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79화
혈천교 안은 어수선했다.
교주가 신녀에 의해 비명횡사하고, 후인의 위협까지 있자 교인들의 불안함은 극에 달했다.
“교주님의 시체는 어찌했나?”
“일단 교주전에 두었다고 들었네.”
“하,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 신녀가 교주가 되는 거지.”
“신녀는 정당한 방법으로 교주가 된 게 아니잖아?”
“강하면 그만이야. 너도 멀리서 신녀가 변하는 모습을 봤잖아. 신녀보다 강한 자가 없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
“그렇긴 하지.”
사도의 천갑을 입고 한순간에 교주의 몸을 두 동강 낸 신녀의 힘은 기함할 정도로 강했다.
그러나 그 모습에 교인들은 경외를 보이기 보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품었다.
“어차피 이럴 거, 진짜 혈신님이 나타나서 다 쓸어버렸으면 좋겠네.”
“사도가 저 정도니 혈신님의 능력은 어마어마하겠지.”
“정말 끝내줄 거야.”
“캬, 상상만 해도 좋네.”
세상을 피로 물들이고, 무인들의 시체 위에서 오연히 서 있는 혈신은 그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듯 교인들의 눈이 몽롱해졌다.
“이 거지 같은 세상 다 부숴 버리고 새 세상을 만드는 거지.”
“위선 쩌는 정파인들과 힘만 믿고 까부는 놈들이 혈신의 손에 개미처럼 짓뭉개진다니!”
“크으, 생각만 해도 좋구나!”
혈천교는 혈신을 믿는 단체이니만큼 믿음과 충성심이 굉장히 강했다.
비록 신녀가 교주를 죽이는 사태가 있긴 했었으나, 그들이 믿는 것은 혈신(血神).
세상을 오시할 힘을 가진 혈신이 언젠가는 이 모든 것들을 해소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교인들의 불안감을 조금씩 잠재우고 있었다.
“사도까지 나타난 걸 보면 혈신님이 오실 날이 머지않았어.”
“맞네. 조금만 기다리면 혈신님이 오실 거야!”
혈신이 온다며 눈을 빛내던 교인 하나가 들고 있던 무기를 고쳐 들었다.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구먼.”
“혈신님이 오시기 전까지 제대로 교를 사수해야지!”
“자, 우리 모두 혈신님께서 오실 때까지 맡은 일을 열심히 하자구!”
혈천교의 교인들은 언제 불안해했냐는 듯 무기를 잡고 눈을 빛내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뒤.
교인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커다란 기둥 뒤에서 투명한 신형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혈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구나.’
잠시간의 대화를 들었음에도 교인들의 혈신에 대한 믿음을 엿볼 수 있었다.
혈천교가 마교 내에서 사람 취급받지 못하던 자들이 혈신의 힘을 얻고 분리되어 나온 분파라고 했었으니 어쩌면 당연하기도 했다.
‘힘이 없는 상태에서 마교로 들어간 것 자체가 세상에 상처 입거나,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 흘러간 사람이었을 테니.’
그들에게 혈신은 세상을 바꾸고, 자신들을 무시하던 놈들을 벌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신(神)이었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그들을 받아주고 구원한 혈신.
혈신은 버림받은 그들을 위해 세상을 부수고, 복수할 자의 피를 마음껏 마시도록 허락했다.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이유가 있었어.’
이미 목숨 따윈 별 가치가 없는 그들이었다.
세상에 대한 복수와 강한 힘만이 그들에겐 전부였고, 혈신은 그 보상을 넘치도록 주려 하는데 어떻게 혈천교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광신도(狂信徒).
이것이 저들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였다.
“마교의 소교주가 꽤 고생하겠네.”
광신도가 된 무인들이야 정리한다 쳐도, 이미 혈천교의 교리에 젖어버린 다른 교인들을 흡수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교의 사정.
나로서는 일단 교주의 기물을 빼낸 후, 문제가 되는 이들만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나머지 정리는 모두 마교가 할 테니 나로서도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지금은 기물만 가져가면 돼.’
시체 또한 교주전에 있다고 했으니 한 번에 처리하기 좋은 상황.
때맞춰 가야가 기물의 위치를 알려왔다.
[좌측 십 보. 직진 방향으로 십오 장 거리 근처에 기물이 있습니다.]
[사 장 거리 안쪽은 제 능력으로 확인이 불가합니다.]
