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64화
무량후를 만난 지 반 시진이 흘렀을 때, 새롭게 지어질 천의학관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정말 기대되는군.”
새롭게 바뀔 학관이 기대된다는 듯 그의 두 눈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걸 받으십시오.”
무량후에게 내민 것은 붉은색과 황금색이 섞인 패였다.
“이건…… 천금장의 최상위 고객들에게만 주는 패가 아닌가?”
천금장의 귀빈 패가 어떤것이던가.
귀빈 패는 천금장이 인정하는 거부(巨富)에게만 선사하는 패였다.
그런데, 아직 소년티도 안 벗은 후인이 귀빈 패를 가지고 있다니!
놀란 눈빛으로 묻는 그를 향해 나는 싱긋 웃었다.
“맞습니다. 앞으로 천의학관을 건립하시는 데 편하게 쓰시라고 드리는 패입니다.”
“허어, 내 생전에 귀빈 패를 만지게 될 줄 몰랐네. 손이 마구 떨리는 구먼.”
그러나 떨린다고 말하면서도 무량후는 귀빈 패를 거절하지 않았다.
천의학관을 짓는 것 자체가 워낙 큰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앞으로 모든 것을 무량후 님께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힘드시더라도 천의학관의 건립에 힘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리 세심하게 챙겨주는데 내가 어찌 소홀히 하겠나. 천의학관은 자네가 꿈꾸는 대로 지어질 것이네.”
“감사합니다.”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이자 무량후는 더 깊이 몸을 숙였다.
“나야말로 자네에게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네.”
귀빈 패를 소중히 쥔, 감격스러운 표정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후인이 정도무림에 있다는 것이 정말 홍복(洪福)일세.”
무량후는 합장하듯 고개를 다시 한번 숙였다.
“앞으로 후인에게 늘 좋은 일만 생기길 바라겠네.”
“저도 무량후 님의 일이 잘되시길 바랍니다.”
답례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어딜 갔다 왔는지 당무의 헐떡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휴, 전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제 가실까요?”
고개를 들자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있는 그가 보였다.
몸에 좋은 약초며, 개인 물품들까지. 언제 다 챙겼는지 꽤 큰 보따리를 짊어지고 있는 당무.
“……어딜?”
의아한 내 질문에 당무가 슬쩍 웃으며 몸을 툭 쳤다.
“에이, 다 아시면서.”
“뭘 말입니까?”
“무림맹에 가야지요.”
“무림맹?”
“네. 천의학관 건립하신다면서요? 그런데 무림맹이 아무것도 안 하면 되겠습니까?”
‘아하.’ 이제야 눈치챈 나와 무량후가 속으로 탄성을 뱉어냈다.
당무는 무량후를 앞세우고 무림맹에가서 실컷 긁어오려는 속셈인 것이다.
“맞습니다. 후인님께서 이렇게 많은 돈을 내셨는데 무림맹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요.”
“당연하죠.”
당무의 눈이 안타까움을 머금은 채 무량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무량후 님께서 닳고 닳은 무림맹 놈들에게 잘 뜯어낼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그건…….”
“아니지.”
아니라는 내 말에 무량후와 당무의 시선이 향했다.
“흠, 아무래도 무량후 님께서는 너무 선하시니 말입니다.”
사실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로서는 힘이 빠진 데다가 몸마저 좋지 않은 상태.
예전처럼 대우해 줄 리 없었다.
“그러니 제가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당무가 가야, 무림맹 놈들에게 잘 뜯어낼 게 아니겠습니까?”
빠진 말은 무림맹 놈들에게 내 이름을 실컷 판다는 것 정도?
‘하긴, 당무 정도 돼야 내 이름도 편하게 팔 수 있겠지.’
나는 인정한다는 듯 당무의 어깨를 잡고는 속삭이듯 말을 덧붙였다.
“당무님이라면 잘 얻을 수 있겠지요. 아주 뼛속까지 긁어오시길 바랍니다.”
“흐흐, 당연한 말씀 아니겠습니까?”
당무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펴고는 무량후를 돌아보았다.
“그럼 저와 함께 가실까요?”
“하하,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로서는 고맙지.”
무량후는 웃으며 나에게 살짝 목례했다. 이제 정말 가보겠다는 그의 인사였다.
“그럼 두 분께서는 무림맹에서 일을 잘 보시길 바랍니다.”
