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76화
신녀는 화사한 모습이었다.
결전을 앞둔 모습 같지 않게 나붓한 걸음으로 나오는 그녀의 뒤로 교주와 장로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대로 싸우는 겁니까?”
사도가 되었다고 하건만 특별히 변한 것이 없는 신녀의 모습에 장로 하나가 의문을 표했다.
신녀는 그의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질까 봐 걱정되시나 보군요.”
“그건 아닙니다만…… 무방비 상태로 보여서 말입니다.”
본래부터 경신법을 빼고는 무공을 지니지 않던 그녀였다.
사도의 힘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잡설은 그만하고 사도가 된 모습을 빨리 보고 싶구나.”
차가운 교주의 말에 신녀가 그를 흘끗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지요.”
대답이 끝나자 얇은 쇳소리와 함께 신녀의 몸이 검붉은 무언가로 덮이기 시작했다.
촤라락.
붉은 갑각류의 모양을 한 얇고도 단단한 껍질들이 일사불란하게 촤르르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몸집을 불려 나갔다.
촤악.
몸을 감싸던 독특한 모양의 갑옷들이 갑자기 쭉 늘어났다.
수십 개의 마디로 이어진 모양은 마치 전갈의 꼬리 부분과 같았고 그 끝은 날카로운 칼날이 달려 있었다.
얼굴 부분은 머리 앞부분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투구 모양이었으며, 보이는 것은 어느새 붉게 변한 신녀의 눈이었다.
“……오!”
“이것이 혈신의 사도인가!”
햇살을 등지고 검붉은 전갈 모양의 갑옷을 입고 서 있는 신녀의 모습은 강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끝내주는군!”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풍기는 기운도 대단하구먼!”
장로들의 입에서 경탄이 터져 나왔다. 아직은 천갑을 입은 후인조차 눈앞에서 본 적 없는 그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신녀가 사도로 변하는 장면은 혈신이 선사하는 기적처럼 보였다.
“이런 모습이었군.”
교주는 경탄 대신 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빛을 받아 번쩍이는 검붉은 천갑.
주변을 내리누르는 요기는 강력하게 앞에 있는 상대를 옭아맸고, 매혹하는 뱀처럼 유혹하듯 움직이는 꼬리는 위협적이면서도 기이했다.
사아아.
때마침 불어오는 모래바람 속에 서 있는 사도의 모습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탄이 튀어나왔다.
곁에 있었을 뿐인데도 살갗을 따끔하게 할 정도의 강력한 힘의 파장이 느껴졌다.
‘이 정도 힘이라니.’
교주는 사도라면 후인 따위 죽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모두가 경이로운 눈길로 완성된 사도를 바라보는 사이, 사도가 교주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혈신의 뜻을 받들어, 후인을 죽이고 오겠습니다.]
강한 힘을 가졌음에도 교주에게 충성하는 듯한 신녀의 목소리.
사도는 교주에게 아무런 위협을 하지 않는다는 듯 오체투지에 가까운 형태로 몸을 깊이 숙였다.
그 모습에 신녀를 경계하던 교주의 얼굴이 약간은 풀어졌다.
‘왕이라도 된 기분이군.’
앞의 존재가 어떤 존재이던가.
혈신의 힘을 지닌 사도가 모두 앞에서 무릎을 꿇자 그는 흡족함을 숨기지 못하고 사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완전히 경계를 푼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땅바닥에 오체투지를 한 상태로 엎어져 있는 사도의 모습에 그는 오만해진 나머지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나를 위해 후인을 없애고 오너라.”
평소 같았으면 내밀지 않았을 묵빛 반지를 낀 손이 고개를 숙인 사도의 투구 쪽으로 내밀어진 것이다.
손이 사도에게 닿으려는 순간.
휘릭!
신녀의 눈이 반짝임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붉은 무언가가 교주를 향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스치고 지나간 것은 사도의 꼬리 형태의 날카로운 칼날.
“……컥!”
잘린 것은 교주의 몸이었다.
“이, 이게 무슨?!”
급작스러운 사태에 장로들이 어쩌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는 사이, 두 동강이 나버린 교주의 몸이 땅으로 떨어졌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나뉜 채 팔을 허우적대는 교주.
