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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83화 (183/200)

기갑무림 183화

눈을 뜬 신녀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크고 검은 눈동자는 진짜 신녀와 다르지 않았으나 눈빛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원래의 그녀와 다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감정 없는 눈빛을 마주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침착하자.’

저놈은 진짜 혈신이 아니다.

신녀의 몸을 차지한 가증스러운 대리자일 뿐.

아직 놈은 내가 정체를 눈치챘음을 모르고 있으니 최대한 상황을 이용해야만 했다.

“왔네?”

신녀를 가장한 놈이 입술 끝을 살짝 올리며 반갑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저놈은 알까?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게 점혈을 해놨음을 말이다.

놈의 연기에 발맞추어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며 물었다.

“……다른 짓을 한 건 아니지?”

놈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점혈 당했는데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역겨움을 감추고 신녀에게 다가섰다.

이제 남은 거리는 한 장.

혈상의 팔은 더 내려가지 않았다.

최상급신의 힘을 지니지 않은 걸 다행이라 해야 할까?

발을 옮기는데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물을 얻어온 거야?”

“그래.”

놈은 혈천교가 소멸한 것을 아직 모르는 듯했다.

나를 속이기 위해 최대한 신의 힘을 쓰고 있지 않은 바람에 생겨난 실책이었다.

“어떤 건지 봐도 돼?”

검은 눈을 빛내며 묻는 놈을 향해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너에게 기물까지 보여줄 만큼 친한 사이던가?”

“뭐, 그건 아니지만.”

어울리지 않는 뾰로통한 표정을 짓던 놈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어차피 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안 보여줄 게 뭐람?”

“…….”

난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신녀를 가장한 놈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 몰랐다.

지금이 아니면 혈신의 대리자인 놈에게 물어볼 기회는 없으니까.

“생각해 보니 못 보여줄 건 없는데.”

“정말?”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뭐가 궁금한데?”

신녀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궁금증을 해결해주면 기물을 보여줄 것만 같은 태도에 놈이 흥미를 느낀 것이다.

“혈신이란 어떤 존재지?”

가장 근본적인 의문이었던 동시에 늘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이 세계에는 원래 혈신이란 존재는 없었고, 진천의 세계에서도 없었다.

그런데 왜 혈천교는 혈신을 믿게 되었을까?

가야조차도 모르는 이 답을 나는 들어야만 했다.

“흐응. 글쎄……?”

신녀는 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놈은 잠시 고민하더니 어차피 죽일 놈에게 적선한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혈신은 말이지, 다른 세계의 신이야.”

“어떤 세계를 말하는 거지?”

“큭, 말하면 네가 알아?”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던 신녀의 표정이 돌연 진지해졌다.

“아, 어쩌면 알려나?”

“내가 알 수 있다고?”

“사실 혈신은 진천의 신이거든.”

“……!”

눈을 크게 뜨자 탐색하는듯한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난 놀랐던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진천이라면, 내 선조가 왔던 곳이잖아.”

“역시 아는구나!”

신녀가 활짝 웃었다.

“혈신은 진천의 신이야. 우리는 마교의 아랫것들에게 위대한 혈신에 대해 말해주고 힘을 보여주었지. 그랬더니 바로 혈천교를 만드는 게 아니겠어?”

놈의 거리낄 것 없는 태도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마력을 쓰는 진천의 세계와 이곳은 다르잖아. 힘을 쓰기 어려웠을 텐데?”

“마력은 생명이 빚어내는 힘이야.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피. 우리는 피에 있는 생명력을 활용함으로써 혈신의 힘을 끌어낼 수 있었지.”

“그래서 피에 집착했던 것이로군.”

“맞아. 진천인들이라면 적당히 피의 힘을 취했을 테지만, 이곳의 인간들은 저급해서인지 광기에 빠져서 살육을 저지르더라고. 네가 그놈들의 머저리 같은 모습을 봐야 했는데 말이지.”

생각만 해도 우습다는 듯 킥킥대던 놈을 향해 나는 나직이 물었다.

“하지만…… 혈신은 진천의 세계에 없는 신이잖아?”

내 물음에 신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오, 그것도 알아?”

반색하던 놈이 물었다.

“진천의 세계에 대해서 아는 걸 보니 네게 가이드가 있구나!”

“가이드?”

“큭, 가이드도 몰라? 일종의 안내인 같은 거야.”

놈은 탐욕스러운 눈을 빛냈다.

“대부분 가이드는 이곳에 오면서 소실되었어. 신들이 가이드를 추격하는 게 가능해서 말이야. 가이드를 없앨 때 정말 아까웠었지. 그런데 네게는 있었네?”

