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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80화 (180/200)

기갑무림 180화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이지러진 형태의 건물들.

어두운 밤, 혈천교의 건물들을 지나며 어디론가 향하는 발걸음이 보였다.

주변의 환경들이 일렁이며 재조합되는 것이 누군가의 기억을 재생하는듯한 모습이었다.

‘누구의 기억이지?’

의문을 품은 채 시선이 발걸음을 따라가는데, 곧이어 교주전의 문이 열리며 노쇠한 누군가가 나타났다.

“왔구나.”

검붉은 교주의를 입은 노인이 앞에 선 이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예, 사부님. 그런데 이 밤에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신 것인지요?”

답을 하는 목소리의 나이는 어림잡아 이십 대 후반이나 삼십 대 초반.

노인의 나이는 아흔이 다 되어 보였다. 그는 힘이 빠진듯한 모습이었는데 앞의 인물을 보자 인자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더 늦기 전에 네게 줄 것이 있어서 부른 것이란다.”

“제게 줄 것이요?”

“그래. 안쪽으로 들어오렴.”

노인의 말에 따라 교주전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자 화려한 가구들 사이로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도 사부라 불린 노인이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듯했다.

‘혹시…… 혈천교주의 사부인가?’

그렇다면 전대 교주란 말이었다.

지금 혈천교주가 교주위를 물려받은 지 이십 년이 지났다고 들었으니 이 모습들은 그때의 것들이었다.

“쿨럭.”

노인의 숨찬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전대교주로 추정되는 노쇠한 사내는 연신 기침을 하며 교주전 벽의 붉은 모란 무늬를 몇 번 쳤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벽 자체가 위로 올라가며 비밀 금고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나는 비밀 금고가 보이자 좀 더 유심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전대교주는 벽 안의 금고에서 미리 준비한듯한 쟁반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쟁반 위에 보이는 것은 묵빛 반지와 사안의 미륵, 그리고 작은 은빛 조각.

“사부님……?”

보란 듯 비밀 금고를 열고 기물을 꺼내오는 사부를 보는 교주의 눈이 커졌다.

“앉거라.”

전대교주는 이젠 때가 되었다는 듯 말을 꺼냈다.

“이 물건들은 혈천교가 창시되었을 때 은인에게서 받은 물건들이다.”

“은인이라면……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너도 알다시피 우리의 뿌리는 마교다. 그중에서도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유령 취급받던 인간들이었지.”

전대교주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천갑무신에게 천마가 패한 후, 마교는 힘을 잃어갔다. 덕분에 우리는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되었어. 그때 은인이 나타났다.”

은인에 대해 말하는 동안 전대교주의 죽은 눈빛이 신의 은총을 받은 것처럼 생기를 품었다.

“은인은 우리에게 혈신에 대해 알려주었고, 혈신의 힘을 주었지.”

혈천교가 만들어진 진짜 원인을 처음으로 듣던 교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혈천교는 혈신의 계시를 받은 마교의 인물이 세운 것으로 알려졌었기 때문이었다.

“은인이 혈신의 힘을 주었단 말입니까?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전해 듣기로 그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고 했어. 온몸을 가려 얼굴은 보지 못했다고 하더구나.”

“누군지 알지 못한단 말입니까?”

“은인 또한 천갑무신이 있던 곳에서 같이 있던 사람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그런……!”

그들의 적인 천갑무신과 혈천교를 창시하게 해준 은인이 같은 곳의 출신일지 모른다는 말에 교주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더냐? 우리에게 살아갈 종교를 주었고 마교와 정파놈들을 이길 힘을 주었는데.”

전대교주의 말을 틀리지 않았다.

힘을 주고, 살아갈 목적을 주었는데 그가 누구인 게 무슨 상관일까.

혈천교가 만들어진 지 백팔십 년이 지났음에도 혈천교는 굳건하다 못해 더 강해졌다.

제자가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사부가 말을 덧붙였다.

“은인이 말하길, 천갑무신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힘으로 너희를 짓밟았으니 우리 역시 다른 힘을 지녀야 한다고 하더구나.”

그 방법은 인간의 피를 통해 혈신의 힘을 얻는 것이었다.

