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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74화 (174/200)

기갑무림 174화

이 세계의 힘이 아닌 외부의 힘을 강제로 끌어다 쓰는 사도의 힘.

하늘이 노한 듯 붉은 번쩍임을 혈천교를 향해 토해내고 있었다.

뇌전을 뱉어내는 하늘의 검은 입구는 태풍이 불어치듯 검은 구름이 원을 그리며 점차 속도를 높여갔다.

휘몰아치는 바람.

바람은 혈천교에서 가깝지 않은 곳에 위치한 머리칼을 흩어놓을 정도였다.

“꽤 요란하네.”

지금 서 있는 곳은 혈천교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높다란 산의 정상이었다.

삐쭉하게 솟은 바위 위에서 아슬하게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에서 혈천교와 거리는 대략 천오백 장 정도였다.

이곳까지 흩날리는 기운을 보건대 사도의 힘이 예상보다 강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 역시 각성한 상태.

각성하지 않있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사도와의 대결에서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야. 적들에 대해 알려줘.”

가야가 푸른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혈천교 쪽을 향해 눈을 빛내더니 곧이어 정보를 읊었다.

[혈천교 부근에서 감지되는 인원은 모두 이만 명 정도입니다.]

[적미륵의 힘을 흡수하거나 마력이 느껴지는 무인의 수는 모두 오천이백육십오 명.]

[무림의 기준으로 봤을 때 일류 이상의 무인은 육백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육백 명이라.”

이 정도의 수라면 혈천대다.

무림맹에서 들었던 정보대로라면 내가 해치웠던 놈들을 제외한다면 현재 남은 수의 혈천대원의 수와 엇비슷했다.

[주인님의 능력을 봤을 때, 그들은 큰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위협이 되는 것은.]

가야의 눈이 무언가를 감지한 듯 새파랗게 빛났다.

[사도와 진천의 기물을 가지고 있는 혈천교주입니다.]

혈천교에 나를 견제할 만한 것이 있을것이라 생각하긴 했었다.

‘그게 진천의 기물일 줄이야.’

혈신의 사도는 어찌 되었든 싸워야만 하는 존재다.

이미 진천의 세계에서 겪었던 사도처럼 천갑과의 대결이 될 터.

이긴다 한들 교주가 가진 진천의 기물은 승리를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패였다.

“기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나?”

[흑마석을 제외하고도 느껴지는 기물은 모두 셋.]

[하나는 혈천교 안에 위치해 있으며, 둘은 교주의 몸에 착용 되어 있습니다.]

가야는 한참을 혈천교를 바라보았으나, 더는 알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물의 능력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기물의 능력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아쉽긴 했으나, 이 정도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혈천교 안은 위험하다.’

개조차도 집 앞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했다.

그런 마당에 혈천교 놈들이 득실대는 데다가 사도에 기물까지 있는 마당에 나 홀로 혈천교로 들어간다는 것은 스스로 덫에 빠지는 꼴이었다.

최선의 방법은 놈들을 밖으로 나오게 만드는 것.

“함정이 필요해.”

놈들을 유인하고 되려 내 쪽에서 함정을 만든다면…….

혈천교 내부에 설치된 기물 하나를 피할 수 있을뿐더러, 불필요한 희생을 막을 수 있게 된다.

‘혼자 오길 잘했어.’

사도와 기물까지 보유한 그들로서는 갑자기 홀로 나타난 나를 보며 의심하면서도 이번이 기회라 생각할 테다.

정파인들을 데려왔다면 모를까, 홀로 온 이상 경계를 풀고 방심할 수밖에 없다.

‘숲을 건드려 볼까.’

숲을 건드리면 사도라는 뱀이 튀어나올 터.

교주라는 뱀도 튀어나오면 좋을 테지만, 한 마리씩 나오는 뱀도 나쁘진 않았다.

“건드리는 과정에서 놈들이 자중지란을 일으키면 좋겠는데.”

사도의 힘은 강하다.

강력한 힘을 가진 사도가 과연 혈천교주의 말을 들을까?

그럴 리 없다.

