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70화
혈천교 안은 고요했다.
둥둥거리는 북소리도, 광기에 절은 혈천교도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금은 적막함만이 감돌 뿐이었다.
조용하면서도 음습한 기운의 중심에는 신녀가 있는 동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로부터 발산되는 거대한 요기가 혈천교 전체를 잠식하고 있어 모두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바닥을 가득 찬 굵었던 검회색의 줄기들은 분열을 거듭해 얇아져 있었고, 수 없이 분열한 줄기들은 가늘어진 상태로 하나의 존재에게 모여 있었다.
청동거울에서 뻗어 나온 줄기로부터 발생한 힘의 집약은 혈신의 사도(使徒)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
“하아.”
여인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도로서의 변신을 꾀한 지 삼십오 일째에 드디어, 고통이 끝난 것이다.
고통이 끝난 후 밀려오는 것은 천갑의 힘이었다.
거대한 힘을 받아들이는 그녀에게서 탄성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이런 힘이라니.”
만족을 담은 요요한 붉은 눈이 천천히 고개를 내려 아직 완성되지 못한 허벅지 아랫부분을 바라보았다.
허벅지를 뚫고 있는 얇아진 촉수들이 꿀렁거리며 강렬한 미지의 힘을 전달해 주고 있었다.
“아주 좋구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요사스러운 미소는 정신을 흐트러뜨릴 정도로 매력적이었으며,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칼은 물결치는 검은 비단 구름 같았다.
경국지색(傾國之色).
경국지색이란 말로도 부족할 만큼 경건하면서도 요사스러운 배덕(背德)의 아름다움이 신녀에게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스륵.
검붉으면서도 기다란 전갈 형태의 꼬리가 여인의 한숨과 함께 스르륵 올라왔다.
꼬리는 마치 수족처럼 그녀의 뜻에 따라 동굴 안을 배회했다.
끝에 달린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은 모양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섬뜩할 정도.
촤르륵.
신녀의 몸에 붉은 갑옷이 물결 일어나듯 목 부근까지 차올랐다.
더불어 전갈 꼬리 부분 또한 붉은 쇠가 덧대어지자, 탁한 붉은 빛을 내는 천갑이 만들어졌다.
붉은 갑옷이 그녀의 몸을 감싸자, 극강의 힘은 몸 구석구석을 향해 뻗어 나갔다.
“아…….”
극대화된 감각.
손끝과 머리끝에 전해져 오는 쾌감은 모든 감각을 열어버렸다.
갑자기 활성화된 시각은 어두운 공기 속에 떠다니는 먼지마저 자세히 보일 정도였다.
또한, 예민해진 청각은 혈천교 내부의 웅성거리는 소리 전부를 잡아냈다.
‘…….’
신녀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요기가 너무 강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나.’
‘혈신께서 우리를 지켜 주실 거야.’
수많은 목소리는 지금의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시끄러움에 신녀가 청각을 닫으려는 찰나였다.
‘……신녀의 기운이 강합니다.’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귀에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집중해서 듣자, 들려오는 목소리의 정체는 혈천교의 장로들이었다.
‘저희가 무시하던 신녀가 힘을 쥔다면 어떻게 될지…….’
‘감당하지 못할 힘이라면 지금이라도 없애심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같이 혈천교주에게 대책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총사가 죽기 전 그의 편에서 신녀를 경계하던 장로들이, 신녀가 강력한 힘을 갖게 되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겨우 이 정도에 저런 꼴이라니.”
평소에 잘난척하며 거드름 피워대던 놈들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생각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신녀가 재밌다는 듯 정신을 집중하자 대화가 좀 더 또렷이 들리기 시작했다.
‘걱정 말게.’
들려오는 혈천교주의 목소리는 자신감을 담고 있었다.
‘아무리 신녀가 강해진다 한들 우리에겐 흑마석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년 따위 내가 어쩌지 못할 것 같나?’
그는 자신하고 있었다.
강해진 신녀를 흑마석으로 조종할 수 있다고 말이다.
‘교주인 내게 그년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어.’
