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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57화 (157/200)

기갑무림 157화

혈천대원들은 앞의 압도적인 존재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와아아!”

소리라도 질러, 본능적인 두려움을 없애겠다는 듯 그들의 함성은 귀가 떨어져 나갈 만큼 크게 울렸다.

스윽.

그러나 붉은 물결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천갑은 그저 검을 횡으로 들었을 뿐이었다.

“놈을 쳐라!”

“우리는 무적이다!”

놈들이 달려오는 시간은 매우 빠를 터인데 이상하게 모든 것이 느려 보였다.

마치 이 순간만큼은 진천의 시간인 양, 느리게 보이는 놈들의 모습은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냥 베어버릴까, 아니면 천갑인 상태에서 진천검을 한번 연습해 볼까, 라는 고민이 들 정도로.

놈들의 본거지라면 모든 것을 검의 범위 안에 갈아버리는 진천파(眞天波)를 섞겠건만, 이곳은 현무학관이었다.

나는 놈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돋움하며 달려드는 수십의 붉은 괴물들에게 검을 천천히 내밀었다.

“죽어라.”

느려지는 시간 속에서 커다란 검신이 빛을 내며 한 바퀴 휘돌았다.

촤촥.

빛을 내는 커다란 회오리처럼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대검 사이로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크어억!”

“컥!”

호기로운 놈들의 외침은 곧바로 비명으로 뒤바뀌고, 거대한 검이 눈부신 원을 그리며 지나간 자리에는 놈들의 몸이 두 동강 난 채 나뒹굴었다.

“흐어억!”

“말도 안…….”

말조차 끝맺지 못한 놈들의 몸에서 터져 나온 핏자국들이 수십 개의 큰 원을 그리며 땅을 적셨다.

“……!”

순식간이었다.

이성조차 잃고, 공포도 잊은 채 달려들던 수십의 혈천대원들이 위아래가 분리된 채 바닥에 쌓여 있게 된 것은.

푸르르.

어떤 강한 무기에도 견딘다는 놈들의 분리된 몸은 아직도 이 상황을 모르겠다는 듯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하아─”

놈들의 모습을 보자니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혈천대가 약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가진 힘이 비이성적으로 강한 것일 뿐.

여전히 넘쳐나는 힘이 전혀 소모되지 않았음에 짜증을 느끼며, 천천히 팔대주를 바라보았다.

갈증(渴症).

이것은, 넘치는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함에서 오는 갈증이었다.

“이게 끝인가?”

너희의 힘이 겨우 이 정도냐는 질문이었다. 팔대주의 얼굴을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자신의 부하들이 눈앞에서 한순간에 모두 죽었음에도, 팔대주의 전의(戰意)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직 내가 남았다.”

압도적인 힘을 봤음에도 팔대주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을 지었다.

“혈천의 신(神)은, 우리의 시체가 그분이 이 땅에 오실 수 있는 다리가 될 거라 하셨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외쳤다.

“티끌만도 못한 목숨이 위대한 혈신님을 위해 쓰이는데, 뭐가 아깝단 말이더냐.”

혈천교는 혈신을 위한 광신도(狂信徒)들의 집합체.

목숨을 도외시한 광기(狂氣)가 팔대주의 눈에서 번득거렸다.

천의무신을 향해 검을 강하게 움켜잡은 그가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혈전사로 죽은 우리에게 천국이 주어질지니-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마지막 혼신의 일격을 위해 팔대주가 땅을 박찼다.

타앗.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높이 솟아오른 손에서 민첩하게 칼이 내리쳐졌다.

팔대주의 모든 힘을 담은 강한 힘이었다.

쩌엉!

그러나, 놈이 내리친 것은 강철보다도 단단한 천갑으로 둘러싸인 팔.

“크윽!”

오히려 강한 반동으로 놈의 몸에 커다란 충격이 전해졌다.

동시에, 천갑의 반대편 손이 놈의 검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우드득.

천갑의 강력한 손아귀에 잡힌 놈의 칼이 비틀리며 구겨졌다.

종이짝처럼 구겨지는 팔대주의 칼과 함께 놈의 팔 역시 비틀리며 잡혔다.

“크아악!”

나는 잡힌 놈을 서서히 들어 올리며 말했다.

