 것이다.
“…….”
나는 숨이 끊어진 시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커다란 고통을 감내하고 사도가 되었건만, 그녀의 죽음은 처참했으며 마지막은 허무함만이 가득했다.
“죽음은 스스로 불러온 결과야.”
혈천교에서 신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사도가 될 만큼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누군가를 원망했던 독기를 엿보았기에, 신녀의 삶 또한 녹록지 않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죽이려 했던 자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궤변일 테니.
나는 고개를 들었다.
붉게 물든 노을로 가득한 하늘이 눈동자 안에 가득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분지 위로 보이는 하늘을 자세히 보면 작게 소용돌이치는 수백의 돌개바람이 있었다.
작은 돌개바람들은 모두 내가 준비했던 덫이며, 수백 개의 진천기공으로 만든 공격형 기파였다.
“저걸 쓰지 않아서 다행인가?”
적과의 싸움 전, 주변을 갈아버리는 진천파를 축약해 하늘 위로 올려버린 후 진천망을 덮었다.
투명할뿐더러 진천망으로 감싸 기운까지 감출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이자 덫.
진천망을 해제하는 순간, 수백 개의 공격이 분지 안에 쏟아지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날 예정이었던 것이다.
“진천망 해제.”
손을 내밀자, 분지를 둘러싼 바위 쪽을 제외한 공중에서 바람이 일었다.
작은 바람들은 태풍이 되어 모여들더니 손 위로 모여들었다.
손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가는 진천파는 몸 안을 터질 듯이 채웠다.
“하아─”
폭발하듯 스며든 진천기공으로 인해 머리카락과 옷이 터질 듯 나부꼈다.
푸스스.
곧이어 천천히 흡수되는 기운들.
나는 잠시간 좌선을 한 채 몸속의 기운들을 다스렸다.
진천기공의 대단한 점 중 하나는 밖으로 내보낸 기운들을 원한다면 다시 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만들어 놨던 형태 그대로 축약해서 말이다.
‘이미 상대에게 쏘아져 흩어져 버린 기공이 아닌 이상 언제든 회수가 가능하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시간.
이곳으로 오는 동안이나 평소에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시간만 있으면 진천파를 만들어 갈무리하곤 했다.
오늘에 이르러 강력한 공격을 품은 덫이 되었다. 이것들은 마지막 싸움을 위해 요긴하게 쓰일 터.
‘무라흔과 진천파를 품은 덫.’
적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으나 이 정도라면 최소한 어이없이 당하진 않을 테다.
특히 믿었던 무라흔이 자신을 공격하는 걸 보고 얼마나 당혹스러워할지.
“큭.”
‘그분’이라 불리던 고고한 자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모든 것을 설계한 자라고 했지.’
지독한 놈이었다.
오랜 시간 무엇을 위해 이런 준비를 했는지 모르겠으나, 놈의 집착과 인내만큼은 인정할만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무라흔까지 나온 이상, 설계자라는 놈을 보는 건 시간문제였다.
좌선을 위해 앉았던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이제는 이곳을 정리하고 새로운 싸움을 위한 준비를 해야만 했다.
가장 큰 적이었던 혈천교의 소멸.
혈천교가 사라진 이상, 내 적은 이제 단 하나만이 남았다.
‘혈천교의 후처리는 마교놈들이 할 테지.’
그들은 완전한 혈천교의 소멸을 보며, 후인인 내 힘에 혀를 내두르다 못해 공포를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공포는 마교가 함부로 무림에 나서지 못하는 경계가 되고, 약속했던 봉문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리라.
이제 남은 것은 그분이라는 존재와의 마지막 싸움이었다.
놈에게 중원무림을 차지하는 것에 대한 큰 뜻은 보이지 않았다.
의지가 있었다면 오랜 시간을 기다릴 필요 없이 가졌을 테니까.
‘놈이 원하는 건 나와 관련되었을 거야.’
힘과 능력을 갖추고도 내가 지금까지 성장하는 것을 방관해왔다.
얼마든지 벌레 죽이듯 쉽게 죽일 수 있음에도 말이다.
‘찾지 못한 게 아니야. 안 찾은 거지.’
아니, 오히려…….
놈은 내가 성장해서 자신을 찾아오는 걸 바라는 것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이제 때가 되었음에 스스로 나를 찾아오던가.
“결론은 하나다.”
놈이 살든, 내가 살든.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이 모든 것의 결론이 난다는 것.
그리고 나는 살아야만 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말이다.
‘그것이 이 세계를 지키는 방법이니까.’
놈이 이기게 된다면 이 세계 또한 멀쩡할 리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지키고자 했던 모든 사람은 죽을지도 몰랐다.
으득.
지고 난 후를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살기가 떠오르며 이가 갈렸다.
“반드시 이겨야 해.”
나를 포함한 모두를 위해서 놈을 이겨야만 했다.
놈이 얼마만큼 치밀하게 설계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놈은 혼자다.
아무리 강한 놈이라 해도 혼자인 놈과 약하다 하도 수많은 이의 희망을 등에 업은 나는 출반선 자체가 달랐다.
“후우.”
끓어 오르는 전의를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을 한 번 하자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가라앉은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널브러져 있는 신녀의 시체가 보였다.
