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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65화 (165/200)

기갑무림 165화

“나도 사람이야.”

인외의 힘인 천갑을 지녔을지라도 본질은 나도 저들과 같은 사람이었다.

죽음의 무게 또한 똑같이 느끼고, 함께 울고 웃는 하나의 인간일뿐이었다.

“손에 수많은 적들의 피를 묻혔음에도 내가 제정신으로 보이는 이유가 뭔지 알아?”

멍한 눈으로 입만 벌린 제갈신을 향해 몸을 천천히 기울였다.

“전부 너희들 때문이었어.”

“……!”

“적들과 싸우다 죽는다 해도 아깝지 않을 친구, 너 때문이었다고.”

진심이 담긴 말에 입술을 꾹 다문 제갈신의 턱 끝이 떨려왔다.

“나, 나는…….”

“모용설화도 마찬가지야.”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 아픈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모용설화가 생명을 버리면서 기회를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모두가 살 수 있었을까?

“혼인이라는 수까지 쓰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던 개자식과 모용설화가 평생 함께 했어야만 하는거야?”

살아 있다 한들 지옥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인질이되어 피에 미친 놈과 사는것이 결코 행복하진 않았을테니.

“너를 비롯한 모두의 목숨과 앞으로 펼쳐질 지옥대신 죽음을 택한 것은 그녀의 선택이었어.”

힘이 들어간 손이 흩트러진 제갈신의 멱살을 틀어 올렸다.

“죽음을 슬퍼하는건 괜찮아. 하지만.”

나는 으르렁대듯 말했다.

“네가 이러는 건, 그녀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란 걸 잊지마.”

“내 행동이…… 모용설화의 죽음을 헛되게 만든다고?”

멍한 표정으로 중얼대던 제갈신의 얼굴이 와락 무너졌다.

“아니야, 그런게 아니었어. 단지 그녀가 나때문에 죽은 것 같아서, 죄책감에 그만……!”

“너 때문에 죽은게 아니야. 우리를 위해서 희생한 거지.”

모두를 위해서였다.

작게는 제갈신부터, 넓게는 남궁비천이라는 암적인 존재를 무림에서 사라지게 하기 위한 희생이었다.

고귀한 희생의 무게는 모두가 짊어져야하는 것.

제갈신 혼자서 견뎌야 하는것이 아니라, 모두의 가슴에 품어야할 빚이었다.

“그러니 혼자 죽음을 짊어지지마.”

책임은 나눌수록 무게가 줄어든다.

모용설화의 죽음이 주는 짊이 너무 무거워 삶마저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그 무게를 줄여줘야만 했다.

실제로 그녀의 죽음은 제갈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럼 나혼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거야?”

“그래.”

단언하는 내 답에 제갈신의 표정이 복잡한 감정을 띄웠다.

한동안 입술을 벙긋거리던 얼굴은 점차 일그러져갔다.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제갈신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은 죄책감보다도 슬픔이 더 강했다.

“……모용설화의 죽음이 온전히 내 탓인 줄만 알았어. 그녀의 뜻을 모르고 내 작은 시선으로만 평가했지.”

메마른 손이 엉망이 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려고 누우면 원망하는 그 애의 피에 젖은 모습이 보였어. 나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원망하는 모습을 말이야.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내 생각이 짧았어.”

그녀를 돌이켜보면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조차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죽음을 택한 것도 짐이 되기 싫어서라고 했을 정도로 말이다.

“모용설화는 누구를 탓하는 아이가 아니었어.”

제갈신도 알았다.

그녀가 자신을 탓하지 않을 사람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눈앞에서 자신을 살리는 대신, 처참하게 죽어버린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아 사고가 정지되어 버렸다.

“흐으윽…….”

나는 제갈신이 실컷 울게 놔두었다.

울음이 점차 잦아들어 갈 때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도 네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건 바라지 않을거야.”

주변 사람을 진심으로 위하던 그녀라면 정말 그랬을 터다.

“모용설화에 대한 마음의 빚은 묻어두고, 이제 네 삶을 살아.”