“죽음을 원한다니 주도록 하지.”

타는 듯한 갈증과 힘을 해소해 줄 적이, 사도와 혈신이라면.

그래.

얼마든지 주겠다.

“크억!”

구겨진 검이 비명을 질러대는 팔대주의 목을 갈랐다.

* * *

강력한 혈천의 힘을 가진 팔대주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그것도, 일방적인 힘에 의해서.

“……!”

처참하게 썰린 채, 피로 점철된 바닥 위에 팔대주의 목이 데구르르 굴렀다.

“히익!”

벌겋게 부릅뜬 눈과 마주친 세가인 하나가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말도 안 돼…….”

그 모습을 보던 세가인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허옇게 변했다.

“……어떻게 이런!”

천의무신이라 불리는 후인의 진짜 전투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강할 줄이야!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과장이 섞여 있다 넘겨짚고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

강하다 자부했던 자신들이라면 혈천대와 손까지 잡은 이상, 어린놈 하나 죽이는 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토록 자랑스럽던 정파의 의기(意氣)조차 내던지고 어린 생도들을 잡아두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천의무신은 고작 칼질 몇 번에 그토록 강하고 잔인하다고 일컬어지는 혈천대를 죽였다.

학살(虐殺).

이건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남궁세가인들의 시선이 이미 생명이 끊겼음에도 푸들거리는 놈들의 몸에 닿았다.

붉게 변한 괴물처럼 보이는 저놈들 몇만 있어도 웬만한 문파는 사라질 터인데.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야.”

혈천교 놈들이 수십이 덤볐음에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은 천의무신을 보는 세가인들의 눈에는 경이로움과 공포가 담겼다.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남궁한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 보는 천의무신의 전투는, 인간이 개미를 짓밟아 죽이는 것처럼 보였다.

인외(人外)의 힘.

천의무신의 힘에 필적한 자는, 오직 신밖에 없으리라.

엎어진 붉은 시체들 위에서 고고히 서 있는 천의무신을 보는 그의 눈에는 경탄과 두려움이 담겼다.

그리고, 오랜 세월 살아온 그의 육감이 그에게 간절히 말했다.

저 존재에게 맞서서는 안 된다고.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무릎을 꿇는다면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가문은 영원히 일어설 수 없었다.

혈천교와 손잡은 배덕(背德)의 가문, 남궁세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가문을 그 누가 원할까.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천갑무신의 후인을 잡기만 한다면……!’

자신은 여전히 대(大) 남궁세가의 주인이 될 수 있었으며, 손자인 남궁비천은 미래의 주인이 될 터였다.

배덕의 가문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무림 최고의 가문이 될 것인가를 따진다면 당연히 최고가 되길 바랐다.

남궁세가는 최고의 가문이 되어 천년토록 무림에서 군림해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 있었다.

남궁세가를 영원토록 최고의 가문으로 만들기 위해 이미 악귀의 탈을 쓰지 않았나.

“아직은, 지지 않았음이로다.”

번들거리는 남궁한영의 시선이 불타는 철판 위의 생도들에게 향했다.

저들의 희생으로 인해, 남궁세가는 살아날 수 있을 테다.

“당황하지 말라!”

남궁한영의 음성이 현무학관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남궁한영의 외침에 겨우 정신을 차린 세가인들이 다시 칼을 강하게 쥐었다.

“궁수들이여, 일어서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무학관의 높다란 담장 위에 은신해 있던 궁수들이 일어섰다.

궁수들의 손에는 저마다 생도들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으!”

화살이 자신들을 향하자, 생도들이 겁에 질린 모습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남궁한영은 생도들을 가리키며 들으란 듯 소리쳤다.

“저들을 죽이고 싶지 않다면, 천갑을 풀어라!”

천의무신이 천갑을 입고 있는 이상, 그들에겐 승리란 없었다.

당장 놈을 자진하게 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천갑만큼은 없애야만 했다.

‘나머지는 그 후에 생각하면 될 일이다.’

남궁한영은 망설임 없이 오른손을 쳐들었다.

처척.

그가 손을 들자, 궁수들이 지금이라도 생도들을 향해 쏘겠다는 듯 행동을 취했다.

생도들에겐 벽력탄까지 있으니, 아무리 천의무신이라 해도 함부로 하지는 못할 터.