“네, 네 이년이! 감히 나를!”
사도가 변하는 경이로운 모습과 자신의 발밑에 무릎 꿇은 거대한 힘에 취해 방심하고 말았다.
교주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묵빛 반지를 심장 가까이 끌어당기려 했다.
그러나 두 동강 난 몸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빌어먹을!”
급한 마음에 욕설을 내뱉는 교주의 행동보다 빠른 것은 사도의 날카로운 꼬리였다.
촥!
또다시 붉은빛이 빠르게 스침과 함께 혈흔이 주변에 흩뿌려졌다.
“크악!”
이번에 잘려나간 것은 묵빛 반지를 낀 그의 손가락이었다.
손가락이 잘려 버린 교주가 반대편 손으로 손가락을 잡고는 악을 쓰며 장로들과 무인들에게 명령했다.
“배, 배신자인 저년을 죽여라!”
교주의 명령에 장로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교주를 공격한 사람은 혈신의 사도가 아닌가!
게다가 교주도 없이 그들이 덤벼봐야 개죽음일 게 뻔했다.
[배신자라.]
장로들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묵빛 반지를 주우며 천천히 일어서던 사도에게서 비웃음이 들려왔다.
[나는 혈신의 대리자나 다름없는 혈신의 사도다.]
[혈신의 힘만을 취해 권력을 쥐려 한 놈이 누구더러 배신자라 하느냐?]
서릿발과 같은 냉기가 목소리에서 흘러나왔다.
[경배하고 따라야 할 사람은 혈신이지 교주가 아니다.]
[너희는 교주가 아닌, 혈신의 사도인 날 따라야 함이 맞지 않는가.]
사도는 결정할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교주의 머리를 발로 내려쳤다.
콰직.
비명조차 내지를 틈도 없이 교주의 머리가 터졌다.
뇌수와 함께 사도의 발밑에서 흐느적대던 교주의 두 동강 난 몸이 움직임을 멈췄다.
“……!”
교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교주의 최후는 황망하고도 허무했다.
교주가 방심하지 않았다 한들, 사도와 교주의 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럴 수가…….”
장로들은 교주의 처참한 모습에 그만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장로 중 하나가 사도가 된 신녀에게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사도를 따르겠습니다.”
이미 교주마저 죽은 마당이다.
천갑무신의 후인이 언제 침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이 따라야 할 존재는 명백하게 하나였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저 역시 사도를 따릅니다.”
모두의 판단은 빨랐다.
어차피 혈천교 자체가 힘이 강한 자가 권력을 가지는 자리였다.
정의와 의리는 사라진 지 오래.
교주는 싸움에서 진 개였고, 앞에 있는 경이로운 힘을 가진 존재가 혈천교 최고 존엄성을 가져야 했다.
그래야 그들이 생존할 수 있었으니까.
혈천교에서 최고의 자리란, 교주의 자리. 가장 강한 자가 가져야 할 자리였다.
“새로운 교주의 탄생을 경하드립니다.”
“경하드리옵니다.”
장로들로서는 교주가 죽은 이상 새롭고 강한 교주가 필요했고, 그 적임자는 혈신의 대리자인 사도였다.
모두가 몸을 엎드린 가운데, 사도가 입을 열었다.
[교주의 자리는 후인을 죽인 후에 갖도록 하겠다.]
후인이라는 적을 앞두고,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교주를 없애두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야 마음 편하게 후인을 사냥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혈천교의 교주가 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지금은 후인과의 싸움에 집중해야 했다.
‘나머지는 그 후에 생각한다.’
신녀는 교주의 피에 절은 묵빛 반지를 손아귀에 쥐었다.
파사삭.
강한 힘에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묵빛 반지의 조각들.
고작 가루가 닿았을 뿐인데도 그녀의 검붉은 갑옷이 지지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다른 기물들도 찾아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교주의 물건들을 직접 살펴봐야 했다.
[교주의 시신과 물건들은 모두 그대로 두고 감시하라.]
“알겠습니다.”
음산한 신녀의 명령에 시체를 치우려던 장로들의 손이 멈췄다.
‘기물은 후인을 죽이고 나서 찾는다.’
장로들의 조아린 머리 위로 신녀의 붉은 눈빛이 번들거렸다.