가야가 대략적인 기물의 위치를 말해주자 투명화된 신형이 한 곳을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넓은 복도 끝에 자리 잡은 교주전 앞은 경계하는 혈천대원 수십 명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었다.
‘모두 사십육 명이군.’
혈천대원들은 내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지금만 해도 바로 눈앞에 내가 서 있건만, 저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교주와 신녀가 없는 이상, 나를 감지할 사람 따윈 이곳에 없었다.
작게 발을 구르자 투명화된 몸이 복도의 옆면 벽을 튕기며 앞으로 몸이 쏘아졌다.
촤악.
가속에 가속을 더한 속도는 마흔여섯의 혈천대원들의 움직임을 매우 더디게 볼 수 있었다.
파파팟.
눈을 한번 깜빡이기도 전에 그들 모두가 점혈 당했다.
점혈 당한지도 모른 채 스르르 쓰러지는 혈천대원들.
한순간에 실 끊어진 인형처럼 마흔여섯의 무인들이 풀썩 쓰러졌다.
‘일단 시간은 벌었다.’
굳이 소란을 피워 모두를 달려들게 만들 필요가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교주전의 문을 열었다.
끼익.
안으로 들어서자, 침상 위에 두 동강이 난 교주의 몸을 맞춰 뉘어놓은 것이 보였다.
교주의 피로 붉게 물든 침상.
나는 교주를 흘긋 보고는 교주전 주변을 살폈다.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데.’
교주전은 화려했으나, 물건이 많지는 않았다.
침상과 탁자, 그리고 책상…….
둘러보는 가운데 눈에 띈 것은 꽃병에 있는 화려하고도 짙은 향기를 뿜는 붉은 꽃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 볼품없이 자리한 붉은 미륵.
‘적미륵?’
자세히 보니 적미륵은 아니었다.
독특한 점은 불상은 사안(四眼)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크기 또한 적미륵에 비해 반 이상 작다는 것?
사안의 미륵을 손으로 집어 들자, 푸른빛이 손 쪽으로 흐르더니 곧이어 가야의 감탄이 들려왔다.
[……사안의 혈상(血想)이라니!]
[이곳에서 바라트의 물건을 보게 될 줄 몰랐군요.]
‘바라트의 물건?’ 바라트 또한 진천의 신이었으니, 그의 물건은 진천의 기물일 테다.
의문점은 어떻게 혈천교의 교주가 바라트의 물건을 손에 넣었느냐였다.
[이곳으로 사안의 혈상이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나, 꽤 좋은 물건을 얻게 되신 듯합니다.]
“이 혈상에 어떤 공능이 있기에?”
내 물음에 가야의 목소리가 살짝 들뜬 듯 답했다.
[바라트는 신들의 대적자이자, 배신자였죠.]
[그는 신의 눈을 피하기 위한 기물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가 사안의 혈상.]
[혈상을 중심으로 주변 사장 거리 안은 신의 눈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신의 눈을 피할 수 있어?’ 나는 새삼스레 놀란 눈으로 사안의 혈상을 바라보았다.
가야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사안의 혈상은 단지 혈신의 힘만을 제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천의 세계에 있는 신들의 눈조차 속일 수 있는 기물이라는 뜻이었다.
신의 눈을 속이다니.
이 얼마나 귀중한 기물이란 말인가!
[가까운 거리에 있음에도 진천의 기물을 확인하기 힘들었던 것은 혈상의 방해 때문이었군요.]
가야는 잠시 후 말을 보탰다.
[혈상에 마력을 주입해 보십시오.]
그녀의 말에 따라 손에 쥔 사안의 혈상안으로 마력을 살짝 집어넣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스슷.
적미륵과 비슷한 재질의 붉은 나무껍질이 알을 깨듯 갈라지며, 안에서 새로운 형태의 혈상이 나온 것이다.
‘이것은……!’
껍질을 깨고 나온 것은 팔이 네 개요, 눈이 네 개인 신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작은 혈상이었다.
손가락 세 마디 정도의 크기인 혈상은 몸에 지니고 다니기 편했을뿐더러 어딘가에 세워놓고 적의 눈을 피하기 좋았다.
[혈상의 능력에는 제약이 있습니다.]
[신의 등급에 따라, 숨길 수 있는 범위가 달라지는 것이죠.]
“어떻게 범위가 달라진다는 거지?”
[혈상의 눈이 감기는 숫자에 따라 신의 등급이 나타납니다.]
[지금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혈상 네 개의 눈이 떠 있습니다만.]