그는 기이한 힘들의 원천이 마력이라 불리는 것인 만큼 흑마석이라면 사도를 막을 수 있다고 장로들에게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쯧.”
들려오는 소리를 듣던 신녀가 혀를 찼다.
“거짓을 그대로 믿다니. 머저리 같은 것.”
더 이상 들을 필요 없다는 듯 극대화된 감각을 닫았다.
사도가 되기 전, 교주에게 거짓을 고했다.
마력을 억제하는 반마력석인 흑마석이라면 사도를 조종할 수 있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이다.
강한 힘이니만큼 그가 혹시라도 허락을 해주지 않을까 봐 말했던 것인데 이리도 철석같이 믿을 줄이야.
“크큭…….”
도톰한 입술 안쪽에서 아주 통쾌하면서도 재밌다는 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도는 신의 힘이다.
인간이 만들어 마력의 힘으로 움직이는 기갑 따위가 아닌 신의 힘을 받아 움직이는 천갑.
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천갑을 어떻게 반마력석인 흑마석 따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완전한 사도가 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열흘.
이제 열흘만 지나면…….
신녀는 화사한 눈웃음을 지으며 피처럼 붉은 입술을 열었다.
“치워야 할 것이 많겠구나.”
* * *
서장에 있는 혈천교와 진천세가와의 거리는 꽤 멀었다.
마차로 간다면 몇 달이 소요되는 거리.
그러나 진천비를 극성으로 운용해서 날아간다면, 팔일 정도면 갈 거리였다.
내게는 높다란 산도, 강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의 기운이 더 짙어졌어.”
진천세가를 떠난 지 이틀이 흘렀다.
혈천교에 다가갈수록 요사한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것은 거리의 문제가 아닌, 사도가 점점 완성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생각보다 강하다.”
기운은 짙으면서도 강함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과연 내가 혈신의 사도를 이길 수 있을까?’
불안함 속에서 드는 의구심.
진천의 세계에서 만난 하급신의 사도와 혈신의 사도는 얼마나 다를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흘러나오는 기운을 볼 때 그보다 더 강했으면 강했지 약하진 않을 테다.
“각성한 힘을 내 것으로 만들면 좋으련만.”
지난번 각성했을 때 변신을 하지 않고도 완전 개방만큼의 힘을 보였다.
각성한 상태로 완전 개방을 한다면?
상상치 못할 힘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각성된 힘을 쓴다면 사도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짐작조차 못 하는 상황이었다.
‘각성이 온 것은 모용설화의 죽음 때문이었지.’
죽음의 충격 때문에 각성이 되었다면, 또다시 충격을 받으면 각성이 되는지.
다른 조건에 의해서 가능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가야. 각성 때 보였던 힘을 쓸 방법이 있을까?”
고민 어린 물음에 가야가 답했다.
[각성한 힘을 쓰려면 주인께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가야의 말이 맞았다.
어떤 무공이든 경지이든 간에 스스로의 깨달음이 있어야 발전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각성 때 머릿속을 침범했던 존재는 뭐지?”
[당시 주인님의 머릿속에 침투했던 존재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 존재에 대해 저 역시 알지 못하나.]
[각성은 불안정했기에, 비슷한 힘을 가진 다른 존재가 잠시 주인님의 머릿속을 파고든 것이라 짐작합니다.]
‘일시적이라고?’ 돌이켜 보면 충격에 의해 삿된 존재가 정신을 침범했을 당시, 그에 의해서 각성이 된 것은 아니었다.
괴이한 목소리는 자신이 나를 각성시킨 것이 아니라, 마치 알려주는 듯한 어투로 말했으니 말이다.
[그 힘은 주인님의 의지에 밀려났으므로, 또 다른 충격이 생기지 않는 이상 지난번과 같은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다시 만난다면 그 존재가 직접 주인님 앞에 서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내 머릿속에 들어온 존재가 누구인지,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가야도 마찬가지.
가야가 말하는 것은 충격에 벗어난 내가 더는 삿된 존재를 허용치 않으리란 말이었다.