남궁한영의 눈이 자신감을 머금고 천의무신에게로 향했다.

* * *

‘어떻게 할까.’

천무륭이 인피면구를 쓰고 놈들의 시선을 끌 때, 투명화를 사용해 생도들이 쇠사슬에 조금만 힘을 주어도 끊어지도록 만들어 놓았다.

가장 큰 문제였던 벽력탄까지 정리했음에도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궁수들이 쏘는 화살 정도는 현무학관의 생도들이라면 못 피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현재 생도들의 내공이 금제 되어 있는 상태.

몸까지 허약해졌음을 고려할 때, 모두가 화살을 피하지는 못할 것은 자명했다.

나는 천천히 놈들을 둘러보았다.

여지껏 공포에 떨어 차마 눈조차 들지 못하는 놈들과.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악에 받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무인들.

어린 생도들을 인질 삼아 내게 천갑을 벗으라 요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자니, 입에서 비소가 새어 나왔다.

‘저것들이 정파였다니.’

우스웠다.

그리고 그나마 위협이 되었던 혈천대의 모두가 죽은 지금.

과연, 천갑을 벗는다 한들 놈들이 나를 이길 수 있을까?

완전개방을 해제한다고 하더라도 부분 기갑을 응용할 수 있으며, 진천비급을 칠성까지 익힌 나였다.

‘놈들은 착각하고 있어.’

천갑만 벗기면 자신들이 나를 이길 수 있다고 말이다.

그동안 몸을 사리며 전방에서 내가 한 전투를 보지 못했으니 그런 착각을 하는 것일 테다.

“좋다.”

혈천대가 모두 죽은 지금, 저들은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놈의 제안을 받아들었다.

“천갑을 해제하지.”

“……정말인가?”

천갑을 해제하겠다는 말에 남궁한영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대신 생도들의 안전을 약속하마.”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양심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속으로 그들의 생사를 가늠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기뻐하는 놈들을 보며 나는 냉소를 흘렸다.

‘지금이라도 놈들을 모두 쓸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놈들을 바로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철판 위에 벽력탄을 가지고 모여있는 생도 중에는 제갈신과 모용설화, 당하연이 없었던 탓이었다.

‘……괜찮겠지.’

만약 그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저들은 살아있는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

놈들을 향해 으르렁대자 그들은 몸을 움찔 떨었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나를 믿어라.”

그는 자신만만하게 답했지만, 나는 남궁한영을 믿지 않았다.

믿을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의 힘뿐.

친우들의 안전만 확인된다면, 바로 놈들을 쓸어버릴 작정이었다.

“천갑 해제.”

나직한 음성이 해제를 명했다.

[천갑을 해제합니다.]

가야의 답과 함께 들려오는 쇳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천갑을 해제하자, 몸을 둘러쌌던 천갑은 가슴의 마력석을 향해 촤르륵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천갑을 입은 천의무신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검은 옷을 입은 소년이 홀로 서 있었다.

“오……!”

천갑을 입었을 때 보였던 압도적인 위용과 존재감이 사라지자, 놈들의 입에서 감탄과 함께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그리곤 언제 공포를 느꼈냐는 양, 세가인들은 입술을 비죽거렸다.

“역시 어린 것이라 그런지 정에 약하군.”

천갑을 벗자마자 비아냥대는 그들의 위선과 비겁함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정의를 정(情)으로 치부하지 말라.”

“……뭐라?”

“네놈들의 탐욕으로 던져버린 정의(正義)를 왜 정이란 이름으로 낮춰 부르냐는 말이다.”

“그건!”

“너희들은 위선을 뒤집어쓴 비겁자일 뿐이야.”

약간의 양심은 남아있었는지 놈은 답을 못한 채 입술을 씰룩였다.

“그만.”

남궁한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대로 우리는 정의를 버렸을지도 모르지.”

그는 나를 또렷하게 직시하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한 번으로 인해, 남궁세가는 무림을 제패할 것이며 대대손손 최고의 가문이라 추앙받을 것이다.”

말을 하며 세가의 사람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던 그가, 네모난 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니, 넌 저 아이들과 이곳에서 정의롭게 죽으려무나.”

빙그레 웃던 남궁한영이 네모난 돌을 힘껏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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