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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84화 (184/200)

기갑무림 184화

천갑으로 변환된 상태에서 처음으로 하는 각성이었다.

각성하는 순간, 천갑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터지듯 뿜어져 나왔다.

“네놈이…… 각성을 해?”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간 따위가 어떻게 각성을 한단 말이냐?!”

콰득.

천갑을 거세게 얽매던 촉수들이 뜯겨 나갔다.

조금 전만 해도 움직일 수 없었던 천갑이 촉수들을 뜯어내자 놈에게서 황망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전보다 적어도 배 이상 강해진 힘.

이것이 말하는 바는 하나였다.

“진짜 각성을 했단 말인가!”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놈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콰드드득.

강한 힘에 의해 촉수들이 거의 다 뜯겨 나갔다.

“크크크.”

그 모습을 보자 자조하는 듯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째서 혈신이 네게……?”

놈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하건 말건 나는 촉수들을 전부 뜯어내자마자 위로 솟구쳐 올랐다.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그게 무슨 소리지?”

놈의 의문에 헛웃음을 흘렸다.

“네놈과 같은 목소리가 내 각성을 알렸어. 그런데 모른다니. 말이 안 되지 않아?”

“……나와 같은 목소리?”

놈의 눈이 커졌다.

비슷한 형태의 목소리로 후인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존재는 자신을 제외한다면 단 한 명이었다.

그 한 명은 바로 자신이 ‘그분’이라 일컫는 사람.

“그럴 리가…….”

“목소리는 각성을 도와주기까지 했지. 그런데 몰랐다고?”

놈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으르렁댔다.

“말도 안 된다! 그분께서 왜 네놈을 도와준단 말이냐?!”

놈의 광분하는 태도는 정말 모르는 듯했다.

‘하! 진짜 모르잖아?’

혈신의 대리자로 지상에 내려온 놈과 날 각성시킨 자는 같은 편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놈들이 나를 대하는 행동은 달랐다.

그렇다면 이건 기회다.

놈과 그분의 관계가 어떻든 간에 말로 놈을 자극해야만 했다.

그래야 그 틈에서 내가 살아날 수 있을 테니까.

“난 네가 말하는 그분이라는 존재에 대해 몰라.”

나는 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각성을 했을까? 아마도 그분이란 존재는 나를 통해 널 죽이려 했을지도 모르지.”

“……!”

“그러니 날 각성시킨 게 아니겠어?”

내 말에 놈의 흉측한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만큼 홉뜨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놈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젓고는 섬뜩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넌 가짜다. 나를 현혹해서 이기려는 속셈이지. 하지만 난 속지 않는다!”

생각보다 강렬한 놈의 부정에 비웃음을 날렸다.

“내 각성을 그분이란 존재가 도운 건 사실이야.”

“거짓말 그만해라! 그분은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다!”

놈의 강한 믿음에 입에서 냉소가 새어 나왔다.

“네가 그토록 궁금해하는 기물의 출처가 어디인지 아나?”

“그분이 준 것이겠지!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아느냐?”

“맞아, 그분이라는 존재가 준 것이지. 그런데 이것까지 아는지는 모르겠네.”

나는 한차례 비아냥대고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기물의 정체가 널 죽일 수 있는 물건이라는 걸 말이야.”

“말도 안 돼!”

놈은 목에 믿을 수 없다는 듯 핏대를 세우며 외쳐댔다.

“믿을 만한 개소리를 해라! 날 죽일 만한 기물이라면 최상급일 텐데, 그런 보물을 인간 따위에게 주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네놈이 믿지 못하니 보여주마.”

나는 천갑에서 혈상을 꺼내어 놈에게 보여주었다.

“저, 저것은……!”

놈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흔들렸다.

혈상은 누가 뭐래도 최상급의 기물로 불리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귀한 기물이 적의 손에 있었다.

“……어떻게 네놈이 그분이 가지고 있던 혈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이건 혈천교주에게 얻은 거야. 잘 생각해 봐. 그분이 왜 이것을 인간에게 주었는지를.”

“…….”

놈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다가 무언가를 생각하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믿지 못한다면 자세히 봐라.”

놈에게 혈상을 들고 다가서자,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다시 올라갔던 혈상의 팔이 하나씩 내려갔다.

“……네놈의 말이 진짜였다니.”

혈상을 보던 놈의 눈이 잘게 떨려오며 배신감을 머금었다.

“어떻게 그분이 내게 이러실 수가!”

믿었던 절대적 존재에게 배신당한 놈이 폭주하듯 이성을 잃으며 괴성을 질러댔다.