잔인한 일이긴 하나, 그들은 이미 사마외도(邪魔外道)였다.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뭐든 못할까.

피로서 강함을 얻고, 동질감을 얻은 혈천교인들은 나날이 결속이 단단해져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혈천교로 이름 지은 그들의 무리는 마교로부터 분리되어 나올 수 있었다.

“자, 보아라.”

전대교주는 탁자 위의 세 가지 물건들을 가리켰다.

“이것은 은인이 교주들에게만 내린 특별한 하사품이다.”

특이해 보이긴 하나 별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물건들이었다.

“무기도 아닌 이것들이 어째서 특별하다는 것입니까?”

교주의 물음에 노인이 미소 지었다.

“이것은 혈신의 힘에 대항하는 것들이지.”

“네?”

당혹스러운 의문이 튀어나왔다.

“사부님께서는 혈천교의 교주이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런 것들을……!”

교주의 물음에 전대 교주가 담담히 입술을 떼었다.

“그 이유는 혈신의 강한 힘에 홀려 정신을 잃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는 혀를 차며 부언했다.

“비록 같은 혈신을 섬기기는 하나, 광신도가 된 것들을 보면 미친놈들 같더구나. 우리마저 그렇게 이성을 잃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맞는 말이었다.

교주마저 미쳐 날뛰면 혈천교가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 될 것은 뻔했다.

“……그렇군요.”

애써 납득한 교주를 보던 전대교주의 시선이 다시금 쟁반 위의 기물로 향했다.

“이것은 은인이 준 다른 세계의 기물이란다.”

그는 사안의 미륵을 가리켰다.

“이 사안의 미륵은 혈신의 눈을 넓게는 사장까지 피할 수 있다고 하지. 그리고 이 묵빛 반지는…….”

전대교주는 기이하게 일렁이는 빛을 지닌 작은 은빛 조각과 반지를 함께 들었다.

“인간이 상상하지 못한 힘을 쓸 수 있게 만들어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묵빛 반지 속 어둠이 미세하게 요동치더니 얇은 은빛 조각이 넓게 확 퍼졌다.

은빛 조각을 보던 교주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것은 천갑이 아닙니까?!”

너무 놀라 눈을 부릅뜬 교주를 향해 전대교주가 환하게 웃었다.

“천갑무신이 입는 것과 똑같진 않아도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지.”

그가 조각과 반지를 떨어뜨리자 다시금 조각은 원상태로 돌아갔다.

“보다시피 반지와 닿는 순간 조각은 천갑무신과 같은 보호갑을 생성한다. 고작 반지의 위치에 따라 우리의 생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

얇아 보이긴 하나, 천갑무신이 입었던 것과 같은 재질의 보호갑이라면 이것 하나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은 사라진다.

게다가 옷 속에서 생성되는 얇은 보호갑이라 다른 사람들은 눈치 못 챌 테고.

은빛 조각을 보던 교주가 감탄을 흘렸다.

“전대 교주님들 모두가 천수를 누린 것인 이것 때문이었군요.”

“맞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 어떤 살수나 암수에서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 그러니 이 묵빛 반지를 조각을 품은 네 몸과 절대 두 자 이상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그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사부가 자신에게 모든 것들을 넘겨주려 하자, 교주는 기쁜 낯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허리를 깊게 숙인 자신의 제자를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던 전대교주가 은빛 조각을 들고 천천히 앞으로 다가섰다.

“나는 이제 죽을 날이 다 되어 이 조각이 필요 없다. 하나, 너는 혈천의 새로운 교주로 살아갈 터.”

고개를 들자, 전대교주의 얼굴과 말에는 엄숙함이 깃든 모습이 보였다.

“제 오대 혈천교주가 될 너에게 이것들을 넘겨주겠다.”

그는 제자의 어깨를 잡고는 은빛 조각을 심장 쪽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윽.”

붉은 옷이 피로 번짐과 함께 약간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은빛 조각이 살갗을 파고들었을 때만 고통이 들었을 뿐.

조각이 심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스스로 살이 아물기 시작하더니 알 수 없는 고양감이 온몸을 강타했다.

“……!”

동시에 조각을 넣었던 심장 부근의 옷이 파지직 타올랐다.

