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무림-178화 (178/200)

기갑무림 178화

사도의 모습이 해제된 신녀를 공격한 또 하나의 이유는 혹시나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뒤통수 맞긴 싫으니까.’

지금 졌다 해도 사도의 힘을 가진 신녀는 최강자나 다름없다.

그런 신녀를 어떻게 그냥 둔단 말인가.

최소한의 장치로 사도의 천갑을 부수고 그녀의 손발을 막아야만 했다.

“어떻게든 살아나기 위해…… 사도의 힘까지 받았건만.”

숨을 헐떡이는 신녀를 내려다보니 허탈한 표정이 보였다.

“……결과는 같구나.”

“이건 네 선택의 결과다. 누굴 탓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

“내 선택의 결과라.”

신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너는 내가 아니었으니 결과가 이렇게 되었다 한들 날 비난할 수는 없다.”

“너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어. 어떻게 비난을 할 수 없다는 거지?”

“살아온 삶이 그런 삶이었으니까.”

신녀가 이를 으득 깨물었다.

“나라고 이런 빌어먹을 삶을 살고 싶었겠느냐?”

그녀의 눈빛에서 누군가를 향한 짙은 원망이 스쳐 지나갔다.

“그년에게…… 복수하고 싶었는데.”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이를 갈던 신녀가 한동안 하늘을 쏘아보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

“나를 죽일 것이냐?”

“글쎄.”

모호한 대답에 신녀가 조금은 안심한 미소를 지었다.

“큭, 어쨌건 당장 죽인다는 뜻은 아니로구나.”

그녀는 피를 쿨럭이며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지금 죽이지 않을 거라면 난 좀 쉬겠다.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 죽을 것만 같으니까.”

반듯하게 누워 내공을 돌리는 듯한 신녀의 모습.

보통 사람이면 진작 죽었을 상처이건만, 사도의 힘을 받은 신녀는 벌써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역시 사도의 힘을 받은 신녀로군.’

스스로 상처를 고치는 모습의 신녀를 보자 죽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그러나 신녀를 죽인다면, 혈신이 강림할지도 몰랐다. 혈신이 강림한다면 나로서는 백전백패.

나중에 신녀를 죽이더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기물부터 확보하는 게 먼저야.’

진천의 기물은 혈신의 힘을 약화시킨다.

그렇다면 지금 신녀를 죽이지 않는 대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기물부터 찾아야 했다.

‘신녀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것은 기물을 찾은 뒤다.’

혈신의 힘을 지닌 신녀야 말로 기물을 가져온 뒤에 사용법을 시험해보기 좋았으니, 그녀를 살려두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신녀를 말없이 보던 나는 조금 전의 싸움으로 인해 엉망이 된 분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다행히 설치해 둔 덫은 망가지지 않은 상태.

‘덫이 있다 해도 강림한 혈신을 막기엔 부족하긴 하지.’

신녀에게 다가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점혈을 하고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기물을 가져올 동안 얌전히 있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널 죽일지도 모르니까.”

“……도망가라고 떠밀어도 움직일 힘조차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점혈로 인해 입과 눈만을 움직일 수 있는 신녀의 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리자, 신녀가 죽은 듯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괜찮겠지.’

상처가 아문다고 해도 아주 조금씩일 뿐이다.

저 속도라면 최소 한두 달은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법은 하나.

‘최대한 빨리 진천의 기물을 찾아와야겠어.’

나는 땅을 강하게 박차고 빠르게 혈천교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 *

잠시 후.

주변에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자 신녀의 감았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으윽.”

고통에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진천파로 인해 온몸이 찢겨 자신도 모르게 나온 신음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상처가 아물고 있다고는 하나, 약해진 힘은 겨우 생명을 붙여놓을 정도였다.

“사도의 힘이라면 후인을 이길 줄 알았건만……. 지고 말았네.”

자신이 진 이유는 사도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경험이 부족했다.’

사도가 된 힘에 취해, 마치 신이 된 것마냥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강력한 힘이 주는 쾌락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당연히 후인 따위야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게 만들었다.

“크큭.”

신녀는 처참한 자신의 꼴을 보며 황망한 웃음을 흘렸다.