“너로 인해 기물과 무라흔을 얻게 되었으니……. 이곳을 네 무덤으로 만들어주마.”
처음부터 이 분지는 사도가 된 신녀를 가두기 위해서, 혹은 무덤으로 계획된 곳이었다.
하늘에 떠 있던 진천파 중 없애지 않은 것들은 이곳을 폭파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잘 가라.”
손을 들어 아직 허공에 남은 진천파들을 바위 쪽으로 떨어뜨려 폭파하려는 순간.
갑자기 위쪽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외침과 함께 높은 바위산에서 바닥으로 사뿐하게 떨어지는 신형.
급작스레 나타난 신형은 여리여리한 체구를 가진 내 나이 또래와 비슷한 여인이었다.
‘누구지?’
이곳은 사람들이 싸움을 볼 수 없도록 정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마치 알고 온 것처럼 흰옷을 입은 여인 긴 옷을 나부끼며 다가오고 있었다.
약간의 당혹스러움은 곧바로 경계로 뒤바뀌어 경고를 내뱉었다.
“죽기 싫다면 멈춰라!”
손은 여전히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바위산을 내리치려던 진천파들이 정체 모를 여인에게 향했다.
탓.
여인은 약 삼 장의 거리를 두고 내 앞에서 사뿐하게 착지했다.
“나는…….”
자신에 대해 말하던 그녀의 눈이 죽어있는 신녀를 향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녀의 동생이다.”
동생이라면, 신녀가 내 앞에서조차 가리지 않고 증오했던 인물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도 신녀의 얼굴이 여인의 얼굴에도 보이는듯했다.
이상하게도 왠지 익숙한 듯한 얼굴.
‘저런 여자는 본 적이 없는데.’
여자는 꽤 아름다운 외형을 지니고 있었고, 특유의 신비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혈천교의 인물인가?”
여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연관은 있지만, 혈천교의 인물은 아니야.”
처음 봄에도 익숙한듯한 반말을 내뱉는 여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언니의…… 마지막 모습을 봐도 될까? 절대 너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을게.”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은 침울하고 어두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모습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렇게 친숙하게 반말을 하는 존재는 몇 명 없었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모용설화와 현무학관의 친우들.
하나 더 있다면 행방불명 되었던 하후홍밖에 없었다.
‘혹시?’
하지만 하후홍은 남자다.
저런 모습으로 나타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여인의 얼굴 위로 자꾸만 겹쳐지는 하후홍의 이름이 겹쳤다.
나는 하후홍의 이름을 애써 지우며 얼굴을 찡그렸다.
“너…….”
흐려지는 말끝을 읽은 여인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내 이름은 후(后). 너와도 조금은 관련이 있는 이름이긴 하지.”
“네가, 후라고?”
“그래.”
후라는 여인은 죽어있는 신녀 쪽을 바라보고는 다시 입술을 떼었다.
“궁금한 게 많은 건 알아. 하지만…… 잠깐이라도 죽은 언니를 애도할 시간을 주지 않겠어?”
여인과 죽어 있는 신녀의 시신을 한번 바라보고는 약간의 한숨과 함께 답했다.
“시간을 많이 주지는 못해. 이곳은 없앨 예정이거든.”
그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죽어있는 신녀에게 다가갔다.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었구나.”
천천히 몸을 낮춘 손이 죽은 신녀의 부릅뜬 눈을 조심스럽게 감겨 주었다.
“……바보처럼.”
안타까움이 섞인 말이 붉은 입술에서 탄식처럼 새어 나왔다.
“언니의 죽음이 슬프긴 하지만 울어줄 수는 없어. 그 이유는 언니가 잘 알 거야.”
사도가 될 만큼의 커다란 증오를 가진 대상이 자신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언니를 찾은 이유는…… 어쩌면 지금 언니의 모습이 내가 될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게 마음에 걸려서 찾아왔어.”
둘의 운명은 예언에 의해 갈렸다.
둘 중 하나는 결국 불행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고, 그 불운이 언니에게 떨어졌을 뿐이었다.
“불운이 나에 대한 증오로 커졌을 거란 거, 알아. 하지만 나 역시 편하게 살았던 건 아니었어.”
과거를 떠올리던 여인의 아름다운 아미가 설핏 구겨졌다.
“우리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런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해야 하는 거지?”
울분 섞인 목소리가 부르르 떨려왔다.
“복수할 거야. 나는…… 그 사람의 인형이 아니니까.”
붉은 입술이 분노를 내뱉고는 신녀의 얼굴에 손을 댄 채 알 수 없는 단어들을 중얼거렸다.
파앗.
환하게 터져 나오는 빛.
신기하게도 빛은 이미 죽어버린 신녀의 신체를 복원하고 있었다.
“설마, 신녀를 살리는 건 아니겠지?”
내가 놀란 눈빛으로 묻자 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 죽은 언니가 온전한 시체로 남길 바랐을 뿐이야.”
그녀의 말대로 신녀의 모습은 상처만이 사라졌다.
“내가 가진 능력은 예지와 복원. 하지만 생명까진 되돌리지 못해. 생명을 되돌리는 것은 오직 신만의 영역이지.”
말을 조그맣게 내뱉던 여인이 눈을 떴다.
“이제 됐어.”
조금은 후련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킨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