그런데도 하나의 상처조차 입지 않은 심장 부근에는 두 개의 뱀 형상의 문양이 떠올랐다.

은빛 조각의 힘을 잘 받아들인 제자의 모습에 전대교주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로써 혈천은 새로운 세상을 맞을 것이니, 네게 혈신의 영광이 함께하기를…… 기원하마.”

* * *

팟.

전대교주의 말을 마지막으로 기억을 보여주던 장면이 끊겼다.

그리고 동시에 두통과 심장의 두근거림이 사라졌다.

‘이건…….’

정신을 차리자 보이는 것은 침상에 두 동강이 난 채 죽어 있는 교주였다.

‘저자의 기억이다.’

교주의 심장에서 조각을 빼내었기에 그의 기억이 보이는 듯했다.

[괜찮으십니까?]

교주의 기억을 엿본 내가 잠시 멍해 있자, 가야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괜찮아.”

답을 하면서도 내 시선은 영롱하고도 기이한 빛을 내는 신의 조각을 향해 있었다.

교주의 기억을 본 것과 신의 조각과의 연관성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바라트의 유해 조각은 그의 힘이 담겨 있다고 전해집니다.]

[강한 신이었던 만큼, 가장 원하는 형태로 힘을 준다고 하는데 혈천교주는 어떤 힘을 받았는지 모르겠군요.]

“원하는 힘을 준다고?”

[예.]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나,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원하는 것이라.’ 가야의 말에 은빛 조각을 더 유심이 바라보았다.

혈천교인들이 바라는 것은 천갑무신처럼 강한 힘이었을 테다.

그러니 바라트가 그들의 소원을 받아들여 은빛 조각이 천갑무신의 갑옷처럼 변했던 것이겠지.

그렇다면…….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꽈악.

나는 은빛 조각을 강하게 쥐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원하는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내게 나쁘게 대해주었던 사람이 있었던 반면 장삼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위해 주었던 사람도 있었다.

이득만을 위해 남들을 해쳤던 사람이 있었던 만큼 정의(正義)를 위해 생명을 던졌던 의인도 있었으며.

처음엔 나를 해하려 했으나 지금은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이 된 흑영형제도 있었다.

복잡한 속을 가진 채 겉으로는 쾌활했던 당무부터 절세의 재능을 가졌던 천무륭, 가장 친한 친구가 된 제갈신,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하후홍까지.

그리고.

우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렸던 모용설화.

그녀의 죽음으로 얼마나 상심했던가.

나는…….

더는 내 주변 사람들의 참혹한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따뜻한 정을 품은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는 것.

주변의 사람들을 더 이상 모용설화처럼 헛되이 잃고 싶지 않았다.

‘내 사람들의 평화.’

그래, 내가 아끼고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평화(平和)였다.

진가장을 나와 현무학관에 들어가면서 알게 된 사람의 정(情).

정을 느낀 그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면 나도 행복해질 것만 같아서.

불운과 불행들이 모두 사그라들 것만 같은 평화가 주는 안도감을 갖고 싶었다.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

넓게는 장삼 아저씨와 같이 순박한 이들과 정의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지키길 원했다.

웃음과 행복을 지키다 보면 그들 옆에서 나 역시 언젠가 행복해지지 않을까, 라는 작은 소망.

이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바라는 원(願)이었다.

그때, 은빛 조각을 쥐고 있던 손에서 흰빛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너의 원을 받으마.]]

갑자기 들려온 알 수 없는 목소리에 당황한 것은 잠시.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화악.

그리고…….

희고도 영롱한 내 몸을 감싸며 주변이 폭발하듯 흰빛으로 뒤덮였다.

* * *

어떻게 교주전을 나왔는지 모르겠다.

눈을 떠보니 내가 있는 곳은 신녀를 두고 왔었던 곳과 가까운 곳이었다.

약 백 장 정도 앞에 그녀를 가두고 온 분지가 보였다.

‘내가 언제 여기로 왔지?’

빛이 폭발하듯 터진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후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한동안 정신이 나간 듯 서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손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손.

당황스러웠다.

분명, 흰빛이 터질 때 신의 조각을 손에 쥐고 있었건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니.

“……어떻게 된 거지?”

망연한 물음에 가야가 잠시 뜸을 들인 후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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