“인간이 사도의 힘을 얻은 천갑을 이길지 어떻게 알았을까.”

혈신의 사도를 인간이 이겼다.

둘 다 천갑을 입었다 한들, 놈이 입은 천갑은 그냥 보기에도 사도의 천갑보다 못해 보였다.

그럼에도 자신이 진 이유를 찾자면 오직 하나였다.

무공의 차이.

천갑의 힘과 혈신의 힘을 가졌음에도 숙달되지 못한 무공으로 인해 자신은 진 것이다.

“하. 천갑끼리의 싸움에서 가진 무공에 따라 실력 차이가 나는 것을 몰랐구나.”

입에서 허망한 한숨이 새어 나왔으나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살아나기만 하면 돼. 그러면 반드시 기회는 온다.”

자신이 죽는다면 혈신이 강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후인이 자신을 죽일 리 없었다.

기회를 잘 살려 살아나기만 한다면,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을 되돌려줄 날이 분명 올 터였다.

“지금은 참아야 해.”

신녀가 이를 악물며 미래를 생각하던 때였다.

[우습구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신녀의 눈이 당황과 놀라움으로 인해 크게 떠졌다.

“누, 누구?”

당장이라도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거는 존재를 확인하고 싶건만,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눈과 입뿐.

눈만 도르륵 굴리는 가운데, 그녀의 뒤편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츠츠츠.

소리는 마치 벌레들이 웅웅 대는 듯한 소리였는데, 나중에는 작은 쇳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설마…… 천갑의 소리?’

사도의 천갑은 사라졌다.

설령 사라지지 않았다 해도 어떻게 홀로 움직이며 살아있는 생명처럼 소리를 낸단 말인가.

그러나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목소리가 나오는 곳은 분명, 모습을 드러낸 부서진 사도의 천갑 조각이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천갑의 조각들은 신기하게도 스스로를 복원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천갑의 조각에서는 신녀를 탓하는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었다.

[역시 네년을 믿는 게 아니었어.]

“그게 무슨 말…….”

신녀는 다음 말을 하지 못한 채 눈을 부릅떴다.

눈동자에 비친 것은 사도의 천갑이 스스로 형체를 만들어 일으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허억!”

찢기고 갈라졌으나, 원래의 모습의 반 정도를 복원한 사도의 천갑.

공포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 위를 덮은 그림자는 괴기한 모습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당혹과 두려움으로 인해 흔들리는 신녀의 눈동자 위로, 사도의 천갑이 괴기한 모습을 한 채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너는 스스로 죽었어야 했다.]

신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목소리는…….”

공포에 절은 목소리가 단말마처럼 튀어나왔다.

“혈신의 대리자!”

그녀의 외침에 음산한 목소리가 큭큭대는 웃음과 함께 울려 퍼졌다.

[그래, 난 혈신의 대리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녀는 혈신을 직접 영접한 적이 없었다.

만난 것은 오직 혈신의 대리자뿐.

그러나 대리자임에도 그는 혈신의 모든 힘과 권능을 쓰고 있었다.

“설마…… 나를 죽이고 혈신을 강림시키려는 건가?”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에 사도의 천갑이 비웃음을 흘렸다.

[너 따위에게 혈신이라니. 처음부터 네년의 몸은 혈신을 받을 그릇조차 못 돼.]

“……그럼 내가 받은 힘은 뭐지?”

처음부터 대리자는 말했다.

자신의 그릇이 부족하다고.

그럼에도 신녀가 받은 것은 분명 혈신의 힘과 사도의 천갑이었다.

[그건 나를 위한 것이었다.]

“뭐?”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고통을 견딘 후, 진정한 사도가 된다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 고통에는─]

스스슷.

어느새 꼬리까지 복원된 사도의 천갑이 살아 움직이듯 그녀의 머리 위를 천천히 맴돌았다.

[네 죽음도 포함되어 있지.]

“……그런!”

당혹스러운 신녀의 눈이 위협적으로 얼굴 위를 맴도는 날카로운 칼날에 닿았다.

그리고 피 묻은 칼날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난…… 처음부터 이용당한 거야!’