“내게 진천의 세계에 대해 알려주던 존재가 있는 건 맞아.”

“역시! 어쩐지 너무 쉽게 우리를 파악한다 했어.”

눈을 반짝이던 신녀는 곧이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네. 네가 가진 것이라면 상등품일 텐데. 높은 등급의 가이드들은 우리가 전부 파괴했었거든.”

신녀의 혀가 날름 입술을 핥았다.

“네 가이드를 보여줄 수 있어?”

“왜 보여줘야 하지?”

“보면 어떤 급인지 알 수 있거든.”

“급?”

“가이드는 형태로 등급을 나타내. 음성만 나오는 건 하급. 실체를 가질수록 최상급을 나타내지.”

신녀는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것은 어떤 형태의 등급이야?”

가야는 목소리에서부터 시작해 지금은 인간의 형태를 갖춘 진화형 가이드였다.

‘처음엔 목소리뿐이라서 파괴되지 않았구나.’

놈의 탐욕스러운 태도를 보건대, 가야에 대해 알게 된다면 당장이라도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잖아. 일단 답부터 해.”

“흥, 냉정하긴.”

놈은 유희를 위해 잠시 참는다는 표정을 짓고는 내 물음에 답했다.

“혈신이란 이름이 진천에 없던 것이지, 비슷한 신은 있어.”

“비슷한 신?”

“거기까진 모르는구나. 피와 파괴에 관련된 신이 하나 있지.”

‘혹시…….’ 나는 떠오르는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두 주먹을 나도 모르게 쥐었다.

“그 신의 이름은 바라트.”

“……하지만 바라트는 사라진 신이잖아.”

“그래, 지워진 신의 이름이지. 그러나.”

바라트의 이름을 말하는 신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진천의 왕족이 은밀하게 섬기던 신이 바라트였던 거, 알아?”

“진천의 왕족이 바라트를 섬겼다고?”

“그래. 그러니 피에 대한 특별한 능력을 갖추게 된 거지.”

상상하지 못했던 진실에 머리가 멍해졌다.

‘그래서였어……!’

진천의 왕이 피로써 모든 것을 증명하고 능력을 발휘한 것이 바라트를 섬겨서 얻은 것이었다.

당혹스러운 내 눈빛을 보던 신녀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너로서는 모를 수밖에. 이건 제사장과 진짜 왕족으로서 교육받았던 이들만이 알 수 있었던 것이니까.”

“그럼 신과의 전쟁이 일어났던 건…….”

“아아, 이제 그만.”

신녀는 질문을 잘랐다.

“해줄 수 있는 답은 여기까지야.”

더 이상의 질문은 용납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은 신녀가 이번에는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하며 재촉했다.

“대답해 줄 만큼 했으니, 진천의 기물과 가이드에 대해 보여줘.”

더 듣고 싶은 뒷이야기가 있었으나 더 이상 말해주지 않을 듯했다.

‘아쉽다.’

하지만 내가 무슨 행동을 한들, 놈에게서는 더는 정보를 얻어내긴 어려울 테다.

나는 품에서 기물을 꺼내는 척하며 오른손에 진천파의 기운을 숨겼다.

“알겠다. 기물부터 보여주도록 하지.”

기물을 보여준다는 말에 방심한 놈이 기대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가져온 기물은─”

손을 내미는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신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컥!”

신녀의 입에서 울컥 핏물이 새어 나오면서 시선이 배 쪽을 향했다.

가운데가 텅 빈 배.

기물 대신 진천파가 방심한 사이 놈의 배를 뚫어버린 것이다.

“이익!”

신녀를 가장한 놈이 핏발 선 붉은 눈으로 이를 으득 갈며 외쳤다.

“네놈이 나를 속였구나!”

어느새 뒤로 물러난 나는 진천파를 날린 손을 휘저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속인 건 네가 먼저 아닌가?”

“……뭐?”

잠시간 멍한 표정을 짓던 놈이 광소 했다.

“크하하! 그럼 네놈은 내가 누구인지 진작 알고 있었단 말이렷다?”

“그래.”

긍정하는 내 답에 놈의 웃음이 뚝 그쳤다.

“혈신의 대리자인 내가 이년의 몸에 강림한 걸 알면서도 겁 없이 덤비다니!”

분노한 놈의 음성이 들리는 가운데 배가 뚫린 채로 서서히 일어나는 신녀의 몸은 괴기했다.

“네놈은 쉽게 죽지 못할 것이다!”

마치 내 몸을 찢어발기다 못해 뭉개버리겠다는 듯 놈의 살기가 넓은 분지 안을 가득 채웠다.

스르륵.