이것은 제갈신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위했던 그녀를 마음에 묻어놓고, 나 또한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면 된다.

그녀에 대한 빚을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써 갚아가는 것.

“그것만이 진정으로 그 애를 위하는 것이니까.”

* * *

나는 잠든 제갈신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눈만 감으면 나타났던 모용설화의 피에 절은 모습에 잠을 못 잤던 제갈신이었다.

죄책감을 덜어내고 나서야 겨우 잠에 든 녀석의 얼굴은 이제야 생기가 조금씩 돌고 있었다.

‘다행이다.’

모용설화의 죽음이 이토록 제갈신을 힘들게 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녀와 친했던 것은 나였기에, 곁에서 죽음을 지켜보았던 제갈신의 충격을 알아채지 못한 탓이었다.

‘늦었으면 되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거야.’

오늘의 만남은 제갈신과 내게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이 시기를 놓쳐 망가진 제갈신을 봤다면 나야말로 죄책감을 가졌을지도 몰랐다.

한동안 제갈신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꽤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천무륭은 아직도 처음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서.”

제갈신을 보러 들어간 시간이 한낮이었다면 지금은 초저녁이었다. 긴시간을 천무륭은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고맙다.”

내 인사에 녀석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천무륭은 곧 표정을 정리하고는 별거 아니라는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정도야 뭘.”

기대를 품은 눈빛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갈신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 방금 전 잠드는 걸 보고오는 길이야.”

“후, 역시 네가 오니까 괜찮아졌네.”

천무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간 마음고생이 심했거든.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했어. 신의가 몸은 고쳐도 마음은 못 고치더라고.”

“신의가 마음을 고칠 만한 사람은 아니긴 하지.”

가신이 되긴 했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괴팍한 면이 있었다. 그런 신의가 어떻게 마음의 병을 고칠까.

“다른 생도들은 어때?”

“대부분 충격받긴 했지. 하지만 제갈신이 제일 심했어.”

“당하연은? 그녀야말로 가장 친했으니 충격이 클 텐데.”

“아직 모르더라.”

남궁비천이 당하연을 갑자기 밀어버리는 바람에 기절을 했으니 그 뒤로 죽은 모용설화에 대해 모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

어쨌든 다들 충격이 크긴 해도 제갈신 정돈 아니란 말이었다.

“남궁비천이 흘린 기운 때문에 비교적 무공이 얕은 제갈신의 정신이 더 무너진 듯해.”

적미륵의 힘을 얻은 데다가 흡혈까지 했던 놈의 기운은 강했다.

적미륵의 요사한 기운이 제갈신에게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크긴 했다.

가장 무공이 약한데다가, 모용설화가 눈앞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으니 말이다.

“심지가 약한 녀석은 아니니 곧 털고 일어나겠지.”

내 말에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던 천무륭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오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거야.”

“하지만 내가 이곳에 온건 네 덕이 커.”

진심이었다. 천무륭이 제갈신을 신경 쓴 덕분에 늦지 않게 녀석의 마음을 고칠 수 있었으니까.

나는 웃으며 천무륭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그러자 부끄러운 듯 이상한 표정을 짓던 녀석이 머리를 긁적였다.

“너는 이제 가는 거야?”

“응. 집으로 가야지.”

제갈신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으니 돌아가야 했다.

혼자만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었으니까.

“잘 있어라.”

작별인사에 천무륭의 얼굴은 아쉬운 듯한 표정을 품더니, 곧바로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래.”

나는 녀석을 보며 설핏 웃었다.

예전보다는 훨씬 인간냄새를 풍기는 천무륭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보자.”

“응.”

여전히 짧게 답하는 천무륭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바로 진천비를 전개했다.

‘이별은 짧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진천비를 극상으로 전개함과 동시에 작게 보이던 천무륭의 모습이 어느 사이엔가 사라졌다.

* * *T3T

현무학관과 진천세가는 마차로 보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천비를 사용한다면 며칠이면 충분한 거리.

천무륭과 헤어진 후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밤에는 진천비로 낮에는 주로 산길을 이용했다.