그 순간.

‘이때다!’

천갑의 몸이 가속하며 앞으로 튕겨 나갔다.

각성까지 이룬 몸으로 가속을 하자 놈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천갑이 사라졌다.

“……!”

가속을 미친 듯이 더하자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당황한 놈의 눈동자가 천갑을 향하며 비틀리는 공간 속에서 나를 막으려 했으나 허사.

놈은 내게 이 장 이하의 거리를 허용하고 말았다.

‘상급신의 눈을 가리는 거리다!

허우적대는 놈의 거대한 팔과 손이 보였으나, 날 보지 못하는 놈과의 찰나 간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한 사람은 나였다.

“진천격(眞天擊)─!”

천갑의 두 손이 기운을 모으고, 천지간의 뇌격을 담은 강력한 힘이 폭풍 몰아치듯 놈의 심장을 향해 돌진했다.

퍼엉─!

커다란 굉음과 함께 손을 휘젓던 검붉은 촉수를 가진 거인이 거대한 기파에 휘말려 뒤로 무너졌다.

“크으윽!”

놈이 뒤로 밀려나며 쓰러지자 부딪힌 분지 안의 바위들이 우르르 소리를 내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산하는 먼지들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땅을 박차고 위로 솟아올랐다.

휘익.

온몸의 힘을 실은 오른발이 놈을 향해 아래로 내리찍었다.

이것 또한 가속된 시간 속, 일그러진 공간이 만들어낸 찰나의 순간이었다.

놈이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고 돌무더기가 놈의 얼굴을 덮을 무렵.

콰득!

천갑의 발이 넘어진 놈의 다리를 짓뭉개버렸다.

“크아아─!”

귀가 멀어버릴 듯한 놈의 비명 속에서 또다시 천갑의 발이 다른 발을 짓밟았다.

그리고 활시위를 당기듯 천갑의 오른팔이 뒤로 가더니, 놈의 얼굴을 강타했다.

퍼억!

비명조차 지를 틈 없이 뒤로 몸이 날아가 버리고, 기운의 소용돌이를 머금은 주먹이 또다시 놈을 향해 날아갔다.

극강의 진천권(眞天拳).

놈을 공격하는 주먹은 하나임에도 연 달은 타격으로 주먹의 잔영은 수백 개로 보였다.

파파파팟!

거대한 촉수로 이루어진 거인은 연타에 맞아 온몸이 주먹 모양으로 패였다.

부스스─

그 위로 천천히 떨어지는 먼지들.

가속된 일그러진 공간 안에서의 공격은 먼지들이 떨어지기도 전에 수백 합의 공격을 가능케 만들었다.

“허억.”

숨쉬기가 힘든 듯한 놈의 헐떡임.

쿠득.

망가질 대로 망가진 놈의 몸을 천갑의 발이 내리눌렀다.

“검(劍).”

먼지가 흩날리듯 비산하는 가운데, 쓰러진 놈의 몸을 밟은 내 손에 검이 은은한 빛을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

검을 바라보는 놈의 눈이 커졌다.

“진천뇌(眞天雷).”

검을 든 손이 올라가고 입에서는 진천의 뇌(雷)를 말한다.

파지직.

이번에도 진천의 정수를 담은 검격의 파동이 용오름 치듯 검의 주변을 휘돌고 번개가 일었다.

그리고 검은 모든 힘을 담은 채 곧장 아래로 향했다.

“……안 돼!”

놈의 단말마에도 불구하고 검에는 자비가 없었다.

서걱!

들린 소리는 한 번이건만, 목과 팔다리에서 피가 튀었다.

파앗.

혈(血)이 솟구쳤다.

혈신의 정수인 피들이 잘린 몸의 단면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으윽……. 이럴 수는 없어.”

놈은 꿀렁거리며 밖으로 빠져나가는 피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자신은 혈신의 대리자였다.

그런데 인간 따위에게 이런 꼴을 보이다니!

“용서할 수 없다……!”

미칠듯한 분노가 전신을 감싸며 놈의 눈이 희번덕 돌아갔다.

화앗.

돌아간 눈동자에서 갑자기 흰빛이 터지듯 번쩍거리더니, 검붉은 촉수들이 떨어져 나갔다.

“……!”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는 주변을 괴이한 분위기로 압도했다.

지금까진 전초전이었다는 듯 붉고도 괴이한 기운들이 사방에 흩날렸다.