“네! 잘 뜯어 먹고 오겠습니다. 천의학관 일로 진천세가에 한동안 못 갈 듯하니 흑영에게 안부 전해주십시오. 후인님께서도 몸조심 하시고 말입니다.”
당무가 빠르게 할 말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저도 할 일을 하고 있겠습니다. 다들, 나중에 건강한 모습으로 뵙도록 하죠.”
내 할 일을 한다는 말에 당무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이어 눈을 찡긋거렸다.
“거, 혼자서 모든 걸 다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뭐,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좀 기대기도 하고 그러란 말입니다.”
나는 그의 말에 잠시 멈칫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지요.”
당무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천의학관의 진행되는 상황은 진천세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제가 없어도 외로워 마십시오!”
그는 무량후의 믿음직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객잔의 문을 나섰다.
‘역시 당무네.’
멀리 사라져가는 둘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돈은 대부분 내가 내지만, 무림맹이 앉아서 꿀만 빨 수 있게 하고 싶진 않았다.
학관은 정도 무림을 채워나갈 인재의 양성소나 마찬가지고, 무림맹 역시 무관하지 않았으니까.
“알아서 잘 뜯어 오겠지.”
천의학관의 교관부터 무공, 졸업 후의 청사진까지.
일머리 좋고 능글스러우면서도 제 것은 잘 챙기는 당무이니 충분한 협조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몸의 운신이 어려운 무량후에게 그의 눈치 빠른 행동이 도움이 될 테고.
무엇보다 앞으로 할 일에 당무가 계속 옆에 있을 수는 없었다.
‘혈천교와 전쟁을 치러야 하니까.’
이것은 나 혼자만의 전쟁이었다.
모용설화를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 전쟁은, 오직 나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정파인들과 같이 싸우길 원했으나, 그들의 힘은 혈천교 놈들이 기이한 힘에 대항할 수 없었다.
놈들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혼자였다.
‘곧 사도가 온다.’
예전에 말했었던 가야의 경고대로 사도가 강림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힘.
그렇다면 나 역시 인세의 것이 아닌 힘으로 상대하면 된다.
인외의 힘은 인외의 힘끼리 싸우고, 인세의 인간들은 그들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맞았다.
‘놈들을 없앤다면, 무림은 적미륵 따위에 놀아나지 않겠지.’
더불어 무림의 전반에 흐르는 공포심 또한 많이 옅어지게 될 터.
앞으로 새워질 천의학관은 안정된 무림 속에서 그 꿈을 펼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먼저 놈들을 친다.”
지금껏 놈들이 나를 공격했다면 반대로 내가 놈들을 칠 차례였다.
* * *
진천세가로 가기 위해 별채를 나와 경공을 전개하기 직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휘야.”
고개를 돌려보니, 객잔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천무륭이 보였다.
“천무륭?”
초조한 기색을 지난 천무륭이 내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얼굴을 보니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해 온 건 아닌듯했다.
‘무슨 일이지?’
모용설화가 죽은 후 며칠간은 나도 힘들었던 터라, 저들을 챙기지 못했다.
천천히 다가와 나를 자세히 훑어보는 천무륭의 시선에는 걱정이 실려 있었다.
“자휘, 넌 괜찮은 거야?”
“……지금은 괜찮아.”
괜찮다는 말에 천무륭의 얼굴에 안도가 서렸다.
“너라도 괜찮으니 다행이네.”
“그게 무슨 말이야?”
천무륭이 한숨을 뱉어내며 말했다.
“제갈신이…… 이상해.”
“뭐?”
“말보다 직접 보는 게 나을 거야. 같이 갈래?”
한동안 친우들을 못 볼 것이기에 진천세가로 가기 전 인사를 하고 말까 망설였던 참이었다.
그런데 제갈신에게 문제가 생겼을 줄이야.
내가 승낙했다고 생각한 천무륭이 자신을 따라오라는 것처럼 고갯짓하고는 바로 발을 굴렀다.
휙 하니 사라지는 천무륭의 신형.
천무륭을 따라 진천비를 전개하자, 잠시 후 다친 생도들이 모여있는 커다란 의방에 다다랐다.
꽤 많은 의원이 들락날락하며 생도들을 치료하는 것이 문밖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저기야?”
천무륭이 고개를 저었다.
“의방 말고, 옆에 있는 객잔이야.”
“객잔? 제갈신도 다쳤잖아.”
“다친 건 금방 고쳤어. 신의님도 오셨거든.”