‘또 다른 충격이 없다면 말이지.’
하지만 모용설화의 죽음 이상의 충격이 주어질 일은 없었다.
머릿속 존재를 만날 일이란 가야의 말처럼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굳이 그 존재에 대해서 고민할 일은 없었다.
괴상한 존재가 내 머릿속을 잠식한 건 내가 충격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였으니 말이다.
‘한 번 당하지, 두 번은 안 당해.’
나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앞으로 아무리 충격적인 일이 있어도 절대 삿된 존재에게 내 정신을 허락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각성 상태의 힘을 얻는 것은 오직 주인님의 깨달음에 달린 것.]
[어떤 방법이든 시도해 보시길 권장해 드립니다.]
가야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어떤 방법이든 시도해 보라고?”
나는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아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각성 상태를 유도 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죽음을 또다시 볼 수는 없고…….
자해를 해보려 하니, 강철화가 된 몸이라 자해가 먹히지 않았다.
‘절벽에서 떨어져 볼까?’
의문과 동시에 고개가 저어졌다.
높은 절벽에서 떨어진다 한들, 자동으로 몸이 보호되기 때문이다.
보호를 해제한다고 하더라도 실패 시 피해가 너무 컸다.
“그래도 생명의 위협이 있어야 할 것 같긴 한데.”
강해진 몸뚱어리는 어지간해서는 위협을 느끼지 못할 게 뻔했다.
적당한 위험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게 뭘까 고민하는 와중이었다.
졸졸.
귓가에 들려오는 시냇물 소리.
“……그래, 물이야!”
어떤 무기든 내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스스로 물속에 들어가는 것.
물속에서 숨을 못 쉬는 상태가 되면 조금은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좋아.”
나는 시냇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위쪽을 향해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곧이어 큰 강가가 보였고, 꽤 물이 깊어 보이는 것이 실험에 꼭 맞아 보였다.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어쨌든 안 해보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나는 조금은 비장한 표정을 하고는 겉옷과 신을 벗은 채 강 안쪽으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차갑게 느껴지는 물이 발목에서 무릎, 허리, 가슴까지 닿았다.
“후읍.”
마지막으로 숨을 들이쉬고는 몸에 힘을 빼자, 몸이 서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떠야 하는 몸이지만 일부러 무거운 기갑을 팔과 다리에 둘러놓았기에 몸은 서서히 바닥에 닿았다.
잠시 후, 흙이 가라앉은 물속 바닥에 누운 눈에 일렁이는 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막혀오는 숨.
‘크윽.’
역시 생각대로였다.
몸이 강한 것과 반대로, 살기 위한 호흡법을 하지 않는 이상 숨이 막혀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숨이 막혀와 죽을 듯한 괴로움에도 딱히 각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허억.’
허덕대는 팔다리는 분명 생명의 위협을 느끼듯 살려달라 외치고 있건만, 내가 원했던 각성의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숨을 참았으나 얻은 것은 죽을듯한 숨 막힘뿐.
‘……실패인가 보네.’
이제는 정말 안 되겠다 싶어 물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첨벙.
갑자기 누군가가 내 몸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닌가?
‘……!’
무공을 익힌듯한 사람은 내 몸을 제비가 물을 차듯 한꺼번에 꺼내 들더니 곧바로 땅에 가볍게 착지했다.
“쿨럭!”
공기가 한순간에 폐에 가득 차자, 입안에 있던 물이 쏟아졌다.
정신없이 물을 다 뱉어낼 때쯤, 나를 구했던 사람이 다가와 엄하면서도 인자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젊은이. 아무리 세상이 힘들다고는 하나, 그렇게 목숨을 버리면 쓰나?”
“저, 그게.”
뭐라 변명하려 했으나 목소리는 엄중하게 계속 꾸짖었다.
아무래도 내가 물속에 스스로 자진한 것으로 보는듯했다.
“사람이 태어난 것은, 아무리 작아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네. 그러니 자네도 자신감을 갖고 살아갈 방법을 알아보게나.”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는……?’
혹시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날 구해준 사람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