천갑을 가진 나는 그 힘이 주는 광대하고 오만하기까지 한 능력을 안다.

진짜 신이 된 듯한 힘.

그 힘을 가지고 고개를 숙인다고?

그것도 혈신(血神)의 사도가?

장담하건대, 이어지는 것은 사도의 반란일 것이다.

그리고 혈신의 사도를 대하는 교주의 태도에서 기물의 능력이 드러날 테고.

반란이 어디까지 성공할지 못내 궁금해졌다. 그리고 교주의 기물이 어떤 능력으로 사도를 대할지도 말이다.

“어디 한번 잘 싸워보라고.”

혈천교를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기대와 긴장이 가미된 흥미가 한껏 실려있었다.

* * *

“적이 침입했습니다!”

“교를 방어하던 교인 스무 명이 다치거나 죽었습니다!”

“천갑무신의 후인으로 인해 방어막이 뚫리는 중입니다!”

혈천대원들이 연달아 급한 표정으로 교주가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뭐라?!”

보고에 놀란 교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언제 여기까지 왔단 말이냐?”

후인이 이쪽으로 온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 불과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벌써 여기까지 왔다니!

급전을 날리는 그들의 정보체계보다 천갑무신의 경공이 훨씬 빨랐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체 얼마나 빠르기에?’

교주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천갑무신의 후인이 있는 진천세가와 서장인 이곳은 자신조차 경공을 최대로 발휘한다 한들 스무날은 걸리는 거리였다.

아무리 정보가 늦게 도착한다 한들, 이건 새보다도 빠르지 않은가.

머리가 지끈해지는 가운데 교주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설마, 홀로 온 건 아니겠지?”

무릎을 꿇은 혈천대원들이 빠르게 고했다.

“혼자인 듯합니다.”

“저도 후인 외에는 다른 정파 놈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혼자가 아닌 무림맹의 무인들과 연합해 급습당했다면 피해는 더욱 커졌을 터였다.

‘하기야, 무림맹과 이곳까지의 거리가 얼마인데.’

후인 혼자라면 모를까, 다른 놈들까지 이렇게 이른 시일 내에 달고 오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임에도 워낙 강하여 저희 쪽 대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천갑을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인의 손짓 한 번에 대원들이 쓸려나가는 참입니다.”

“대책이 필요합니다.”

말하는 대원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후인의 위력은 모두가 알다시피 인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혈천교주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옆에 있는 장로를 향해 물었다.

“신녀의 상태는?”

“현재 특별한 문제는 없으며, 예상시간에 사도로 완성될 듯합니다.”

신녀가 사도로 변하기 시작한 날은 오늘로부터 사십사 일 전 유시.

정확히 사십오 일이 지나게 되는 시점은 오늘 유시였다.

‘반 시진 정도 남은 건가?’

혈천교주의 얼굴이 남은 시간을 생각하고는 찌푸려 졌다.

후인의 공격에 반 시진을 견디려면 얼마만큼의 손해가 날지 짐작조차 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나 천갑무신에 대항할 상대는 오직 사도뿐이었다.

‘완성될 때까지 버텨야 한다.’

교주는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선 후, 보고하러 온 혈천대원들을 향해 명령했다.

“우리에겐 사도가 있다. 놈은 사도를 이길 수 없으니, 그전까지 어떻게 해서든 견뎌라!”

“알겠습니다!”

혈천교주의 명령에 대원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은 나를 따르라.”

어서 신녀에게 가봐야 했기에 교주가 긴 소매를 펄럭이며 빠르게 발을 옮기자, 옆에 있던 장로들과 무사들이 일제히 뒤를 따랐다.

본래 있을 열세 명의 장로들과 백 명의 혈천대의 무사들.

이장로와 오장로가 없음에도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아무도 그들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후.

여전히 짙은 요기를 뿜어내는 동굴 앞에 그들이 도착했다.

동굴 앞은 강한 요기가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라.”

교주는 굳은 얼굴로 말한 후, 신녀가 있는 동굴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음……?’

코에 미약한 혈향이 감지되었다.

교주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전음으로 물었다.

[신녀가 사도가 되는 과정에서 인간을 제물로 쓴 적이 있느냐?]