신의가 왔다는 건 몸을 많이 다친 생도들에겐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의님이 계시니 의방에 있으면 될 텐데, 왜 객잔으로 옮긴 거지?”
“그게…… 몸보다는 다른 문제가 심해서. 계속 자다가 깨고 비명을 지르는 통에 숙소를 옮겼거든.”
“…….”
나는 천무륭의 말에서 제갈신의 문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모용설화의 죽음이 녀석에게 큰 상처를 남긴 거야.’
그녀의 죽음은 내게도 충격이었고, 각성 사태까지 불러왔다.
제갈신의 경우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모용설화가 죽었다는 죄책감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렸으면 천무륭이 나를 찾아왔을까.
“제갈신이 있는 곳을 알려줘.”
고개를 약하게 끄덕인 천무륭이 앞서 걸어갔다.
멈춘 곳은 객잔의 복도였다.
천무륭은 복도의 왼쪽 끝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밖에서 기다릴 테니 제갈신을 만나고 와.”
복도 끝방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여러 개의 식사들이 그대로 놓인 방이 보였다.
한 번도 먹지 않은 듯 식사는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여기로군.’
나는 입술을 굳힌 채로 방문을 두들겼다.
“나야, 진자휘.”
그러나 문을 두들겼음에도 제갈신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우린 언제 볼지 몰라. 앞으로 안 볼 게 아니라면 문을 열어줘.”
다시 문을 두들기며 말하자, 한참 후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이 열리자 보이는 것은, 핼쑥한 제갈신의 모습이었다.
사방을 어두컴컴하게 만들어 놓고 침상에 누워 있는 제갈신의 모습은 살아 있는 시체 같았다.
그동안 식사는 물론, 물마저 마시지 않은 듯 그의 입술은 터져 있고 바짝 말라 있었다.
‘환기부터 시켜야겠네.’
창을 가리고 있던 천부터 걷어낸 뒤, 창문을 열고 물병에서 물을 따랐다.
“자, 마셔.”
그러나 제갈신은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싫다면 내가 마실게.”
따라놓은 물을 한 번에 들이킨 후, 제갈신의 앞에 앉았다.
“네가 이런 거…… 모용설화 때문인 거야?”
내 물음에 고개를 돌리고 있던 제갈신의 몸이 움찔 떨려오더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등을 돌린 제갈신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아무렇지 않아?”
제갈신의 물음에 나지막한 한숨을 흘렸다.
그녀의 죽음을 보았을 때, 충격으로 삿된 존재까지 허용했던 나였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일그러진 내 표정조차 차마 못 보겠다는 듯 제갈신은 등을 돌린 채로 말을 이었다.
“……모용설화가 남궁비천을 공격하고 떨어지기 전에 나는 알았어. 그 애가 죽음을 각오했다는 걸 말이야. 그런데도 말리지 못했어. 아니, 어쩌면 속으로는 바랐을지 몰라. 살고 싶었으니까.”
말라버린 눈에서 눈물이 솟았다.
“그 애가 죽고 나서 깨달았어. 난 모용설화의 목숨을 딛고 살아난 것이라는 걸.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미칠 것만 같았어. 아니, 이미 미친 건지도 몰라.”
슬픔과 자책으로 가득 찬 제갈신이 눈동자가 뿌옇게 물들었다.
“자꾸 모용설화가 떨어지던 모습만 생각나. 남궁비천 그 빌어먹을 놈이 칼질해서 사방이 피로 물든 것도, 죽기 전에 지른 마지막 비명도 말이야.”
제갈신이 머리를 세차게 감싸 쥐었다. 눈앞이 전부 새빨간 핏빛으로 보이는 듯 그는 고개를 흔들며 눈이 시뻘게지도록 비비고 또 비볐다.
‘이런.’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모용설화가 죽었다는 사실을 제갈신은 견딜 수 없어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모용설화의 선택이었어.”
선택이라는 말에 제갈신이 고개를 홱 돌렸다.
“선택? 그게 어떻게 선택이야? 그 애는 나를 살리려고……!”
“그럼 나는?”
“……뭐?”
“너희를 위해 수많은 세가인들을 죽였어. 세가인들 뿐인가? 셀 수 없을 만큼의 혈천교인들도 죽였지.”
시선이 흔들리는 제갈신의 눈동자에 닿았다.
“그런 나는 괜찮은 걸까?”
“그, 그건…….”
나는 제갈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