[최상급의 신이 근처로 온다면 네 개의 눈이 모두 감깁니다.]
“혈상의 팔은?”
[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급신에게 감출 수 있는 거리는 사 장. 이때, 팔은 하나만 내려갑니다.]
[중급신, 상급신, 최상급신에 따라 팔이 하나씩 더 내려가는데, 그때마다 일 장씩 숨겨지는 거리가 줄어듭니다.]
[마지막 팔이 내려가게 된다면 우리의 위치가 탄로 나는 것이죠.]
“신기하네. 눈과 팔이 움직이면서 신의 등급에 따라 신이 볼 수 있는 거리를 알려준단 말이지?”
[맞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진천의 신이 없잖아?”
사안의 혈상은 진천의 신이 보지 못하게 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러나 이곳은 진천의 세계가 아니다.
[신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어느 세계이건 간에 신이란 존재가 가지는 영향력과 본질은 비슷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안의 혈상은 그 본질에게서 일정 거리를 보지 못하도록 감추는 것입니다.]
가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힘과 등급은 다를지라도 어느 세계이건 간에 신을 이루는 본질은 비슷하다는 말.
그렇기에 혈상이 진천의 기물임에도 혈신의 힘을 제어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좋은 기물을 얻었어.’
나는 작은 혈상을 한번 바라보고는 품속에 깊이 갈무리했다.
세 개의 기물 중, 하나는 신녀가 없앴고, 혈상은 내가 가졌으니 남은 것은 하나였다.
“남은 건 어디 있지?”
혈상에 마력을 흘려놓자, 날 새로운 주인으로 인식한 혈상은 더 이상 가야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았다.
[교주의 심장 쪽입니다.]
바로 나온 가야의 답에 나는 침대에 죽은 채 누워 있는 교주의 시체로 발걸음을 옮겼다.
허리 부근이 갈라진 채 죽은 교주.
그는 눈조차 감지 못한 모습으로 차가운 시체가 되어 누워있었다.
가슴 부근의 옷을 파헤치자, 보이는 것은 흰 비단천으로 감싼 그의 몸이었다.
‘뭐지?’
이상하게 여기며 천을 찢자, 교주의 가슴이 드러났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것은 교주의 심장 부근에 있는 특이한 문신뿐.
문신의 모양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두 마리의 뱀이었다.
두 마리의 뱀은 두 개의 원을 그리며 서로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흐음. 이건 바라트의 표식이군요.]
“바라트의 표식?”
문신을 보는 내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왜 자꾸 바라트의 이름이 나오고 그의 기물이 나오는 것일까.
이곳은 진천의 세계가 아닌 내가 사는 세계일진대 혈천교로 인해 두 세계가 이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문신이 나타내는 두 마리의 뱀처럼.
[바라트의 표식은 그의 힘을 받은 자를 표시하는 수단입니다.]
혈천교의 교주가 이계의 신의 힘을 받아?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나, 진천의 조상이 오게 된 시점과 혈천교가 나타난 시점은 비슷했다.
‘어쩌면 배신자라는 사람이 혈천교와 관계가 있을지도 몰라.’
그 배신자가 혈천교의 교주를 만들고 진천의 기물과 힘을 줬다면 아귀가 맞아떨어지긴 했다.
[교주의 심장을 갈라보십시오.]
나는 의문을 뒤로하고 소매에서 단도를 꺼내 심장 부근을 갈랐다.
반짝.
그러자 심장 부근에 달라붙어 있는 작은 은빛 조각이 보였다.
작은 은빛 조각은 무언가를 갈라놓은 듯 보였다.
“이게 뭐지?”
[제 정보에는 들어 있지 않은 내용물입니다.]
말을 하는 가야의 눈이 순간 푸른빛을 뿜어냈다.
그녀는 정보를 수천 개를 조합하더니 하나의 결론을 내었다.
[저것은 아마도…….]
[바라트의 유해 조각인 듯합니다.]
“이게…… 사라진 신의 조각?”
바라트의 유해라 불린 은빛 조각은 아름다우면서도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진짜 신이 있다면 뿜어냈을 아우라처럼.
‘아름답다.’
매혹적인 빛에 홀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조각을 손에 들자,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자 가슴 부근에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으윽.”
조각을 놓으려 했으나 이상하게 조각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더욱 세차게 뛰는 심장과 깨질듯한 머리의 두통.
순간, 머릿속으로 내 것이 아닌 기억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