신녀를 담당했던 장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음으로 답했다.

[그런 적은 없는 줄 압니다.]

[……그래?]

피를 매개로 힘을 쓰는 혈천교의 교주이니만큼 피에 관해서 만큼은 꽤 후각이 발달한 그였다.

이 혈향(血香)은 분명 얼마 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그 원인을 따진 후 신녀에게 갔겠지만, 지금은 천갑무신의 후인이 침입한 매우 급한 상황.

미약한 혈향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제가 있더라도 이게 있으니 괜찮겠지.’

불안함을 머금은 시선이 오른손에 끼고 있는 묵빛 반지에 닿았다.

묵빛 반지를 한 번 쓰다듬자 신기하게도 아까보다 마음이 진정되었다.

마치 인외의 힘에 저항하듯.

‘역시 기물이군.’

자신감을 얻은 교주는 신녀가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들어가도 되겠나?”

교주가 신녀의 동굴에 들어가려는 것은 사도로 변하게 된 후 처음이었다.

잠시 후 신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음성은 예전과 같았으나, 기이한 분위기가 실려 있었다.

교주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는 신녀가 있는 동굴로 들어섰다.

그의 발이 동굴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순식간에 사라진 요기.

짙던 요기가 사라진 대신 풍기는 것은 신녀가 피우던 향초 냄새였다.

향초 냄새는 그가 맡았던 미약한 혈향을 지우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연기로 가득한 동굴의 가운데 서있던 신녀가 그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오셨습니까?”

그녀의 태도는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다. 괴이한 모습의 사도로서 거들먹거릴 줄 알았건만.

너무 공손하지 않은가?

“……오랜만이구나.”

교주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신녀의 인사를 받으면서 주변을 살폈다.

사도가 되면서 바뀐 줄로만 알았는데, 신녀가 머물던 동굴 안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평소에 보던 광경을 보자 안도감과 함께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사도가 된 것이 맞느냐?”

그의 물음에 신녀가 고개를 들며 화사하게 웃었다.

얼굴이 드러난 그녀의 웃음은 무심한 교주의 머릿속을 휘저을 만큼이나 매혹적이었다.

신녀는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별다를 것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사도로서 완성은 이미 되었습니다. 이 모습은 천갑무신의 후인처럼 평소대로 있는 것이지요.”

“……그런가.”

생각해 보면 후인이 항상 천갑을 입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신녀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원래의 시간보다 빠르게 사도로서 완성되었다고는 하나, 그럴 수도 있는 일.

‘사십오 일 중 반 시진 정도야 빨라 질 수도 있겠지.’

어쨌건 신녀가 사도로서의 완성이 빨라졌다면 그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천갑무신의 후인이 혈천교를 급습한 만큼 사도가 더 빨리 필요해 졌으니 말이다.

“혹시, 후인의 침입으로 인해 제게 오신 것입니까?”

여전히 화사한 웃음을 머금은 신녀가 천천히 다가오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나?”

“호호, 제가 누구입니까? 명색이 신녀인데 그 정도쯤이야 알 수 있지요.”

요사스러우면서도 여유로운 신녀의 모습에 교주의 이마가 구겨졌다.

“미리 알았으면 사도로 변해 후인을 상대해야 할 것 아닌가? 이리도 여유로워서야 원.”

교주의 타박에 미세하게 신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러나 신녀는 여전의 입에 미소를 띠고 답했다.

“후인의 기운이 곧 사라져서 나서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

“제 생각으로는 잠깐 이곳을 정찰할 겸 들렸던 듯싶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단 널 믿도록 하지.”

“사도가 된 이후로 저만큼 후인의 기운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믿으셔요.”

확신하는 신녀의 말을 듣자, 갑작스러운 후인의 침입에 급했던 교주의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다행이로군.”

교주는 일단 급한 일이 사라지자 무언가를 생각하듯 탁자에 앉아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쳤다.

신녀의 눈길이 흘긋 묵빛 반지를 끼고 있는 그의 손에 닿았다.

“으음?”

그리고 탁자에 앉은 교주 또한 바닥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몸을 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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