온몸의 뼈가 꺾여서 일어나는 신녀의 뚫린 배 사이로 지렁이 같은 얇은 촉수들이 뻗어 나갔다.

검붉은 촉수들은 짧은 시간 신녀의 구멍 난 배 부분을 채우고 주변으로 일렁이듯 몸집을 불렸다.

삽시간에 신녀의 몸보다 훨씬 크게 변하는 놈의 체형.

‘들킨 이상 굳이 신녀의 모습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건가.’

나는 굳은 얼굴로 바로 진천파를 연달아 쏘아댔다.

퍼퍼펑!

사방을 갈아버릴 정도의 힘을 가진 진천파가 주먹 크기로 축약되어 변화하는 적을 적중하고 있었다.

스스슷.

그러나 놈은 신(神).

변화하는 와중에 받은 공격에도 놈의 몸은 구멍 난 곳을 메워가며 여전히 몸을 불려갔다.

‘내 공격은 놈의 변신을 조금 지체시키는 정도밖에 되지 않아!’

방심을 기회로 첫 공격은 성공했으나 내 공격 따윈 놈에게 큰 상처를 주지 못했다.

“크크크.”

놈의 음산한 웃음이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되어 분지 안에서 메아리치듯 울렸다.

“실력이 고작 이건가?”

어느새 검붉은 촉수로 온몸을 뒤엎은 거인의 모습을 한 놈의 입에서 비아냥대는 말이 흘러나왔다.

‘크기는 약 십이 척 정도.’

올려다보는 놈의 키는 일반 무인의 두 배는 됨직해 보였다.

무엇보다 검붉은 지렁이처럼 보이는 촉수들은 놈의 몸 표면에서 일렁이듯 움직이고 있었는데, 마치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놈보다 높은 곳에서 공격한다!’

타앗.

놈이 움직이기 전, 발이 땅을 거세게 박찼다.

“완전 개방!”

땅을 박참과 동시에 촤르륵 하는 쇳소리와 함께 몸에 천갑이 덮였다.

사 차 진화된 천갑이니만큼 가벼웠으나 훨씬 더 강화된 천갑.

찰나의 시간을 거치며 천갑으로의 완전한 변환을 마쳤다.

가속에 가속을 거듭한 빠르기는 마치 순간이동을 한 듯 놈에게 튕겨 나갔다.

퍼억!

천갑의 발이 놈의 가슴을 걷어찼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는 놈.

“……!”

꽤 강한 충격을 놈에게 주었건만, 놈의 몸은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탓!

놈의 몸을 디딤판 삼아 다시금 박차고 하늘로 솟아오르자, 놈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바라트의 천갑을 입었음에도 고작 이 정도라니. 쯧.”

처음 공격은 그냥 받아준 것처럼 놈이 혀를 찼다.

“네놈은 천갑의 진짜 사용법을 모르는구나.”

하늘 높이 솟아오른 나는 분지 아래에서 비아냥대는 놈을 보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어떻게 사용한다는 거지? 네놈이 한번 보여주지그래.”

공중에서 한 바퀴 휘돈 천갑이 온몸의 무게를 무기 삼아 아래쪽으로 내지르듯 쏘아졌다.

콰앙!

진천기공을 몇 번이나 두른 천갑이 놈의 몸과 부딪히자, 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놈도 타격이 있는지 몸이 뒤쪽으로 휘었다.

놈의 몸이 휘는 잠깐의 사이, 천갑의 팔꿈치가 턱 부근을 강타하고 무릎은 복부를 찍어 눌렀다.

“크으.”

잇단 강력한 타격에 놈의 몸이 휘청였다.

그러나 흔들리는 것은 잠시.

화악!

놈의 몸 전체를 감싸고 있던 검붉은 촉수들이 나를 향해 순식간에 펼쳐졌다.

“……!”

검붉은 촉수들은 마치 질기디질긴 끈끈이처럼 몸을 휘감기 시작했고, 뱀마냥 조여왔다.

트트트.

강한 힘이 천갑을 조여오자, 그토록 단단했던 천갑의 표면이 일그러지듯 한 소리를 냈다.

“네놈의 힘이 이 정도가 끝이라면, 넌 죽을 것이다.”

촉수들에 의해 온몸이 사로잡힌 나에게 놈이 살의가 담긴 마지막 말을 건넸다.

“크윽…….”

고통으로 짓눌린 목소리에 이어 놈에게 해줄 답이 흘러나왔다.

“……각성 시작.”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온몸에 빛이 번지며 가야의 목소리가 울렸다.

[각성을 시작합니다.]

[각성 시, 천갑의 능력이 세 배 이상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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