* * *
[진천의 기물 중 하나가 파손되었습니다.]
교주의 죽음을 알리는 가야의 목소리 뒤에 이어진 것은 기물의 파손 소식이었다.
‘왜지?’
가야가 알려온 소식에 의문이 들었다. 기물의 기능이 뭐길래 사도가 직접 파손시킨단 말인가?
[추측하건대, 파손된 기물은 혈신의 힘을 약화시키는 힘을 가졌던 듯합니다.]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사도의 힘이다.
그 힘을 제어하기 위해서 가진 것은 혈신의 힘을 약화시키는 기물일 수밖에 없을 터.
‘신녀는 교주를 죽이고 기물을 파손시킨 거야.’
그전까지 어떻게든 몸을 움츠리고 교주의 방심을 얻어냈을 테다.
결과는 기물의 파괴.
그러나 혈천교 내부에 하나 더 기물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교주의 몸에 있다.
“그것까진 모르는 건가?”
만약 알았다면 전부 다 파괴했을 텐데 신녀는 고작 하나만을 없앴을 뿐이었다.
‘기회가 생겼어.’
두 개의 기물에 대해서 신녀가 알건 모르건 간에 일단 없애지 않았다는 것은 나 또한 기물을 가질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사도의 힘이 점차 이곳과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은, 혈천교와 약 천 장 정도 떨어진 바위산이었다.
이 정도 거리야 사도로서 마음만 먹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올 거리.
나는 서쪽에서 다가오는 강력한 기운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완전 개방.”
긴장감에 몸을 일으키자, 촤르륵 하며 경쾌한 쇳소리가 몸을 감싸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주체할 수 없는 강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촤라라─
강력하면서도 시원한 힘은 몸속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밖으로 뻗어 나가며 은빛 갑옷을 만들어 냈다.
[현재 동화율 190.]
[천갑의 사 차 변화가 일어납니다.]
혈천교로 올 때 아무 준비 없이 온 것은 아니었다.
각종 영약과 하급 마석으로 동화율을 급격히 올려놓았던 것.
원래는 동화율을 이백 이상으로 만들려 했건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백이라는 숫자에 어떤 조건이나 금제가 걸려 있는지는 몰라도 더는 동화율이 올라가지 않았다.
‘그래도 충분해.’
비록 원래 계획에는 못 미치나, 동화율이 높아진 지금 천갑은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천갑의 사 차 진화(進化).
쾌속한 쇳소리와 맞물려, 진화된 천갑은 처음보다 훨씬 더 정밀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완전 개방된 상태에서 각성하시겠습니까?]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모든 힘을 사도에게 보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한껏 차오른 힘을 느끼며 손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스스슷.
그러자 뻗어 나가던 강력한 기운들이 다시 손바닥 안으로 모여들었다.
사 차 진화를 완성한 천갑은 힘을 감추지 못하고 뿜어내는 것을 넘어, 이제는 숨길 경지에 다다랐다.
이것이 내가 혈천교로 온 이유.
혈신의 사도가 얼마나 강할지 모르나, 나 또한 지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혈신의 사도가 십 장 이내로 진입했습니다.]
타앗.
가야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고고한 빛을 뿌려대던 은빛 형체가 사라졌다.
은빛의 천갑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주변이 암벽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 형태의 공간이었다.
[사도가 이곳으로 오기 위해 방향을 틀었습니다.]
[사도가 분지로 진입합니다.]
쿠웅.
높다란 절벽 아래로 검붉은 형태가 바닥으로 꽂히듯 굉음과 함께 떨어졌다.
기이익.
떨어지며 허리를 숙였던 검붉은 사도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전갈 모양의 천갑을 입은 신녀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만났구나.]
기대를 담은 기쁜듯한 목소리.
그러나 목소리는 마치 지옥의 소리마냥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 너를 죽여 혈신에게 제물로 바치겠다.]
“제물이라.”
나는 천갑에 가려 보이지 않는 얼굴로 답했다.
“제물은 네가 될 것 같은데.”
내 답에 사도가 나직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웃음을 흘렸다.
촤륵.
순간, 살아 움직이듯 유연하게 움직이던 꼬리가 내 쪽으로 빠르게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