스스슷.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들은 어느새 다시금 놈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혈신의 정수였던 혈(血)들을 거둬들이던 그의 몸이 서서히 일어났다.

[……감히, 나를.]

달라진 놈의 음성.

완전한 힘을 쓰지 않았던 놈이, 이제야 신격의 힘을 쓰려 하고 있었다.

[그분께서 너를 죽이지 말라는 말만 하지 않았다면, 너 따위에게 당하지 않았을 터.]

츠츠츳.

상처 입은 몸에 있던 검붉은 촉수들은 마치 두꺼운 근육의 결처럼 변해 놈에게 달라붙었다.

삽시간에 원래의 모습보다 밀도 있는 모습으로 돌아온 놈의 몸.

주변으로 휘도는 붉은 혈흔들의 흔적 속에 고고하게 서 있는 모습은 전과 달랐다.

압도하는 듯 내리누르는 공기.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각성한 몸임에도 천근만근 무겁게 만들었으며, 심장에는 두려움이 스며들게 했다.

‘이 모습이 신의 대리자인가!’

과연, 상급신의 대리자는 달랐다.

목과 팔다리가 잘렸음에도 다른 존재가 되어 일어나는 괴이함이라니.

기함하는 와중에 놈의 음침한 목소리가 분지 안을 울렸다.

[왜 너를 각성하게 하고 교주에게 기물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놈이 손을 들자, 손 주변으로 검붉은 기운들이 회오리치며 모여들었다.

[그분이 나를 속였던 만큼, 나 역시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만이다.]

츠츠츠.

손 주변으로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모였던 검붉은 기운들은 곧이어 빛을 내며 갑옷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검붉은 갑옷의 재질은 신녀가 사도가 되었을 때 입었던 천갑의 재질과 같았다.

사도였던 그녀가 마치 전갈 모양의 커다란 천갑을 가졌다면 신의 대리자인 놈은 검붉은 색의 커다란 갑옷을 입은 장군의 모습처럼 보였다.

신녀가 입었던 천갑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면서도 강해 보이는 천갑.

검붉은 색의 천갑 뒤로 검붉은 기운들이 마치 망토마냥 뒤로 흩날리며 주변을 잠식했다.

‘저것이…… 신의 대리자가 입는 천갑!’

전쟁으로 치자면 신녀는 일개 단장 정도의 강함이었고, 놈은 말 그대로 장군의 강력함을 지니고 있었다.

‘제길.’

속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각성을 한데다가 신의 눈을 속일 수 있는 혈상까지 있음에도 놈을 이기기란 힘들어 보였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아직 놈에게 내보이지 않은 강력한 바라트의 힘.

‘소멸의 서’가 남았기 때문이다.

[너를 죽이겠다.]

살기 담긴 말이 날카로운 기운으로 변해 살갗을 찔러왔다.

나는 놈이 내뿜는 살벌한 기운 속에서 애써 정신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죽더라도 꼭 들어야만 하는 대답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면 날 죽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 말과 행동에는 오류가 있다.”

[오류?]

놈이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허튼 말을 하면 바로 죽일 듯 위협적으로 손을 내뻗었다.

“내가 한 각성은 혈신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혈신의 이름을 들먹이자 뻗어오던 놈의 손이 잠시 멈췄다.

“혈신의 대리자로 인간의 몸을 통해 강림했다면 나를 죽여서는 안 되지 않나? 어쨌든 혈신과 관련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분이란 존재가 내게 각성의 힘을 준 것일지도 몰라. 그런데 우리는 같은 신의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싸우고 있지.”

우리는 지금껏 서로를 적으로 삼아 미친 듯이 싸워왔다.

누군가의 장기 말인 양,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단지 살기 위해서가 아니야. 뭔가 이상하지 않아?”

[…….]

내 질문에 놈 또한 아무 말이 없었다.

바라트가 어떻게 힘을 가지고 지상에 혈신이란 이름으로 나오게 되었으며, 신의 대리자까지 만들 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바라트와 관련된 힘을 가지게 된 나는 왜 그들을 추종하는 인간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였다.

잠깐의 침묵 후 묵직한 목소리가 답했다.

[오류는 없다.]

[나는 혈신이 살아 있다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놈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울려 퍼졌다.

[혈신으로 불리는 바라트는 신들에게 죽임을 당한 신.]

[일곱 조각으로 나뉜 바라트의 유해를 가지게 된 우리는 신의 힘을 지닐 수 있었고, 신의 대리자가 되었지.]

[그리고…….]

놈의 눈이 열망에 차오른 채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우리는 예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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