혈신도 아닌, 대리자에게 이용당해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중이라니.

복수를 위해 몇 번이나 까무러치며 사도가 되기 위한 고통을 겪었건만.

그것은 진짜 혈신도 아닌, 대리자를 이곳에 강림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말도 안 돼. 모든 인간 중 최고의 신녀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내가……. 겨우, 대리자가 이 세상에 강림하게 만드는 그릇이었을 뿐이라고?”

황망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 내 복수는?’

복수는커녕 목숨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신녀의 눈이 독기를 품었다.

웃음을 뚝 그친 사나운 눈빛이 여전히 얼굴 위에서 칼날로 위협을 하는 사도의 천갑을 향했다.

“대리자인 네놈이 이러는 걸 혈신은 알아? 감히 혈신의 힘을 빌려 신녀인 나를 이용하고 멋대로 지상에 강림하려는 것을 말이야!”

[혈신은 아직 모른다.]

[하나, 곧 있으면 알게 될 터.]

텅 빈 사도의 천갑 투구 안의 검은 그림자 안에서 눈동자만 있는 듯 붉은빛이 번득였다.

[나야말로 혈신이 내가 한 모든 일을 알길 원하는 사람일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말이지?”

[크큭. 너 따위 버러지가 이유를 안들 무슨 소용 있을까?]

[너는 죽으면 그만이다.]

“……!”

대리자의 말에 신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잠깐 신의 힘에 취해 인간들을 벌레 취급했건만.

정작 벌레만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이용당한 건 자신이었다.

뜨거운 울화가 신녀의 가슴에 버석거리며 타올랐다.

그러나, 울화는 잠시.

죽음의 공포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도, 도망가야 해!’

하지만 그녀의 몸은 움직이지 못했다. 점혈도 점혈이지만, 혈신의 대리자의 힘으로 인해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그녀를 비웃듯 내려다보던 혈신의 대리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세상에 강림하게 된다면, 혈신 또한 새로운 몸을 가질지니.]

천갑의 꼬리 끝이 날카로운 살기를 뿜으며 신녀의 가슴을 향했다.

[모든 것은 네 죽음에서 비롯되는바.]

[너는 혈신의 신녀로서 영광된 죽음을 맞으라!]

괴기한 목소리가 서늘하게 죽음을 외치는 순간.

“아, 안 돼! 아아악!”

신녀의 비명이 울렸다.

푸욱!

동시에 검붉은 사도의 꼬리가 신녀의 가슴뼈를 부수며 몸을 꿰뚫었다.

“……커컥.”

신녀의 입에서 붉은 피가 울컥 솟아올랐다.

점차 생기를 잃어가는 눈동자 속에 비친 것은, 텅 빈 투구 안에서 비추는 탐욕스러운 붉은 눈.

“아아…….”

신녀의 흐려져 가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시 후, 모든 것이 멎었다.

신녀가 죽은 것이다.

[드디어…….]

[내가 이 세상에 강림할 수 있게 되었구나!]

분지 안에 가득 울리는 괴상하고도 음습한 목소리.

목소리는 기쁨에 차 있었다.

혈신의 대리자로 불린 그가 신녀의 머리에 손을 올리자 신기하게도 사도의 천갑이 서서히 사라지며 신녀의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스스스.

사도의 천갑이 붉은빛의 먼지가 되어 죽어버린 신녀에게 모두 흡수된 지 얼마 후.

번쩍.

붉은빛의 눈을 지닌 혈신의 대리자, 신녀가 눈을 떴다.

* * *

‘뭔가 이상하다.’

진천의 기물을 찾기 위해 혈천교 내부로 들어가기 직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함.

신녀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데다가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해 혈신을 불러낼 일은 없을 텐데.

이런 기분은 왜 드는 것일까?

‘혈천교 때문일 거야.’

애써 불길한 기분을 눈앞에 있는 혈천교 탓으로 돌렸다.

만약 신녀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가야가 알려주었을 텐데 가야는 아무런 경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우.’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혈천교 쪽으로 몸을 천천히 옮겼다.

점차 투명해지는 몸.

어느샌가 전혀 보이지 않는 신형이 혈천교의 담장을 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