굳이 빠르게 진천세가로 향하는 이유는 사도가 나타날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천갑과의 동화율이 높아진 후로 놈들의 기운이 느껴져.’

가야가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적미륵의 기운을 느끼는 원리랄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놈들의 특이한 기운을 나또한 미약하나마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만큼이나 놈들도 나를 느낄 가능성이 컸다.

강해지는 진천의 힘이 뿜어내는 기운을 혈천교 놈들이 모를 리 없었으니.

“기운을 숨기는 방법을 강구해야겠어.”

무림인들도 일정수준 이상의 고수가 되면 무공의 경지를 짐작할 수 없는 것처럼, 진천의 힘도 가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방법만 안다면, 앞으로 있을 혈천교와의 싸움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머릿속으로 고민을 하며 진천비를 이용해 산 위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꺄악!”

찢어지는 여인의 비명소리가 깊은 산 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닌가.

어둠을 뚫고 들리는 여인의 외침은 절박함을 담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진천세가로 빠르게 가고 있긴 하나, 당장 급한 일은 없는 상태.

또다시 들려오는 여인의 비명에 점점 진천비가 느려졌다.

“일단 상황을 보자.”

투명화한 상태로 상황을 보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최소한의 도움만 주고 떠나면 될 일이었다.

스슷.

진천비가 서서히 하강하며 산 아래로 향하는 신형이 투명하게 변해갔다.

나무가 우거진 산속으로 발을 내디딜 무렵, 이번에는 여인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 우리를 보내줘.”

땅에 내려서자 여인의 절박한 말이 귓가를 찔렀다.

“비급을 가져다주면 놔준다고 했잖아? 봐봐, 이사람 지금 죽어가고 있어. 그러니 제발……!”

주변을 보니, 스무 명의 복면을 쓴 자들이 망가진 마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망가진 마차의 잔해 속에는 젊은 사내가 다친 듯 누워 있었고, 여인은 피를 흘리는 사내를 부여잡고 오열하고 있었다.

‘저 남자 어디선가 본 듯한데.’

핏물에 가려진데다가 어둡기까지 해서 사내의 얼굴 전체가 보이진 않았으나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이었다.

남자가 누군지 생각해 내고 있는데 또다시 여인의 애원이 들렸다.

“놓아만 준다면, 절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게. 원하다면 혀라도 자를 테니…… 제발 우릴 보내줘.”

그러나 여인의 애원에도 복면인이 내뱉는 음성은 차갑고 단호했다.

“배신자 따위가 감히 선처를 부탁하다니.”

“나는 배신자가 아니야. 너희가 날 이렇게 만든 거잖아!”

“흥! 원주님께서 예뻐하시니 코가 하늘을 찔러 이렇게 된 일을 누굴 탓하느냐? 긴말 필요 없다. 저 년을 죽여라!”

“죽이라고……? 원주님이 진짜 그렇게 명하실리 없다!”

여인의 반박에 복면인의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네 년이 우리에게 살수를 써서 어쩔 수 없이 죽였다고 하면 그만이다. 이제 잔말 말고 뒈져라!”

명령과 동시에 복면인들이 칼을 뽑으며 쏟아지듯 달려들었다.

순간 여인의 눈빛이 사납게 바뀌었다.

“그렇게 애원했건만…… 들어주지 않는다 이거지?”

입술을 짓씹으며 말한 여인의 눈이 하얗게 변하더니, 기다란 머리카락이 흰빛을 띄며 허공으로 일렁였다.

촤라락.

여인의 머리칼이 갑자기 얼어붙을 듯한 냉기를 뿜으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구 성의 빙공이라니! 네년이 우릴 속인 게로구나!”

복면인의 노성에 여인이 벌떡 일어서며 앙칼진 목소리를 내었다.

“약속조차 지키지 않는 너희를 뭘 믿고 전부 말한단 말이냐?”

“여우같은 년!”

명령을 했던 남자가 이를 갈더니, 곧이어 쓰러져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저년 대신 남자를 먼저 죽여라!”

“아, 안 돼!”

복면인들의 칼날이 당황한 여인을 피해 쓰러진 남자를 향해 쇄도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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